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조선

생활선 이해(묵조선)

나는 하루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홍주(洪州) 태안사(太安寺)의 주지는 경(經)과 논(論)을 강론하는 강사(座主)였는데 오직 마조스님을 비방하기만 하였다.

하룻밤은 삼경(三更)에 귀신사자(鬼使)가 와서 문을 두드리니, 주지가 물었다.

누구시오?

귀신세계의 사자인데 주지를 데리러 왔다.

내가 이제 예순 일곱인데 40년 동안 경론(經論)을 강의하여 대중들에게 공부를 하게 하였으나 말다툼만 일삼고 수행은 미처 하지 못했으니, 하루 밤 하루 낮만 말미를 주어 수행케 해 주시오.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기를 탐하면서도 수행을 못했다면 이제사 다시 수행을 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한창 목마른데 우물을 파는 격(臨渴掘井)이니, 무슨 소용이 있으랴.

―《마조록(馬祖錄)》―

이상의 이야기는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스님의 어록인 《마조록(馬祖錄)》에 전해진다. 마조스님의 스승은 남악회양이고, 남악스님의 은사스님은 육조 혜능스님이므로, 마조스님은 곧 육조 혜능스님의 손 제자 뻘이 된다.

당시 마조스님은 홍주 개원사에 계셨는데, 태안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모양이다. 태안사의 주지는 40년 동안 경론을 강의하던 강사였는데, 오직 마음법 만을 강조하던 마조스님을 사뭇 비방하기만 하였다고 한다.

사실 가장 가까운 곳에 지내는 사람일수록 가장 큰 경쟁상대가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강사였던 주지는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며 은근히 마조스님을 비하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저승사자의 방문 앞에서는 학식과 변재가 소용이 없음을. 예컨대 불교나 참선의 이치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달통 하거나 혹은 대단한 말재간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그대로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이다. 즉 이러한 학위나 말재간이 비록 생계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생사(生死)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태안사 주지는 저승사자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어, 다만 하루 동안이나마 말미를 얻고자 간청하고 있다. 말 그대로 임갈굴정(臨渴掘井), 즉 목마름에 다다라서야 우물을 파는 격이 되었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강 건너 불로 볼 수 없는 현실입니다. 강사가 되었든 주지가 되었든 혹은 수좌나 재가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깊이 헤아려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돌연 이와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또한 자신의 현재 수행방법이 올바른 것인지.

그나마 이 정도라도 정신차려 하루동안 말미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40년 동안 공부했던 도움이라고나 할까?

저승사자는 이러한 요청에 대하여 장황한 훈계조의 언설을 피력한 후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40년 동안 구업(口業)을 지었으니, 지옥에 들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또 옛날부터 경전에 분명한 글이 있다. 즉 말로써 모든 법을 말씀하여도 실상(實相)을 나타내지 못한다. 하였는데 그대는 망상(妄想)으로 입을 놀려 어지러이 말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받아야 하니, 다만 자신을 탓할지언정 남을 원망치는 말라. 지금 어서 빨리 가자. 만일 늦으면 저 왕께서 나를 꾸짖을 것이다.

그러자 둘째 사자가 말했다.

저 왕께서 벌써 이런 사실을 아실 터이니, 이 사람에게 수행케 해준들 무방하지 않겠는가?

첫째 사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하루쯤 수행하도록 놓아주겠소. 우리들이 돌아가서 왕에게 사뢰어 허락해 주시면 내일 다시 오겠고, 만일 허락 치 않으시면 잠시 뒤에 다시 오겠소.

사자들이 물러간 뒤에 주지가 이 일을 생각했다.

귀신 사자는 허락했으나 나는 하루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鬼使則許了也 某甲一日作摩生修行)

아무 대책도 없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겨를도 없이 개원사(開元寺)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니 문지기가 말했다.

누구시오.

