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드는 법

화두 드는 법

마음을 돌이킴(轉心)에는 무한 공덕이 있다

탐행자(貪行者)에게 선(善)이 일어날 때에는 믿음(信)이 강력해진다. 믿음은 탐욕과 가까운 덕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탐욕은 불선(不善)의 측면에서 풍부하고, 조잡하거나 거칠지 않은 것처럼, 믿음은 선(善)의 측면에서 풍부하고, 조잡하거나 거칠지 않다.

―《청정도론(淸淨道論)》―

인간의 여섯가지 유형

탐행자(貪行者)→신행자(信行者)

진행자(瞋行者)→각행자(覺行者)

치행자(癡行者)→심행자(尋行者)

탐(貪)·진(瞋)·치(癡) 세 가지 모두가 근본번뇌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서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된 속성이다. 욕계(慾界)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 이상, 탐욕은 근본적인 생명의 구성원리이며, 이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유발되는 성냄과, 중생으로서의 어리석음은 인간 모두가 예외 없이 갖추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 인간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을 특징 지워 탐행자·진행자·치행자 등으로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각각 대비시켜 신행자·각행자·심행자를 설정해 놓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즉 탐행자와 상대시켜 신행자를, 진행자와 대비하여 각행자를, 치행자와 대비하여 신행자를 설정하고 있는 점은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탐욕과 믿음, 성냄과 지혜, 어리석음과 사색 등이 동근이상(同根異相)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탐행자의 특징인 욕심을 완전히 부정하여 억제코자 하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그 욕심을 인정하되 노력의 방향을 바꾸어 도심(道心)으로 인도케 하자는 것이다. 즉 탐행자가 성욕·식욕 등의 기본적 욕심을, 붓다를 보고자 하는 욕심, 불법을 얻고자 하는 욕심, 계(戒) 등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 등으로 전향시켜 신행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정(有情)을 회피하고 부실한 과실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진행자도, 그 성냄의 대상을 전환하여 일체의 유위법을 회피하고 실한 과실을 참지 못하는 각행자로 돌릴 수가 있다. 또한 일체의 선한 법이 아직 생기지 않아 혼란하고 통찰이 없어서 동요하는 치행자는, 오히려 하나하나 장애를 없애나가면서 통찰을 확립해나가는 심행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속성인 탐·진·치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여 이에 역류하고자 인위적 노력을 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힘(끊임없는 향상성)들을 오히려 도(道)를 깨우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코자 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승선(大乘禪)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후대에 선종의 가르침에서 표방하고 있는 ‘번뇌 즉 보리(煩惱卽菩提)’의 기초적 개념이 이미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충실히 정리하여 서술하고 있는 《청정도론》자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돌이킴에는 무한한 공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성향별로 적합한 선정방법(禪定方法)과 수행자세(修行姿勢) 및 수행장소(修行場所):

 
성 향 적합한 선정방법 적합한 수행자세 적합한 수행장소
貪行者 十不淨觀

十隨念 가운데 身至念

걷거나 서있는 것 더럽거나 혐오스런 곳, 동굴·초옥 등
瞋行者 四梵住

十遍 가운데 靑遍·黃遍·亦遍·白遍

눕거나 앉는 것 깨끗하고 쾌적한 곳
癡行者 數息觀 걷는 것 사방이 트인 곳
信行者 十隨念 가운데 佛隨念·法隨念·僧隨念·捨隨念·戒隨念·天隨念 눕거나 앉는 것 깨끗하고 쾌적한 곳
覺行者 死隨念·止息念

食厭觀

界差別

모두 적당 모두 적당
尋行者 數息觀 걷거나 서는 것 은폐된 곳, 동굴이나 은폐된 숲

깨침으로 법칙을 삼는(以悟爲則)다

근년 이래로 총림 가운데에 일종이 있어 삿된 설을 제창하여 종사된 자가 학자에게 일러 가로대, “다만 오로지 고요함만을 지켜라” 하니, 알지 못케라. 지킨다는 것은 이 어떤 사람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이 어떤 물건인고. 도리어 말하기를 고요하다는 것은 이 기본이라 하고 도리어 깨달음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여 이르되, “깨달음은 이 지엽이라”한다.

