한국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정평불교포럼] 1부. 한국불교의 현실,중세 근대 탈근대가 짬뽕


[1부] 권력승 양성소, 중앙종회를 해체하라


[2부] 자정기능확보가 종단개혁의 시금석


[정평불교포럼] 2부 수행과 재정분리가 종단개혁의 방향


[정평불교포럼] 3부 종단을 넘어 마을공동체 중심으로

□ 제3회 정평불교포럼
위기의 한국 불교:개혁방향을 탐색하다
□ 일시 2018년 8월 13일 오후 2시∼6시
□ 장소 서울 시민청 워크숍홀
□ 주최 정의평화불교연대
차례
– 좌장: 박경준/정의평화불교연대 고문
총론-한국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발표1.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이도흠(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발표2.운영원리의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김경호(지지협동조합 이사장)
발표3. 바람직한 종헌 종법 개정 방안에 관하여/김형남(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발표4. 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박병기(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발표1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에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
이도흠_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I. 머리말

진성은 참으로 깊고 지극히 미묘해 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더라.…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부합하지만 뒤섞이는 일 없이 따로따로 이루었어라.

한 순간에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부터 현재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구세(九世)가 시간과 기억과 해석, 상상의 주름 속에 하나로 겹쳐있다. 공간은 텅빈 곳이 아니라 중력장과 다른 공간과 연기적 관계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결을 쌓고 채우려는 것들로 주름이 잡히다가 인간의 기억과 해석, 상상과 실천에 따라 주름이 풀어지며 비틀어지는 장이다. 21세기 오늘 한국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멀리로 조선조 불교와 일제 강점기의 잔재로부터 해방 직후, 94년 개혁 등의 모순들이 어우러져 현재 조계종단을 만들고 미래에 대한 상상에 따라 해석과 실천이 요동치며 조계사와 각 절들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포스트세속화/탈종교 시대를 맞아 종교는 전 시대와 분명히 구분되는 변화를 요청받고 있다. 지금 한국 불교는 중세, 근대, 탈근대적 모순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일방의 해결이 어렵다. 예를 들어, 예전에 정의평화불교연대에서 합격발원기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폈지만 단 한 곳의 절도 이에 호응하지 않았고 몇몇 신자들만 대체 방안으로 제시한 무료논술교실에 자녀들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비합리적인 주술의 힘으로 소망을 실현하려는 것은 중세 봉간사회의 전재다. 『중아함』 17권의 『가미니경(伽彌尼經)』에서도 이런 행위를 바위를 물에 던지고 떠오르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잘 아는 스님들도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근대적 모순, 곧 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화폐 증식의 욕망, 무한한 소비와 향락 추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본주의적 탐욕을 내면화하였기 때문이다. 재가불자는 만인 사이의 투쟁에 의한 경쟁 확대로 인한 불안을 기도에 의존하여 치유하려 하고, 승려들은 이것이 교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사찰재정 증대를 위해 포기하지 못한다. 탈근대에 들어 종교가 3차 서비스 산업화하고 근대 자본이 미치지 못하던 마음의 영역까지 상품화하여 개인의 소외와 불안, 피로에 대해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평온, 위로와 치유, 스트레스 해소, 행복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스님들의 팬덤(fandom)현상이 유행하는 등 재주술화가 과도하게 진행되고 있다. 대다수 분야에서 한국 불교는 중세 봉건체제의 잔재인 기복성, 가부장적 질서, 농경사회에 부합하는 교육과 수행 시스템을 유지한 채 자본주의적 탐욕과 소비, 향락으로 병들고 있는데 근대적 합리성을 달성하고 시민사회로서 공론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재주술화의 파도에 휘청이고 있다.

현재 위의 세 가지 모순이 심화한 바탕에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은 적폐가 쌓이고 정당성과 신뢰의 위기에 놓이고, 이를 극복하자는 적폐청산과 종단개혁 운동이 MBC 피디수첩의 보도와 설조 스님의 목숨을 건 단식을 계기로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첫째,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다. 둘째, 스님들이 자기 돈으로 가사와 발우를 마련해야 하고 다른 절에 가면 숙식을 제공받지 못할 정도로 승가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고 각자도생하고 있다. 셋째, 자승 전 총무원장 등 몇몇 권승들로 이루어진 카르텔이 권력과 재정을 독점한 채 당동벌이(黨同伐異)가 만연하고 있고, 사부대중은 이름뿐인 채 비구들이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질서에 의존한 독단과 배제와 폭력을 다반사로 행하고 있다. 여기에 탈종교화와 탈세속화의 흐름 속에서 종교의 사사화(私事化)화 경향이 보태지면서 300만 명의 불자가 절을 떠났으며 여러 요인들로 스님들의 재생산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상당수 신자들이 위빠사나와 초기 불교에 더 이끌리며 한국 불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스님들은 문화재 관리인으로, 불교는 샤머니즘 수준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에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면서 한국 불교 개혁의 방향과 방안에 대하여 종단의 질서 안과 밖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Ⅱ. 종단 개혁의 방향과 방안

1. 수행과 재정의 분리 및 사찰운영위원회의 거버넌스 시스템 확보

종단의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확고히 착근시키려면, 수행과 재정을 분리하여 권승들의 권력과 자본 독점과 전횡을 근본적으로 막고, 궁극적으로는 청정 승가 공동체를 회복하려면 사찰운영위원회의 거버넌스 시스템을 확고히 해야 한다.
지난 10년 사이에 승가에서 굳건하게 행해지던 삼의일발(三衣一鉢)과 객실문화가 사라졌다. 수많은 전각이 즐비함에도 행각을 할 때 바랑을 풀 절이 없고 모두가 개인 토굴 갖기를 희망하고 가사와 다비 비용마저 개인이 준비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체제의 탐욕을 내면화하고 이것이 권력과 결합한 때문이다.

주지하듯, 불교는 욕망의 확장과 물질적 소비를 통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고 설한다. 불교는 개인의 깨달음과 공동체적 삶을 통하여 소외를 극복하라고, 무소유의 삶을 통해 화폐증식의 욕망을 없애라고, 무한한 소비와 향락의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살라 가르친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수행자들이 ‘삼의일발(三衣一鉢)’이나 ‘육물(六物)’만 소유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라 일렀으며, 이 계율을 어기면 모든 소유물을 4인 이상의 도반들 앞에 내놓고 참회해야 했다. 달마대사는 ‘구함이 있으면 모든 것이 고통이지만 구함이 없으면 이 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말하며 무소구행(無所求行)의 실천을 제시했다. 나아가 육조 혜능 역시 욕망을 줄이고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설파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딜레마는 남는다. 홀로 암자에서 수행하는 자는 자본주의의 욕망을 지멸하면 되지만, 그 밖의 영역에서는 이는 불가능하다. 설혹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는 운동을 하더라도 자본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앙굿따라 니까야 Aṇguttara Nikāya』에 “비구들이여, 눈먼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은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 비구들이여, 두 눈 가진 이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가? 그는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다. 그는 또한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두 눈 가진 이라고 부른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니까야에서는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하지 못하는 이를 눈 먼 사람으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행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한 이를 한 눈만 있는 이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을 할 줄 알면서 이를 윤리적으로 정당하게 행하는 이를 두 눈이 있는 자로 분류하고 있다. 일정한 윤리규범에 따라 재산을 획득하고 증식하는 자야말로 세 부류의 인간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자다. 『증지부(增支部)』엔 다섯 가지로 재의 효용을 펼치고 있다. 부모, 아내, 자식, 하인, 일꾼을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우인(友人)과 동료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가뭄과 홍수, 도적 등 재난에 대비하고 상속하기 위하여, 친족, 손님, 아귀, 왕, 신에 대한 다섯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내와 겸손으로 자아를 성취한 성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재화는 필요한 것이다.
이처럼 경전을 잘 살펴보면, 일정한 윤리규범에 부합하는 한, 재산의 획득과 증식은 정당한 것이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성자에게 공양할 수 있는 길이다. 한 마디로 재정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은 중도인 것이다.

중도의 입장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 사찰을 운영하는 길은 명확하다. 출가 수행자는 계율에 따라 수행과 중생구제에만 전념하고, 재정의 운영은 재가불자에게 맡기며, 재산의 획득과 증식, 재정의 지출은 불교 교리와 계율, 윤리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일에 한해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절마다 사찰운영위원회를 두고 여기에 사부대중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거버넌스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다. 사찰 운영위원회에 모든 재정관련 사항에 대한 심의만이 아니라 의결을 행하고 절 안의 다양한 행사를 기획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다. 중앙종회에서 재정과 권력을 분리하고 사찰운영위원회가 심의 및 의결기능을 갖도록 개정하고, 전문 인력을 통한 재정운영과 회계관리시스템을 통해 운영ㆍ관리되도록 사찰예산회계법을 제정한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여론에 밀려 형식만 갖춘 느낌이 강하다. 민주성과 지속성, 감시체계의 확립이 수반되어야 사찰운영위원회는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주지와 다른 운영위원, 스님과 재가불자 사이에 권력이 비대칭일 경우 사찰운영위원회는 큰스님이나 주지의 의사를 추인하는 형식 기구로 전락한다. 물론, 근본적으로는 주지와 스님에게 모든 권위와 권력이 집중된 지금의 문화가 바뀌어 사부대중의 공의를 민주적으로 모으고 실천하는 공동체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사찰운영위원회의 구성을 출가자와 재가자가 1:1이 되도록 구성하여야 한다. 주지에게 운영위원의 위촉과 해촉을 할 권한을 부여하고서 운영위원의 감시와 견제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부대중 모두가 참여하는 선거를 통하여 운영위원을 선출하되, 이 선거에는 각 사찰에 소속된 모든 신도가 참여해야 한다. 해촉의 권한 또한 운영위원의 합의를 통해서 행해야 한다. 당분간 사찰운영위원회에 주지의 추천권을 부여하는 것도 한 방편이다. 아울러 사찰운영위원회의 회의도 월별 및 회기별로 정기적으로 행할 것을 명시해야 한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 모든 면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을 준수하고 사부대중의 공의를 수렴하지 않는다면, 사찰운영위원회는 주지의 독점과 전횡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기구가 아니라 외려 이를 정당화하는 기구로 전락한다.

재정과 회계에서는 전문화와 투명화, 상호견제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종단에서 포교, 교육, 사회적 실천에 대한 예산 배정의 최소 비율을 정하되, 각 사찰의 특성을 살려 그 안에서 융통성을 부여한다. 종단은 회계 관리를 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이를 일정 규모 이상의 사찰에 파견한다. 종단에서 회계 관리 운영시스템에 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각 사찰에 보급하고 이를 통합하여 중앙에서 관리한다. 각 사찰운영위원회는 회기별, 월별로 재정의 수입과 지출 현황을 사찰과 교구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장부를 작성하여 종무실에 배치하고 감사 담당자 및 운영위원은 언제든 열람하게 한다. 모든 결제는 신용카드를 사용한다. 주지와 재정책임자를 분리하며, 재정책임자의 결제 없이 어떠한 지출도 허용하지 않는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대로 돈을 다루면서 물욕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수행과 별도의 문제다. 지극히 높은 단계의 수행에 이르거나 무소유의 정신이 몸이 된 극히 일부의 사람을 제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견물생심의 원리는 보편적이다. 흔들림이 없으리라고 본인과 타인 모두 인정하던 사람도 돈 앞에서 타락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기에 필요한 것이 공정한 감시체계의 확립과 시선의 공유다.

정부에 감사원이 있고, 각 공ㆍ사기업마다 감사실이 있는 것처럼, 일정 금액 이상의 예산을 집행하는 사찰의 경우 감시 및 감찰기구를 종단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독립적으로 운영하여야 하며, 회계감사도 받아야 한다. 아울러 절에 소속된 신도는 소속 사찰에 대해, 재정 사고 및 관련 소송 당사자는 관련 사찰에 대해 재정 관련 자료를 요구하고 회람할 수 있도록 종법을 개정한다. 이들 사찰은 종회에 회계를 공개하고 관련 자료를 제출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혹은 재정에 관련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자동적으로 전문회계사를 통한 감사를 실시하는 것을 종법으로 규정한다. 이 기구는 재정의 비리를 경계하는 소극적인 감시만이 아니라 낭비성의 불사를 견제하여 사찰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적극적인 감시 기능을 수행한다. 스님들은 재가불자로부터 감시를 받는 것을 꺼릴 필요가 없다. 그를 공심에 따른 시선으로, 더 나아가 내 안의 타락을 경계하는 부처님의 눈으로 보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님들의 사유재산도 공공화하여야 한다. 2007년 9월, 제174회 조계종 중앙종회는 승려법 제30조 2항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성문화했으며, 귀속된 사유재산을 스님들의 노후복지와 교육기금으로 사용하자는 합의도 하였다. 하지만,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가진 ‘큰스님’이 실행에 옮기지 않는 바람에 유명무실한 종법이 되었다. 이 기회에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소임자, 큰스님과 본사 주지, 종회 의원들은 모든 사유재산을 공개하고, 최소한의 품위유지 비용을 제하고는 이를 종단에 헌납하여야 한다. 이렇게 해서 생긴 재산은 기금으로 조성하여 스님들의 노후 복지, 승려의 교육비 및 종립대학의 장학금, 사회적 약자들의 지원 비용만으로 사용한다. 몇몇 소문난 기도처의 경우 한 곳에서만 매년 수십억 원이 들어온다는데, 평생을 수행과 포교로 보낸 노스님들의 병원비조차 보태주지 못한다면 그 종단은 해체하는 것이 더 낫다.

재정의 분배에 따라 절을 특성화, 다양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절의 수입은 기도비, 불전함, 인등비, 재, 특별 불공, (문화재가 있는 사찰의 경우) 문화재 유지 및 보수 지원금, 입장료 등이다. 재정 수입을 거의 포기하고 수행에만 전념하는 ‘가난한 절’ 운동을 할 스님은 없을까. 대만 불교처럼, 수입의 절반 이상을 사회적 실천이나 전법에만 할당하는 ‘자비 실천의 절’, ‘전법의 절’이 곳곳에 세워진다면 불일은 다시 환하게 빛나리라.

이제 절은 신자유주의체제 및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 확대재생산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고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대체하지 않는 도량, 화폐 증식의 욕망으로부터 해탈된 성역, 시장의 원리와 물화와 소외로부터 지치고 병든 중생들을 치유하는 부처님의 품,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고 구제하는 대승의 도량으로 거듭나야 한다.

2. 자승 전 원장의 멸빈 통한 권승 카르텔의 해체

지금 한국 불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은처, 도박, 공금횡령, 폭행, 성폭력 등 총무원장을 비롯한 지도층 승려들의 범계 및 비리 행위가 임계점을 넘어섰음에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장치가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승 전 총무원장을 핵심고리로 하는 권승카르텔이 과도하게 권력과 재정을 독점한 채 이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사찰 안과 밖의 장치를 무력화하거나 포섭하였기 때문이다.

자승 전 총무원장은 적광 스님 폭행, 용주사와 마곡사 사태, 해종언론, 명진스님 제적, 정교유착 등 조계종 적폐를 쌓은 장본인으로서,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를 단행한 종단의 수장으로서 무한 책임이 있다. 자승 전 총무원장은 은처, 억대 도박, 신밧드 룸쌀롱 출입 및 상습 성매매 의혹에 대해 아직 해명하지 않고 있다.

자승 총무원장은 포섭과 배제의 전략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정치인이다. 그는 불교광장으로 통합하여 종회를 장악하고 호법부, 호계원을 무력화하고 원로와 정부와 언론을 포섭하였다. 이용할 가치가 있는 스님과 재가불자, 언론인, 정치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편으로 포섭하였으며, 자기 편은 무조건 두둔하고 자신에게 해가 되는 자는 단호하게 내쳤다. 그는 그와 가까운 동국대 총장, 용주사 주지, 마곡사 주지는 죄가 드러났는 데도 비호하여 조계종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종헌과 종법을 무력화하였으며, 종회와 호계원은 물론 교구본사를 자신의 의지 관철기관으로 전락시켰다. 그야말로 조계 종단을 마구니 소굴로 전락시킨 장본인이다. 촛불혁명의 동력이 작동하고 정권이 교체되고 불자들의 분노가 점차 상승하자 자승 총무원장은 하수인인 설정 스님을 총무원장에 앉히고 상왕노릇을 하고 있다. 모든 적폐의 주도자 및 책임자로서 자승 전 원장을 승려대회를 통하여 멸빈시키거나 사찰방재 시스템에 대한 수사를 올바로 하여 구속시켜서 권승 카르텔의 핵심 고리를 끊고 판을 새롭게 짜야만 청정 승가를 구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3. 직선제와 불교 민주제의 정립

청정 승/재가 공동체의 필요조건은 민주화다. 종단과 절 등 모든 불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광장을 만들어 대중공의에 의한 민주제를 확립해야 한다. 불교는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불성의 잠재성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중생은 모두가 존엄하고 평등하다. 붓다는 “나의 제자는 종성(種姓)이 같지 않고 출신도 각각 다르지만 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종성(種姓)을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사문 석가모니 종성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만민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 고귀한 사람은 신분이 아니라 마음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삼독을 멸하고 약자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베푸는 이들은 고귀한 자이고 권력과 돈과 탐욕에 물들어 전전하는 이들은 비천한 것이다.