태안사 주지인데 스님께 문안을 드리러 왔소.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니, 주지는 곧 마조스님께로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온 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한 뒤에 말했다.

죽음이 닥쳐왔는데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저의 남은 목숨을 자비로써 구제해 주십시오.

스님께서는 그를 곁에 서 있게 하였다. 날이 새자 귀신사자는 태안사로 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다시 개원사로 와서 주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이때 마조스님과 주지는 사자를 보았으나 사자는 스님과 주지를 보지 못했다.

―《마조록》―

나는 하루동안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이는 실로 중대한 문제이다. 과거 40년 동안의 공부가 물거품이 되어 버린 마당에, 겨우 하루 동안의 말미를 얻어내긴 하였지만, 과연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

우리도 함께 되짚어볼 만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수행을 통해 얼마만한 힘을 얻었는지, 내지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확신은 서 있는지. 이러한 스스로의 질문에 떳떳이 대답할 수가 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얼른 마조스님의 곁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저승사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금 마조스님은 안 계시다. 그러나 다행히 그 가르침은 남아 전하고 있다. 따라서 남겨진 가르침의 언저리라도 이해하고 실천코자 애쓰는 것으로서 마조스님의 곁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도는 닦는데 속하지 않는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를 닦는 것입니까?

도는 닦는데 속하지 않는다(道不屬修) 닦아서 체득한다면 닦아서 이루었으니 다시 부서져 성문(聲聞)과 같아질 것이며, 닦지 않는다 하면 그냥 범부이다.

―《마조록》―

마조스님의 가르침은 가히 파격적이라 할 만하다. 우선 상식적으로 사람들은 수행이라는 원인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상식적인 견해에 불과할 뿐이다. 참다운 도(道)는 상식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성문(聲聞)이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깨친 이로써, 여기서는 보살과 상대되는 뜻으로 쓰여졌다. 다만 혼자 도를 깨치고 갈무리할 뿐, 아직 참다운 부처의 경지에 다다르기엔 요원한 단계이다. 결국 도를 닦아서 깨친다고 하면 성문의 단계에 불과하며, 그나마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냥 범부라고 하는 것이다. 둘 다 참다운 도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일까?

자성(自性)은 본래 완전하니 선이다 악이다 하는데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 닦는 사람(修道人)이라 할 것이다.

―《마조록》―

자성이란 스스로의 성품, 즉 본 마음·참 나를 말한다. 본 마음·참 나는 본래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이라고 해서 취한다거나 악이라고 해서 버린다거나 공(空)을 관찰해 선정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것은, 공연히 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한 생각 망념이 삼계 생사의 근본이니, 이 한 생각 망념(妄念)만 없으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의 위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한 생각 망념은 홀연히 일어난다. 이 생각을 좇다보면 복잡다단한 인연의 수레바퀴에 얽매어, 마침내는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스스로 쳐 논 인연의 줄에 스스로 얽매이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참으로 도를 닦는 사람은 오직 이 한 생각 망념만 없애면 될 따름이다. 즉 도는 닦음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만 물들지만 않으면 될 뿐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이기 때문이다.

마조스님은 설법하셨다.

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말라(道不用修 但莫汚染) 무엇을 물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와 성인이 없는 것이다.

―《마조록》―

평상심이란 평상시의 마음을 뜻한다.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시비분별을 떠나있다. 비록 시시각각으로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듯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경계에 부딪쳐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인 것이다. 순간 순간 평상심이 깨어지거나 흔들림으로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처럼 안심(安心)을 주는 말이 또 있을까? 더 이상 멀리 찾을 것도 없으며, 완벽해지고자 애쓸 필요도 없어진다. 다만 나 자신의 평상시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해 나가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본 마음·참 나에 이미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이에 입각한 수행이란 결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아니며, 단지 본 마음·참 나를 지켜나갈 따름인 것이다.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상태를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름만 걷히면 그대로 맑은 하늘이라고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또한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고 해서 하늘에 흠이 나거나 이지러지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본 마음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평상심이 아닐까? 맑은 하늘을 움켜잡을 수 없듯이, 평상심으로 사는 마조스님을 저승사자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마조스님께 생사를 온통 맡겨버리는 확고부동한 신심을 갖고 곁에 서 있던 태안사 주지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결국 오늘 밤 불쑥 찾아올지도 모르는 저승사자에게 허망하게 붙잡혀가지 않으려면, 마조스님과 같이 평상심을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내지는 최소한 평상심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심이라도 지니고 부처님께 생사를 맡겨 버리던가 해야 하지 않을가?

