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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림성사

작성자
busong
작성일
2018-02-06 21:18
조회
344
총림성사

총림성사 서[敍]

내가 총림에 몸을 담은 지 거의 30년 동안 당대의 큰스님들을 만나본 일이 많았으나 세상
을 떠나 단구산(丹丘山) 봉우리에 문을 닫고, 나날이 초목들과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벗어
던져버렸다. 그러나 옛 버릇을 잊지 못하고 조는 틈에 손에 닿는대로 케케묵은 옛 상자 속
을 뒤지다가, 마침 강서(江西) 효영 중온(曉瑩仲溫)스님의 저서 `나호야록(羅湖野錄)" 한 질
을 찾았다. 첫머리를 펼치니 무착(無着)스님의 서가 있었다.

"옛 철인들이 도에 들어간 숱한 기연(機緣) 중에 선서에 기재되지 못한 부분이 많은데, 그
허물은 당시 뛰어난 스님들이 편집하면서 빼먹었기 때문이다. 이는, 종문(宗門)을 보호하고
불법을 넓히려 하는 마음이 없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급기야는 훌륭한 분들을 보고서 자기
도 그렇게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공허한 탄식만을 더해 주었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 보니, 참으로 우리처럼 게으르고 오만스러운 자의 병폐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평소 대중으로 있을 때에 보고 들었거나, 선배 또는 근세 스
님들에게서 본받고 기록할 만한 말들을 더듬어 한 권의 책으로 엮게 되었다.
책이 완성되어 무봉( 峰:育王山)의 불조(佛照:德光禪師, 經21∼1203) 노스님에게 올렸더니,
이를 보시고 기뻐하시면서 시자 도권(道權)에게, 이는 참으로 우리 종문의 훌륭한 일[盛事]
이라면서 어찌 목판에 새겨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이 책을 "총림성사(叢林盛事)"라 이름하였다. 나를 알아주거나 나를 허물하는 것이
여기에 있으니 비웃지말기를 바란다.

정사(丁巳) 경원(慶元) 3년(經97) 8월 15일 도융(道融)서

총림성사 上

1. 황룡스님을 참방하다 정대경(程大卿)

정대경(程大卿)이 혜남(黃龍慧南:1001∼1069)선사를 찾아뵙자, 혜남스님은 그에게 `태어난
인연[生緣:黃龍三關 중 하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법창(法昌倚遇:1005∼1081)스님
이 어느 날 혜남스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그 자리에서 번뇌망상을 떨쳐주지 않소?"
"언제 사족이라도 그렸단 말인가? 그 스스로가 단박에 깨닫지 못했을 뿐이오."
"스님은 그를 어떻게 가르치시렵니까?"
"생강을 깨물고 식초를 빨게 하겠소."
"속된 중이 또 저러는구나."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말에 법창스님이 불자(拂子)를 뽑아들고 황룡스님을 치자, 황룡스님이 "이 늙은이가 이처
럼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나!"라고 하니, 법창스님은 그만두었다.

2. 소동파의 옥대를 벗기다 불인 요원(佛印了元)선사

불인(佛印了元:1032∼1098)스님이 어느 날 방에 들어가려는데 생각찮게 소동파(蘇東坡:103
6∼經01)가 오자, 그에게 말하였다.
"이곳에는 앉을 자리가 없어 거사를 모실 수 없습니다."
"잠시 스님의 육신[四大]을 자리로 빌어 앉아 봅시다."
"이 산승에게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거사께서 만일 대답을 하면 앉도록 하겠지만 대답을
못하신다면 옥대(玉帶)를 풀어 주시오."
이 말에 소동파가 선뜻 말씀해 보라 하니 스님이 말하였다.
"거사는 조금 전에 이 산승의 육신을 빌어 앉겠다고 하셨는데, 이 산승의 육신은 본디 빈
[空] 것이며 오음(五陰:五蘊)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사는 어디에 앉겠소?"
이 말에 소동파는 생각해 보았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옥대를 풀어 놓고 껄껄대며 밖
으로 나가자 불인스님은 행각할 때 입던 누더기를 그에게 선물하였다. 이에 소동파는 세 수
의 게를 읊었다.

백천 개의 등불이 하나의 등불이라
항하의 모래알이 모두가 묘한 법왕이기에
나, 소동파는 감히 이를 아끼지 않고
그대 육신을 빌어서 자리 삼으려 하였다오.
百千燈作一燈光 盡是恒沙妙法王
是故東坡不敢惜 借君四大作禪牀

병든 몸에 옥대를 두르기란 벅찬 일이라
노둔한 근기가 그대의 활촉같은 기봉에 떨어졌노라
기생집 앞에서 걸식할 뻔하였는데
행각선승 옛 누더기와 바꾸었다네
病骨難堪玉帶圍 鈍根闖落箭鋒機
會當乞食歌姬院 換得雲山舊衣

이 옥대 숱한 사람 여관[旅閣]처럼 거쳐오다가
이 내 몸에 전해온 지도 아득하여라
비단 도포 위에 서로 어울리더니
거짓 미치광이 노스님에게 빌려 주노라.
此帶閱人如傳舍 流傳到此赤悠哉
錦袍錯落渾相稱 乞與佯狂老萬回

이에 대하여 불인스님은 게송 두 수를 지어 화답하였다.

석상(石霜:807∼888)스님, 배휴(裴休:796∼870)의 홀(笏)을 빼앗아
3백년간 많은 입에 그 소문 자자했지만
길이 밝은 달과 티없이 함께 할
소동파가 끌러 놓은 옥대만이야 하겠는가
石霜尊得裴休笏 三百年來衆口誇
長和明月共無瑕 爭似蘇公留玉帶

형산 땅 변씨[卞和]는 세 임금에게 옥을 바쳤고*
조나라 인상여는 온갖 죽음 무릅쓰고 되찾아왔네*
귀중한 보배란 오로지 천자만이 쓰는 것인데
어이하여 이 소봉래산(小蓬山:金山)에 있는 것일까
荊山卞氏三朝獻 趙國相如萬死回
至寶只應天子用 因何留在小蓬萊

3. 양차공과 한위공에게 답하다 부용 도해(芙蓉道楷)

제형(提刑) 양차공(楊傑)이 어느 날 부용 도해(芙蓉道楷:1043∼經18)선사를 찾아와 물었다.
"제가 스님과 헤어진 지 몇해입니까?"
"7년 되었소."
"이 7년 동안 참선을 하셨습니까, 아니면 도를 배우셨습니까?"
"북도 치지 않고 피리도 불지 않았소."
"그렇다면 괜히 산수에서 노닐었으니 아무것도 이룬 게 없겠군요?"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잘도 아는군!"
이 말에 양걸은 껄껄 웃었다.
한위국공(韓魏國公:韓琦)이 여름결제 때에 방문하자 도해스님은 산문 밖까지 나와 맞이하니,
그가 말하였다.
"결제 중에는 나오지 못하는데 무슨 까닭에 파계를 하셨소?"
"공적으로 말한다면 한 치의 바늘도 용납될 수 없지만, 사사로이는 수레도 통과합니다."
이 말에 한기는 크게 기뻐하였다.

4. 대우산에 살 때 진정 극문(眞淨克文)선사

진정(眞淨克文:1025∼經02)선사가 균주(筠州) 대우산(大愚山)에 있을 때였다. 태수(太守) 전
익(錢 )이 그곳을 찾아가 보고서 갑자기 선승이 많아진 것을 이상하게 여겼는데, 사실은 대
중들이 스님의 도덕 때문에 모여든 것이었다. 그래서 전익은 방장실로 들어가 보았으나 남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튿날 대중공양[齋]을 열도록 명하여 스님이 앉으려는 찰
나에 병풍 뒤에서 갑자기 개 한 마리가 뛰어나오게 하자, 스님은 몸을 움찔하며 개를 피하
였다. 이에 전익이 비웃으며 말하였다.
"대선지식이란 본래 용도 항복시키고 호랑이도 굴복시킬 수 있다 하는데 어찌하여 개 한 마
리를 두려워합니까?"
그러자 스님이 맞받았다.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는 굴복시키기 쉽지만, 집 지키는 용을 항복시키기는 어렵
소."
전익이 매우 기뻐하여 스님을 성수사(聖壽寺)로 모셔 와 도를 물었다.