붓다는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중아함경』에 보면, 어느 날 아난다가 눈이 먼 아나율타 존자를 위하여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며 그의 옷을 함께 지을 사람들을 구하였다. 이를 본 붓다는 “아난다야, 너는 왜 나에게만 아나율타 존자의 옷을 짓기를 청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고는 다른 비구들과 함께 아나율타의 옷을 손수 지으셨다. 『법구경』을 보면, 붓다는 소를 잃고서 밥때를 놓친 농부가 설법자리에 오자 집주인에게 밥을 청하여 농부가 밥을 다 먹은 연후에야 설법을 하셨다.

『디가 니까야』에 의하면, 강대국 마가다 왕이 밧지족을 침략하려 할 때 붓다는 제자 아난다에게 밧지족 사람들이 “① 밧지족 사람들은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② 밧지족 사람들은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며 밧지족으로서 해야 할 것을 함께 행하는가. ③ 밧지족 사람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옛날에 정해진 오래된 밧지족의 법에 따라 행동하는가. ④ 밧지족 사람들은 밧지족 중의 밧지 노인들을 존경하고 환대하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⑤ 밧지족 사람들은 종족의 부인이나 여자아이를 폭력으로 꾀어내거나 그것을 만류하지 않은 일은 없는가. ⑥ 밧지족 사람들은 내외(內外)의 밧지족 조상의 사당을 존중하고 공경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이전에 바치고, 이전에 시행한 올바른 공양물을 버리지는 않는가. ⑦ 밧지족 사람들은 아라한에 대하여 올바로 보호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또 아직 오지 않은 아라한이 이 땅에 오도록 하고 이미 오고 있는 아라한이 이 땅에서 편안히 머물 수 있도록 하는가.”를 물으셨다. 아난다가 밧지족 사이에 이러한 일곱 가지 사항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밧지족 사람들이 이 일곱 가지 사항을 실행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번영하고 결코 마가다국에 의해 멸망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나아가 이 칠불퇴법(七不退法)을 불교승가에 적용시키셨다.
① 비구들이 자주 회의를 열고 회의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② 비구들이 함께 집합하고 함께 일을 시작하고 함께 승가의 제반 행사를 치르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③ 비구들이 이전에 정해진 적이 없는 것을 정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것을 깨뜨리지 않으며 모든 학처(學處=戒本)에 따라 행동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④ 비구들이 출가한 지 오래되어 경험이 풍부한 장로비구들, 승가의 어른들, 승가를 이끄는 사람들을 모두 존경하고 존중하며 공양하고,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⑤ 비구들이 이미 생기(生起)해 있는 재생(再生)을 초래하는 갈애(渴愛)에 지배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⑥ 비구들이 숲속의 좌와소(坐臥所)에 있기를 원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⑦ 비구들이 각자 자신의 마음을 단련하고 또 착한 수행자들을 거기에 오게 하고 또 거기에 오고 있는 수행자들을 편안하게 머물러 있게 하는 한 비구들에게는 틀림없이 번영이 기대되고 멸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원래 공화주의, 혹은 공화국의 정치형태인 부족국가를 뜻하는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대중의 동의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렇게 승가의 찬성과 반대를 묻는 대중공사를 갈마(kamma)라 한다. “이 갈마에는 단백갈마, 백이갈마, 백사갈마의 3종류가 있다. 단백갈마는 행사를 알리는 것이며, 백이갈마는 1회의 안건올림과 1회의 논의를 통하여 구성원 전원의 승인에 의하여 안건을 의결한다. 백사갈마는 1회의 안건올림과 3회의 논의를 통하여 의결한다.”

이제 갈마와 같은 불교적 민주제의 전통을 바탕으로 대의민주제에 숙의민주제와 참여민주제를 결합하여 대중의 공의를 모으고 이를 정책으로 수렴하는 것이 활성화하고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하고 사찰운영위원회 등을 중심으로 문화로 정착해야 한다.
이의 출발은 직선제다. 법랍 10년 이상의 스님들 가운데 80.5%가 압도적으로 직선제를 지지하고 있으며, 직선제에 선거공영제와 중앙관리제를 결합하고 법을 엄정히 집행하면 금권선거, 부정선거, 매관매직이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승 스님도 34대 총무원장 재선 시 ‘총무원장 직선제 도입’과 ‘비구니 참종권 확대’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기존의 간선제는 금권선거와 권력 야합의 장이었다. 종단의 총무원장 선거 관행에 대해 명진 스님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24개 교구 본사에서 240명, 중앙종회 의원 81명을 합해 321명이 투표로 총무원장을 뽑는다. 후보들은 본사 주지에게 2000만〜3000만원, 나머지 선거인단에게 500만 원 정도 뿌리는 것이 관행화돼 있다. 대략 30억 원을 쓰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종회의원이나 주지 선거 때도 액수의 차이만 있을 뿐 돈이 오간다.”라고 말한 바 있다. 24개 교구본사별로 10명의 선거인단을 선출할 때 본사 주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늘 공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으며, 선거 공고 전후부터 투표일에 이르기까지 계파 사이의 밀약과 금품살포에 의하여 늘 표심을 조작할 가능성이 농후하였고, 실제 그런 사례가 많았다.

다양한 선거방식이 있고 나름대로 장단점이 있지만, 인류는 여러 시행착오를 통하여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를 따른 선거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며, 개개인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으며, 집단 지성에 따라 지혜를 도모할 수 있는 제도임을 깨달았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민주주의 선거는 보통선거, 비밀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를 행한다. 이를 종단의 선거에 대입해 보자.

이제 흑인이나 여자라고, 혹은 신분이 낮다고 선거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종단은 4부대중 가운데 일부에게만 이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종헌 제8조는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로써 구성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집단의 구성원이 그 수장의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법 제12조의 중앙종회의원 제12조 선거권 조항을 보면 비구로 한정하고 있다. 참종권을 제한하는 것은 보통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 당연히 비구니와 우바이, 우바새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
4부대중에게 선거권을 준다면, 비밀선거와 직접선거를 행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해 조계종 총무원의 교구별 재적승 현황에 따르면 전체 1만 1487명의 스님(사미‧사미니 제외) 가운데 직할교구가 2857명으로 가장 많았고 뒤를 이어 해인사(1409명), 통도사(1072명), 범어사(690명), 수덕사(634명)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반면 신흥사(115명)와 대흥사(107명)는 100명을 간신히 넘었고, 관음사는 81명에 그쳤다. 직할교구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재적승 수만 합쳐도 전체 스님의 절반(52%)을 훌쩍 넘는다. 이들 교구본사가 단합해 후보를 낼 경우 다른 교구를 모두 합쳐도 승산이 없다는 계산이다.” 스님들이 교구나 문중의 큰 스님의 의견을 무시하는 투표를 하기 어렵다. 교구끼리 단합할 경우 교구의 이해관계 관철이 총무원장 후보의 자질과 충돌할 것이며 전자가 후자를 이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선거를 하는 순간 모두가 정치행위를 하는 것이며, 정치는 권력과 가치를 제도를 통해 배분하는 행위이자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이 권력을 갖고 펼쳐지는 장이다. 당원이 자기 정당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처럼 교구나 문중이 지지하는 후보를 찍는 것은 자연스런 정치행위다.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악용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악용을 견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선거 국면에서 누구도 특정 후보의 지지를 천명하지 않도록 청규로 정한다. 그리고 선거 당시는 물론, 선거 이후에도 누구도 이에 대해 묻지 않는 비밀투표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하도록 계율로 정하면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투표를 보장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재가불자에게도 투표권을 주면, 실제 문중이나 주지의 통제력 하에 있는 불자는 아주 적기 때문에 교구별 단합문제는 상당히 상쇄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현재 총선이나 대선 때처럼 비밀투표를 보장할 수 있도록 교구별, 지역별로 선거인단과 지리적 상황과 교통을 고려하여 투표소를 설치하고 관리한다.

문제는 평등선거다. 평등선거는 모든 유권자가 균등한 기회를 가지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함과 동시에 각각의 표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오계를 수지하고 등록된 지 일정 년도가 지났으며 일정 기간 동안 교무금을 납부한 재가불자에게도 선거권을 준다. 하지만, 삼보를 공경해야 하고 스님의 위의가 지켜져야 하는 불교 전통과 평등선거를 조화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같은 스님인 비구와 비구니의 표는 1 대 1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하지만, 재가불자의 표를 스님의 표와 똑같이 1 대 1로 대응시킬 수 없다. 대안은 스님 전체 표와 재가불자 전체의 표를 동일한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님이 1만 명, 자격을 갖춘 재가 불자가 10만 명이라면, 재가불자는 1인 1표를 행사하지만, 10만 표가 1만 표와 1 대 1로 동등한 가치를 갖기에 실제 재가불자의 표의 가치는 스님의 1/10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여 재가자 10명의 표가 스님 1명의 표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총무원장 선거에서 반드시 수립해야 하는 것은 선거공영제와 중앙관리제다. 현재 구성되어 있는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현재 중앙종회에서 선출되는 위원으로 구성되도록 되어 있어 중앙종회의 계파의 이해, 특히 다수파의 이해를 반영하여 중앙선거 관리위원들을 선출될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중앙 선거관리위원회가 종단의 정치나 계파의 이해로부터 벗어나 선거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총무원장 선거 때마다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문제제기가 발생하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의 위원 구성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선거법이나 선거절차 등 선거에 전문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신망있는 재가전문가의 참여를 통해 객관성과 전문성을 보완해야 한다. 총무원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기구로 ‘조계종 중앙 선거관리위원회’(가칭)를 만들고, 당분간 불교시민단체의 인사들로 위원들을 구성한다. 이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정 기간 동안 국가의 중앙 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하는 것이 오히려 선거의 공정성을 기할 수 있다.

선거공영제의 도입 또한 금권선거를 방지하는 방법이다. 선거공영제는 금권선거를 비롯하여 자유방임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하여 종단의 중앙 조직에서 선거를 관리하고 그에 소요되는 선거비용을 종단의 부담으로 하거나 후보자의 기탁금 중에서 공제함으로써 선거의 형평과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선거비용을 경감하며 나아가 공명선거를 실현하려는 선거제도를 말한다. 총무원장선거에 소요되는 비용을 종단 예산으로 계상하고, 이를 중앙선거 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단은 빠른 시일 안에 4부대중이 공히 참여하여 직접, 평등, 보통선거를 하는 것과 관련한 종헌과 종법을 만들어 통과시켜야 한다. 예를 들어, “본종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로써 구성한다.”라는 종헌 제8조 정신에 따라, 종헌에 “본종의 구성원은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다.”를 명시하고, “선거에 관한 경비는 종법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중이나 계파, 후보자에게 부담시킬 수 없다.”, “총무원장은 승려(비구·비구니)와 신도(우파색·우파이)가 직접 참여하여 선출한다.” 등의 조항을 추가한다. 새로운 종헌과 종법에 따라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종법에서 규정한 자격을 갖추어 선거권을 가진 비구와 비구니, 우바새와 우바이의 선거인단 명부를 작성하고, 최소한 보름 이상의 기간 동안 이를 종단, 각 교구 본사의 홈페이지에 올려 공람하여 피드백을 받는다. 선거인단 명부가 완성되면,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총무원장 후보자들과 협의하여 휴일 가운데 선거일을 택일하며 이를 최소한 한 달 이전에 공지한다.

총무원장 후보는 약력, 종책 등을 중앙선거 관리위원회에 제출하고, 중앙선거 관리위원회는 이를 기본자료로 만들어 투표 안내문과 함께 등록된 선거인단 모두에게 우편으로 발송한다. 종책 토론회 또한 종법으로 규정하여 각 후보자는 불교방송의 토론을 3회 이상 한다. 선거운동은 24개 교구 본사 별로 순회하면서 종책설명회 형식으로 공동으로 수행한다. 24개 교구 본사별 종책 설명회는 후보자들이 협의하여 그 횟수를 제한할 수 있다.

투표일에 선거인단에 등록된 모든 4부대중이 교구본사와 소속사찰 별로 마련한 투표소에 직접 참여하여 1인 1표를 행사한다. 물론 비밀투표로 한다. 24개 교구본사별로 개표를 하며, 개표작업에는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위원과 이 위원회가 임명한 개표위원, 각 후보자가 추천한 참관단이 참여한다.

선거 직후 후보자들은 모든 선거비용에 관한 회계자료를 제출한다. 단 돈 1만원이라도 부정하게 쓰인 것이 확인되면 당선자는 자격을 상실하며, 선거법에서 정한 바와 같이 그 10배로 배상함은 물론 10년 동안 선거 및 피선거권을 박탈한다. 종단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가의 전통에 부합한 직선제에 관련한 종헌과 종법을 만들어 통과시키고 중앙선거 관리위원회 조직과 선거명부작성 등 직선제를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4. 고령화 사회와 승려복지체계 수립

스님들이 수행에 전념하지 못하고 중생구제와 종단개혁에 나서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노후복지가 보장되지 않아 주지나 문중 어른 스님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령인구(65세 이상)는 2015년 인구센서스 결과 13.2%(657만 명)으로, 2010년 11.0%(536만명)에서 5년 만에 121만 명 증가하였다. 노령화지수(0~14세 인구에 대한 65세 이상 인구 비율)는 2010년 68.0%에서 5년 만에 95.1%로 증가, 저출산 현상과 고령화가 겹친 결과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스님과 재가불자도 고령화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노스님들의 복지다. 나름대로 수많은 대중들에게 훌륭하게 포교하고 수행에서도 명성을 날린 스님조차 늙고 병들면 말 그대로 한 몸을 뉘울 집도, 절도 없다. 소임을 맡고 있거나 탄탄한 문중의 뒷배를 받지 못하거나, 힘 있는 제자를 두지 못한 스님은 의지할 곳이 없다. 찾다, 찾다 끝내 찾지 못한 스님은 개인적으로 사암을 짓거나, 토굴을 얻기도 한다. 사암도, 토굴도 얻지 못한 스님은 이리 저리 유랑하며 걸식이 아닌 걸식을 한다. 아무리 삶이 곤고해도 바라볼 별이 있고 기댈 언덕이 있으면 그나마 생을 영위할 수 있는 법인데, 한국불교는 힘도 연고도 없는 스님들에게서 별도, 기댈 언덕도 빼앗았다. 노후가 걱정이 되니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노후를 대비하여 나름대로 준비를 한 스님은 괜찮지만, 그렇지 못한 스님은 속가를 기웃거리거나 삼보정재에 손을 뻗치기도 한다. 늙지 않는 스님은 없다. 희망이 없는 미래는 현재를 구속한다. 노스님들을 책임지지 못하는 한, 종단의 미래는 물론 현재 또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병도 마찬가지다. 몸이 병들면 수행이나 포교뿐만 아니라 도반이나 대중들에게 자비심을 내는 데도 제한을 받는다. 그런데 적지 않은 스님들이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 노스님 가운데 기댈 언덕조차 없어서 유랑을 하다가 병을 얻으면 제주도 밤배를 타기도 한단다. 제주도를 향한 배가 아니라 물고기에 육보시를 하는 배란다. 이것은 정녕 구조적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이란 “(인간이) 지금 처해 있는 상태와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는 것, 잠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형성하는 요인”이다. 위암으로 병원에 가서 수술 실패로 죽는 것은 자연사이지만, 제때 수술하면 살릴 수 있는데 수술비가 없다는 이유로 치료를 받지 못하여 죽는다면 이것은 구조적 폭력이다. 인간답게 존엄하게 살려 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에게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종단은 언제까지 올곧게 수행과 포교를 한 스님들에게 구조적 폭력을 가할 것인가.

전국선원수좌회에서는 수좌 스님들의 열악한 수행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앞으로 불교계 의료기관과 의료지원체계를 구축하고 불교노인요양원과 연계해 입소를 지원하는 등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지만, 종단 산하에 복지원을 설립하고 종단 차원에서 복지책을 강구해야 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적극적 복지와 구조적 폭력을 제거하는 적극적 평화 개념을 불교에 맞게 전환하여 종단의 복지이념을 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빈곤, 질병 등 좋지 않은 것을 해소하는 것에 대처하는 소극적 복지는 이를 야기하는 구조를 존속시킨다. 요한 갈퉁이 말한 대로, 평화란 싸움과 폭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구조적 폭력을 제거한 상태를 뜻한다.

2011년 4월에 ‘승가복지법’이 제정되고서 10월부터 65세 이상 노스님들에게 요양비와 입원치료비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새발의 모기 피다. 교구별로 다양한 복지가 행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천차만별이다. 승가의 복지는 스님들의 위상에 관계없이 출가에서 입적까지 모든 스님들에게 의료, 교육, 주택 등의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편적 복지를 행하여야 한다. 이제 종단 안에 복지원을 설립하고 그 산하에 정책기획 및 재정부, 주택, 의료, 연금 지원부 등을 둔다. 종단 차원에서 마스터플랜을 짜고, 요양비, 치료비, 연금 등 수요를 추산하고 이에 맞게 안정적 재정을 확보한다.