자기의 보배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서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하겠는가? 무엇이 자기의 보배창고인가.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그것이 각자의 보배창고인 것이다.

오직 앉아 있을 뿐(只管打坐)

선승이 탁월케 되는 첫째 마음씀은 오직 앉아 있을 뿐 (只管打坐)에 있다. 근기가 둔하고 날카로움 혹은 현명하거나 어리석음을 막론하고 좌선을 하면 자연히 탁월하게 되는 것이다.

―《正法眼藏(정법안장)》―

‘오직 앉아 있을 뿐’,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일체의 다른 생각이나 다른 행위 없이 다만 좌선에 몰두해서 ‘몸도 잊은 듯 마음도 잊은 듯’함을 의미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한가지 일 한가지 행위에 전력투구함을 뜻한다.

여기에는 작불(作佛) 즉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행불(行佛) 즉 수행의 모습 그대로가 부처라고 하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좌선 자체가 부처의 몸, 부처의 경계이므로, 좌불(坐佛) 즉 좌선하는 부처는 다시 작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좌선, 즉 부처가 되고자 하는 좌선이 아니라 부처의 좌선, 즉 부처님 성도 이후의 좌선을 연습하는 것이다. 행위가 다만 목적을 향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행위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좌선은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좌선 그 자체가 부처로서의 완성되어진 행위인 것이다. 수행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오늘은 내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은 오늘로써 절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지관타좌의 특색은 명백히 ‘몸의 좌’이라는 점에 있다.

도를 깨닫는 것은 마음으로써 깨닫는가, 몸으로써 깨닫는가, 교가(敎家)등에서도 신심일여(身心一如)라고 해서 몸으로써 얻는다고는 하지만 역시 일여(一如)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로 몸으로써 얻는 것이 확실하지가 않다. 이제 나의 집안에서는 몸과 마음이 동시에 깨닫는다 한다. 그 중에서도 마음으로써 불법을 계교하는 한, 만겁천생에도 깨닫지 못한다. 마음을 내려놓아서 지식적 알음알이를 버리는 때에 깨닫게 된다. 사물을 보고 마음을 밝히거나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는 등의 것도 역시 몸의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생각과 지견을 모두 버리고 지관타좌(한다면, 도는 친히 깨닫게 된다. 따라서 도를 깨닫는 것은 틀림없이 몸으로써 깨달음이다. 이리하여 좌(坐)를 오로지 해야 한다고 깨우쳐 권하는 것이다.

―《정법안장》―

몸으로써 깨닫는다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철저히 놓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행이니 깨달음이니 자기의 입장에서 이것저것 사색하여, 모든 사물의 진실을 밝히려 드는 것이야말로 미혹과 다를 바가 아니며, 일체의 진실이 스스로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깨달음인 것이다.

일체는 중생이고 실유(悉有)이며 불성(佛性)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는 말의 참뜻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이름지을 수 없는 그 무엇이 분명하게 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중생이라 부르고, 어느 때는 유정(有情)이라고 하며, 어느 때는 온갖 생물 어느 때는 온갖 생류(生類)라고 하는 것이 모두 중생이며 일체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온갖 존재(悉有)가 불성이며, 그 온갖 존재의 한 온갖(一悉)을 중생이라 한다.