5. 편지를 전하다 / 승천 전종(承天傳宗)

승천사(承天寺)의 전종(傳宗)스님이 행각할 때였다. 천주(泉州) 서은(棲隱)스님을 위하여 부
마(駙馬) 이도위(李遵勖 都尉:?∼1038)에게 편지를 전하고자 경사(京師)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니, 그가 스님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서울까지 왔소?"
"절 일로 편지를 가져왔을 뿐이오."
"방금 내가 물은 것이 후회스럽소."
"도위께서는 항상 편지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도위가 악! 하고 할을 한번 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또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할 수 없소."
"30년 후에 이를 거론할 사람이 꼭 있을 것이오."
이 말에 이도위는 큰소리로 웃었다.

6. 원두 소임을 맡아서 / 흥양 청부(興陽淸剖)선사

흥양 청부(興陽淸剖)선사가 처음 대양(大陽警玄:942∼1027)스님 회하에서 원두(園頭:채소밭
관리를 맡은 스님)가 되어 외씨를 심고 있는데 대양스님이 물었다.
"참외가 언제쯤 익을꼬?"
"지금 다 익었습니다."
"단 것을 골라 따오너라."
"따오면 누구와 드시겠습니까?"
"참외밭에 들어가지 않는 자와 먹겠다."
"참외밭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도 참외를 먹을 수 있습니까?"
"너도 그를 아느냐?"
"모르지만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양스님은 웃으면서 참외밭을 떠났다.
청부스님이 병으로 앓아 눕자 대양스님이 문병을 와서 말했다.
"이 몸이란 허깨비나 물거품 같은 것이지만 허깨비나 물거품 속에서 일을 마쳐야 한다. 만
일 허깨비나 물거품 같은 것 마저 없다면 생사대사를 끝낼 길이 없다. 만일 생사대사를 끝
내려고 하거든 이 허깨비나 물거품을 알아 차려야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아직은 이곳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곳은 어떠한가?"
"온 누리에 태양이 찬란하여도 바다 밑엔 꽃이 피지 않습니다."
대양스님이 웃으면서, 그에게 정신이 또렷또렷하냐고 물으니 청부스님은 할을 한번 하고 나
서 말하였다.
"내가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 청부스님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대양스님은 마침내 그의 의발과 게송을 부산 법
원(浮山法遠:997∼1067)스님에게 전하였고, 부산 법원스님은 투자 의청(投子義靑:1032∼1082)
스님에게 전하여 조동종(曹洞宗) 일파를 일으켜 세웠다.

7. 운문의 정종을 잇다 / 원통 법수(圓通法秀)선사

법운사(法雲寺)의 원통법수(圓通法秀:1027∼1090)선사는 처음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하루
는 "내가 책을 보니 `선재동자는 처음 문수보살을 만나고서도 또다시 經0성(城)을 돌아다니
며 53인의 선지식을 찾아갔다' 하고, 또 `달마스님은 서쪽에서 오시고 육조 혜능스님은 남쪽
으로 떠나가서 교학 밖에 따로 무상심인(無上心印)을 전했다'고 하는데, 내 어찌 한 쪽 모퉁
이에 머물러 성상(性相:法性宗과 法相宗)의 종문(宗門)에 머물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였
다. 이를 계기로 하던 공부를 모두 팽개치고 행장을 꾸려 남부지방을 돌아다니다가 무위산
(無爲山)에 이르러 의회(天衣義懷:992∼1064)스님을 찾아뵈니 스님이 물었다.
"좌주(座主:강사의 존칭)는 무슨 경을 공부하였나?"
" `화엄경"을 대강 공부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무엇을 종지로 삼는가?"
"법계(法界)를 종지로 삼습니다."
"법계는 무엇으로 종지를 삼는가?"
"마음입니다."
"마음은 무엇으로 종지를 삼는가?"
법수스님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의회스님은 말하였다.
"터럭끝 만큼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벌어진다. 그대 스스로 이를 수긍하게 되면 깨닫는
바 있을 것이다."
그 후 17일이 지난 어느 날, 한 스님이 화두를 거량하였다. "백조(白兆圍圓)스님이 보자(報
慈慧朗)스님에게 `알음알이가 생기면 지혜가 막히고, 생각[想]이 변하면 본체[體]가 달라진다
고 하는데 알음알이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보자스님이 `막혔구나!'
하였다" 이 말을 듣고서 법수스님은 크게 깨치고 곧장 방장을 찾아가 깨친 바를 말하니, 의
회스님은 기뻐하며 말하였다.
"전후하여 수많은 좌주가 나를 찾아왔었지만 오직 그대만이 큰 법을 이어 받을 만하다. 앞
으로 우리 종문은 너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이에 법수스님은 8년 동안 부지런히 섬기니, 의회스님의 추천으로 수좌가 되었고, 서주(舒
州) 사면산(四面山)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다. 뒤에 동경(東京) 법운사(法雲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운문(雲門)의 정통 종지가 이로부터 세상에 크게 펼쳐졌다.

8. 투자사의 전좌가 되다 / 부용 도해(芙蓉道楷)선사

부용 해(芙蓉道楷:1042∼經18)선사가 투자(投子義靑)스님 회하에 에 있을 무렵, 전좌(典座;
대중의 식사를 맡은 소임)가 되었는데 하루는 투자스님이 물었다.
"부엌살림 꾸리기가 쉽지 않지!"
"아닙니다."
"죽을 끓이느냐, 밥을 짓느냐?"
"인부들은 쌀을 씻고 불을 지피며, 행자들은 죽을 끓이고 밥을 짓습니다."
"너는 무엇을 하는고?"
"스님의 자비로 그들에게 맡겨두고 한가로이 지냅니다."
이 말에 투자스님은 깜짝 놀랐다.

9. 한 납자를 제접하다 / 정인사 고목 법성(枯木法成)선사

정인사(淨因寺)의 고목 법성(枯木法成:1072∼經28)스님이 한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 사람인가?"
"서천(西川)사람입니다."
"언제 고향을 떠나왔는가?"
"작년 2월입니다."
"고향 떠나기 전의 일을 한 마디로 할 수 있겠나?"
"온 몸이 입이라 해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직도 집을 떠나 일 자리가 없는 자의 말에 불과하다."
그 스님이 아무 말 못하자 법성스님은 불자로 한 차례 후려치면서 "부질없이 수많은 짚신짝
만 닳아 없앴구나!"라고 하였다.

10. 총림을 소란케 하다가 / 불심 본재(佛心本才)선사

고산사(鼓山寺) 불심 재(佛心本才)선사는 복주(福州) 민현( 縣) 사람이다. 처음에 사심(死
心悟新)스님을 찾아뵈니, 사심스님이 물었다.
"고향이 어딘고?"
"복주입니다."
"현사(玄沙師備)스님은 오령(五嶺)을 넘어가지 않았고, 보수(保壽)스님은 강을 건너지 않았다
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
"걸어가면서 팔을 흔드는 것이야 어떻겠습니까?"
"왼팔을 흔들었느냐, 아니면 오른팔이냐?"
본재스님이 두 손을 길게 늘어뜨리고 흔들며 나오자 사심스님은 매우 기뻐하며 그를 받아들
여 머물도록 허락하였다. 얼마 후 시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는데 시자가 사심스님에게 "본
재는 가는 곳마다 총림에서 물의를 일으켜 소란스럽게 만드니 스님께서는 그를 이곳에 머물
게 해서는 안됩니다."하여, 사심스님은 마침내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말하였다.
"듣자하니 너는 가는 곳마다 어느 총림에서든지 소란을 피운다 하니 우선 다른 곳으로 가보
아라."
본재스님은 "큰 선지식이 눈은 어디다 두었소!"하면서 소매를 떨치고 떠나 그 길로 소묵(昭
默)스님을 찾아뵈었다. 소묵스님은 그를 받아들였으며, 얼마되지 않아 마침내 황룡스님의 도
를 깨쳤고, 소묵스님은 그에게 큰 법을 맡겼다.