복지를 반대할 스님은 없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재정이다. 이번 기회에 ‘사유재산의 종단귀속’을 단행하여 이를 종자돈으로 삼아 종단 차원의 요양원과 병원을 짓고 수익사업을 한다. 노스님들이 대부분 교구 본사에서 머물며 수행하기를 원하는 만큼, 교구 본사와 협력하여 교구 본사 안에 공동주거 및 수행처를 짓는다. 남는 돈은 적립하여 이자를 복지비용으로 전용한다.

매년 소요되는 재정의 경우 종단 전체 예산에서 일정 정도 비율을 복지예산으로 배정하자는 합의를 한다. 특히, 문화재사찰 관람료는 53%는 문화재관리를 위한 사찰의 경상운영비로, 17%는 중앙분담금(이중 5%는 교육분담금)으로, 30%는 사찰 목적사업비로 사용되게 되어 있다. 이중 53%의 경상운영비 중의 일부를 소속 교구의 승려복지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복지는 승려의 미래다. 복지를 간과하는 것은 불교의 미래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스님일수록 더욱 존경받고 위의가 빛나야 한다. 종단에서 파악한 승려복지예산은 요양에 10억 원, 치료에 50억 원, 건강보험료에 150억 원, 연금보험료에 25억 원 등 235억 원이다. 앞의 글대로 하면, 그 정도의 재정확보는 가능하다.

재정을 확보한 후 이에 맞게 복지 마스터플랜을 짠다. 스웨덴의 복지 구호가 “요람에서 무덤까지”였다. 이를 차용하면, “출가에서 다비”까지 스님들에 대한 복지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 종단의 복지원에서 이를 추진하되, 복지 전문가와 스님이 공동으로 기획한다.
기존의 연구 및 조사를 보면, 강원과 선방 수좌 수님들의 70% 이상이 주거할 공간이 없다. 65.4%의 스님들이 노후문제를 염려하고, 생활거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스님들이 68%다. 32.1%가 사설암자에 거주한다. 노스님들 가운데 만성질환과 퇴행성질환은 22.5%, 위장질환은 20.0%, 치과질환은 17.5%, 심혈관질환은 7.5%가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복지의 방향은 분명하다. 우선 질병 치료비는 무조건 전액 지원하는 체계를 확립한다. 거주문제의 경우 스님들이 거처할 주거 및 수행공간을 마련한다. 여기엔 간단한 진료와 요양을 겸할 수 있도록 시설과 인력을 확보한다. 기존에 이미 설립된 곳은 증축 및 시설의 현대화를 지원한다. 덕숭문중은 수덕사, 범어문중은 해인사, 백파문중은 백양사, 탄허문중은 월정사 식으로 배정하면 문중과 교구, 지역별 안배가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모든 스님들에게 일정액의 수행보조금을 매달 지급한다.

이미 복지를 잘 시행하고 있는 곳도 많다. 용주사의 경우 전강문도회를 중심으로 승가노후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승랍, 20년, 25년, 30년 이상의 스님들에게 매달 30만 원, 40만 원, 50만 원의 수행연금을 지급한다. 병이 들면 입원비 전액을 지원한다. 20명의 문중 스님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재정은 말사에서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갹출하여 충당하는 데 약 3억 원의 기금을 조성한다. 월정사도 2억 4천만 원의 수행연금과 8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한다. 종단에서 각 문중과 사찰별로 자구적인 복지책을 조사하고, 이를 통합하되, 상호협력시스템을 확보하여 중앙의 복지와 각 문중 및 지역 사찰의 복지를 원활하게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장기적으로 볼 때, 기능주의 복지 이념보다는 협동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공제조합 방식’의 제도로 발전시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계종 전체 스님들을 회원(조합원)으로 하는 사단법인 형식의 공제회로 발전시켜서 장기적으로는 직능별 공제회와 같이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승가복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달에 3만 내외의 조합비를 내면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개인의 노력도 수반되어야 한다. 큰스님이 입적하면 30년 먹을 것 지고 간다는 말이 회자된다. 호화장례를 치르느라 엄청난 재정이 소요된다는 말이다. 그런 장례문화를 일소하고 그 비용을 생전에 스님들이 위의를 갖추고 수행할 수 있도록 복지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 옳다. 공양은 평등하게 하는 것이 승단이 정신과 부합한다. 스님들에 대한 기본 소득제도 바람직한 대안이다.

5. 스님의 범계에 대한 진상조사와 엄정한 집행 및 계율의 현대화

홍주종의 흥선유관(興善惟寬)의 말처럼, 무상보리란 것은 몸에 걸치면 계율이요, 입으로 말하면 법이요, 마음으로 행하면 선이 된다. 즉 계율이 바로 법이요, 법은 선정을 떠나지 않으니 계, 정, 혜를 따로 분리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계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점이다. 윤리는 교리와 달리 보편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맥락 위에서 형성된다. 윤리는 사회ㆍ문화적 맥락이 변하면 같이 변해야 한다. 변하지 못하면 윤리를 통한 자유는 사라지고 속박이 된다.

그러기에 윤리와 계율을 논하려면 먼저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 필자는 문화를 연기론적으로 정의한다. E.B. Tylor에서 C. Geertz에 이르기까지 서구 학자들의 문화 정의는 실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동쪽이 있어 서쪽이 있고, 나무가 풀과 관계 속에서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듯, 문화 또한 타자를 자연이나 야만으로 설정하고 이것과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서 빚어지고 해석되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에 “문화란 자연이나 야만과 구분되는 세계에서 구성원들이 세계를 나름의 체계와 코드로 해석하고 대응하면서 세계관과 상징을 형성하고 그 세계관 – 주동적, 잔존적, 부상적 세계관 – 의 구조와 상징체계 속에서 자신과 자연과 세계와 타인, 사회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고 소통하며 끊임없이 의미의 상호작용을 하고 이 의미의 망 안에서 서로가 자신과 집단의 삶의 지향성에 부합하는 의미를 중심으로 실천하고 기억하고 전승하면서 생성하는 역동적인 총체”로 정의한다.

이 정의처럼, 문화는 상대적이자 연기적이다. 승단의 문화는 비승가문화를 전제로 하며, 이것은 상호 조건의 관계에 놓인다. 디지털 사회로 이행하면서 승단과 비승단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도박사태의 근본 원인 또한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에서 빚어진 것이다. 특정 집단에서 어떤 것이 문화로 자리를 잡으면, 규범은 그 문화를 규제하는 장애로 인식되며, 결국 문화에 맞추어 규범이 변할 때까지 문화와 규범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아무도 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어부가 기준치 이하의 생선을 놓아주면서 주체의 자유로움에서 오는 황홀감에 취하듯, 수행을 통하여 자유로운 주체는 계율을 지키는 행위를 통하여 환희심에 젖는다. 하지만, 그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한 수행자들은 자아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자성불의 목소리, 감시의 시선과 범계에 따른 벌이 두려워서 계율을 지키게 된다.

가장 아래 단계의 수행자들은 벌 때문에 계율을 지키려 하는데, 그 벌이 공정하고 엄정하게 집행되지 않으면 두려움을 상실하고 범계 행위를 하게 된다. 그 동안 호법부는 공정하지도 엄정하지도 않았다. 권력을 가진 이, 문중의 도반처럼 인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너그럽기는 사회와 마찬가지였다. 호법부를 별도의 독립기관으로 정하여 총무원장으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고, 양형기준을 적시하여 사적인 감정이 자리할 여지를 없애야 한다.

대다수의 수행자에게 벌보다도 계율을 지키도록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자성불의 목소리와 감시의 시선이다. 하지만, 계율에서 어긋난 것이 문화가 될 때 부처님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감시의 시선은 전도된다. 예를 들어, 거마비가 이미 승가의 문화로 관례화한 곳에서 이를 받지 않으려 하는 자가 외려 그 집단의 눈총을 받고 왕따를 당한다. 문화와 관례에 의하여 감시의 시선이 전도되면, 그를 어기는 자 사이에 ‘공범의 연대’가 성립하여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되고 지키는 자를 타자로 설정하여 그를 감시하고 배제하면서 연대를 강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이 경우 그 시선에 맞서서 계율을 지키는 것에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그 집단으로부터 추방도 각오해야 한다.

종단은 차제에 승단의 문화와 계율 및 청규, 사회법 사이에 괴리를 빚고 있는 것에 대해 면밀히 조사하고 이 괴리를 메워야 한다. 문화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경우에는 문화를 계율에 맞추어 바꾸어야 할 것이고, 다른 경우에는 계율을 바꾸는 경우도 있어야 할 것이며, 양자 모두 조정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다소 수정해야 할 계율도 있다.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고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스님들도 재미있게 생활하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계율과 청규를 현대화하여 지키지 못할 계율과 청규는 개정하는 한편, 스님들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 창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도박이나 음주를 대체할 스님들의 놀이문화 개발, 족구, 축구 등 스님들의 체육 활동을 보장하고, 신도나 마을주민과 함께 하는 체육ㆍ문화 활동도 필요하다.
스님들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시, 노래, 악기 연주, 그림, 등산 등의 취미활동도 보장하고, 그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이나 교구 안에 동아리를 만들고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 볼 사안이다.

아울러 스님들도 이원화 하여, 이판승의 경우 더욱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수행 비구승 -사자상승- 지원 체제를 확립하고 사판승의 경우 교화승(포교승)으로 구분하여 결혼과 공인된 재산의 사유를 인정하되 상좌를 두지 않고 일정 정도 이하의 소임만 갖도록 제한하는 것도 이 시대에 필요한 연구 과제다.

이처럼 문화와 계율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해야 하지만, 이런 사유로 지금까지 저지른 범계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스님들의 범계 행위가 불교를 쇠망하게 할 만큼 극단의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모든 성찰과 쇄신은 진실의 조사와 공표로부터 시작한다. 신뢰받는 출가자와 재가자 공동으로 “청정승가 정립을 위한 범계 행위 진상조사위원회(가칭)”를 구성하여 빠른 시일 내에 모든 진실을 조사하여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하여야 한다. 조사한 후 드러난 허물이 개인적인 것은 참회하고, 드러난 문제가 구조적, 제도적인 것은 제도를 개혁하여야 한다. 일부 불자들은 진상이 드러날 경우 종단의 혼란과 불교의 위상 전락을 우려한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성찰하지 않으면, 범계 행위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 불교는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여 사라질 것이다. 약간의 혼란과 대중의 충격, 위상 전락이 따르겠지만 재빨리 성찰하고 제도개혁을 해나간다면 그를 중심으로 불자들이 하나가 되고, 잃었던 신뢰와 지지를 되찾을 것이며, 위상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정으로 진실을 낱낱이 조사하고, 공표하고 함께 성찰하고 모든 삿된 것을 몰아낼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6. 국가 제도화의 해체와 삼권분립과 권력 견제 기능 강화

자승 총무원장체제에 와서 삼권분립은 형해화하였다. 자승 총무원장이 중앙종회의원, 호계원, 호법부는 물론, 동국대 총장, 정부 내 종교관련 직책에 자기 사람을 심어놓고 전횡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에 중앙종회는 종도가 아니라 총무원장의 의사를 대변하고, 호계원은 서의현의 재심을 결정하고 외려 종단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한 스님을 쫓아내거나 제재를 가하는 등 권력의 하수인 구실을 하고 있다. 수행과 교화의 수장이 되어야 할 주지소임이 신심과 원력 없이 세속적 출세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궁극적 대안은 중앙의 총무원과 지방의 교구 본사제를 해체하고 지역에 기반한 자율적인 승가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총무원과 교구본사제는 일제의 식민지적 근대의 잔재이자 국가가 종교를 제도 안으로 편입하여 관리하자는 근대적 유산이다. 승가는 자율적인 공동체이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각 절별로 역사와 능력, 승려들에 맞게 수행중심, 전법과 포교 중심, 중생 구제 중심 등으로 특성화하여 자율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개량적 방안으로는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중앙종회와 호계원의 종헌에 규정한 실질적 역할 수행을 통한 삼권분립을 구현하며, 수행과 재정의 분리 등 제도개혁을 단행하여야 한다. 중앙종회의원 또한 해당 교구의 비구니를 포함한 모든 종도들이 참여하여 선출할 수 있도록 한다. 중앙종회는 상임분과위원회를 중심으로 종도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제도를 만들고 법제화를 하여야 하며, 종단의 행정은 물론, 수행, 포교, 교육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중앙종회가 먼저 나서서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기회를 통하여 모든 일과 행사에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평등하게 참여하는 공의제를 정착시키고 구체화, 활성화하여야 한다. 원로원만이 아니라 중앙종회를 근본적으로 양원제로 나누어, 상원은 계율대로 대덕 이상의 출가자로 자격을 한정하고, 하원은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함께 구성하여 상호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호계원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호계위원은 도덕성, 경력 등에서 일정한 자격기준을 부여하고 이에 합당하는 자 가운데 중앙종회에서 선출하되, 중앙종회의 일반 의결이 아닌 중앙종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하여 권위를 부여해야 한다. 일정 부분(최소한 1/3)은 불자 법조인으로 구성하거나 배심제도를 도입하여 심판은 호계위원이 하고 유죄/무죄의 판단은 배심에서 결정하도록 한다. 호법부는 중앙종회 직속으로 독립시키며, 호법부는 사전예방과 진상조사의 업무에 주력하고 호계원은 심판에 주력하도록 기능을 분할한다. 원로원에 사회의 헌법재판소와 같은 역할을 부여하여 총무원장이 종헌을 위반하였다고 판단하였을 경우 바로 탄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7. 호국불교 이데올로기와 정교유착의 해체

총무원와 교구본사제와 함께 정교유착을 정당화하는 논리인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한다.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는 정교유착을 심화하고, 불자 대다수가 아니라 일부 권승과 이들과 야합한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철저히 복무한다. 이는 대중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종단의 모순을 은폐하고 이를 애국으로 대체하는 허위의식이다. 원래 중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호국불교사상은 정법을 전제로 한 것이고 호국(護國)이 아니라 호법(護法)하자는 것이고 그 목적은 왕권이나 신권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락이었다.

하지만, 일제와 독재정권에 와서 호국불교는 정권의 권력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다. 이 이데올로기는 화랑과 의승과 같은 애국시민의 삶과 실천이라는 상상관계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종단, 사찰과 같은 이데올로기 국가기구 안의 실천을 규정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주체의 범주의 기능에 의해 구체적인 개인을 구체적인 주체로 부르거나 호명(interpellation)한다.”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는 스님과 재가불자들을 사찰과 종단이라는 이데올로기 국가기구를 통해 국가와 정부를 정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주체로, 화랑이나 의승(義僧)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조금이라도 그들처럼 애국을 하고 싶은 주체로 호명한다.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것의 필연적인 상상적 왜곡 속에 생산의 실존하는 관계(그리고 그로부터 유래한 다른 관계들)가 아니라, 특히 생산 단계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와 그로부터 유래한 다른 관계들을 재현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속에 재현된 것은 개인들의 존재를 지배하는 실제 관계의 조직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실제 관계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이다.” 부처님의 정치에 대한 가르침은 정교분리다. 불교는 깨달음조차 집착이라고 할 정도로 대자유를 지향한다. 그럼에도 권승들은 전통사찰의 보존 및 지원에 관한 법률, 문화재보호법, 자연공원법을 매개로 정교유착, 더 나아가 불교, 종단/사찰의 국가 종속을 수용한다. 이들은 국가가 위임한 권력과 분배한 재정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소유와 탐욕을 증대하면서 그러는 한, 무소유와 삼독의 지멸을 추구하는 불자에서 멀어짐에도 종단과 사찰에서 큰스님으로 군림하고 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모든 것을 정법에 근거하여 현실을 직시하고 비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비판하고 저항해야 한다. 원래 호국불교사상이 호국이 아니라 호법이며 그 목표는 지배층의 수호가 아니라 백성의 안락임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번 촛불혁명이 주권자로서 각성한 시민들이 주체가 된 것처럼, 호국불교가 정법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그 목적은 국가가 아닌 국민의 안락이라고 할 때 기존 체제의 균열을 내고 변혁으로 가는 지평을 열 수 있다. 지금까지 일제와 독재 정권에 의해 왜곡된 호국불교에 대한 기술과 논리는 모조리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종단은 오로지 부처님의 뜻, 정법에 따라 호법을 위하여 여법하게 권력과 ‘타협적 평형’을 도모하고 ‘창조적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권력의 비호를 받아 심한 범계행위를 은폐한 모든 권승들은 절절하게 참회하고 모든 소임을 내려놓아야 한다.
돈을 주고 표를 사는 것처럼 표를 매개로 부처님을 파는 것은 중죄이자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주범이다. 중앙이든 지방이든 선거를 매개로 정교유착이 강화하므로, 표를 매개로 종단과 절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고 권력이 이에 대한 보답으로 지원금을 늘리는 행위를 금품선거나 뇌물을 주는 것에 준하는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공직선거법과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야 한다.