―《정법안장 正法眼藏》―

《열반경》의 핵심사상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법안장》의 저자이며 일본 조동종의 개조인 도원(道元, 1200-1253 도오겐)선사는 이를 일체는 곧 중생이며, 온갖 존재로서, 불성이다라고 끊어 해석하고 있다.

첫째로, 일체는 중생이라는 것은 일체는 살아있다는 의미이다. 통례로 살아 있다고 하면, 동물만을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초목이나 산하 등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동물만이 아니라 풀도 나무도 산도 강도 모두가 살아있는 것이다. 즉 중생이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며, 그 위에 그것이 불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산하대지가 모두 불성의 바다인 것이다.

그러므로 통상 불살생계(不殺生戒)라고 하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참된 의미는 부처의 씨앗을 증장 한다는 뜻이다. 부처의 씨앗을 증장시킨다고 하면, 사람들 가운데에 내재하고 있는 불성을 끌어내서, 그것을 더욱 크게 생장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불성이란 드러나 있는 일체의 것이 살아 있는 것이며, 부처의 생명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의 씨앗을 증장 시킨다는 것은 온갖 사물,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풀과 나무와 산과 강의 생명과 하나가 되어, 인간 자신이 이들 생명과 함께 사는 것이다. 눈을 맑게 하면 풀도 나무도 진리의 자태를 열어 보이며, 귀를 맑게 하면 산도 강도 진리의 소리를 노래하고 있는 이 같은 경지에 이른 때에 비로소 한 포기 풀, 하나의 사물의 진실이 분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의 사물을 깨닫는 것이며, 한 포기 풀을 깨닫는 것이다.

둘째로, 일체는 온갖 존재(悉有)라 함은, 전세계에 감추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전세계에 있어서의 일체가 지금 여기에 현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체는 드러나 있으며, 어느 것 하나 감추어진 것은 없다. 그러므로 불성을 미래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둘레 도처에 나타난 데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시간과 존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 존재는 곧 시간인 것이다. 시간과 자신은 하나이기도 하다. 어느 한 순간이 단지 이동해 가는 한 순간의 모습이 아니고, 시간을 초월한 ‘영원의 지금’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산에 오르는 때는 현성(現成)하고 있는 것은 산뿐이며 전세계는 지금의 산에 다하고 있어서, 전시간은 등산하는 지금에 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강을 건너는 때에는 현성하고 있는 것은 강뿐이어서 전 세계는 지금의 강에 다하고 있으며, 전 시간은 도하하고 있는 지금에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생사(生死)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삶도 일시의 모습이며 죽음도 일시의 모습이다. 이를테면 겨울과 봄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겨울 그 자체가 변한다고는 생각치 않으며 봄 그 자체가 여름으로 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움직여 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삶이라고 하면 완전히 삶이 되어져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삶이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삶이 오면 다만 삶에 마주하고 죽음이 오면 죽음에 향할 따름이며, 삶과 죽음을 내 것으로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극한 상황이지만, 모든 것은 시시각각 흘러가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것은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어 가는 것이다. 인간도 이러한 만물의 일원으로서 시시각각 태어나고 죽어 가는 것이다. 하루 밤낮을 나누어 보면 6십4억9만9천9백8십의 찰나가 있어서 오온이(五蘊) 모두 생멸하는 것이다. 이렇다해도 범부는 일찍이 알아차리지 못하며,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을 알지 못하고, 불법을 믿지 못하는 자는 찰나 생멸의 도리를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로, 온갖 존재는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세계의 무상교류의 모습이 그대로 불성이라는 것이다.

초목의 무상(無常)함이 곧 불성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의 무상함이 또한 불성이다. 국토산하가 무상함은 곧 불성인 까닭이다.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한 불성인 까닭에 무상이다. 대반열반 또한 무상인 까닭에 불성이다.