11. `능가경"을 보다 / 장안도(張安道)

낙전선생(樂全先生) 장안도(張安道)가 경력(慶曆:1041∼1048) 연간에 제주( 除州) 태수로 있
을 때였다. 한 절에 갔는데 불교서적이 책꽂이에 기지런히 꽂혀 있기에 이상히 여겨 뽑아
보니,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脛)"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어렴풋한 옛 물건
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필적을 자세히 살펴보니, 완전히 자기가 쓴 글씨였다. 이에
기쁨과 슬픔이 엇갈려 큰 한숨을 쉬고, 이로부터 깨침을 얻게 되었다.
일찍이 경(능가경)첫 머리 4수의 게로써 마음의 요체를 밝혔는데, 소동파가 남도(南都)를 지
나는 길에 친히 장안도의 책을 보고는 다시 30만 냥을 맡기면서, "이 책을 인쇄하여 강회
(江淮)지방에 반포하라"고 당부하였다. 소동파는 몸소 불인(佛印了元)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금산사(金山寺)에서 간행을 맡아 주도록 부탁하였다. 이 일로 소동파가 낙전에게 보낸 시구
(詩句)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낙전거사 하늘에 노닐어
유마거사 방장실이 쓸쓸하네.
樂全居士樂於天 維摩丈室空 然

12. 부모를 찾아뵙다 / 설당 도행(雪堂道行)선사

설당 행(雪堂道行:1089∼1151)스님은 괄창(括蒼)사람이다. 어린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
제하였으나, 살생하는 것을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생겨 마침내 집을 나왔다. 사주(泗州)보조
왕사(普照王寺)에서 출가하여 탑청소를 맡아보다가, 삭발한 뒤에는 서주(舒州)용문사(龍門
寺)의 불안(佛眼淸遠)스님에게 귀의하여 시자가 되었다. 옷 한 벌로 여름과 겨울을 지내고
게다가 이( )를 죽이지 않으니, 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싫어하여 항상 불당의 구석에서 혼
자 좌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현사(玄沙師備)스님의 `축착각지두(築著脚指頭)'*라는 화두
를 들다가 크게 깨친 바 있었다. 불안스님은 사천 땅 사람인데, 상당법문을 하려다가 마침
도행스님이 옆에 서있는 것을 보고 장난삼아 말하였다.
"사천성 중은 장난꾸러기 망나니이고 절강성 중은 말끔하다. 여러분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하
겠거든 나의 시자승을 보라."
이 말에 모든 대중이 껄껄대며 웃었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태상박사(大常博士)에서 삼구(三衢)태수로 나오게 되었을 때, 도행스님
은 어머니가 매우 늙었으므로 집을 찾아갔다. 문지기가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두번 세
번 들어가지 못하게 하므로 마침내 도행스님은 옷을 벗어 건네 주자 겨우 통과할 수 있었
다. 그의 모친은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거꾸러지면서 "내 아들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이냐!"하고 놀라며, 마침내 도행스님을 내실로 맞이하여 옷을 갈아 입히고 목욕을 하
도록 하였다. 스님이 목욕하는 사이에 옷을 모조리 새 옷으로 바꾸어 놓으니 도행스님이 울
면서 말하였다.
"내 몇해 동안을 그들과 한 식구로 지내왔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갑자기 버릴 수 있겠습니
까?"
그 길로 곧장 길상사(吉祥寺)를 찾아가 잠을 잤다. 이튿날 부모 형제가 모두 찾아가서 만나
려고 하였으나 도행스님은 첫 새벽녘에 떠나서 만날 수 없었고, 벽 위에 시 한 수가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 마음 쇠붙이 같다고 미워하지 마오
내 자신도 아직껏 안타까워 하나니
문 앞에 내린 눈 모두 쓸고 나면
바야흐로 불꽃 속에 연꽃이 피겠지요
온갖 일 다시는 묻지 말고
다같이 인연을 잊어버립시다
이 일을 이루는 날에
금강의 씨앗이 나타나리다.
莫嫌心似鐵 自己尙爲
掃盡門前雪 方開火裡蓮
萬般休更問 一等是忘緣
箇事相應處 金剛種現前

그의 어머니는 스님을 잊지 못하여 눈이 멀었다. 다시 괄창 땅으로 돌아오니 그의 아버지
가 남명사(南明寺)의 주지를 맡도록 강요하였고, 구주(¡州)오거사(烏巨寺)로 옮기자 스님의
도는 크게 떨쳐졌으며, 요주(饒州)천복사(薦福寺)에서 열반하였다. 묘희(大慧宗 )스님이 도
행스님의 어록에 손수 쓴 서문이 세상에 널리 전해오고 있다.

13. 소치는 노래 / 전우(典牛)스님

전우(典牛)스님은 성도(成都)사람이며 성은 정씨(鄭氏), 이름은 천유(天游)이다. 본래 관리
의 집안으로 고을의 초시(初試)와 재주(梓州)의 복시(覆試)에 모두 급제하였으나 천유는 이
를 마다하고 이름을 숨기고서 관문 밖을 나갔다. 때마침 산곡도인(山谷道人)황정견(黃庭堅)
이 촉 땅에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의 비범한 기골과 뛰어난 논변을 보았다. 마침내
그와 함께 배를 타고 여산에 갔고, 그는 머리를 깎았지만 옛 이름은 바꾸지 않았다.
맨처음 사심(死心悟新)스님을 찾아뵈었으나 기연이 맞지 않자 늑담사( 潭寺)담당(湛堂文準)
스님에게 귀의하였다. 당시 묘희 스님은 시자였고, 천유스님은 서사(書司)를 맡고 있었기에
아침저녁으로 서로 함께 지냈다. 그후 고약산(古藥山)에 가서 생사대사를 밝히고 여산의 소
보봉사(小寶峰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뒤에 운암산(雲岩山)에 주석하였다.
일찍이 충도자(忠道者)의 `목우송(牧牛頌)"에 화답시를 지었다.

두 뿔은 하늘로 향하고
네 발은 땅을 밟는데
코뚜레만 끌어당기면
소 칠 일이 어디 있겠나
兩角指天 四蹄踏地
斷鼻圈 牧甚屎

처음 장무진거사는 스님의 평범한 모습을 보고서 섬기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를 업신
여겨 "미친 놈 천유"라고 하였는데, 뒷날 묘희스님이 이 송(頌)을 바치자 그는 책상을 어루
만지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에 묘희스님이 물었다.
"상공(相公)은 한 번 말해 보시오. 이 송은 누가 지었다고 생각됩니까?"
"미륵대사(彌勒大士)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소?"
"이 송은 바로 지난날 `미친 놈 천유'가 지은 글입니다."
"이상하고 이상한 일이다! 담당스님에게 이런 아이가 있었다는 말인가. 임제의 온 종문이 여
기에 있구나. 전당포에 잡히면 돈 100관은 빌려 쓸 수 있겠다. 이 장상영의 눈도 별 게 아니
였어. 자칫하면 이 사람에게 잘못을 범할 뻔했군."
마침내 그는 향을 사르고 운암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천유스님이 뒤에 운암사에서 물러나와 여산 서현사(棲賢寺)를 지나가는데, 그곳의 노스님들
은 스님에게서 고집과 사천 사람의 기질을 보고는 그곳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서 도
리어 이렇게 물었다.
"노스님께서 바로 전당포에 잡힌 천유스님이십니까?"
스님은 이 말을 듣고 게를 짓고 떠났다.

전당포에서 소를 전당잡을 줄 알려는지?
물어줄 값이 너무 비싸 갚기가 어렵기 때문이지.
생각해 보니 그대에겐 근본 공부에 재주가 없는 듯하니
어떻게 이 소 한 마리를 받아들일 줄 아시겠소
質庫何曾解典牛 只緣償重實難酬
想君本領無多子 爭解能容者一頭

이를 계기로 무녕산(武寧山)에 암자를 짓고 40년 동안 주석하면서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
오지 않았는데, 도독(塗毒智策)스님이 그를 만났을 때는 이미 93세였다.

14. 하늘을 꾸짖는다[罵天]는 호를 가진 스님 / 불등 수순(佛燈守)선사

불등 순(佛燈守珣)스님의 호는 매천(罵天), 호주(湖州)안길(安吉)사람이다. 불감(佛鑑慧懃)스
님의 법제자로 화산사(禾山寺)의 주지를 지냈다.
어느 날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빈중빈(賓中賓)'이란 무엇입니까?"
"나그네의 길은 하늘처럼 멀기만 한데, 문에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바다처럼 깊구나."
"`빈중주(賓中主)'란 무엇입니까?"
"먼 길손 떠나보낼 때, 집 떠나던 생각이 나는구나."
"`주중빈(主中賓)'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만나 말에서 내리지 않는 것은 제각기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주중주(主中主)'란 무엇입니까?"
"하루아침에 조사의 명령을 시행하니 어느 누가 앞에 나설까?"
"`빈과 주[賓主]'에 향상사(向上事)가 있습니까?"
"향상사를 가지고 물어 보아라."
"향상사란 무엇입니까?"
"큰 바다가 만일 스스로 만족하면 모든 강물은 아마 거꾸로 흐르리라."
그 스님이 절하자 수순스님은 말하였다.
"이는 내(珣上座)가 30년 동안 공부해서 얻은 것이다."