―《서장(書狀)》―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는 간화선이라고 하는 수행방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요가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의 심신수행 방식과 삼매는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오로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인위적인 의심의 응결과, 이의 타파를 통한 견성체험이라고 하는 방식의 수행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화두참구 방식의 참선을 하다가 벽에 부딪히는 경우, 자칫하면 회의감을 불러일으킬 소지도 있다.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화두를 가지고 끊임없이 씨름해 나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도 않으며 진전도 쉽지 않은 터이므로,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염불선이나 위빠싸나 같이 얼핏 수긍이 가는 방식을 택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심지어는 지금 이 주인공 자리를 믿고 다 놓아 버리면 몽땅 해결되어 지금 그대로 삼매이고 그대로 참선이고, 전부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놈이 뭔고?’ 하고 앉아 있으면 몇천 년 전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반규선사(盤珪禪師)같은 이도 의단(疑團)을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안(公案)은 의단이 없는 사람에게 의단을 짐지워서 불심을 의단으로 변하게 한다고 나무랐다. 말하자면 공안의 공부는 불필요하게 어려운 것을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격이라는 주장이다.

이상과 같은 주장들은 중국 선종에서의 조사선(祖師禪)적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조사선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본각적 신심(本覺的 信心)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미 부처인 것이다. 육조 혜능의 ‘마음땅에 그릇됨만 없다면 자성의 계(戒)요, 마음땅에 혼란 없으면 자성의 정(定)이요, 마음땅에 어리석음 없으면 자성의 혜(慧)’라는 말이나, 마조(馬祖)의 ‘도(道)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더 이상 삿된 생각을 일으키지만 않으면 본래 부처인 것이다. 즉 고요함만을 지키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믿고 앉아 있는 다 해서 곧바로 도(道)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절대로 체험이 필요하다. 또한 정말로 그 경지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검증 절차도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인 진전을 더한 것이 바로 간화선이라 할 수 있다. 상기의 본각적 신심에 입각처를 두고 있으되, 화두참구라는 시각적 의심(始覺的 疑心)을 내는 구체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법은 대혜종고(大慧宗嗋, 1089~1163)가 특히 묵조사선(默照邪禪)을 공격하면서 그 폐단을 벗어나고자 제시한 것이다.

근년 이래로 일종의 삿된 스승이 있어 묵조선을 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열두시간 가운데에 이 일을 관여치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되 소리를 짓지 말라, 금시(今時)에 떨어질까 두렵다” 하니, 왕왕에 사대부가 총명이근에 부린 바 되어 대부분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다가, 자못 삿된 스승들의 고요히 앉아 있으라는 지령을 입고는 도리어 힘 덜음을 보고는 문득 이로써 족함을 삼아 다시 묘한 깨달음[妙悟]을 구하지 않고 다만 묵연함으로써 극칙을 삼나니, 내가 구업을 아끼지 아니하고 힘써 이 폐단을 구하니 지금 조금씩 허물을 아는 이가 있음이라. 원컨대 공은 다만 의정이 부수어지지 아니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행주좌와에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으니 이 한 글자는 문득 이 생사의 의심을 깨뜨리는 칼인 것이다.

―《서장(書狀)》―

깨침은 묵조의 삿된 스승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미친 소리가 아니며, 제이두(第二頭)가 아니고, 방편의 말도 아니고, 접인의 말도 아닌 것이다. 다만 쉬어가고 쉬어가서 고요함에 안주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묘한 깨달음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정이 파하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60)의 《무문관(無門關)》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 그 제1칙인 조주무자(趙州無字)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승(僧)이 조주화상에게 묻되,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화상이 답하되 없다(無) 하였다. 무문(無門)이 가로되, 참선은 꼭 조사관을 뚫는 것이요, 묘한 깨달음은 요컨대 마음의 길을 끊어 다하는 것이라.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을 끊지 못하면 이 모두 풀을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유령과 같은 것이니, 또한 일러라 어떠한 것이 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한 개 무자(無字)가 이 종문의 한 관문이라, 드디어 지목하여 가로되 선종의 무문관이라 한다.―《무문관》―

더 이상 닦을 것도 깨칠 것도 없이 본래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이 조사선의 입장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선의 경지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관문을 통과하지도 않고서 본래 부처라느니, 제할 망상도 없고 진리를 구할 것도 없다느니 하는 것은 고목사선(枯木邪禪)에 불과하다. 따라서 참선을 통해 조사관(祖師觀)을 뚫어야 하며, 묘한 깨침을 통해 마음길이 끊어져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관(祖師觀)이란 다름 아닌 무자공안(無字公案)인 것이다.