8. 승려 교육의 혁신

“출가자는 재생산의 위기에 있다. 행자 수료자는 2005년 정점(319명)에서 지속 하락, 2012년 212명으로 최저점을 찍고, 2015년에 205명으로 10년 전인 2005년 대비 1년 배출 총 수가 114명 감소, 특히 여행자 수료자 수가 2010년 84명으로 61% 정도 하락하였다.” 이에 대한 대안은 승려 교육을 혁신하고 기본소득제를 포함하여 승려들의 보편적 복지책을 마련하고 실행하고 사부대중이 함께 하는 것이다.

종단의 <교육법> 제1조는 “종단교육은 부처의 혜명을 잇고 법을 전해 중생을 제도하는 근본이념 아래 모든 종도에게 깨달음을 성취하고 보살도를 실천함에 필요한 교육을 시행하여 불국토 실현에 이바지할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 혹은 원효가 말한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중생을 넉넉하고 이롭게 한다(歸一心之源 饒益衆生)”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의 승가교육의 목표는 불법의 진리를 깨달아 하화중생의 이타적 보살도를 실천하여 현실세계를 불국토로 전환시킬 수 있는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 더 줄이면, 깨달음과 보살행을 행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계정혜의 삼학을 바탕으로 지혜를 닦는 해와 계율선정을 행하는 행을 종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계승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하지만, 21세기 오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우선 깨달음의 개념이 올바로 정립되어야 한다. 물론, 깨달음에 대해 함부로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합의된 개념을 도출하여야 교육과정과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깨달음을 설명을 위하여 굳이 분별하면, 나에 대한 깨달음, 세계에 대한 깨달음, 중생에 대한 깨달음으로 나눌 수 있다. 나에 대한 깨달음은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깨달음으로, 세계에 대한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으로, 중생에 대한 깨달음은 사회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교육은 말 그대로 백년지대계다. 스님의 교육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의 방식이 별다른 성찰과 개선이 없이 답습되고 교과목도 구태를 전통이라 간주하며 집착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스님들의 법문이 들을 것이 없다며 기피하는 불자들이 늘어나고, 스님들이 불자들과 대화하다가 무지를 드러내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이에 스님들의 위의는 전락하고, 스님 스스로도 무명에 휘둘려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교육원은 이런 폐단을 척결하고자 어느 정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동안 한문을 공부하다가 정작 경전의 의미나 진리는 놓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이에 한문 교재를 한글화하였다. 기존의 강원에서는 치문, 선요, 절요, 서장, 전등록, 염송 등 주로 선과 관련된 교과목에 집중하였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 너머의 진리를 깨우쳐야 하지만, 교의 사다리 없이 선으로 도약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지하게 만든다. 치문경훈, 선요 등의 선 관련 교과목에 금강경, 화엄경 등의 경전도 한문불전강독의 교과목으로 들어갔으며, 어학, 불교사회경제학, 불교생태학, 비교종교학 등의 교과목도 새로 추가되었다.
이것만 해도 진일보한 것이지만, 더욱 혁신적일 필요가 있다. 나를 깨닫기 위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과 인지공학, 세계와 진리를 깨닫기 위한 서양 인문학, 중생을 깨닫기 위한 사회학과 대중문화 등의 강좌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서양에서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였거나 과학적으로 입증한 마음과 심리, 두뇌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지금 중생들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탐욕에 물들어 고통 속에 있는데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찌 이들을 구제할 것인가. 이밖에 불교미학, 인류학, 과학사, 과학철학 등도 교양 선택과목으로 선정할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너무 많은 교과목으로 학인의 부담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는데, 각 단계별로 체계화하고 과목을 통합하여 학인의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교육원 산하에 ‘교육개발연구소’ 및 ‘교재연구 및 교과목 개편위원회’를 둘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에 기본교육기관도 정리하여 체계화한다. 강원이 난립한 가운데 강원과 강원의 유기적이고 횡적인 연계가 없었다. 강사 스님이나 교수들도 통일된 교수법이나 교재 없이 다른 교수들과 교류도 없이 스승으로부터 도제식으로 교육받은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또한 ‘승가대학 운영에 관한 령’이 학년별 정원을 10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현재 출가자 감소로 인한 정원 미달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승가대학 통합, 다른 교육기관으로의 전환 등도 적극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강의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교육원에서 동영상 강좌를 마련하고 연수교육을 시행한 것은 잘한 일이다. 교재를 통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교과목별로 표준 교안을 만든다. 교과목에 따라 다양한 교수법을 개발하고 보급한다. 경전에 대한 해석도 통일한다. 교수도 자격고사를 보게 하며, 공통교재에 대한 연수 등을 종단 차원에서 시행한다.

9. 언론 자유의 보장

붓다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비판에 귀를 열었다. 붓다는 『장아함경』에서 “말과 뜻이 다른 어떤 이에 대해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이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① 충고하고, ② 듣지 않으면 꾸짖고, ③ 듣지 않으면 꾸짖기를 멈추고 ④ 다 같은 여래의 제자로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 함께 올바른 말과 뜻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했다. 부처를 만나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까지 지존의 권위와 지위마저 해체하고 진리라 생각한 것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이를 깨야만 진정한 진리에 다다른다는 것이 불교의 진리관이다. 원효성사는 진리라고 단정하는 것에도 일말의 허위가 있으니 그를 골라내고 허위라고 규정한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있으니 그를 추려내야 하니, 어떤 주장이든 받아들인 다음 그를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 순이불순(順而不順)의 화쟁(和諍)을 통하여 진리로 다가가는 방편을 알려주었다. 승가(僧伽)는 모든 안건을 찬성과 반대를 묻는 대중공사인 갈마(kamma)를 통하여 처리하는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만장일치에 이를 때까지 토론을 거듭하되, 이것이 불가능하면 다수결로 표결하여 정하였다. 이렇듯 불교는 교리적으로나 전통으로나 강렬하게 민주주의와 ‘언로(言路)의 열림’을 지지하고 추구하였다. 그러니, 종단의 언론탄압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을 어기는 훼불행위다.

백보를 양보하여 불교에 민주적 교리와 전통이 없다 하더라도 지금은 21세기다. 스님과 종단 또한 근대 국가의 틀 안에 있다. 근대국가는 언론의 자유를 근간으로 한다. 존 밀턴이 1644년에 『아레오파기티카(Areopagitica)』에서 언론과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에 『자유론(On Liberty)』에서 “전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견을 갖고 있고 한 사람만이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갖고 있을 경우, 인류에겐 그 한 사람을 침묵시킬 권리가 없다. 한 사람이 인류 전체를 침묵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가 인류를 침묵시킬 권리가 없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밀은 이어진 문장에서 그 이유에 대하여 말한다. “만약 의견이란 것이 그 당사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개인적 소유물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그 의견의 향유를 방해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손해이며, 그 손해가 소수자에 미치는가, 다수자에 미치는가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데 대한 폐해는 그것이 인간의 권리를 탈취하며 그 의견의 당사자들보다도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권리마저 박탈한다는 데 있다. 만약 그 의견이 정당한 경우 반대자들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만약 그 의견이 그릇된 경우, 그들은 과오와의 충돌에서 야기된 진리의 좀 더 명료한 지각과 선명한 인상 – 이것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에 따르는 이익과 거의 동일한 규모의 이익 – 을 잃어버린다.”
밀턴과 밀의 이론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위하여 피를 흘린 결과,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인류의 보편원칙이 되었으며, 이로 인류는 중세의 ‘주술의 정원’에서 벗어나 진리를 올바로 구현하는 지평에 놓였다. 실제에서 괴리가 있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헌법을 통하여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언론 또한 권력자들이 통제하고 검열하는 권위주의 단계에서 벗어나 진리와 사상을 마음껏 표현하는 자유주의 단계로 도약하였다.

밀의 인용문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사건이 <데일리메일>지의 사례다. 세계 제1차 대전 발발 이듬해인 1915년 5월에 다른 언론이 영국의 연전연승을 보도하는 상황에서 <데일리메일> 신문만은 영국군이 실은 연전연패하고 있으며 그 원인은 포탄과 병기들이 너무 낡았고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 사이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도한다. 아스키스(Asquith) 내각과 육군 장관 키치너(Kitchener) 원수 및 군부의 보도협조 요청을 받아들인 다른 신문들은 일제히 <데일리메일>의 보도를 매국노의 짓으로 매도한다. 이에 시민들도 이 논조에 동조하여 <데일리메일>지를 불태우고 불매운동을 벌인다. 광고주도 외면하자 이 신문은 심각한 경영위기에 놓이고 문을 닫으려 한다. 이때 비스카운트 노스클리프(Viscount Northcliffe) 사장의 동생이 자신의 재산을 투여하여 돕는다. 이후 새로 들어선 로이드 조지(Lloyd George) 내각은 병기를 개선하는 등 패전 요인들을 바로잡아 나갔고 결국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패전한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는 “노스클리프의 신문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지금 두 언론사는 17개월 동안 취재와 광고탄압을 받으면서 <데일리메일>처럼 문을 닫을 위기에 있다. 밀이 잘 묘사한 대로, 두 언론사의 의견이 정당한 경우 종단은 과오를 버리고 진리를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설혹 두 언론사의 의견이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종단은 허위와 삿됨과 싸움에서 진리를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내고 전파할 수 있는 이익을 상실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나 집단은 그것으로 드러날 비리와 허위, 망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등에가 쏘지 않는다면 누가 게으른 말을 깨우겠는가.” 열쇠구멍으로 방안을 훔쳐보던 아이가 계단의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가는 것처럼, 타자의 응시가 없다면 인간은 마음대로 타락할 것이다. ‘방일한 스님을 깨우는 등에’로서, ‘범계의 유혹을 견제하는 타자의 응시’로서 언론의 자유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의 토마스 에머슨(Thomas I. Emerson) 교수는 『표현 자유의 체계(The System of Freedom of Express』라는 책에서 표현의 자유가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기실현(self-fulfillment)을 도모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데 기여하며(truth-seeking enlightment),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여 사회 결정, 더 나아가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며(self-government), 다양한 의사를 표현하여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안정 사이에서 균형(safety valve)을 취하게 한다. 필자가 더 추가하면, 표현의 자유는 정부와 소속집단의 부패와 비리를 견제하고 정화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현재와 같은 디지털시대에서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보다 위키피디아가 더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담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나듯, 집단지성을 통해 지혜에 이르게 한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침묵하게 하는 것은 인류를 침묵하게 하는 것이자 인류가 기억과 성찰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단이 승려들의 범계와 비리를 비판한 언론사를 탄압하는 것은 역사를 17세기 이전의 야만의 시대로 퇴행시키는 것이자 헌법을 부정하는 위헌 행위이다. 종단은 두 언론사에 대한 모든 탄압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부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고 언론사와 어떤 밀실협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야 한다. 아울러, 표현의 자유와 정보의 접근권 등을 철저히 보장하고 이를 탄압하지 못하도록 종헌과 종법에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명시해야 하며, 원로원은 이를 어겼을 시 바로 탄핵해야 한다.

그럴 때 종단은 다시 위의와 권위, 정당성을 획득하며, 승가는 청정성을 회복하기 시작할 것이며, 절을 떠난 신도들도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법학대학원이 있을 정도로 권위가 있는 미국의 연방대법관인 벤저민 카도조((Benjamin N. Cardozo)가 1937년 팔코 대 코네티컷 재판에서 판결한 대로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자유의 모체이자 절대 필요한 조건”이다.

10. 향후 불교개혁 운동의 방안

‘향후’는 ‘설조 스님 단식 이후’와 ‘설정 원장 퇴진 이후’라는 두 가지 조건을 의미한다. ‘설조 스님 단식 이후’란 스님이 목숨을 걸고 행한 단식으로 이끌어온 동력과 운동의 구심점을 어떻게 유지, 또는 대체할 것인가를 제기한다. ‘설정 원장 퇴진 이후’란 설정 원장 퇴진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운동의 목표와 전략을 어떻게 재정립하여 이 꼼수를 극복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종단개혁 운동의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승을 정점으로 한 권승 카르텔의 해체다. 설정 원장은 꼬리자르기일뿐이다. 그의 퇴출이 없는 한 권승 카르텔의 유지와 이들에 의한 범계와 비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수행과 재정의 분리, 직선제 등 종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개혁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이를 달성할 것인가. 승려대회와 재가불자 결집의 두 가지 길이 있다. 승려대회는 적폐의 온상인 종단에 맞서서 초법적으로, 전격적으로 개혁을 할 수 있는 대안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려면, 대표성과 신뢰, 권위를 갖는 스님들로 봉행위원회를 조직하고 이것이 주체가 되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승려들을 동원해야 하며 재가불자들도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스님들은 패배주의와 침묵의 카르텔에서 벗어나서 “이번에 개혁하지 않으면 승려의 미래는 없다”라는 마음으로 서로 권면하며 동참해야 한다. 승려대회는 단순히 승려들의 이해관계 반영에 머물러서는 헤게모니를 상실한다. 그동안의 적폐를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근본적인 개혁을 결의하되, ‘탈세속화시대와 인공지능 시대에 부합하는 청정승가 구현’이나 ‘지역공동체로서 승가의 정립’이라는 비전도 담는다. 권승 카르텔 해체의 핵심 고리로서 자승의 멸빈을, 종단개혁의 상징으로서 재정과 수행의 분리와 직선제를 확실하게 결의한다. 비상개혁기구를 구성하되, 여기에 자승 원장의 일당은 물론 도법 스님 등 이에 부역한 세력 또한 철저히 배제하고 그동안 적폐청산 운동을 해 온 재가불자들이 함께 한다. 이는 승려대회와 비상개혁기구가 정당성과 힘을 갖고 사람과 제도의 개혁을 함께 이룰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아울러, 기득권을 제외한 스님들로 대안의 세력을 구성한다.

재가불자의 결집은 따로 이루어져야 한다. 승려대회 실패를 대비해야 하지만, 승려대회가 성공한다 하더라도 재가불자들이 주체가 되어 종단개혁운동을 이끌어온 역사와 승려에 대한 불신이 팽배한 상황은 재가불자만의 새로운 운동을 요청한다. 설조 스님의 단식 중단으로 비워진 자리는 제도권에 있던 단체,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갖는 단체들의 ‘불교개혁행동’ 합류로 메워졌다. 제도권의 한 축이 무너졌고, 전국적인 조직체계를 이용하여 승려대회를 견인하고 전국의 불자들을 네트워킹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개혁행동 내부에 ‘이런 조직을 가지고 무엇을 못하랴’라는 자신감이 치솟고 있다. 승려대회가 성공하면 승려대회의 결의에 재가불자들의 가치와 염원을 담아야 하며, 비상개혁기구에도 참여한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재가불자들은 권승 카르텔이 해체되고 종단개혁이 이루어질 때까지, 더욱 조직을 정비하여 매주 촛불법회는 물론, 3보 일배, 포럼, 농성, 기자회견, 선전 운동, 담론 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한다. 반 자승 종단개혁 전선을 구성하여 재가불자가 주도하는 범위에서 승려와 대중을 이 전선에 끌어들이고 개혁 의제를 담론화한다. 단기적으로는 약한 고리인 지홍 원장 등을 퇴진시켜 권승 카르텔에 균열을 내고, 중기적으로는 자승의 구속과 멸빈을 주장하고, 장기적으로는 대만의 거사불교운동처럼 종단 바깥에 청정한 불교를 만들고 종단에 대한 불복종운동과 시주 거부운동을 전개하여 종단의 헤게모니를 무력화한다.

발표2

운영원리의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
김경호(지지협동조합 이사장)

I. 들어가며

○ 종단이 출범하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 불교계는 상전벽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재산관리법 시절에는 임명장을 받은 주지가 관공서를 찾아가 신고하여야 했다. 분규사찰은 지방 자치단체장이 재산관리인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종단과 스님들의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특히 94년 개혁 이후 확연하게 달라졌다. 서의현총무원장 시절에는 종로서를 비롯한 정보기관원들이 무시로 들락거리며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94년 이후에는 감히 과거와 같은 행태는 더 이상 없다.

이제 총무원장실에는 장관과 국무총리가 인사를 온다. 대통령선거 즈음에는 유력후보들이 와서 허리를 조아린다. 지방 본사 주지는 물론 수말사 주지만 되어도 기관장들이 찾아온다. 검찰과 경찰에서 찾아와 도와드릴 일이 없느냐며 친근한 척을 한다. 종교지도자로서 지역사회에서 예우받는다. 이 대접에 도취된 것은 아닌가?

근대 불교의 생활상은 넉넉하지 못했다. 스님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60-70년대에는 하루 3끼를 온전히 먹을 수 있는 절이 많지 않았으며, 대웅전이 기울어 무너질 지경에 이르러도 사찰재정으로는 보수비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스님들은 쇠락한 사찰 공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탁발을 나서거나 대처의 신도집을 순방하여 불사를 위한 보시를 받았다는 이야기와 기록을 본다.