15. 시기를 받다 / 개복사 영도자(寧道者)

개복사(開福寺)영도자(寧道者:?∼1113)는 흡주( 州)사람이며, 오조 법연(五祖法演)스님에게
공부하였다. 법연스님은 그의 고상한 뜻과 뛰어난 식견을 보고서 항상 대중 앞에서 그를 칭
찬하고는 그에게 당사(堂司)소임을 맡겼다. 그런데 도반들이 그를 시기하여 밤중에 산길로
끌고가서 이야기 끝에 때려서 얼굴에 상처를 입히니, 영도자는 대중법회에 나가지 못하였다.
법연은 이 소식을 듣고 몸소 찾아가 문병을 하고 물었다.
"듣자하니 그대가 한 떼거리 놈들에게 봉변을 당했다던데, 어찌하여 방장으로 찾아와 억울
함을 씻고 나에게 알려서 그놈들을 쫓아내지 않았느냐?"
그러나 영도자는 차마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말하였다.
"이는 제 스스로 다친 것이지, 다른 일에 관계된 것은 없습니다."
오조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나의 인욕이 그대만 못하다. 뒷날 어느 누가 그대를 어찌할 수 있겠느냐?"
뒤에 영도자는 개복사의 주지가 되어 회하에 500명의 대중을 수용하였다. 입적할 때에는 미
리 입적할 날을 정해 놓고서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으며, 월암 선과(月菴善果:1079∼1152)스
님에게 법을 전했다. 월암스님은 대중의 밑바닥에 묻혀 있었기에 아무도 그를 알지 못하였
지만, 원오(圓悟克勤)스님만은 그를 알고 있었기에 후일 그가 세상에 나가도록 도와주었고,
송을 지어 전송하였다.

흡산노인의 말후구를
명명백백 사절당(月菴이 주석한 곳)에 몸소 전하니
바른 법령 행하는데 그 기상 늠름하여
북두성에 쏘는 칼빛 하늘에 번뜩이네.
山老人末後句 的的親傳四絶堂
正令已行風凜凜 斗間劍氣燭天光

16. 원오스님에게 귀의하다 / 응암 담화(應菴曇華)선사

응암(應菴曇華:1103∼1163)스님은 처음 장산(蔣山)원오(圓悟)스님의 회중에 귀의하여 차암
경원(此菴景元:1094∼1146)스님과 도반이 되었다. 경원스님이 처주(處州)연운사(連雲寺)의 주
지로 있을 무렵, 담화스님이 호구 소륭(虎丘紹隆:1077∼1136)스님의 회중에 있다가 연운사를
찾아갔다. 처음 찾아왔는데도 경원스님은 그를 곧장 수좌를 시켰다가 얼마 뒤에 입승을 시
키고는 법상에 올라 설하였다.
"서하(西河)에 사자가 있다고 하더니만 이 연운사엔 호랑이(호구 소륭)새끼가 나타났다. 몸
소 사나운 호랑이 굴 속에 있다가 나오니, 털무늬가 또렷하고 발톱과 이빨이 모두 갖추어
있다. 아직은 많은 무리를 놀라게 할 수는 없지만 이미 소 잡아먹을 뜻이 있다. 그는 양기종
의 법령이 땅에 떨어져 자취가 없어질까 염려하여 무쇠 같은 등뼈를 한껏 곧추세우고 스승
과 함께 기염을 토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누군지 알겠느냐. 눈이 가락지같이 큰 사람, 바로
우리 앞에 서있는 이 사람이다."
스님은 뒷날 묘엄사(妙嚴寺)의 주지가 되었다. 호구(虎丘)스님을 위하여 향을 태우고 그 후
10년 동안 줄곧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의 도는 묘희스님과 견줄 만하였다. 시랑(侍郞)이호
(李浩)는 오랫동안 스님과 교류하였는데 일찍이 스님의 영정에 다음과 같은 찬을 썼다.

일생을 쉬지 않고 분주하더니
주지가 되자마자 문득 벗어버렸네
오늘날 또다시 영정 위에 나왔구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겠도다
平生波波 裳得箇院子住便打脫
而今又向幀子上出來 知他是死是活

17. 수견송(水 頌)목암 / 안영(木菴安永)선사

목암 영(木菴安永:?∼1173)선사는 복주(福州)장성자(章聖者)의 제자로, 유학을 버리고 불교
에 귀의한 사람이다. 그는 사제 안분(安分)스님과 도반이 되어 양서암(洋嶼庵)의 나암 정수
(懶菴鼎需:1092∼1153)스님을 찾아뵙고 모두가 크게 깨쳤으며, 이를 계기로 `수견송(水頌:`수
견'은 물을 끌어오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홈통)'을 지었다.

가파른 만길 벼랑길을 돌아들면서
물을 지고 달빛 받으며 몇번이나 쉬었던고
이 하나 홈통 속에 하늘로 통하는 구멍을 돌려놓으니
사람 스스로 편안하고 물 스스로 흐르는구나
路繞懸崖萬 頭 擔泉帶月幾時休
箇中撥轉通天竅 人自安閑水自流

묘희스님은 이 송을 보고서 "정수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니, 양기의 법도가 아직까지 쓸
쓸하지 않구나!"라고 감탄하였다.
뒤에 안영스님은 고산사(鼓山寺)의 주지를 지내니 강절(江浙)지방의 스님들이 모두 영(嶺)으
로 들어갔다. 송원(松源崇岳:1132∼1201), 무용(無用淨全 : 1127∼1207), 식암(息菴達觀:1138∼
1212)등 여러 큰스님이 모두 스님 회하에 있었으며 후일 천남사(泉南寺)에서 열반하였다.

18. 묘희스님에게 참구하다 / 직도자[一庵善直]

직도자(直道者)는 안주(安州)사람이다. 처음 회응봉(回應峰)아래 계신 묘희스님을 찾아뵙자
묘희스님이 물었다.
"스님은 어디 사람인가?"
"안주사람입니다."
"내가 듣자하니 너희 안주 사람들은 씨름을 잘한다는데 그게 사실이냐?"
이 말에 직도자가 곧바로 씨름할 자세를 취하자 묘희스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호남 사람이 물고기를 먹으면 호북 사람에겐 뼈다귀만 돌아간다 하더라."
직도자가 물구나무를 선 뒤 나가버리자 다시 말하였다.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 속에 콩알 만한 불씨가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직도자가 마침내 묘희스님의 회하를 떠나 강절지방을 지나갈 때, 삼구(三衢)땅의 승(陞)·식
(式)이라는 두 사람과 동행한 적이 있었다.
후일 금릉 보령사(保寧寺)의 주지를 지냈고, 묘희스님의 법제자가 되어 불법을 크게 떨쳤다.
유수(留守)인 승상(丞相)진준경(陳悛卿)이 여러 절의 주지를 모아 다회(茶會)를 연 자리에서,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등나무가 나무에 얽힌 것 같다"라는 공안을 들어 여러 주지에게 이
를 비판하도록 하였다. 여러 주지들은 모두가 교묘한 말로 승상의 비위를 맞추려 하였지만
오직 스님만은 맨 끝에서 다음과 같이 송하였다.

장씨도 기름을 짜고
이씨도 기름을 짜지만
혼신의 힘을 쓰지 않고
위에만 토닥거리는구나.
張打油 李打油
不打渾身 只打頭

진준경은 매우 좋아하였으며, 얼마 되지 않아 직도자는 장산(蔣山)의 주지로 옮겨가게 되었
다.

19. `정신없이 바쁜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다 / 혹암 사체(或菴師體)선사

혹암 체(或菴師體:1108∼1179)스님은 태주(台州)황암(黃巖)사람이다. 타고난 성품이 거칠고
소탈하여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대로 도맡아보니 위아래 도반들이 `체란요(體亂擾:정신없이
바쁜 사체)'라고 불렀다.
호국사(護國寺)에서 차암 경원(此菴景元)스님에게서 공부하였는데, 어느 날 나한전에서 수행
하다가 갑자기 창고 아래에서 얻어맞는 행자의 비명소리를 듣고 훤히 깨쳤다. 곧바로 경원
스님에게 달려가 말하니, 스님은 "이 막둥이가 앓다가 이제사 땀이 났구나!"라고 하였다. 얼
마 후 그에게 지객(知客)을 맡기고 그 후 도전(塗田)의 화주로 보내면서 송을 지어 전송하
였다.