화두는 배로 참구(호흡법)한다

3백60 골절과 8만 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쳐 한 개 의심덩어리를 만들어서 이 한 개의 무자(無字)를 참구(參究)하여 의심하되 주야로 공부하여 놓지 마라. 그러나 이 무자를 허무의 무(無)로 알려고도 하지 말며, 유무(有無)의 무로 알려고도 하지 말고, 마치 뜨거운 무쇠덩어리를 목구멍에 삼켜 넘긴 것같이 하여 삼킬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이 하여 종전의 악지악각(惡知惡覺)을 탕진하고 오래오래 무르익게 하여 자연히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면 벙어리가 꿈을 꾼 것처럼 다만 저 스스로만 앎이로다. ―《무문관 無門關》―

‘3백60골절과 8만4천의 털구멍을 한꺼번에 뭉’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혼신을 다해서 화두를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즉 무자(無字)라는 조사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의심덩어리를 지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몸조차 없는 듯 잊은 듯 ‘안팎이 한 조각을 이루어 나가도록’화두삼매에 드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본래 마음에는 일정한 방소(方所)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화두를 어느 한 자리에다 묶어 놓는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위에서 가리키는 바와 같이 온몸으로 간절히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머리로 생각이 집중되어 상기병(上氣病)에 걸리기도 쉽고, 또는 호흡의 부조화상태에 이르러 격심한 가슴의 통증을 수반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 수행에 있어서는 대체로 견성체험을 위해서 의정을 일으킬 것을 중시하며, 이러한 의정은 생사 일대사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화두를 간절히 용을 써서 참구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작용과 시행착오를 덜 수 있는 방법으로서 화두 참구 시에 복식호흡을 병행해 나가는 것이 좋다. 처음부터 복식호흡을 통해서 화두를 들다보면 상기 부작용을 피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상과 혼침도 줄일 수 있다. 즉 급하고 완만함이 그 중간을 얻어서, 상기병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정진도 제대로 하기 위해서 복식호흡을 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두를 드는 것은 간절한 의심을 갖되 ‘머리’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화두를 ‘배꼽 밑에 두고 관하라’고 권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지만, 마음의 시선을 배에 두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아랫배가 볼록하고 홀 쪽 함을 느끼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각이 단전에 가 있게 되고, 생각이 단전에 가 머무는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의심을 내어 ‘이 뭐꼬?’하면 화두가 단전에 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머리로서만’이 뭐꼬 이 뭐꼬?’하면 기(氣)가 상승해 상기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 단전에 무리한 힘을 주게되면 탈장할 우려가 있으니, 호흡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준비호흡과 본 호흡이 있다. 처음에는 준비호흡을 한다. 즉 공기를 가득 들이마셔 잠시 머물렀다 내쉬기를 두 세 번해서 폐 속의 묵은 공기를 완전히 방출한다. 그리고 나서 본 호흡을 한다. 이때는 공기를 조용히 들이마시되 아랫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하고, 조용히 내쉬어 차츰 아랫배가 약간 들어가도록 8부 가량만 숨을 쉰다. 이 때 잠시 호흡을 머물렀다가 내쉬면서 ‘이 뭐꼬?’하는 것이 화두를 배로 참구하는 요령이다.

간혹 내쉬는 숨만 있고 들이마시지를 못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해진다. 그럴 때는 숨을 들이마실 때 아랫배가 홀 쪽 하도록 하고, 내쉴 때 아랫배가 볼록하도록 한다. 즉 위와는 반대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가슴이 답답함이 사라진다. 어쨌든 호흡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숨이 가쁘거나 막히도록 하지 말고 무리가 없도록 자연스럽고 편안케 해야 부작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차츰 요령을 터득하면 매번 숨쉴 때마다 화두를 들 필요가 없고, 화두가 사라지거나 딴 생각이 들어오면 화두를 한 번씩 챙긴다. 이 때 가벼운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고 다만 화두만을 의심하면 된다.

이상과 같이 복식호흡을 하면서 화두를 챙기다 보면 자연히 머리로써 사량분별하지 않게 된다. 마음의 시선이 배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배는 분별치 않는 것이다. 더러 화두를 전방에 놓는다거나 혀끝에 놓는 것이 좋다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화두를 어느 곳에 두는 것이 가장 좋은가는 참구하는 이가 실제로 활용해보고 선택할 일이다.