그에 비하면 지금 전통사찰의 경우 비록 절차상의 번거로움은 있지만 정부 지원금으로 보수공사를할 수 있다. 60-70여개소에 달하는 관람료 사찰들은 입장료 수입이 제법 풍요롭다. 그러나 동시에 정부 지원금과 관람료에 기대는 사찰을 확보하기 위한 종단정치는 더욱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13,000여명의 비구 비구니가 원하는 풍요로운 사찰은 얼마나 될까? 전통사찰 778개를 비롯 종단 소속 모든 사찰의 수는 2,500여개에 불과하다.(선학원 사찰 570여개가 법인법 파동으로 빠져나갔다.) 그 안에서도 경쟁의 대상이 되는 사찰은 150-200여개에 불과하다. 그 사찰의 대부분은 주인이 있다. 특정 문중 큰스님 문도들 사이에서 돌아가며 주지를 한다. 남는 대상은 그야말로 제한적이다. 한정된 목표를 놓고 생존을건 무한경쟁이 지속된다.

소수 기득권의 경제상황은 풍요를 넘어 종교재벌이라고 할 만하지만 대다수는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정속에 빠져있다. 소문중중심의 배타적 사찰권역이 종단에 고착화되면서 기댈 반연이 없으면 해제 철이 되어도 바랑을 풀 곳을 찾지 못한다.

종단이 공동체성을 상실하여 구성원들이 각자도생해야 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도덕을 외면한 채 누구도 납득하지 못하는 처분을 반복하면서 대중의 신뢰는 상실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자신들을 ‘불 교자본가’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이름 없는 아무개의 망발이 아니라 교육원장이라는 고위직 승

려가 한 말이다. 그런데 율장에 등장하는 정인淨人은 돈을 만질 수 없는 스님을 대신하여 사찰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교육원장 현응 스님의 발언은 승려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포기한 발언이 아닐수 없다.

○ 1994년 개혁회의 5대 지표를 상기하자. 종단 개혁당시의 목표에는 1994년의 한시적 목표가 아니라 근현대 한국불교의 총체적, 집단적 꿈과 의지가 담겨있다. 각각의 주제가 담고 있는 키워드를 임의 대로 살펴보면 – 정법종단의 구현 – 인적 청산과 제도개혁, – 불교자주화실현 – 정권예속, 친정권 들러리 탈피, 정부지원금 의존 감소, – 종단운영의 민주화 – 사부대중 참여, 간선제 선거인단 확대, 각종 선거제도 정비, – 청정교단의 구현 – 범계 자정, 종권 분규 감소, 폭력, 도박, 은처, 정재 망실 처벌.

–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 – 깨달음의 사회화운동, 복지재단 출범, 해외 구호단체, 한중일교류

그리고 3대 개혁과제는 다음과 같다.

– 불교자주화 – 제도개혁 – 인적청산 그러나 24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조계종단은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개혁당시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할 만큼 종단은 발전한 것이 아니라 답보상태다. 오히려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다양해졌다. 원인과 진단에 대해서는 백가쟁명이다.

출범한지 60년이 채 되지 못한 조계종단에 이토록 많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보임으로써 이제는 몇몇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 운영구조의 설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깨진 독에 물을 부어봐야 계속 샐 뿐이다. 조계종의 핵심 운영원리와 관련한 몇 가지 쟁점을 살펴보면서 대안은 없는지 생각해본다.

○ 2017년 제35대 총무원장 선거를 둘러싸고 불교 시민사회진영과 조계종단 적폐의 본진, 자승과 그일당들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이는 2013년 자승의 재임을 둘러싼 전쟁이 다시 점화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자승-설정 연합군은 권력의 재생산에 성공하였고, 시민사회진영은 제도의 편파성, 기울어진 운동장, 기득권의 강고함을 확인하며 아쉽게 물러나야 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와 해석을 놓고 여러 입장이 나타났다. 그토록 많은 대중이 촛불을 들고 단식을 불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실망한 측이 있다. 또 다른 측에서는 시민사회진영의 연대가 발전된 것만으로도 성과라고 여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이 모든 해석은 다 타당성이 있다. 하나의 입장만이 나온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성과에 방점을 찍는 의견은 말한다. 언제까지 지는 싸움만 할 것인가. 과정에 의미 있다고 자족만 하면서 실제적인 변화는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힘의 불균형을 인지한다면,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기지 못할 싸움이니까 하지 말았어야 하나? 성과지상주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지킨 도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승산이 희박했어도 옳다고 생각했기에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싸움을 지속해온 대중들이 있었기에 2018년 오늘의 힘찬 투쟁이 가능했다고 본다. 그리고 오늘의 싸움이 어떤 결론을 내던지, 불교

시민사회는 한걸음 더 성숙할 것이라고 본다.

○ 쌍둥이 아빠 성월이 용주사 주지가 되면서 시작된 용주사 신도들의 분투는, 일견 자격 없는 자가 교구장이 된 것에 대한 일반불자들의 항의로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보다 근본적 물음이 담겨있다. 즉불교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주인의 목소리는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주인의 권리행사를 가로막는 제도적 문화적 문제는 무엇인가? 신도대중을 배제한 채 소수 승려들이 모든 권리를 독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등등.

그리고 불교시민사회가 용주사 투쟁에 결합하고 용주사의 투쟁이 조계사 앞으로 이어진 것은 이 물음이 한국불교의 현재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용주사와 총무원장을 둘러싼 종권 문제는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교시민사회의 각 단위들은 자기 바닥 대중들의 요구를 반영하고 조직화한 편린들이다. 저마다 다른 현장에서, 각기 다른 대중들의 잠재된 생각과 욕구들을 수면위로 끌어 올려 활동의 단초를 마련하고 있다. 단위들의 다름은 총체적인 과제 앞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바로 용주사가 교계에 던진 질문들이다.

그 질문 앞에서 각 단위들은 어떤 스펙트럼에 속하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 불교에게 닥친 위기의 내용과 진단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다른 자리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오늘 발제를 통해서는 아주 근원적 질문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 어떤 불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 – 어떻게 수행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 – 미래 불교는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하고 – 그 상상 속에서 각 구성원들이 어떻게 역할하고 상호 작용할 것인가 – 미래 불교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할 것인가

이런 문제의식으로 한국불교의 여러 모습을 조망하고, 과거와 비교하여 달라진 지점을 살피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면 불교가 달라져야 할 지점이 일부라도 보일 것으로 생각된다.

Ⅱ. 불교 전사의 이해

○ 지금의 한국불교를 멀리서 스케치하듯 바라보면 20세기 산업사회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18세기

농경사회가 보인다. 이 지점을 이해하지 않고서 현실불교를 진단하기란 어렵다. 21세기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일차적 키워드는 ‘농경시대’다. 농경시대 봉건적 윤리관의 인간형이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승려사회를 관통하는 윤리적 기준은 농경사회의 가치관이다. 농경사회라는 용어가 비하적 표현이 아님에 유의했으면 좋겠다. 전근대적인 것이 모두 부정되거나 척결되어야 할 대상임은 물론 아니다. 나름의 긍정성을 갖고, 시대적 필요성에 조응했던 필연성이 있다.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하고 하부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농경사회는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의 생존방식, 인간들 간의 관계, 인간사회의 복잡다양한 구조를 규정하고 강제했다. 그리고 불교가 농경사회를 천년 이상 살아오면서 불교의 구조와 그 안에 속한 인간형은 농경사회의 인간형이 되었다.

전통적 사찰문화, 불교문화가 요구하는 인간형은 농경시대 생활문화가 요구하는 인간형과 다르지 않

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나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부지런한 근면형. 자연질서에 순응하는 기다림과 체념의 정서. 유교적 서열주의와 권위에 대한 복종. 농경사회가 만들어낸 인간형은 그에 부응하는 윤리가 치를 형성했다. 더욱이 재미있는 것은 세속과 출가 생활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절에 간다고 해서 생활리듬, 경제활동방식이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서 농사짓듯 절에 가도 농사를 지었다. 의생활도 비슷했다. 주생활도 차이가 없었다. 당시사회는 오로지 토지에 기반한 생산력이 주된 것이었기 때문이 었다. 그러므로 출가는 인간의 생애에 있어서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은 선택일 수 있었다. 지금과 전혀 다르다.

화폐경제가 본격화되기 이전에는 교환방식도 곡물 등 물물교환이었다. 심청전에서 등장하는 심봉사의 공양미 삼백석 이야기는 당시 조선사회의 경제, 사찰경제의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

농경사회가 요구하는 경제구조는 사찰에도 관철되어 선종사찰의 자급자족형 경제모델로 이어졌다.

부처님 시대에도 없었고 율장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선농일치, 반농반선의 윤리가 불교의 주류가치관으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교단질서도 마찬가지다. 지배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함으로써 순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억불숭유를 표방한 조선왕조시대의 압도적 국가폭력을 앞에 둔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이해하자. 불교 전래시기의 사문불경왕자론 같은 기개는 드물고 유교적 효사상, 장자상속 이데올로기, 호국불교 이데올로기를 정립하였다. 스스로 굴종의 길로 들어선 바도 없지 않다.

이러한 국가주의 불교적 경향성은 조선왕조가 붕괴하고 승니도성출입 해제가 가져온 충격파 속에서 일부 승려가 친일을 내면화하는 등 정체성에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위한 31본산제는 한국불교의 대중공의 전통을 파괴하여 주지 1인의 전횡을 가능케 했으며 대처식육의 파계가 한국불교의 주류가 되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이 대처 왜색화 불교의 청산이 해방 뒤 핵심과 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국불교 정체성의 회복은 농경시대, 조선시대 불교의 복사판일 수밖에 없게 된다. 즉 이미 사회는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었는데도 여전히 사찰의 승려 양성과정은 농경시대 모델이며, 사원경제는 곡물을 가져오는 신도대중에 의존하고, 수행의 깊이나 법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고 출가 서열이 기준이 되는 유교적 장자상속이데올로기가 관철되었다. 그럼으로써 내부적으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온정주의가 남아있는 전 근대성과 반봉건성이 유지되고 있다.

승가에 남아있는 농경시대의 정서는 출가자들 사이에서만 유지되지 않는다. 재가불자들에게도 이질서를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아직 농경시대의 전통이 남아있던 시절의 향수를 간직한 농촌 출신의 이촌향도 인구들에게는 이 요구가 먹혔다. 그러나 이미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탈근대를 넘어 사회질서는 재편되었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됨을 넘어서서 해체가족, 1인가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승가사회는 어느새 전통주의자를 넘어서 꼰대집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권위적 질서의 수용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합리성으로 무장한, 근대교육으로 길러진 세대는 새로운 인간관계, 새 질서를 요구한다.

○ 현대 한국불교가 직면한 비자주적 불교현실, 왜곡되고 부패한 종단문제는 통합종단 조계종 출범의 정권의존 현실에서 잉태되었다.

“조계종은 54년 5월 21일 이승만대통령 유시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불교정화’의 연장선에 서 있다.

불교정화는 왜색불교의 청산, 청정수행가풍의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전개되어 비구측의 대처승 측 사찰 접수로 진행되었다.(때문에 불교정화라는 용어보다는 사찰정화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또 이때 밀려난 대처측에서는 이것을 ‘법난(法難)’으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불교정화 이전 당시 비구승들은 변변한 수행처도 없이 이곳 저곳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던 반면, 대처승들은 수입 좋은 절을 차지하고 처자식을 거느린 채 가사를 돌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승 만의 정화 유시도 모 사찰을 방문하던 중 절 경내에 기저귀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격노하여 내렸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불교정화는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비구 대처 분규 과정에서 빚어진 권력과의 밀착, 삼보정재 탕진, 무자격승려가 무더기로 양산되는 등 많은 부작용 또한 있었다. 45) “ 비자주적 불교는 정부 입맛에 맞도록 관리하려는 정부 측 의도와 정부의 지원금과 권력에 기대어 내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불교정치승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강화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종교권력과 정치 권력의 사적 거래가 일어났다. 정통성이 취약한 정취권력은 종교계의 지지를 빌미로 국고지원과 사법보 호를 제공함으로써 서로가 만족하는 거래를 해왔다.

Ⅲ. 현 조계종단의 구성원리

○ 조계종단의 구성 기조는 대한민국 국가 구성의 미니어처다. 입법은 중앙종회, 사법은 호계원, 행정은 총무원으로 3권분립을 흉내내었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소유질서를 인정한다. 사찰의 관리인인 주지는 임기동안 절대적 권리를 행사한다. 이들 권리와 운영원리는 사실 율장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평등한 승가공동체의 전통에 위배될뿐더러, 무소유에 기반한 수행자여야 할 승려를 불교자산가로 만들 었다. 불교자산가가 된 승려들은 부패의 위험에 늘 노출되고 있다. 제대로 된 견제와 감시장치조차 없는데 청정함을 유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 또한 근대 민주국가의 구성원리를 흉내내었지만 내부 원리는 비민주적이다. 대표적인 것이 성불 평등이다.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의 주요 직위는 ‘비구’만이 맡을 수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다. 중앙종회 81석 가운데 비구니 의석은 10석뿐이다. 호계원에는 비구니 자리가 아예 없다. 총무원의 주요 부국장 자리에 비구니 몫은 형식적으로 할애되고 있다. 지방분권을 상징하는 교구본사의 산중총회(본사주지와 종회의원, 총무원장 선거인단을 선출한다)에서 비구니는 의결권의 20%를 넘을 수 없도록 제도화되 어있다.

○ 출가 2부중의 하나인 비구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는데 재가2부중의 몫이 온전히 있을 리 없다.

종단의 주요 자리에 재가불자의 자리는 없다. 종헌에서 “본종은 출가와 재가로 구성한다.”고 하였고, 종헌 제10조에 “신도는 삼귀의계, 재가5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고 삼보를 호지하며 본종의 종지를 신수봉행 하는 자라야 한다.”고 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제12조 “승려 및 신도의 권리 의무와 분한, 법계, 의제는 종법으로 정한다.”고 하여 신도법이 있으나 이는 종단운영의 주체로 대접하는 규정이 아니다. 46)

45) 필자는 불교평론 2호에 ‘조계종 종권분쟁 연구’라는 제하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46) <종헌 규정> 제 3 장 종 단제8조 본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파새, 우파이)로서 구성한다.

제9조 ① 승려는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수도 또는 교화에 전력하는 출가 독신자라야 한다. 다만, 대처승(통합종단 출범 시 귀의한 자에 한한다)의 기득권을 인정하되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자는 정상적인 승려로 인정하며 기타는 그 자격에 따라 포교사 및 주지서리에 등용할 수 있다.

○ 정화 시 형성된 종단 제도와 권력은 변화된 현재를 담아내지 못한다. 94 개혁조차도 정화모델의 연장선이었다. 지금의 종단 위기는 정화 당시 구축된 종단 질서의 변화 필요성을 확인하고 있다.

Ⅳ. 기존 질서는 변화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 한국불교의 어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부 위기 ? 신뢰의 위기- 승풍실추, 수행명상의 설득력 감소 구조의 위기 – 비민주성 – 민주적 의사결정구조인가 경제 위기 ? 재정프로그램(기도? 입장료 등판매) 재생산 위기 ? 출가인구의 감소, 청소년 포교, 불교동아리 감소 외부 위기 ? 다종교 사회 ? 종교간 경쟁 격화 ? 재래식 불교(농경, 음력)의 위기 종교영역 감소 ? 복지, 상담 등 전문화, 탈종교화-국가 사회의 역할로 근대화 과정에서 교육 의료 복지 등에 투자 부족. 군소 집단으로 전락 산업구조의 변화 ? 산업경제와 불교의 관계성 단절(농경) 혁신의 위기 ?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변명이던가 책임전가던가 수행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 과정과 결과는 동의 받는가? 부정당하지는?

기존 신자들/ 사찰의 신행을 극복할 대안이 없고 기존 불교의 한계와 오류를 설득하지 못하는 시민사회진영의 한계,

○ 어떤 불교여야 하는가 불자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불교일까?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자로써 문화적 역할, 가족 및 전통

가. 실질적으로 사찰에 독신(단신) 상주하며 수도와 교화에 전력하는 자나. 가족부양의 책임을 가지지 아니할 자다. 범속인과 같은 일상생활을 하지 아니할 자

② 삭제 [불기 2553(2009). 3. 18 개정]

③ 본종의 승려가 사설사암을 창건하였을 때는 반드시 종단에 그 사암(재산)을 등록하여야 하며 법인을 설립했을 때는 그 정관에 당해 법인이 본종 관장 하에 있음을 명기하여야 한다. 본종 승려로서 종단에 등록하지 않은 사설사암의 재산상의 권리인과 정관상 본종의 관장하임을 명시하지 않은 법인의 임직원 및 법인 산하 사암의 재산상의 권리인은 다음과 같이 그 권한을 제한한다.

가. 종단 종무원법상의 일체의 종무직에 취임할 수 없다.