어린아이 정수리에 세 개의 눈알을 달고서
팔꿈치에 험인(驗人)부적 열어젖히며
몽둥이로 죽이고 살리는 일 대단할 것 없으니
바다 건너 대장부가 되어 돌아와야 하느니라.
揷亞頂門三隻眼 放開 後驗人符
杖頭殺活無多子 截海須還大丈夫

그 후 할당( 堂慧遠:1103∼1176)스님에게 귀의하여 호구사(虎丘寺)의 수좌로 있다가 소주
(蘇州)각보사(覺報寺)의 주지로 나아가 차암(此菴景元)스님의 법을 이으니 그의 법이 크게
떨쳤다. 그 후 초산(焦山)으로 옮겼는데 군수 시랑(侍郞)증중궁(曾仲躬)이 항상 그에게 도를
물었으며, 스님이 입적했을 때 돌 벼루를 전해 주자 증시랑은 게를 지어 조문하였다.

외짝신으로 나는 듯 서풍을 따라가니
걸망 안에 아무것도 없네
벼루를 남겨두고 나더러 쓰라 하지만
늙은이 몸엔 허공을 가를 필력이 없구려.
翩翩隻履逐西風 一物渾無布袋中
留下陶泓將底用 老來無筆判虛空

스님의 열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쇠나무에 꽃이 피니
수탉이 알을 낳네.
일흔 두 해 만에야
요람의 줄을 끊누나.
鐵樹開華 雄鷄生卵
七十二年 搖籃繩斷

스님은 참으로 임제종의 싹[種草]이라 할 만하다.

20. 원오스님의 늦제자가 되다 / 할당 혜원( 堂慧遠)선사

할당 원( 堂慧遠)선사가 처음 무주( 州)금린산(金鱗山)의 주지를 지내고, 후에 건상(建上)
선적사(禪寂寺)의 청으로 그 곳의 주지로 가는 도중에 삼구(三衢)를 지나가게 되었다. 당시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이 오거사(烏巨寺)의 주지로 있었는데 혜원스님이 그를 찾아가 법
권(法眷:계보 권속)을 이야기하였다. 도행스님은 그와 이야기 한 후 기특하게 생각하여 열흘
간을 머물라 하고는 얼른 군(郡)으로 달려가 초연거사(超然居士)를 만나 말하였다.
"사백(師伯)원오(圓悟)스님이 늦게 둔 아들로서 사천 땅 출신 혜원이라는 스님이 있는데 어
제 나의 산사에 왔소. 머지않아 건상의 주지로 부임하려 하는데, 그곳 산이 깊고 외져서 안
타깝습니다. 거사께서 군수에게 말씀드려 이곳 어느 절에 그를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초연거사는 "곧 군수에게 말하여 그를 자호산(子湖山)정업선사(定業禪寺)의 주지로 임명하였
다." 이에 할당스님은 군수의 초청을 수락하고 대중설법을 하였다.

분수에 달갑게 여기면서 금린산을 굳이 지켜왔는데
그들이 선적사로 나를 잘못 불러들였네
도중에서 다시 어진 군수의 영을 받아
정해진 업은 피하기 어려워 자호산에 머무노라.
甘分金鱗困守株 誤他禪寂遠招呼
中途再領賢候命 定業難逃住子湖

얼마 후 보은사(報恩寺)의 주지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당시 묘희스님은 형양(衡陽)에 주석
하면서 스님의 이름을 듣고 법의와 함께 게를 보내왔다.

사천 땅 버릇없는 망나니는
참도 없고 거짓도 없이
하얀 몽둥이 하나로
부처가 찾아온다 해도 후려칠 것이다
한 가지 장점이 더 있다면
바리때 속에서 말을 달릴 줄 아는 것이지.
這川 詳 無眞無假
一條白棒 佛來也打
更有一般長處 解向鉢盂裡走馬

혜원스님은 뒷날 여러 사원의 주지를 지내다가 황제의 칙명으로 영은사(靈隱寺)의 주지가
되었다.

21. 깨진 사기그릇 / 밀암 함걸(密菴咸傑)선사

밀암 걸(密菴咸傑:1118∼1186)선사는 민땅( :福建省)사람이다. 처음 영(嶺)을 나와 무주(
州)지자사(智者寺)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는데 한 노스님이 물었다.
"상좌는 이번 행각을 어디로 갈 예정이오?"
"사명산(四明山)육왕사(育王寺)를 찾아가 불지(佛智本才)스님을 뵙고자 합니다."
"말세가 되어 도가 없으니, 후배 선승들이 행각에 한결같이 귀만 달고 다니지 눈이 없단 말
이야!"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육왕사에는 천명의 대중이 찾아와 노스님은 매일 그들을 맞이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너희들에게 착실하게 기연을 틔워줄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말에 밀암스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는 지금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길로 구주(衢州)명과사(明果寺)를 찾아가면 화편두(華扁頭:應菴曇華)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비록 후배지만 견식이 뛰어나니, 너는 그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
노스님의 말을 따라 밀암스님은 명과사 담화스님에게 귀의하였다. 담화스님의 가풍은 엄격
하여 들어가기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함걸스님은 갖은 고초를 꺼리지 않았다. 하루는 담화스
님이 방장실에서 그에게 물었다.
"바른 법안이란 무엇인가?"
"깨진 사기 그릇이 무슨 값어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허공이 다 녹아 없어졌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삐죽삐죽 주머니 속의 송곳자루가 불거져 나옵니다."
"같은 죄를 두 번 벌주지는 않는다."
담화스님은 즉시 법상에 올라 대중들에게 알렸다.
"크게 깨친 사람이 법당 앞에서 절벽이 무너지고 바위가 깨질 만한 말을 하였노라."
함걸스님은 담화스님을 의지하여 4년 동안에 많은 성인의 명맥(命脈)을 모조리 깨치고, 모친
이 연로하여 고향에 돌아가겠다 하니 담화스님은 게를 지어 전송하였다.

크게 깨쳐 기연에 맞는 말로
곧장 정수리가 확 트였고
사년을 함께 지내며
묻고 따져도 훤하여 흔적이 없네
아직은 의발을 전하지 않았지만
그 기상 우주를 삼키리라
바른 법안을
도리어 깨진 사기그릇이라 하였네
이 걸음 모친을 뵈러 가는 길이나
결코 눌러앉진 말아다오
나에게 말후구가 있으니
네가 돌아오거든 전하리라.
大徹投機句 當陽廓頂門
相從經四載 徵詰洞無痕
雖未付鉢袋 氣宇呑乾坤
却把正法眼 喚作破沙盆
此行將省覲 切忌便
吾有末後句 待歸要汝遵

뒷날 구주(衢州)오거사(烏巨寺)의 주지가 되어 학인들이 수없이 운집하자 상당법문을 하였
다.
"종전에는 거짓말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만 산에 불을 질러 밭사이의 골뱅이를 줍고, 하얀
해골 나무 위에 고기는 새끼를 낳고 세찬 여울 가에 새는 둥지를 튼다."
이 말은 모두 스님이 명과사에 있을 때, 깊은 밤에 나무꾼의 노래를 듣고서 무명[三漆桶] 을
타파한 화두이다. 스님의 비밀스런 기연은 헤아릴 수 없는 경지였다.
스님은 전후 일곱 차례나 큰 사찰의 주지를 지낸 후 태백산에서 열반하였다. 그러나 응암스
님의 도는 함걸스님의 힘으로 크게 행하여진 것이다.
참으로 행각하여 스승을 찾아가는 데에는 눈을 가지고 다녀야지 귀만 달고 다녀서는 안될
것이다. 비록 한 울타리 밑에 있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겪어 봐야 하며, 절의 크고 작음이나
대중의 많고 적음을 따라 세월을 허송해서는 안된다. 이 일에 있어서 바른 목적을 갖고 있
지 않다면 아무리 석가모니 뱃속을 지나쳐 왔다 해도 똥막대기에 불과함을 알아야 하니 어
찌 이를 가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22. 천동사의 수좌 / 차암 수인(且菴守仁)선사

차암 수인(且菴守仁)선사는 월주(越州) 상우(上虞)사람이다. 어려서 천태교(天台敎)를 익히
다가 처음 괄창(括蒼)땅에서 설당(雪堂道行)스님을 따라 구주(衢州)오거사(烏巨寺)를 지나는
길에, 때마침 설당스님의 보설(普說)법회를 듣게 되었다.
"지금 그대들이 공부하는 일은 마치 활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아서 먼저 발을 안정시켜
놓고 그 다음에 활쏘기를 배워야 한다. 뒤에는 비록 무심결에 쏘아도 오래 익혔기에 쏘는
족족 명중하게 된다."
그리고는 악!하고 할을 하면서 "지금 화살 날아간다!" 하니 수인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숙이며 화살 피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밝게 깨쳤다.
여름안거가 끝나자, 모친이 연로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인사를 드리니 설당스님이 게를
지어 전송하였다.