아무튼 화두는 염하거나 머리로써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하면 될 것이다. 번뇌망상을 배에 맡기고 화두에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처에 무심하면, 차별경계가 스스로 없어지는 것이다. 화두에 모든 것을 맡겨버려 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沒巴鼻 無滋味)뱃속이 고민할 때가 문득 이 좋은 시절인 것이다.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의심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먼저 분노심을 내어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고 의심을 해야 한다. 이 분노심은, 소리를 내거나 내지 않거나 하는 것은 학인들이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 하나의 조주는 어째서 없다고 했을까? 하는 의심을 의심해 가는 것이다.

조주의 무(無)를 간(看)하는 것이 아니다! 조주의 무(無)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기막힌 것이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화두를 드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앞서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경계하여 알음알이를 짓지 말라 한 것도 그러한 알음알이가 의정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의정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화두를 드는 요령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더러는 이러한 요령을 정확히 터득치 못함으로써 헛되이 공력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대표적으로 조주의 무자(無字)를 간(看)할 때, 그저 무(無)! 무(無)!를 되풀이하여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야말로 잘못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갈 때도 무, 앉을 때도 무, 옷을 입거나 밥을 먹을 때도 무, 언제나 무라고 하며 혹은 천천히 하기도 하고, 혹은 호흡과 관련지어 급하게 하기도 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무(無)라는 말에 달라붙어서 의정을 일으켜야지, 그저 무, 무하고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화두는 처음부터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분심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따금씩 소리를 내어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하면 혼침과 도거가 사라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해서 공부를 짓되, 정신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혹은 염화두(念話頭)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念)하지 말지니, 염해 가고 염해 오면 무슨 교섭(交涉)이 있으리오? 염하여 미륵불이 나올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교섭함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각기 화두를 들어 일으켜야 할지니, 무자(無字)를 간(看)한다면 문득 무자(無字)상(上)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백수자(柏樹)를 간(看)한다면 문득 수자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키고, 일귀하처(一歸何處)를 간한다면 문득 일귀하처에 나아가 의정을 일으켜야 한다.

―《몽산법어 蒙山法語》―

이처럼 단지 공안을 염해서는 안된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아미타불과 같은 불명호를 염하는 것이 이익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화두는 염하는 것이 아니고, 의심을 지어 나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의심을 지어 나가는 요령에서도 또한 우선은 화두 전체를 들어서 챙기고, 그리고 나서는 ‘도대체 일체 함령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셨거늘 조주는 무엇을 인(因)하여 무(無)라 일렀을까?’, ‘어째서 무라 했을까?’, ‘어째서?’, ‘왜?’, ‘?’ 하는 식으로 지어 나가는 것이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 때에도 요령은 마찬가지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하여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에다가 의정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리고 ‘도대체 어디에다 두었을까?’하고 의심하고 의심해 나가듯이 의심을 지어 나가는 것이다. 다만 염하는 것과 의심해 나가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하여 골똘히 의심하고 의심할 때, 혼침과 도거는 자연스레 사라지고 성성하고도 적적한 경지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화두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화두를 처음부터 끝 구절까지 들어서 수미일관하게 하고 다시 의심을 지어 나가되, 그래도 쉽사리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다면 포단에서 내려와 한동안 거니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혹 화두를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거든, 연거푸 세 번 들면 즉시 힘을 얻을 것이요, 혹 심신이 피로하고 지쳐 마음이 불안하거든, 조용히 땅으로 내려와 한동안 거닐다가 다시 포단에 앉아 본참화두를 가지고 전과 같이 밀고 나가도록 하라.

―《선관책진(禪關策進)》―

즉 앉아서 공부에 장애를 느낄 시에는 서서 다니며 공부해도 무방한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오로지 서서 다니며 화두를 참구해서 깨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선요(禪要)》의 저자인 고봉화상의 경우가 그러했으며,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의 저자인 원나라 단운지철(斷雲智徹, 1309-?) 선사도 그러하였다.

성상(聖像) 앞에 향을 사르고 3년을 죽기로 한정하고 이렇게 서원하였다.

제가 만약 나태하여 앉거나 눕고자 하여 몸을 자리나 평상에 붙인다면 무간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이곳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어 지이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배회하였다. 두 끼의 공양 때에만 자리에 앉았을 뿐, 그밖에 차를 마시는 경우에도 역시 발을 멈추지 않았으며, 도우(道友)나 시주가 방문했을 때에도 또한 맞이하는 법이 없었다. 말은 일체 절제하였다. 단지 ‘만법귀일 일귀하처’만을 들을 뿐이었다. 다만 이 한 마디를 향하여 간절히 의심을 지어갈 뿐이었다.