―《정법안장》―

이처럼 현상세계의 무상한 모습이 그대로 절대적 의의가 있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찾고 있는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모두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세계 그 자체와 다름없는 것이다. 온갖 것 하나하나 일상생활 전부가 지혜의 드러남, 진리 자체의 체험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허공 꽃(空華)이나 그림의 떡(畵餠)에서 잘 드러난다. 즉 일체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허공 꽃이며,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그림의 떡이어서, 실체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일시적 모습 외에 따로 영원이라는 없는 것처럼, 거짓된 모습 외에 따로 진실은 없다.

진실은 이미 현재에 이 허공 꽃 가운데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병든 눈에 비치고 있는 허공 꽃은 일시적 모습이며 거짓된 모습이지만, 일시적 모습이며 거짓된 모습인 이 허공 꽃 외에 진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진실은 현재 이 허망한 현실에 아낌없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이 허망한 현실을 벗어나서 어디에 진실의 도가 있겠는가?

아울러 일체의 세계 및 일체의 사물은 모두 그림의 떡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하고 있는 진리는 그림으로 나타나고, 부처는 그림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그림에 그려진 떡이 아니면 허기를 채워주는 약이 없다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 일체의 중생이 그대로 불성이며, 일체의 불성이 그대로 일체의 중생인 것이다.

생명을 생기 있게

마곡산의 보철선사가 어느 때 부채를 부치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거늘 어째서 당신은 부채를 부치고 있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대답했다.

자네는 바람의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의 올바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군.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선사는 묵묵히 부채를 부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스님은 깊이 감격하여 예배했다.

―《정법안장 正法眼藏》―

앞서 말한바와 같이 모든 사물의 진실은 지금 여기에 남김없이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있는 곳에 정신차리면 저절로 수행이 가능하고,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넓게 행동할 필요가 있으면 널리 행하고, 좁게 나아갈 필요가 있으면 좁게 나아가는 새나 물고기처럼, 지금 자신이 나아갈 길에 정신차리면 저절로 수행이 가능하며 진리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이 반드시 지식이 되어 논리적으로 이해되어서는 한이 없다. 즉 깨달음이란 표면적 이해를 초월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궁극이란 수행에 의하여 즉각 체험되는 것이지만 이것이 자신에 의하여 마음을 써서는 한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부채를 부치지 않아도 된다. 부채를 부치지 않더라도 바람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바람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일체의 사물 그대로가 진리 그 자체요, 일체중생 그대로가 불성 그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발심하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는 궁극적 이유인 것이다. 여기에 진리를 실현하는 경지가 있으며, 진리를 실현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도의 궁극은 ‘생명을 생기 있게’만드는 것이다. 한가지 일 한가지 행동에 투철함으로써 지금 여기서 우리의 생명을 실현시키는 생동이야말로 불도의 궁극인 것입니다. 참으로 생동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생동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배에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돛을 써서 내가 키를 잡고 삿대질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배가 나를 태우며 배 외에 나는 없다. 내가 배에 오르는 것에 의하여 그 배를 배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생명은 내가 생기게 하는 것이다. 나를, 생명이 되어져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배에 오르면 나의 심신 및 그 주변의 모든 것이 배의 세계가 되고 대지의 전체, 허공의 전부가 배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내가 생(生)과 일체이고 생이 나와 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정법안장》―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이 한가지 일 한가지 행동에 전신으로써 완전히 뛰어드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체험이다. 한가지 일 한가지 행동을 통해서 자아가 완전히 소멸되어 절대의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입장이나 능력 범위 내에서 이것저것 사색하여 진리를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 즉 모든 사물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다와 산이 둥글다던가 사각이라던가 보는 이외에 그 밖의 자태가 끝없이 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자신의 주위환경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도 무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법이 스스로 나아가서 자기를 닦고 깨치는 입장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나아가서 만법을 닦고 깨치는 자기의 전환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자아소멸의 도로써 좌선을 권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