지난 날 유엄(惟儼)스님 `사상(事相)'을 모두 알고
신발 벗고 남쪽으로 큰스님 찾아갈 제
석두(石頭)로 가는 미끄러운 길 고생을 마다않고
몽둥이로 뒤통수 얻어맞으니 모든 게 마땅하구나
그대의 굳건한 뜻을 그 누구와 견주리오
괄창산 백련주(白練州)로 나를 찾아왔구나
거센 파도 소용돌이 치는 곳에
큰소리로 불러봐도 뒤돌아보지 않고
서산에 늙도록 함께 살자 하였더니
다시금 산넘어 고향길을 가겠다하네
돌아올 땐 아마 이 해도 저물겠지!
거기다가 조주에는 노두구(爐頭句)가 있으리라.
儼老昔年窮事相
脫履南游 宗匠
石頭路滑不辭勤
腦後一槌曾兩當
仁禪勁志許誰
訪我蒼山白練州
萬浪千波洶通處
果然呼喚不回頭
西山積老期同住
又設重尋越山路
歸時應是歲華深
趙州更有爐頭句

수인스님은 그후 매산(梅山)땅으로 돌아가 16년간 암자에서 살았다. 그 후 천동사(天童寺)
정각(宏智正覺:1091∼1157)스님이 대주(隊州)에서 상우(上虞)에 이르러 그의 암자에서 하룻
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침상을 맞대고 함께 이야기해 보고는 그를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였
다. 정각스님이 천동사로 돌아와 하안거가 끝나가도록 수좌(首座)를 맞이하지 않자 일 맡은
이들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아뢰었다. 정각스님은 우리 수좌가 조만간 이곳으로 올 것이
라 하고 시자를 월주(越洲)로 보내 수인스님을 맞이하였다. 수인스님이 천동사에 도착하자마
자 수좌실로 초빙하니, 대중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였으나 얼마 후 수인스님에게 불자
를 잡고 패(牌)를 걸게 하니, 대중들은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2년만에 굉지스님이 입적하자 묘희스님이 장례를 주관하였는데 동서 반열(班列)의 모
든 승려가 포복(布服:승려의 喪服)을 입었으나 수인스님만은 이를 입지 않았다. 묘희스님이
이상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묻자 수인스님은 은밀히 그 사유를 말하였다. 이에 묘희스님은 "
원래 이 사람은 설당 회하에서 온 사람이였군!"하였다.
그는 후일 장노사(長蘆寺)의 주지를 지냈으며 법석이 크게 융성하였다.
오대산 노파 화두에 대하여 지은 송이 있는데 학인들은 앞다투어 이를 읊었다.

등심초며 쥐엄나무 약초를 파는 점포를 열어 놓고
날마다 한 되 한 홉 사갈 사람을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는데
끊임없이 장마는 계속되어
본전 · 이자 모두 날리고 수심에 젖어 문전에 기대섰다.
開箇燈心 角鋪 日求升合度朝昏
只因霖雨連綿久 本利一空愁倚門

현모(顯謨閣學士) 여정기(呂正己)가 일찍이 스님에게 도를 묻고 떠나면서 게를 써달라 하
니 스님은 붓을 쥐었다.

그대가 오늘 이렇게 장노사에 왔는데
나의 옷 털어봐도 아무런 물건없네
가다가 만난 사람이 내살림 어떻더냐고 묻거든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거칠더라고 전해주오.
士今親切到長蘆 衣衫一物無
此去逢人如借問 但言風急浪華序

23. 참부처는 어디에 / 백양법 순(白楊法順)선사

백양 법순(白楊法順)선사는 면주(綿州)사람이다. 여러 해 동안 불조(佛照德光)스님에게 귀
의하였는데, 보설법회(普說法會)때 부대사(傳大士:497∼569)`심왕명(心王銘)"의 "물 속의 소
금맛이나 색깔 속의 푸른 아교는 결단코 있는 것이지만 그 형체는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 밝게 깨친 바 있었다. 그 이튿날 입실하자 불조스님이 물었다.
"참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정해지지 않는 곳에 계십니다."
"이미 참 부처인데 어찌하여 정해진 곳이 없다는 말인가?"
"정해진 곳이 있다면 그것은 참 부처가 아닙니다."
이 말에 불조스님은 고개를 끄덕끄덕하였다. 뒷날 그는 임천(臨川)에서 지내며 도를 크게 떨
쳤는데 상당 설법을 하였다.
"개는 황혼녘의 달을 보고 짖고 한밤중 등불에 바람이 분다. 지붕에는 고양이가 쥐를 잡고
세상에선 도인이 승려를 싫어한다. 서천의 망나니는 사람 부르는 것이 이상하고 고고하다
보니 세상사람 모두가 미워하네. 진실한 곳 산 속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되는대로 지
내는 인생, 흰 눈썹이 뽀얗다. 개울가의 바윗돌, 물에 씻기고 옛 불당의 깃발에 바람이 부는
구나. 여기에 낙처(落處)를 안다면 반드시 영산에 있으리라."

24. 개복사 영도자를 뵙고 / 월암선과(月菴善果)스님

월암 선과(月菴善果)스님은 신주(信州)연산(鉛山)사람이다. 처음 영도자(寧道者)를 친견하자
영도자가 물었다.
"상좌의 고향은 어딘가?"
"신주입니다."
"공부는 어디서 했는가?"
"연산 칠보사(七寶寺)입니다."
"보물은 얻어 왔느냐?"
선과스님이 두손을 펴 보이자 영도자는 쩌렁쩌렁한 소리로 할을 한번 하고 법당을 내려왔
다.
뒷날 그는 사심 오신(死心悟新)스님을 찾아뵈니, 사심스님이 `운문화타(雲門話墮)'의 화두
를 들어 설법하는 말을 듣고 법의 근원을 깊이 깨우쳤다. 그러나 그는 개복사를 후일 방장
실에서 이 화두에 송을 붙여 학인들에게 설법하니, 총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였다.

만길 벼랑 용문산, 허공에 매달린 듯
깍아지른 절벽에서 손을 놓아 고기가 용이 되고
세상 사람 모두가 낚싯줄 끝만 보았지
흰갈대꽃이 붉은 여뀌꽃 과 마주한 것은 보지 못하네.
萬 龍門勢倚空 懸崖撒手辨魚龍
時人只看絲綸上 不見蘆華對蓼紅

25. 조주감파 화두에서 의심이 풀리다 / 곡산 단(谷山倦)스님

곡산 단(谷山倦)스님이 처음 불성 태(佛性法泰)스님을 찾아뵈었을 때였다. 어느 날 법태스
님이 법당에 올라 "내가 여러분을 위해 오대산 노파를 간파하였다." 조주스님의 화두를 설
하고,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은 후,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숲에 갈 때는 누른 잎새를 한줌 긁어오려 했는데
산에 들어가 보니 흰구름이 밀려 나오는구려.
就樹撮將黃葉去 入山推出白雲來

단스님은 이 말 끝에 의심이 풀렸다. 이튿날 방장실에 들어가자 법태스님이 물었다.
"백장산(百丈山)의 전주지(前山主:여우가 된 노승)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어
째서 여우 몸에 떨어졌으며, 백장스님이 인과에 어둡지 않다고 하자 어째서 여우몸을 벗어
날 수 있었는가?"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법태스님은 계속 따져 물어 보았으나 대답이 모두 비범하여 얼마 후 그를 입승으로 세
우니 그의 명성은 당대에 진동하였다.
묘희스님이 유배되어 남녘으로 떠날 때 단스님이 송을 지어 바쳤다.

속인들 속에서 도를 행한다 세인들 시기마오
이 때문에 불일(佛日:묘희)이 흙비에 잠시 묻혀 있네
중생을 제도하는 자비원력 게으름 없어
바야흐로 남안 땅에 다시 나오셨구료.
異類中行世莫猜 故敎佛日暫雲
度生悲願還無倦 方作南安再出來

묘희스님은 보고서 매우 칭찬하였다.