―《선종결의집(禪宗決疑集)》―

아침에 죽 먹을 때와 점심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일체 앉거나 기대지도 않고 화두를 참구하여 다만 의정만이 마음속에서 분명한 무심삼매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봉화상도 거의 3년이 되도록 두 끼니의 죽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피곤할 때에도 자리에 기대지 않고서 밤낮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다니며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했다고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이 외에 《선관책진(禪關策進)》의 독봉계선(毒峰季善) 선사도 육계(深溪)에서 정진할 때에 눕는 곳을 만들지 아니하고 다만 한 개의 걸상만을 놓고 정진하여 필경 깨침으로 법칙을 삼았다고 한다. 하루 저녁에는 졸다가 밤중이 된 것도 몰랐는데, 깨어서는 마침내 걸상마저 치우고 주야로 서서 다니며 참구하였다. 한번은 벽에 기대어 졸은 지라, 그후로는 ‘내 다시는 벽에도 기대지 않는다’ 맹세하고 빈 땅 위를 홀로 걸으며 각고의 정진을 하여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한다. 한 마디로 수마(睡魔)와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걸어다니며 정진하는 것은 대체로 혼침이 심할 때에 주로 잠을 쫓고자 쓰는 방법이다. 물론 걸어다니면서 조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은 잠깐뿐이고, 앉아 수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잠을 쫓기에 수월할 것이다. 따라서 비록 흔치 않은 예이지만, 이상과 같이 전적으로 서서 걸어다니며 수행해 깨친 예가 있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화선은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지극한 이치를 궁구 함에는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음이라. 그러나 첫째로 마음을 두어 깨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일 마음을 두어 깨닫고자 기다리면, 기다리는 바의 마음이 도의 안목(道眼)을 장애하여 급할수록 더욱 더디어집니다. 단지 화두를 잡아가다가 문득 잡아가는 곳을 향해서 생사심(生死心)이 끊어지면, 이것이 곧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은 곳이다.

―《서장(書狀)》―

간화선에서는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철저히 확인하기 위해서 깨침을 법칙으로 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깨침을 기다려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절인연이 무르익어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는 저 과실열매처럼 충분히 익을 때를 기다려야지, 생짜로 나뭇가지를 흔들어 떨어뜨리거나 미리부터 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익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즉 간절하기는 하되, 속효심(速效心)을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은 조급한 심정으로 알음알이를 내게 하며, 이러한 사량 계교야 말로 공부를 제대로 되지 못하게 하고 의정을 일으킬 수도 없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점은 깨침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깨닫겠다는 일념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침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단지 화두에 몰두해서 생사심이 파하면 되는 것이다. 오히려 깨침을 얻고자 기다리다 보면 그로 인하여 장애가 되어 깨침은 더더욱 더디어질 따름입니다. 간화선은 결코 대오선(待悟禪)이 아니다. 오히려 그 깨침을 기다리는 마음까지도 화두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버려야 한다.

경산대혜 선사도 ‘평소에 지견이 너무 많아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앞에서 장애를 짓기 때문에 자기의 정지견(正知見)이 현전치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장애라는 것 또한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또 별다른 일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분간할 것이 있겠는가? 이른바 십종병(十種病)이란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여기서 말하는 십종병이란 ‘조주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하여야 할 병통 열 가지를 말한다. 조주무자 화두는 모든 화두의 대표격이므로, 결국 이것은 일반적으로 화두참구에 있어서의 열 가지 병통을 말해 준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내용은 전적에 따라 약간의 출입이 있지만 대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가 있다.

① 유(有)와 무(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不得作有無會)

② 진무(眞無)의 무(無)로 생각지도 말고(不得作眞無之無卜度)

③ 도리(道理)로써 이해하려고 하지 말며(不得作道理會)

④ 의근하(意根下)를 향해서 사량하고 계교하지도 말며(不得向意根下思量卜度)

⑤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데서 캐내려고 하지도 말며(不得向揚眉瞬目處睵根)

⑥ 어로상(語路上)에서 활계(活計)를 짓지도 말며(不得向語路上作活計)

⑦ 일 없는 갑옷 속에 드날려 있지도 말며(不得揚在無事甲)

⑧ 화두를 들어 일으킨 곳을 향하여 알려 하지 말며(不得向擧起處承當)