나. 종단 산하 교육기관 및 포교기관의 교직, 포교사와 임직원에 취임할 수 없다.

다. 종단 각종 위원회의 위원에 취임할 수 없다.

라. 해당 승려의 도제는 본종의 교육기관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

④ 제3항의 제한에 관한 세부사항은 종법으로 정한다.

제10조 신도는 삼귀의계, 재가5계 및 보살계를 수지하고 삼보를 호지하며 본종의 종지를 신수봉행 하는 자라야 한다.

제11조 본종의 승려는 상근 종무직을 겸직할 수 없다. 다만, 총무원장의 직영사찰 주지 겸직과 중앙 종무기관의 간부로서 본사주지를 제외한 사찰 주지 겸직은 예외로 한다.

제12조 승려 및 신도의 권리 의무와 분한, 법계, 의제는 종법으로 정한다.

공동체 붕괴의 간극을 대체 정신적 역할,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영역의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다.

또한 승려들은 가르치는 역할, 모범을 보이는 역할, 수행하는 역할, 자비봉사하는 역할을 넘어서서 앞으로는 어떤 역할을 필요로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불교 구조여야 하는가 – 종단 구조를 권력의 형성과 배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 종교수요자의 입장에서 다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 불교 경제규모에 대한 일반인들의 착시현상은 문화재관람료사찰에서 비롯한다. 불교와 관련 없는 이들이 전통불교와 만나는 첫 자리는 입장료를 납부하는 자리인 경우가 많다. 수많은 이들에게 돈을 징수하는 불교의 모습은, 노동하지 않고 수익을 얻는 부러운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실상 관람료를 징수 하는 사찰은 전국에 걸쳐 64개소에 불과하다. 조계종 소속 3천여 개 사찰가운데 98%는 이 수익과 무관 하다. 다만 관람료사찰을 둘러싼 욕은 공평하게 1/n로 나누어 받는다.

○ 종교권력의 부패는 재정문제에서 시작한다. 종단 혼미의 모든 출발점은 재정을 둘러싼 다툼으로 재정이 우량한 핵심 사찰 150-200여개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다.(2천 5백여 개라는 종단소속 사찰 가운데 공찰은 1천개가 되지 못한다. 나머지는 민법으로 소유권이 보장되는 사설사암이다. 778개의 전통 사찰 중 대다수가 속한 공찰을 둘러싼 다툼이다.) 기득권이 된 승려들은, 확보한 이권을 놓지 않기 위해 종단 정치에 올인하게 된다. 개인의 축재만이 아니라 일가 권속, 문중의 번영이 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 주요 사찰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종단정치와 폭력분규, 매관매직이 벌어진다. 한 번 확보한 이권은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적폐세력은 민족 문화유산의 사유화, 국고보조금의 쌈지돈화, 조폭 패거리 문화로 종단을 통치하는 비민주적 종단운영을 행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종단의 자정기능은 상실되며, 음행, 음주, 폭력, 도박, 돈선거 등 각종 지탄받는 범죄는 반복 발생한다. 급기야는 언론자유 침해 등 헌법질서를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아예 없다.

사회적 상식과 충돌하는 몰상식, 근근대적 퇴행, 반봉건적 내부모순, 권력을 독점한 자들 간에 벌어 지는 부패의 사슬, 공법기능의 편파적 적용, 공적 기구와 자산의 사유화, 자기권리를 자각하고 말하는 대중에 행하는 강폭한 협박은 모두 이 기득권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에서 출발한다.

○ 청정교단은 가능한가? 그런 불교는 없다. 역사적으로 완벽하게 청정한 교단은 존재해본 적이 없다. 석가모니부처님도 못하신 일이다. 청정성 등은 소중하게 여겨야 하지만 절대적 가치기준이 된다면 이를 충족할 이는 거의 없다.

지금의 종단 안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타락, 승풍실추 등의 제 문제에 대해 승가 공동체는 대답할수 없다. 왜냐하면 이만한 규모의 압도적 조직규모를, 자산규모를 감당해본적도 운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전통불교의 질서는 출가자 사이의 갈등을 조정했을 뿐 재가불자까지를 포괄하는, 사회적 문제와 조응하는 부분에서는 역할해 본 적이 없다. 율장은 출가자들의 질서일 뿐이다. 그 질서로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 자기가 경험한, 혹은 상상한 작은 범주에서 각기 불교를 인식하지만, 지금의 현전승가는 역사상한 번도 마주해보지 못한 광범위한 권역이다, 새로운 문명으로 인해 즉시적 정보교환이 가능하며 교통 발달로 세계가 일일생활권이다. 변화된 세계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새로운 운영원리가 필요할 때다. 더욱이 출가자들만의 폐쇄적 승원모델은 이제 더 이상 존속하기 어렵다. 사부대중의 눈앞에 늘 노출되는 시대에서는 새로운 운영원리가 필요하다.

○ 나아가 교학적, 이상적, 관념적 사방승가 개념은 역사와 사회를 반영하고 그 안에서 물질적으로 생존해야 하는 개인과 집단임을 망각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크게 불교와 비불교를 가르는 기준은 물론 존재한다. 그 기준으로 불교의 범주를 고정할 수는 있지만 보다 큰 틀에서 보아야 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한국 불교의 풍경은 못난 놈도 어우러져 온 역사다. 그런데 정화운동을 거치면서 불교 아닌 것들에 대해 가혹한 기준을 들이대고 배제의 원칙으로 질서를 구축했다. 이 기준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 지우고 나면 한국불교라 여겨왔던 풍경이, 역사성과 문화성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 다양성이 모여 한국불교라는 큰 풍경을 형성한다. 때로는 아웃사이더조차 불교의 한 영역이었다.

반승반속, 비승비속의 경계는 물론 땡초라 불리는 파계승들도, 급기야는 대처까지도 불교의 큰 풍경이 다. 단청 범패 등 문화전통을 계승한 이들 가운데 비록 대처나 식육, 음주 등의 문화가 있더라도 그들을 불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고승들의 무애행조차도 파격으로 수용하는 불교전통이라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는 조계종단의 청정비구 이데올로기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독신청정의 기본 축을 유지하면서, 다양한 변주를 어떻게 너그럽게 수용할 수 있을지 고민 해야 한다는 문제지적이다.

○ 종단 운영의 핵심은 결국 인사 재정이다. 이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하기 위한 기준은 결국 율장정신이라 일컫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천 오백년 전 율장은 시대와 공간이 달라진 현실을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 지금의 한국불교는 사찰조차 유지 관리가 어렵다. 2천 5백여 개 사찰 가운데 주지 임명을 하지 못하는 사찰이 500개 이상이 된다.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이 추세는 더욱 심화된다. 신도시는 사찰이 없고 산중사찰은 신도가 없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대로 사찰의 유지가 가능한가? 그럼에도 계속 창건할 필요가 있나?

○ 더 나아가, 현 사찰 재정수입의 구조는 크게 기도수입과 재수입(49재와 천도재), 초파일 등 특별 명절수입이 주종이다. 세계최대나 동양최대를 말하던 대형불사 수입은 이제 한계에 봉착했다. 그 수입의 상당부분은 시설관리비용으로 나가고 인건비로 소진된다. 사찰의 연간 전기료는 일년 수입의 1-2개월 치에 해당하고, 난방과 차량운행을 위한 에너지 비용 또한 그에 버금간다. 즉 목탁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2-4개월치가 그런 식으로 소진된다면 미래불교를 위한 재투자 비용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경제가 원활하게 굴러가지 않는 어떤 방안도 사상누각이다. 부족한 부분을 국고보조금에 의존하는 방식도 한계다. 지금과 같은 신도 이탈이 계속된다면, 불교의 신뢰가 계속 하락한다면 미래를 이야기할 것도 없이 곧 말라죽을 지경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있는가?

Ⅴ. 답은 누구나 알고 있다

○ 비구 1부중에 독점된 종단 권력의 해체, 사부대중의 공동관리가 필요하다. 종단 위기상황 때마다 종단권력의 재편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른바 혁신기구가 아니라 100년을 대비하는 기구를 사부대중의긴 호흡으로 해야 한다. 문제는 100인대중공사, 백년대계위원회 등으로 좋은 이름이 오염되었다는 점이 다. 권력기구의 보호막으로 기능하는 위장기구를 척결하고, 사부대중이 동참하는 21세기의 열린 결집을 통해 종단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승려는 수행 중심으로, 관리는 재가 참여로 종단 미래를 공동으로 책임져나가야 한다.

○ 대중공의가 파괴된 자본주의적 재산관리인인 사찰주지의 독점적 권한을 해체. 가톨릭 모델처럼 최소한 교구차원의 공동경제체제 추진 필요. 주요 전통사찰의 수익을 사유화할 수 있는 현 구조는 중단 되어야 하며, 전체 공동체를 위한 공동경비로 이용되어야 한다.

○ 교구 재획정이 필요. 종단 성립 뒤 수십 년이 경과하면서 한국사회 지형이 크게 변화, 교구별로 인구와 경제규모의 차이가 심화, 수도권을 비롯한 광역시는 무주공산, 야생의 각축장이 됨.

○ 이에 덧붙여, 1700여년의 문화유산인 전통사찰과 불교문화재는 불교인만의 것일 수 없다. 온 국민 의, 나아가 온 인류에게 전해지는 유산이다. 이를 관리한 내셔널트러스트 같은 기관을 설립하여 공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소수 권승들의 사유재산화를 방지하여야 한다.

○ 그러므로, 778개의 전통사찰을 포함한 공찰의 관리권을 ‘소속단체 장의 동의’이라는 애매한 법률 규정을 통해 비구승가에 독점한 현재의 사찰관리와 재산에 관한 국가법령을 개폐하는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 이는 수행승을 사찰의 관리 운영으로부터 강제로 분리시키며, – 재산관리인이라는 명목으로 무제한의 재산처분권까지 부여하는 현행 권한을 정지시키며, – 사부대중이 새로이 평등한 관리운영의 주체가 될 법적 지위를 부여하며, – 불교재산의 처분에 대한 비토권을 개인이 아닌 승가공동체에 부여함으로써 재산의 망실을 방지하 고, – 전통사찰의 재정수익을 개인의 수중에 두지 않고 공적 기금화하여 불교발전에 사용., – 사설사암은 현재의 민법규정을 통해 소유권과 관리권이 보장되므로 검토의 대상이 아님.

○ 민주적 대중공의 전통의 파괴와 자본주의 질서 편입 – 사찰주지 1인에게 권력집중 ? 사찰의 사유재산화/ 대중공의 실종(현전승가 사라짐)/ 재정 불투명성 – 율장과 사회법의 괴리/ 지킬수 없는 율과, 사회법의 사각지대 종교

○ 현재 불교 공동체라 말하는 조계종단은 전혀 종교적일 수 없는 세속적 다툼을 종식시키지 못한다. 제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하고 부패한 인간의 문제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구 1부중의 독점적 종단운영의 한계가 드러난 것일 뿐이다. 자자·포살·대중공사·승려대회·칠불쇠법의 전통이 있는 불교는 당연히 모든 구성원이 주인 되는 민주적 대중공의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출발점은 종단의 최고책 임자인 총무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는 일이다.

○ 총무원장의 지위는 출가이부중의 자치대표권자로 하여 재가이부중과 차이를 둘 필요는 있다. 그러나 종단의 운영(교단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수도 있다)은 출재가 사부대중의 공동운영방식으로 추진 되어야 한다.

○ 출가중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재가중은 준비가 되어있는지 고민스럽다. 굴종적 재가신행을 극복할 재가 내부의 노력이 필요하다. 수동적이고 비자주적 신행이 계속되는 한 재가자 또한 불교적폐의 재생산에 기여할 수도 있다. 현 승단의 부패에는 재가자의 책임도 일부 있다. 앞으로 승단의 자율성을 보장하되 재가 부분의 적극적 동참과 대표성 확보 방안 등이 논의되어야 한다.

Ⅵ. 미래불교를 준비하기 위해

미래불교를 준비하려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담대한 그랜드디자인을 그려야 한다. 기존의 종단, 기존의 불교관련 법의 틀에 우겨 넣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청정치 못한 파계승들을 정리해내기 위해 호계원까지 재가가 진출해야 할까? 이는 출가자치를 훼손하는 제안으로 출가의 자존심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승려 자치영역의 인정 필요하고 재가 운영 참여의 범위와 한계를 숙고해야 한다. 즉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지켜온 불교 역사성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 다. 이 고민지점은 향후 종단을 사부대중이 공동운영을 한다고 해도 승려 비토권을 도입하자는 제안으로 연결된다.

이미 출재가 이분법은 혼미해졌다. 승가가 독점적으로 유지해왔던 전통계승의 영역 가운데 상당수가 이미 재가 영역으로 넘어왔다. 미술, 음식 등 생활문화, 교학 연구까지도 이미 재가의 영역이다. 현재 출가중은 불교의례의 전문가이며 수행 실참자로서 권위만 남아있다. 그러나 수행영역 또한 위빠사나, 아바타 수행등 외래종 수입수행 프로그램에 밀리는 추세다.

○ 더욱이 불교교단은 지속가능성의 위기에 봉착했다. 신도 300만 이탈은 너무 충격이 커서 현실감이 없으나, 출가자의 지속적 감소는 지방강원, 중앙승가대학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다. 또한 출가자의 고령화는 생계형 출가자의 증가로 이어져 출가연령제한 완화에 대한 재고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면 미래 불교는 누가 주인으로 책임질 수 있을까? 공동화되는 출가구조가? 신뢰를 상실해가는 재가대중이?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미래 불교는 출재가의 구분 없이 하나의 대승교도로 돌파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3차 산업혁명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전근대성, 반봉건성과 계급사회적 인식이 여전하다. 사찰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보라. 고령의 여성노동자 들이 비인격적 대우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전근대적 교육과 폐쇄적 승원생활에 길들여진 승려들은 전통적 영역에서의 계승은 인정받을지 몰라도 사회 전반의 발전방향을 선도하는 지도력으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근대적 인식이 부재하며 각종 영역에서 문화지체가 빚어지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농경사회 인간형을 넘어서서 산업화 정보화 시대의 불교적 인간형, 윤리적 인간의 형성은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 합리성과 상식이 결여된 종단 운영, 특히 사법질서는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근대 선각자 들인 만암스님은 교육, 가람불사 등 지역 복지, 항일 민족운동에 종사했고 운허 스님은 독립운동, 교육, 한글역경 등에서 우뚝했다. 이밖에도 만해, 용성 등등 큰 스승들의 안목과 실천은 왜색불교를 청산 하고 청정비구승단 건설하는 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거목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요즘 지도급 승려의 안목은 전시대 고승들보다 훨씬 떨어진다.

종교의 미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어떤 불교를 만들어야 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자.

어떻게 수행하고 공동체를 이루고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

미래 불교가 어떠해야 하는지 상상하고 그 상상 속에서 각 구성원들이 어떻게 역할하고 상호 작용하 는지,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권력이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상상해야 한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종교란 무엇인가/ 누가 종사하는가/ 어떻게 기능하는가./ 재생산되는가 등에 대한 논의를 활발발하게 열어가야 한다.

○ 불교 시민사회운동은 변화하고 있다. 종단 적폐를 청산하고 청정종단을 구현하자는 2018년 운동 에서 눈에 띄는 변화라면, 재가만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스스로 자정 못하는 승단에게 희망을 두어야겠느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게 지지를 받고 있다. 더재미있는 것은, 일상적으로 시민사회진영이라기 보다는 신행조직으로 분류되던 부분들이 투쟁대열에 동참하면서 보다 더 과격한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 하지만 조계종단을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조계종단에 승적을 가진 승려들과 연대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계종의 미래가 한국불교의 미래라는 명제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조계종에 아무리 실망했다고 하여도, 출가제도와 승려교육, 역사와 문화를 계승 담지하는 조계종의 역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불교 종단이 수백 개를 헤아려도 조계종을 빼고 나면 한국불교는 거의 남지 않는다. 조계종의 그늘 안에만 있으면 보이지 않으나 조계종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오히려 조계종의 소중함이 보인다.

○ 한국불교의 역동성, 이웃종교, 시민사회와 갈등없이 융합하는 넓은 포용성은 불교 개혁운동이 종교개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남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1700년 한국불교의 문화유산은 온국민의 것이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 안에서 불교전통의 계승, 유지, 보존자는 누구이며 누가 창조적 파괴와 재구성을 담당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할 때다.

○ 붇다의 가르침 안에 모든 답이 있다는 착각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유전자조작, 낙태 등 생명윤 리만이 아니라 당장 실생활에서 MSG(글루탐산나트륨)를 먹어도 되는지,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입장은, 핵에너지에 대한 입장은 어떠한 것인지 불교 지식인사회의 담론조차 아직 맹아상태다. 현대의 생활 속에 부딪치는 작은 제 문제들이 오히려 더 현실적 문제다. 이들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지성의 여행을 불교 지식인사회가 열어야 한다.