26. 묘희스님에게 따끔한 지적을 받다 / 나암 정수(懶菴鼎需)선사

나암 수(懶菴鼎需)선사는 불심 본재(佛心本才)스님에게 귀의하였는데 본재스님이 대승사(大
乘寺)에 있을 때 그는 이미 수좌로 선방에 패를 걸고 학인들에게 `마음이 부처다'하는 화두
를 묻곤 하였다. 당시 묘희스님은 양서암(洋嶼庵)에 있었는데 정수스님의 도반 광장원(光狀
元:晦庵邇光, ?∼1155)스님이 편지를 보냈다.
"이곳 양서암 주지의 솜씨는 다른 총림과는 다르니 한 번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 좋겠다."
그러나 정수스님은 웃기만 할 뿐 답하지 않았다. 이에 광장원은 꾀를 내어 함께 식사나 하
자고 그를 불렀다. 정수스님이 그곳을 찾아가 산문에 들어서니 때마침 묘희스님의 개실(開
室)법회가 열리려던 참이었다. 정수스님도 대중을 따라들어가니 묘희스님이 물었다.
"한 스님이 마조(馬祖道一)스님에게 무엇이 부처냐고 묻자,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수스님이 이에 대하여 말하자 묘희스님은 그를 꾸짖었다.
"그런 견해로 감히 함부로 남의 스승노릇을 하느냐?"
이에 북을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 그가 평소 얻은 바를 말하게 하여 잘못된 견해를 물리쳐주
자 정수스님은 두 뺨이 눈물로 뒤범벅이 되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
해 보았다.
`내가 이제까지 깨달은 바는 이미 깨어졌지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전할 수 없는 종지는
어찌 여기에 그치겠느냐?' 그는 마음을 돌이켜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묘희스님이 물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밖에서 들어올 수 없는, 바로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정수스님이 무어라고 대답하려는데 묘희스님이 죽비를 들고 등짝을 후려치는 바람에 크게
깨치고 말을 이었다.
"스님! 그만하십시오. 이미 많이 때렸습니다."
묘희스님이 또 한 차례 때리자 정수스님은 넙죽이 절을 올렸다. 묘희스님은 웃으면서 "오늘
에야 비로소 내 너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겠지!"하면서 마침내 게를 지어 인가하였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니
몸 밖에 나머지 일이 없어라
아서라! 이 눈먼 당나귀가
정수에게 전해 주노라.
身心一如 身外無餘
這 驢 付與鼎需

이로부터 그의 이름은 총림에 진동하였고 세상에 나아가 천주(泉州)연복사(延福寺)의 주지
를 지내다가 서선사(西禪寺)로 옮겨왔다.
대중에게 법문을 하였다.
"허공에 칼을 걸어놓고 우리 종지를 밝히니 법좌에 앉은 선사의 위엄에 어찌 다가설 수 있
으랴. 그러나 하늘 땅을 뒤바꾸고 번갯불을 말아들이며 별똥을 튀는 수단이 있다 하여도 맞
수가 되지는 못하리라. 여기서 길흉을 가려낼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나와라. 만나보자꾸나.
조금치만 우물쭈물하다가는 한 방에 가루를 내버리겠다."
그리고는 할을 한번 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또한 동짓날 대중법문을 하였다.
"25일 이전에는 많은 음(陰)이 엎드려 있어, 흙 속에 묻힌 용이 문을 닫고 있다가 25일 이후
에는 하나의 양(陽)이 회복되어 쇠나무에 꽃이 핀다. 막상 25일에는 세속의 술취한 자들이
나귀타고 말을 타고 마을과 거리에서 서로가 축하하지만, 세간을 초월하여 한가한 사람은
납의를 머리에 덮어쓰고 화로 곁에 둘러앉았다. 바람도 으스스 비도 으스스 을씨년스럽게
차가운데 그대가 장선생인지, 이도사인지, 되놈 달마인지 무슨 관계이겠는가."
또 한 번은 대중법문을 하였다.
"막야 명검 비껴놓고 어루만지며 하늘을 꿰뚫으려고 괜스레 호기를 부리다 부질없이 정신만
허비하였네. 설령 신비한 칼날을 움직이지 않고서 편히 앉아 태평시대를 이룬 성군 요순도
오히려 교화했다는 찌꺼기가 남아 있었지."

27. 초산 풍월정을 읊은 한 관리의 시를 평하다 / 월암 선과(月菴善果)스님

송(宋)소흥(紹興:1131∼1162)연간에 한 관리가 있었는데, 초산(焦山)에 갔을 때 풍월정(風月
亭)에 시를 붙였다.

소나무 끝에 부는 바람 너무 맑아 머물 수 없고
강물에 어린 달빛 담담히 잠기려 하다
솔바람 원래 물외(物外)의 것임을 알고서야
강 달이 내 마음과 같은 줄을 비로소 알았노라.
風來松頂淸難立 月到波心淡欲沈
會得松風元物外 始知江月似吾心

이 시를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고 칭찬해 마지 않았는데 월암 과(月菴善果)스님이 행각하던
중 이곳에 와서 이 시를 보고서, 시가 좋기는 좋지마는 안목이 없다고 하니 같이 앉았던 사
람 하나가
"어느 곳이 안목이 없소?"
"소승이 두 글자만 고치면 안목이 나타날 것이오."
"무슨 글자를 고쳐야 합니까?"
"어찌하여 이처럼 말하지 않았는지…"하며 두 글자를 고쳐 읊었다.

솔바람 물외의 것이 아님을 알고서야
강 달이 내 마음인 줄을 비로소 알았노라.
會得松風非物外 始知江月卽吾心

좌중이 크게 감복하였다. 참으로 공부를 할 때에 안목이 열린 자의 견해는 이처럼 다르다.
더구나 월암스님은 시를 익힌 일이 없는데도 이처럼 요지를 끄집어내니, 이야말로 한 방울
의 물만 얻어도 능히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뿜어내는 용과 같은 인물이 아니겠는가? 우리
들이 행각하는 일은 내 자리에서 나의 본분사를 결판짓는 것이지 외학(外學)을 전공하는 데
있지 않다. 오랜 세월이 지나 안목이 열리면 자연히 모든 부처님의 눈동자를 가려낼 수 있
을 터인데, 하물며 세간의 문자 따위야 어떠하겠는가.

28. 꿈속에서 지은 시 한 수 / 굉지 정각(宏智正覺)선사

굉지 정각(宏智正覺)선사가 원통사의 주지로 있을 때 어느 날 꿈속에서 시 한 구절을 지었
다.

빽빽한 솔밭길 아름다운 문에
희미한 달 아래 황혼녘 되어 이르렀네.
松徑蕭森窈窕門 到時微月正黃昏

이로부터 몇 해 동안 그 시를 까마득히 잊은 채 지내왔는데 건염(建炎:1127∼1130)연간에
오랑캐를 피하여 삿갓 하나를 쓰고 절강(浙江)동쪽을 지나 천동사에 이르니, 때마침 천동사
는 주지가 물러난 뒤였다. 스님이 배에서 내려 첫 새벽을 뚫고 산에 들어가니, 마치 날이 밝
은 때처럼 빽빽한 솔밭길이 고요한데 가는 연기 아지랑이 속에 달빛은 싸여 있었다. 이에
갑자기 지난 꿈속의 시구(詩句)가 생각났다. 객사에 들어가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스님
들 가운데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있어 "장노사(長蘆寺)노스님 아니십니까. 어떻게 여기에
오셨습니까?"하고서, 주사(主事)에게 알리고, 주사는 그 고을 부사(府使)에게 알리니 부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부사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천동사의 주인은 바로 습주(褶
州)의 고불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부사는 곧 첩지(帖紙:임명장)를 내려 관리를 객사
에 보내 천동사의 주지로 초빙하였지만 스님은 굳이 이를 거절하고 응하지 않았는데 객사의
스님들이 억지로 들쳐메고서 방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30년 동안 주지하여 이로부터 조동
의 종풍은 크게 떨쳤다.
참으로 사원의 주지가 되는 인연도 애초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구차스럽게 구한다고 되는 일
이 아니다.