⑨ 문자로써 이끌어 증명하지 말며(不得文字中引證)

⑩ 어리석음을 가져다 깨닫기를 기다리지 마라(不得將迷待悟)

―《간화결의론》―

이러한 열 가지 병이란 것도 알고 보면 증오(證悟)를 구하는 마음으로써 근본을 삼고 있다는 것이다. 대오지심(待悟之心)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묶어 놓는 것이며, 나아가 깨침을 얻기 위해서 갖가지 계교나 사량분별 및 허망한 노력을 하게 만드는 근원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개 무자만을 간(看)할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한 것과 뚫고 뚫지 못한 것을 관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간화선을 닦는 입장에서 우선적으로 기피하여야 할 점은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오직 모를 뿐

그러므로 황면노자가 말씀하시되, 마음으로 망령되이 과거법을 취하지 말고, 또한 미래사에 탐착하지 말며, 현재에도 머무르는 바가 없어서, 삼세가 다 공적함을 요달하라 하시니라. 과거사에 혹 선(善)과 혹 악(惡)을 사량치 말지니, 사량한 즉 도를 장애하리라. 미래사를 계교치 말지니, 계교한즉 광란하리라. 현재사가 면전에 이르거든 혹 역(逆)과 혹 순(順)을 또한 뜻붙이지 말지니, 뜻을 붙인 즉 마음을 요동케 하리라.

―《서장(書狀)》―

깨침을 법칙으로 삼되, 깨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자칫 상충되기 쉬운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다 함께 살려나갈 수 있어야 올바른 화두 참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두 참구시에 오로지 깨침을 중시하다보면, 다만 미래의 향상사에만 마음을 두어 스스로를 못 깨친 중생으로 매어놓고 중생지견 가운데서 알음알이를 지어 깨닫기를 기다리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묵조선 측으로부터 간화선은 대오선이라는 비난도 받게 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본래 부처라는 입장에 치중하다보면 깨침을 법칙으로 삼지 않고 도리어 방편시하는 현상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입장을 함께 살려나갈 수 있는 중도적 방법은 무엇일까?

본래 불교에서는 제행무상의 도리를 중시하고 있다. 즉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며, 현재라고 할 때 그 현재는 머무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침을 기다리지 않고 화두를 드는 입장에서는 앞의 시간과 뒤의 시간이 끊어진 상태인 전후제단(前後際斷)이 되어야 한다. 일도양단(一刀兩斷)하여 더 이상 뒤를 생각하거나 앞을 사량치 아니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현전일념(現前一念)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일념을 단속해서 화두를 들것이요, 깨치고 못 깨치고에 상관없이 오직 ‘이 뭐꼬’하는 의심덩어리만이 홀로 뚜렷해지는 의단독로(疑團獨露)를 달성하고자 노력할 뿐인 것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의단을 갖는다는 것은 견성체험을 살리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모르겠습니다’하는 마음가짐에서 비로소 알 수 없는 의심이 일어난다. 정작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하는 바로 이 ‘모르는 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내 견해’ ‘내 여건’ ‘내 상황>’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잘못 알고 있는 악지 악각(惡知 惡覺)을 쓸어 없애주는 것이다. 즉 ‘나, 나의, 나를’을 사라지게 하며, 비로소 올바른 정지견(正知見)이 드러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경각을 얻기 전에는 완전히 바보처럼 멍청이처럼 여올여치(如兀如痴)하게 지내면서 분별지해로써 알려고 하지 말고, 다만 모른 채로 오직 모를 뿐인 화두를 챙겨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비로소 깨치고 못깨치고에 상관없이 화두가 한 조각을 이루어(打成一片) 의단이 독로해지고 시시각각으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느껴나가 안락의 법문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요컨대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는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비록 견성체험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견성에 너무 얽매여서도 안 된다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본래 부처임을 확신하는 조사선의 초기적 입장을 기반으로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번뇌망상을 다스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표명하고 있다. 본래 부처임을 확실히 믿는다면, 본래 부처인데 왜 이리 차별적 번뇌망상이 끊이지 않는가 하는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이러한 근원적 의심을 비롯한 천가지 만가지 의심을 오직 하나의 의심으로 응축시켜 ‘오직 모를 뿐’인 마음가짐으로 화두로 곧장 나아가, 이 한 가지 의심덩어리를 타파시킴으로써 천만가지 의심을 일거에 타파하고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참다운 본래 부처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