○ 어쩌면 대웅전 의례공간과 승려들의 생활공간인 요사가 함께 있는 사찰이라는 형식이 혁신되어야할 때가 아닌가? 사찰 없이도 신행이 가능한 신행모델을 불자들은 개발하여야 하고, 절 없이 생활 가능한 승려들의 생존방식이 고민되어야 한다. 그 안에서 미래불교의 생존 방향이 나온다. 총무원 권력구조, 총무원장 선출방식 등의 거대 담론 이전에 이러한 미시적 담론의 활성화를 기대해본다.

발표3

바람직한 종헌 종법 개정 방안에 관하여
김형남(참여불교재가연대 공동대표)

Ⅰ. 94년 개혁종단이라는 조계종의 현실의 모습을 본다.

2600년 전 위대한 스승 붓다가 만든 승가에는 전체 대중이 모여 의사결정하고 공양물을 균등하게 분배받고 객승은 방사와 필수품을 분배받고 교육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승가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지금의 조계종단의 승가는 한마디로 “각자도생”으로, 수행자들은 노후에 자신이 살 수 있는 토굴을 짓는데 일생을 허비하며, 자신이 부담해야 할 기본 필수품을 사기 위한 돈을 만들기 위해, 한계절 선방에서 시간을 보내며 해제비를 받아야 한다.

이미 공찰은 몇몇 권승들에 의해 사유화 되었고, 승려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지 자리에 목을 매고 있고, 선거 때 돈을 받고 본사 주지나 종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승려생활을 아무리 오래하더라도 승단이 승려를 위해 머물 수 있는 수행공간 하나 제공하지 않는 현실에서 선거 때 받는 목돈이 부의 재분배라고 생각하고 돈을 주고받아도 누구하나 징계 받지 않는다.

사찰의 수입이 해외 여행경비나 실내골프장 시설, 심지어 도박자금 쓰였다는 보도가 나와도 아무도 질책하지 않고,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유지한다.

이렇듯 일부승려들이 종단과 사찰의 수입을 독차지하여 대다수 스님들은 각자도생하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수처작주는 정신세계에서나 통하는 것이고 어느 사찰을 방문해도 숙식을 제공받지 못하고 스님들이 자비를 들여 여관에서 자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이 현실이다.

신도들은 사찰이나 종단에서 아무런 권한도 없고 심지어 신도들을 포교할 포교원까지 신도들이 참여 하지 못하고 권력승들이 돌아가며 앉는 자리가 되었으며, 신도들이 무참히 떨어져나간 상황에도 징계받는 이도 없고, 여전히 그 책임자들은 큰 스님으로 대접받고 있다.

신도들에 대한 이러한 혹독한 대접이 스님들이라고 해서 결코 다르지 않다. 다수의 스님들은 사업주인 주지스님의 눈치를 보면서 목탁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고, 권력이 된 주지는 부전스님들을 종업원처럼 부리며 돈벌이에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주지라 할지라도 본사주지의 눈치를 보고 본사주지는 중앙권력의 눈치를 보며, 눈치의 눈치가 연속되어 스님들은 결국 줄서기의 꼭대기에 있는 몇몇 권승들에 의해 통제받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공부나 깨달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정치승들은 어울리지도 않게 수십 명의 상좌를 두어 본사를 지배 하고자 하고, 현재와 같이 공부를 점검받을 길 없는 종단의 구성원이 된 스님들은 자랑스럽게 정치승의 상좌를 자처하여 줄서기를 생활화하기 시작한다.

목소리 큰 제자들과 돈이 많은 제자들을 많이 둔 노스님은 그 이력과 도덕성이 어찌하든, 선거를 통해 방장이 되며, 다시 주지추천권을 행사하여 그 권력을 재생산 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위계 질서에 짓눌려 스님들조차도 사찰운영에 아무런 목소리를 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94년 개혁 종단이 다다른 권력과 돈이 주인이고 일반 스님과 신도들은 객에 불과한 전도몽상의 종단이다. 이렇듯 진작 드러난 종단의 모순을 고치고자 하는 움직임조차 없었던 것이 현실의 스님과 재가자들의 모습이었다.

조계종의 핵심이라는 선방은 어떠한가? 수행은 관계에 대한 통찰과 소통을 통하여 사물을 바로 보고, 교단을 진리를 구현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데,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건강한 정신문화를 만들기 는커녕 교단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주지의 통제 하에 방안에서 채워야 할 시간동안 갇혀 참선을 하는 곳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선방이 종교적 통찰력을 주는 곳이 아니라, 인내력을 발휘하는 곳이나, 개인적 명상훈련을 하는 곳으로 전락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공부를 누가 점검하고 공부의 발전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서로간의 소통을 통해 공부의 발전을 도모하고는 있는 가? 그러한 일이 상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 정신적 에너지가 벌써 종단을 바꾸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조계종의 정신을 움직여야할 선방 수좌들조차 권력승들에게 교단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많다는 허울을 씌워주는 수행노동자로의 삶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Ⅱ. 권력기구의 해체를 통한 94년 개혁종단 체재의 변혁이 필요 하다.

흔히 94년 개혁종단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자승총무원장 시절에 94년 개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도법스님, 현응스님, 지홍스님을 중용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혁적인 인사가 존재한다는 착시효과를 줄 뿐, 그 분들은 전혀 개혁적인 일을 시도한 적조차 없다. 94년 개혁종단 체재 자체가 커다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고, 현재의 막장을 만드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하고 있다.현재 화두로 닥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선거를 없애고 신망받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문제, 재정투명성과 승려복지, 정치행위 근절과 권력해체, 사부대중의 평등한 종단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개혁과제가 등장하게 된 배경은 94년 개혁종단이 형성한 권력구조의 문제점에서 비롯된다.

94년 개혁이 가장 큰 성과가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과 교육원과 포교원을 별원으로 독립시키고, 비구계 수계와 연결된 4년의 교육과정을 확립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교구 산중 총회에서 주지를 선출하고, 본사주지에게 말사주지 추천권을 주는 교구자치제를 확립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94 년 개혁세력의 가장 큰 착각이 존재한다.

세속의 권력기구 구성원리를 따라서 만든 순차적인 권력기구 형성이라는 종단의 구성과 선거제도, 주지 중심적인 사찰운영이 합쳐져 종단을 완전히 세속화로 물들여 버렸다. 발전한 매스미디어를 타고 자본주의 경쟁논리가 사회전반을 생존경쟁의 장으로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직업적 정치승 집단을 만들 었고, 권력놀음이 종단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세속의 권력투쟁 모습이 너무도 당연히 총무원과 중앙

종회를 중심으로 사판승의 세계를 지배하고, 승려교육은 단지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직업적 승려를 만들어내는 공장이 되었고, 말로만 중요하다고 하지 전혀 투자도 없이 관심 밖으로 멀어진 간화선 공부는 체계적으로 점검해주는 이 없고 점검받고자 하는 이도 없으며, 포교원의 간부는 일부 비구승려가 독점 하고 신도들에게 군림하고 지시를 내리는 곳이 되었다.

포교원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신도조직이 얼마나 될 까? 중앙신도회는 신도들의 대표조직인가? 신도 들은 포교원에 의해 조직화된 신도들을 보고 신심을 느껴 종단 일에 참여하고자 할까? 다른 종교인들이 포교원의 체계적 관리를 보면서 과연 부러워할까?

교육원은 매 시기 스님들의 교육목표를 세우고 그 달성을 점검하고 있을까? 스님들은 매 시기 결재를 들어가며 자신의 공부목표를 세우고 이를 점검해주는 사람은 있을까?

사실 종단의 정치승 누구도 종단이 존재하는 이유인 근본과제에는 관심이 없다. 300만 신도가 떨어져 나간(사실 더 많은 신도가 떨어져 나갔음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시스템을 점검하고자 하는 노력도 없다.

권력놀음과 권력에 의한 스님들의 지배, 신도들의 소외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종단이 권력을 가진 일부 비구승의 편안한 놀이터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 내부 개혁의 움직임조차 없는 이 현상을 타개할 제도적 방안은 무엇인가? 비구계 등 계율은 말할 것도 없이, 종헌 종법을 어겨도 권력을 가지고 판관까지 하는 그들을 아무도 제재하지 않으며, 종헌 종법 질서를 주장한다. 파당을 지어 자기 편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여도, 오히려 그것이 종헌 종법 질서라고 주장한다.

불교가 아닌 것을 불교로 바꾸는 것은 권력기구의 해체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94년 개혁 종단이 구성자들이 종단을 권력기구로 착각한데서 이 모든 비극은 출발하고, 결국 94년 개혁의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불과 5,000~6000명의 비구 스님들 사이에서 균형감각과 공심을 갖고 정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얼마간의 공심이 있던 스님들도 총무원과 중앙종회에 들어온 순간 불과 몇 개월 만에 권력의 노예가 되고, 파 화합의 반불교적 행위를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행한다. 승려 본래의 목적을 가진 스님들이 총무원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서, 중앙종단과 별개의 불교가 돌아가지는 않는다.

중앙의 지배구조 하에 예속된 존재로서 결국 반불교적인 교단을 만드는데 모두 일조하게 된다. 권력기 구의 해체 어떻게 종헌 종법에 담을 것인가.

Ⅲ. 권력승 양성소인 중앙종회를 해체하라.

종단은 승려와 신도들에 대한 봉사기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중앙종회 각 계파의 싸움과 협잡을 통해, 승려와 신도들에 군림하는 지배자를 만들고, 중앙종회 구성원 그 자체가 승자독식의 승자로 군림 한다. 지금 중앙종회를 해체하자고 하면 일부스님들의 신분상승의 꿈을 빼앗아버리는 것으로 여기고 격렬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다. 종단이 대소사는 고민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현실에 서는 아무 하는 일없이 권력 나누는 일에만 여념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좋은 곳이면, 중앙종회의원을 하면 식견이 넓혀지고, 품성이 좋아지고, 종도들에게 꿈과 희망의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물들이 탄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가서 종단의 권력 다툼 조금 경험한 것으로 불교의 모든 것을 안 것처럼 행동하며, 사회관료들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온 갖가지 모든 일에 참견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승상에 사로잡힌 표본이 되어간다. 깨달음과 중생에 대한 붕사라는 본래의 목표를 잃어버린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거듭하고 있는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정신적으로 불안해 하는 인간들을 양성하는 곳이 되었다.

권력놀음의 중심 중앙종회를 해체한다고 해서 종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중앙종회를 상하원으로 운용하되 하원은 각 교구본사별로 추첨으로 선출된 스님들과 재가 전문가들이 모여 종단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공론을 형성하는 장 정도면 족하다. 스님들에게 종단이 공적관심사를 상기시키고, 세상이 요구하는 바를 알고, 오히려 스님들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시켜야 할 것이다.

상원은 원로회의에서 선출한 원로스님들과 인격적으로 인정받은 재가 지도자가 모여 하원에서 올라온 공론을 점검해서 대중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로 운용하면 적당할 것이다.

각종의 인사는 불교인재원을 만들어 선원, 율원, 강원, 능력과 청렴함을 인정받은 사판승, 역시 능력과 인격을 인정받은 재가자들의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고, 불교인재 추천위원회를 만들어 총무원에 추천 하여 인사가 이루어지도록 할 일이다.

Ⅳ. 총무원장은 직선제로 선출하고 불교인재원을 설립하며, 중앙 종단은 봉사기관의 역할에 충실하라.

총무원장은 당분간은 스님 전부와 재가자 대표에 의한 직선제가 실시되어야 한다.재가 대표단의 선출방법에 대해 조속한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일단은 스님들에 의한 직선제가 실시되어야 할 거이다. 수많은 개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폭넓은 지지가 필요하고, 소외된 많은 스님들의 종단참여의 전기 역시 필요하다.

돈선거 문제는 한 두 번 정도 사회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선거를 하면, 내부 분쟁과 혼란없이 사회기관에서 해결해주고, 종도들은 좀 더 나은 총무원장을 뽑는데만 집중하면 될 것이다. 대중들에 의해 뽑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의사를 누구보다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직할 교구 주지를 포함하여 총무원의 교역직 종무원들을 불교인재원의 추천을 존중하며 임명하도록 하여, 총무원장은 좀더 봉사적 역할과 종단 전체의 운영방안 및 대외적 관계에 충실하도록 하여야 한다.

포교원 간부로 재가자들을 대폭 등용하며, 교육원은 교육봉사원으로 변모시켜 스님들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 일정기간 봉사활동을 반드시 포함시키도록 하고, 매시기별 교육목표를 분명히 하여 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Ⅴ. 은상좌제도를 전면 재검토하고, 공동책임을 지는 본사의 자치 권을 강화하며 징계권한을 갖도록 한다.

사판승들이 둘 수 있는 상좌의 수를 제한하여, 공부를 점검할 수 없는 은사가 생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상좌들의 행위에 대하여는 공동으로 참회하도록 하고, 상좌들의 공직임명에 대한 동의 권을 부여하여, 공동책임 전통을 확립하도록 한다. 은상좌제도와 문중을 통해 사자상승의 전통이 권력으로 발전하는 지금의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본사는 총림으로 구성하고 본사 주지와 방장은 임회에서 선출하도록 하며, 임회에서 말사주지 추천까지 이루어지도록 하며, 율원을 반드시 구성하도록 하여 징계기관을 둘 수 있도록 한다.

본사 주지 및 본사 재무국과 호법국 구성원들 역시 본사 구성원의 비위행위에 대한 적발과 처벌에 있어서 직무유기가 있었다면, 이 역시 공동책임으로 처벌받도록 하여야 한다.

Ⅵ. 종단의 자정기능확보가 종단개혁의 시금석이다.

현재 드러나고 있는 문제점에 관하여는 무엇보다 종단의 호법기능과 감사기능을 강화시키면서 해결 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종단의 호법기능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문제점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평등한 적용이 되고 있는가와 과연 권력승들의 범계행위에 대하여 아무런 제어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1차적 징계는 대중공사가 가능한 본사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사 징계에 관하여 이의가 있는 승려나 본사 호법국이 중앙 호계원에 상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본사에서는 지방 방검찰역할을 하여 본사 징계심판원과 호계원에 갈마의 기초자료를 제공해주는 단사인(斷事人)을 두어야 할 것이다. 중앙 호법부는 독자적 규율관리권을 갖고 본사와는 별개로 호법부 독자 사건에 관하여 호계원에 징계심판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고위직 승려에 대해서는 호법부의 기소독점권을 적절히 제어하기 위하여 일정직위 이상 스님들의 일정한 범계행위에 관련하여서는 기소를 할 수 있는 합의제 대배심(大陪審)제도를 두어야 한다.

소위 현 정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또한 일부 승려들의 사익을 위한 행위에 징계제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재가자들이 호계원에 기소할 수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호법부와 호계원에서 적용되는 양형규정을 두는 방안, 호계위원의 인원수를 대폭적으로 늘려 정실에 따른 징계를 배제시키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계파정치의 폐단을 끝내기 위하여 이와 관련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새로운 계파가 생기는 것을 엄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종단의 감사기능을 강화시켜 사찰의 실정을 잘아는 재가자들을 교육훈련하여 감사요원을 대폭확보하고, 각 사찰로 하여금 감사에 적합한 장부작성을 법정화시키며, 시주 금의 사용목적(포교목적, 사회사업목적, 사찰운영비목적, 불사목적)을 장부에 정확하게 기재하여 수입으로 잡고 전용을 금지시키며, 사찰주지 개인에 대한 시주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사찰재정을 공개토록하여 공개된 재정과 실제 재정이 일치하지 아니한 경우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Ⅶ. 승가와 재가의 협업에 의한 사찰재정 투명성 확보 방안에 대하여

현재, 종단에서 만든 사찰운영위원회법은 현재 신도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교육이 행해지지 아니하 고, 사찰의 목적을 이해하고 사찰운영의 주체로써 참여하여야겠다는 신도들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는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고 실제로도 작동하지 않는다. 또한 주지가 위촉과 해촉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어 사부대중의 공의를 통한 사찰운영의 취지와 맞지 아니한다.

현재 예결산 상 연 3,000만원 이상의 사찰에 대하여는 사찰운영위원회를 반드시 구성토록 하고 있고, 이를 구성하지 않으면 징계에 처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상태이나(이 규정이 적용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다), 주지가 임의로 사찰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현재 신도회가 구성되어 있는 사찰을 중심으로 법을 먼저 적용하고, 신도운영위원을 신도들 스스로 임명하도록 하며, 신도운영위원들이 2분의 1 이상 구성되도록 하며, 신도운영위원들에게 회계장 부열람권을 인정하여 실제적인 사찰참여가 가능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고, 종단의 교육과정을 통해 신도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교육을 받은 신도 몇 명 이상이 운영 위원회 구성을 요구하였을 경우 반드시 운영위원회를 구성토록하여 신도들의 자발성을 전제로 운영위 원회를 구성토록 하여야 한다. 사찰예산회계법은 사찰운영의 투명화, 주지스님의 횡령과 전횡의 사전 방지, 주지스님의 권한에 대한 재정책임자의 견제 등에 목적이 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자를 징계하기 위한 것 외에는 현실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정공개만큼 효율적인 방안이 없을 것이고, 주지와 재정 책임자를 분리하여 재정책임자의 결제없이 어떠한 지출도 불가능하게 하고 그 재정책임자가 재정운영에 관하여 책임을 지게 하여야 하는데, 현 사찰예산회계법에서 재정책임자를 주지로 하고 경리회계담당 자를 일반 종무원의 지위에서 재정집행의 책임자로 격상시키지 아니하고 있는 규정들을 전면적으로 손질해야 한다.

재정책임자를 두는 한편, 재정책임자를 둘 형편이 안 되는 사찰이라 할지라도, 시주목적의 전용금지,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장부의 배치, 재정의 교구홈페이지를 통한 공개, 일정액 이상은 개인시주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등의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투명성을 견지하여야 할 것이다.

Ⅷ. 승려복지문제와 관련하여

기초 수행비 지급과 무상교육, 거소마련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가 단번에 실현될 수 있을지, 단계적 으로 실시해야 될지는 현재 사찰재정공개가 안되고, 문화재관람료의 수입과 지출 내역이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재가자들을 모아놓고 스님들을 위해 매월 1만원씩의 기초수행비 지급을 위해 보시할 생각이 있냐고 한다면, 동의하지 않을 재가자들은 없을 것이다. 재정공개와 특별분담사찰의 지정 및 그 분담액 수의 책정, 그리고 공동의 승가복지를 위한 보시를 지금 당장 시작한다면, 적어도 5년 이내에는 전면적 실시가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발표4

한국 불교의 미래와 계율정신의 회복
박병기(직선제 대중공사 재가위원장)

Ⅰ. 머리말

미래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차별화되는 연속성과 차별성을 지닌다.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만을 감각적 느낌을 위한 만들어진 개념으로 인지하는 불교의 시간관은 우선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련성을 강조한다. 오늘은 어제의 산물이고, 내일은 오늘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그 안에서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하는 우리 존재자들은 업(業)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그 흐름에 몸과 마음을 내맡기는 ‘가상적’ 행위 주체들일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 인간들은 그 흐름을 볼 수 있는 깨달음의 역량을 갖추고 있는 존재자들이기도 하다. 그 흐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어리석음을 직시함으로써 우리는 그 질긴 업장을 소멸시키고 이전과는 질적으로 차별화되는 삶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깨달음의 길이 고, 그 과정이 수행의 길이다.

‘21세기 초반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명제는 당연히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다. 우선 ‘21세기

초반 한국불교’라는 개념 정의부터 따져볼 수 있다. 이 개념은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될 수 있고 나아가 그 현재성에 주목하는 개념이지만, ‘한국불교’라는 개념의 내포와 외연은 모두 시비의 대상일 수 있다. 그것이 과연 구체적인 한국불교계, 즉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상징되는 현재 우리의 불교계를 지칭하는 개념인지, 아니면 ‘종교로서의 불교’라는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어떤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인지를 물을 수 있다.

후자는 주로 종교학자들과 종교사회학자 등의 관심사 속에서 등장하고, 그렇게 등장하는 한국불교는 한국인들의 정신적·물질적 삶의 영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고 또 미칠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기초 개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논의의 흐름과는 일정하게 차별화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한국불교는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구체적인 불교공동체를 전제로 한다. 대승불교의 전통 위에 서 있는이 불교는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의 사부대중을 주인공으로 삼아 현재에 이르고 있는 문화전통이자, 가톨릭, 개신교와 함께 현재 한국인들의 종교생활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제도종교이다.

이런 의미의 한국불교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많은 증거들이 제시되어 있다. 본래적 의미의 종교를 생각하면 차마 떠올릴 수조차 없는 비리와 추문들이 널리 알려져 있고, 저들이 왜 존재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태로우면서도 애처로운 초상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국 불교의 미래를 말할 수 있을까? 그 미래가 과거및 현재와의 연계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불교의 관점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해서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업(業)의 흐름을 직시함으로써 미래를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미래에 희망을 담을 수도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Ⅱ. 20세기 한국불교의 굴곡과 극복 과제: 왜색불교와 계율정신의 실종

우리 한국인에게 20세기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굴욕과 저항으로 다가왔다. 을사늑약과 의병운동, 강제 합방과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으로 이어진 20세기 초반부는 양반 지배층의 도덕성과 정치적 역량에 기대 보다 많은 사람을 위하는 위민(爲民)이라는 조선의 이상이 지니는 시대적 한계와 도전 속에서 맞은 것이기도 했다.

우리 불교는 그 상황 속에서 이중적인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일제 식민지주의자들의 억압과 지배라는 일반적인 도전이고, 다른 하나는 천민으로 전락했던 승려 신분의 회복과 물질적 기반 구축 기회라는 특수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상반된 도전 속에서 당시 승려들은 대체로 후자의 흐름에 동참함으 로써 상당한 지위와 권력, 자본까지 획득하는 길을 걷는다. 이른바 친일불교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도전 속에서 전자에 주목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불교의 종교성을 회복하는 두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하는 귀한 시도들이 있었다. 3.1운동 민족지도자로 참여한 만해와 용성이 그 시도들을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은 각각 종단의 중심과 주변에서 다른 방식으로 저항하면서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지켜내고자 노력했고, 일정한 성공과 좌절을 동시에 맛보아야 했다.

성공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3.1운동과 독립 운동 자체이고, 좌절로는 급속한 왜색불교화와 계율의 쇠퇴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성공과 좌절은 광복 이후 우리 불교의 상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는 업으로 작동했고, 그에 따른 보(報)는 21세기 초반인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왜색불교는 대처승단의 주도권 확보와 노골적인 친일로 이어졌고, 광복 이후의 상황 속에서는 대통령 유시에 기반한 타율적인 ‘정화’의 굴곡으로 이어졌다. 1962년 출범한 대한불교조계종은 외형적으로 왜색불교의 잔재인 대처승단을 비판하면서 ‘청정 비구, 비구니 승단’이자 ‘우바새, 우바이’가 주요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사부대중공 동체의 지향을 내세웠지만, 승단의 핵심 기반인 계율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지속적인 위기 상황을 노정시켜야만 했다.

조계종단 핵심 지도층의 은처자 의혹은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오계(五戒) 중 하나인 불사음계(不邪淫 戒)를 위반하는 것이어서 종단 자체의 존립 기반을 스스로 허물어뜨리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 고, 불행히도 이 충격이 누적되면서 승단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무감각과 면역 현상 마저 만연해 있다. 최근의 총무원장 스님들이 거의 모두 이런 은처자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우리에게 20세기 초반 식민지 경험은 전통 신분제 사회의 자율적인 극복의 과정 상실과 힘 있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빌붙음으로써 생존은 물론 상당한 정도의 지위와 권력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는 식민지 마름의 현실인식을 사회정의로 포장하게 만드는, 소피스트적 파국의 결과를 낳았다. 다시 말해서 지주에게 붙어 소작인을 착취하는데 앞장섬으로써 자신의 생존 기반과 알량한 권력을 보장받고자 했던 부정적인 의미의 마름의식이 전 국민에게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이 마름의식은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숭배의 대상을 미국으로 바꾸는 친미적 성향의 고착화로 이어졌고, 현재까지도 특히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이른바 ‘기지촌 지식인’의 이중적 삶을 일상화하게 하는 불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불교계 안에서도 당연히 재생되고 있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모두의 깨달음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처한 상황에 따른 차별화 가능성 또한 수용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은 현재 조계종 종헌에도 명료하게 제시되어 있다

“조계종단은 조선시대 500년의 불교 탄압에도 꺾이지 않고 실낱같이 불조의 혜명을

이어오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와 이사무애(理事無?)를 드높이며, 대승불교의 부처를 이루고 중생을 제도하는 보살행을 실천하여 온 것이다.”(조계종 종헌 전문 중에서, 대한 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계율과 불교윤리』, 조계종출판사, 2011, 250쪽)

“이와 같이 보살이 배워야 할 세 가지 계장에 대해 부지런히 닦아 배우려 하는 이는, 재가자이거나 출가자이거나 간에 먼저 위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의 큰 서원을 세운 뒤에 법을 같이 하는 보살로서, 이미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를 찾아 구해야 한다.”(『유가론』 「보살지」 중에서, 여기서는 원영 편저, 『대승계의 세계』, 조계종출판사, 2012, 291쪽에서 재인용)

보살계의 기반은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의 공존과 자율성이다. 다만 수행의 과정에서 처할 수 있는 상황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보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재가보살이요 둘째는 출가보살이다. 재가자 에게는 여섯 가지 무거운 법이 있고 출가자에게는 여덟 가지 무거운 법이 있다. 이 법들 가운데 보살이 어느 하나 또는 모두를 범하면, 현재에 한량없는 무상보리를 장엄할수 없고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없다. 이는 이름만 보살이지 진정한 보살이 아니다. 당

연히 사문이라 부를 수 없고 바라문도 아니어서 최상의 지혜에 바르게 나아갈 수 없

다.”(『보살선계경』 「우바라문보살수계법」 중에서, 원영 편저, 위의 책, 370쪽에서 재인용)

두 보살 사이의 차이는 계율의 양적인 차이이지 질적인 차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색불교의 그림자는 그러한 양적인 차이를 질적인 차이로 상정하게 하여 승가에 대한 재가의 수직적인 복종과 타율성을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 스님, 우리 스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어떤 추문에도 흔들 리지 않는 재가보살의 굴종적인 신앙이 그 어두운 그림자의 일단이다. 『유가론』에서 말하는 ‘큰 서원을 세워 지혜도 있고 힘도 있고 말로 표현하는 뜻도 있어 깨칠 수 있는 이’는 당연히 출가보살로 한정 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인정하고 또 존중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수의 중계(重戒)를 기꺼이 수지하 면서 수행과 깨달음의 과정에서 수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출가보살과 승가공동체일 뿐이다. 20세기 초반 한국불교에 정착한 왜색불교의 짙은 그림자는 바로 그 계율정신의 마비와 왜곡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것은 곧 한국불교 자체의 왜곡이자 타락이며 소멸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Ⅲ. 계율정신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현재의 계율정신 실종 현상을 직시하면서 회복 방안을 적극적으로 마련 함으로써만 희망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제다.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모두에게 계율은 곧 일상의 삶이자 몸의 움직임을 이끄는 준거이기 때문에 계율정신의 회복은 자신의 일상과 몸의 변화와 회복을 수반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은 습관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돌아보면 계율정신의 회복은 쉽게 설정하기 어려운 지난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런 어려움의 현실화가 현재와 같은 타락과 그 타락에 대한 변명과 무감각의 일상화임을 생각해보면, 이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부정할 길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출가보살만의 범계를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는 당연한 전제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수행에 전념하고자 출가를 감행한 출가보살들이 그 수행에 더 적합한 환경을 지니고 있다는 석가모니 붓다의 전제는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상당한 정도의 변화와 마주하고 있다. 우선 세속과의 연결망이 인터넷에 의해 혁명적으로 확충되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돈을 직접 만질 수 있게 된 우리의 출가보 살들은 그 돈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자유의 과잉’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박과 성매매, 이른바 명품의 일상적인 소비 등이 그런 과잉에 노출된 결과물들이다.

재가보살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불교도, 또는 재가보살이라고 스스로 칭할 수있으려면 당연히 보살계를 받아서 지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 재가보살 중에서 이러한 최소한의 계율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답을 주기 어렵다. 그렇 다면 이번 위기를 계기로 우리의 계율을 다시 보면서 그 정신의 회복을 꾀하고자 하는 노력이 재가와 출가 모두에게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출발점도 재가보살이 먼저 나서서 마련함으로써 출가보살에게 모범을 보이고 또 변화를 촉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전제 속에서 계율정신의 회복을 위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 중 몇 가지를 제시함으로써 발제자로서의 역할을 대신해 보고자 한다.

가. 초기계율과 보살계 전통의 통합과 재구성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 불교는 초기계율에 속하는 <사분율>과 보살계를 모두 받아들여 수지하는 계율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러다보니 출가보살이 너무 많은 계율에 노출되는 결과가 나타나고 있고, 자신이 수지하겠 다고 받아들인 계율이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과 직면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승가공동체의 적극적인 인식과 대응이 필요하다. 사분율의 비구계와 비구니계는 당연히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의 몫이다. 스스로 나서서 현 시대상황과의 부합성이나 미래지향성 등을 감안하여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지를 고려하고 실천하는 몫도 당연히 출가보살들의 몫이다. 한국불교계에서 율사들의 목소리가더 커져야 하지만, 그 크기가 단순한 계율의 강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석과 재구성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 바탕 위에서 보살계 전통을 재해석하고, 꼭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 것만을 중심 으로 계율의 항목을 최소화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켜가는 방향으로의 재구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 금지의 도덕과 권유의 윤리를 구분해야 한다.

계율을 포함한 모든 도덕규범에는 해서는 안 되는 금지의 도덕과 더 나은 목표를 위한 마음가짐과 실천을 권유하는 권유의 윤리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불교계율에서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은 당연히 오계(五戒)이다. ‘살인하지 말라’거나 ‘거짓말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을 하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등의 다섯 가지 계율은 출가와 재가를 통틀어 모두 지켜야 하는 금지의 도덕이 다. 그것은 다시 법적인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법적 차원의 금지와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도덕적 차원의 금지로 나뉜다. 거짓말과 술, 음행에 관련된 계율이 주로 후자에 속하고, 살인과 도둑질에 해당하는 계율이 전자에 속한다.

이러한 금지의 도덕과 함께 보살계에는 권유의 윤리에 속하는 계율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승계의 체계적인 완성으로 평가받기도 하는 삼취정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시민이면서 동시에 사부대중공동체의 구성원인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시민윤리와 수행공동체의 계율을 조화시키고자 노력 해야 한다는 차원의 율의계(律儀戒)와, 몸과 입, 뜻으로 지어가는 모든 악업을 경계하면서 선함을 쌓아 가는 섭선법계(攝善法戒),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는 자리이타행을 지향하는 요익중생계(饒益衆 生戒)가 그 셋이다.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긴 경우에는 엄격하고 엄정한 처벌이 따라야 한다. 출가보살에게는 승단추방과 같은 조치를 즉각적으로 취해야 하고, 재가보살에게도 재가공동체로부터의 소외와 추방이라는 처벌이 가해져야 한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처벌 자체가 유명무실해짐으로써, 금지의 도덕에 속하는 계율을 어기고서도 상응하는 처벌은커녕 양심의 가책조자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듯한 모습이 자주 노출되고 있다.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하는 부정적인 계율문화이고, 그런 점에서 최근에 재가공동체 중 하나인 정의평화불교연대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불음주계를 철저히 준수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진 일은 주목받을 만한 현상이다.

다. 재구성된 계율을 기반으로 시민사회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현재 우리 불교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는 한국 시민사회의 구성원이자 대한민국 국민이다. 시민사회 안에서 종교 또는 종교공동체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단 하나의 해답은 있을 수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된다. 각각의 시민사회가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조차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이제 더 이상 특정 종교공동체가 국가나 시민사회로부터 고립된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불교계는 그동안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국가의 법에 호소하거나 종교의 자율성을 번갈아 내세 우는, 일관성 없는 모습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와 그 자유를 적극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종교의 상대적인 자율성은 당연히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그 자유와 자율은 당연히 시민사회가 제도종교에 기대하는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을 전제로 성립될수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는 제도종교에 자신의 구성원인 시민들의 정신적 안정과 삶의 의미 물음에 대한 적극적인 해답 제시, 시민공동체 자체의 정신적 지향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 등을 기대한다. 그런 기대에 최소한 으로 부응하기 위해서는 제도종교가 당연히 도덕성과 청정성의 기반 위에 서 있어야만 하고, 더 적극적인 영역에서는 사회의 구조적인 부정의에 저항하면서 각 종교의 지향에 부응하는 사회정의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특히 가톨릭의 경우 일정 시기 동안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을 해냄으로써 현재까지도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를 받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적극적인 목소리와 실천은 자신의 종교내의 종교적 청정성과 도덕적 정당성 기반이 확보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시민사회 속으로의 확산이 가능해진다. 최근 언론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개신교와 가톨릭, 불교계 모두의 추악한 모습들은 그런 청정성과 정당성이 종교계 내부에 확보 되어 있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의구심을 불러내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특히 조계종단으로 상징되는 불교계의 경우는 한국 가톨릭과 함께 비교적 단일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비리와 그 은폐에 취약할 수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대응은 당연히 종교계 구성원 개인을 문제 삼는 개인윤리에서 벗어나 사회윤리의 차원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과 종교는 당연히 다르다. 그런 점에서 종교의 계율과 시민사회의 도덕은 일정한 차별성을 지닌 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금지의 도덕 차원에서는 그 차별성이 오히려 종교계율의 더 엄격한 적용과 처벌로 구체화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이러한 최소의 금지도덕에 대한 의식마저 희미해져가고 있다. 계율의 적극적인 해석과 재구성을 전제로 이 지점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시민사회와의 바람직한 관계설정도 가능해질 수 있고 또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 발표집-불교개혁.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