29. 개당할 때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다 / 원극 언잠(圓極彦岑)스님

원극 잠(圓極彦岑)스님은 태주(台州)선거(仙居)사람으로, 고고한 절조를 지녀 근세에는 그
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운거 법여(雲居法如:1080∼1146)스님에게 오랫동안 귀의하여 17년
동안 서사(書司)를 맡아보았는데 법여스님이 입적하자 지팡이 하나 들고 절강 땅으로 돌아
와 도량사(道場寺)의 정당 명변(正堂明辨:1085∼1157)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얼마 후 명변스
님은 그를 수좌로 삼은 후 삽주( 州)변산사(卞山寺)의 주지로 나가도록 하였는데, 그곳은
석림(石林)선생이 역(易)을 강의하던 곳이기도 하다. 명변스님의 생각으로는 이번 개당(開
堂)에서 자기를 위하여 향을 올리리라 생각했었지만 언잠스님은 끝내 운거 법여스님의 법을
이으니, 총림에서는 그를 우러러보았다.
뒤에 스님은 여러 대찰(大刹)의 주지를 지냈지만 복받을 인연이 순탄하지 못하여 세상살이
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이를 개의하지 않고, 일생동안 시주로 들어오는 재물에 눈길
한번 둔 일이 없었다. 그 후 상주(常州)화장도량(華藏道場)에 은퇴하여 세상을 마쳤으며, 그
의 어록 20권이 세상에 전해오고 있고 시랑(侍)증중신(曾仲身)이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언잠스님은 장노 차암(長蘆且菴)스님의 영정에 찬을 썼다.

깊은 밤중에 해를 밀어서 내놓고
날 밝으면 달을 붙잡아 둔다
수미산 사부주(四部州)를 뽑아들어
한 톨의 좁쌀 속에 집어 넣는다
줄없는 거문고를 켜지만 이상곡(履霜曲)이 아니며
오랑캐의 노래를 부르지만 백설곡(白雪曲)이 아니라
큰 대장장이는 끊어진 광맥의 금을 담금질하고
모진 방망이는 흠없는 구슬을 때려 부순다
동쪽 호수의 붉은 꼬리 잉어가
황금빛 무쇠 송아지를 낳는구나.
夜半推出日輪
天明把住桂
拈將四部洲
放在一粒栗
奏無絃而非履霜之樂
唱胡歌而非白雪之曲
大治 絶鑛之金
痛鎚碎無瑕之玉
東湖赤梢鯉魚
生出金毛鐵犢

30. 상당법문 / 혼원 담밀(混源曇密)스님

혼원 밀(混源曇密:1120∼1188)스님이 자택산(紫택山)의 주지로 있을 때 상당법문을 하였다.
"구름덮인 산은 아득하고 아름드리 나무는 울창한데, 옛 집은 가물가물하고 총림은 적막하
구나. 나 혼원이 여기에다 가시나무를 심고 찔레 덤풀을 깔아 바깥과 굳게 막아 놓았으니
어느 누가 감히 바른 안목을 훔쳐볼꼬? 갑자기 한 놈이 나타나 여기서 몸을 돌려 숨을 쉰다
면 진한 차 서너 잔을 대접하겠다. 그 뜻은 쟁기 끝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뾰족한 청산의
험한 길에서 푸른 하늘이나 볼 일이다. 공공연히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지 말라!
봄 날씨 따뜻하고 꾀꼬리 지저귀는데 다시금 절벽 위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노라. 봄 산
에 싸인 푸른 빛 속을 느릿느릿 걸어서 돌아올 땐 저 멀리 나는 새와 누가 함께 할꼬? 이렇
게 돌아오는 한마디를 무어라 부를까. 팔굽혀 베개삼고 누워 저녁 종소리를 듣노라."

31. 승려를 업신여기는 형조관리에게 따끔한 편지를 쓰다 / 부정공(富鄭公)

정국공(鄭國公)부필(富弼)은 투자 수옹(投子修)선사에게 공부하며 제자의 예를 다하였고,
인품이 신중하며 마치 처음 배우는 사람같았다. 뒷날 비부(比部:刑曹)의 우두머리 장은지(張
隱之)가 그의 세력을 빙자하여 승려들을 업신여기자 정국공은 마침내 그에게 편지를 보냈
다.

"선가(禪家)의 사람들은 보통, 첩경으로 하지 않고 번잡스럽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갈등(葛藤)'이라 하여 이를 천하다고 나무라기도 하며 마침내는 갈등가를 지어 문집에 게
재하기도 한다. 나 부필은 일찍이 그 까닭을 생각해 왔는데 오늘 그대와 함께 생각해 보려
하니, 어떻겠소?
세속의 선비와 승려들의 본성(本性)이나 식견이야 애당초엔 터럭끝만의 차이가 없겠지만 그
들의 사적(事蹟)은 매우 다른 점이 있다. 우선 승려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오랫동안 불경을
보면서,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부처에 관한 일들이다. 머리를 깎은 뒤에는 도반과 짝을 지어
행각하며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참선하고 도를 묻는 이외엔 대중생활을 한다. 견문이 해박하
고 핵심적인 데다가 한없이 귀와 눈으로 보고 듣는다. 이렇게 해서 도가 성숙되다가 어느
날 눈 밝은 스승의 지적을 받고 그자리에서 견처가 생기면 그 때는 자신이 이제껏 보고 들
은 바를 가지고 스스로 증거를 삼으니, 어찌 명백하고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 세속의 선비들이란 어릴 때부터 세속 일에 젖어 살다가 커서는 아내를 두고 자
식을 기르며 생활을 꾀하고 벼슬길로 나아가기에 바쁘니, 경전 류는 일찍이 손에 잡아보지
도 않는다. 설령 한가한 시간에 경전을 읽고, 즐긴다 해도 이야기 밑천이나 삼기 위해서일
뿐이니, 어떻게 그 깊은 진리를 깨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모든 이는 제
각기 그들의 일에 매여 있어 그들이 선림법석이 있는 줄을 알고서 설령 그곳을 찾아가 참구
하고 싶다한들 어떻게 갈 수 있으며, 어떻게 도반과 짝이 되어 산사를 행각하며 참선하고
도를 물을 수 있으며, 대중과 함께 해박한 견문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만에 하나 눈
밝은 스님을 어느 계기로 만날 수 있다 하여도 아무런 공부가 없는 터에 얼마나 들을 수 있
으며 얼마나 얻을 수 있겠는가? 묻는 것도 없이 보고 들은 것으로 스스로 증거를 삼고, 더
이상 널리 묻거나 깊이 연구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겨우 한 두마디 듣고 그것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눈은 높아 은하수를 바라보고 콧대는 하늘 끝에 닿도록 거드름을 피운다. 제
스스로 `나는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었으며 수많은 성인이 모두 나의 발 아래 있노라'고 으
스대며 불경이나 선종의 서적은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것만으로 갈등이라는 비난을 피하려
고들 한다. 그러나 이 부필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배우지 않으려면 그만이겠지만 만일 몸과 마음을 결택하기 위하여 배운다면 빈틈없이 치밀
하게 탐색해야 할 것이다. 철두철미하게 뼈속에 사무치도록 깨달아 모든 것이 그대로 완전
한 맑은 광명으로서 한 점 티끌도 가리우지 않도록 한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그대에게 고개
를 숙이리라.
은지여! 이 일은 결코 하찮은 게 아니다. 당장에 무시이래로 있어 온 생사의 뿌리에서 벗어
나 생사를 관장하는 염라대왕과 맞서야지, 사람들의 쓸모없는 말을 듣고 참선을 배울 것이
라고 자신을 속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대에게 만복이 깃들기를 빌고 빌면서 부필은 비부(比部)집사(執事)에게 글을 띄우노라."

32. 어제는 숲 속의 나그네, 오늘은 법당의 주지 / 초당 선청(草堂善淸)선사

초당 청(草堂善淸)선사는 회당(晦堂祖心)스님을 친견하여 깨친 바 있었으며, 그 후 강제(江
制)지방을 두루 돌아다닌 후, 여산(廬山)늑담사로 진정(眞淨克文)스님을 찾아뵙자 스님이 그
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하강(下江)에서 왔습니다."
"무엇을 가져왔느냐?"
"스님께선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그러자 선청스님이 좌구를 들어올리니 진정스님이 말하였다.
"쓸모없는 세간살이로군!"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한번 꺼내놔 보아라."
선청스님이 좌구를 내동댕이치고 나가버리자 진정스님은 크게 놀랐다.
뒷날 선청스님은 황룡사의 주지로 나아가 상당법문을 하였다.
"어제는 숲 속의 나그네더니 오늘 아침엔 법당 위의 주지로다. 버리고 취하는 게 모두 나에
게서 비롯되니 만상 가운데 홀로 나의 몸이 드러나네."
그 다음해에 주지에서 물러나 절 동편 모퉁이에 암자를 짓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지내다가
다시 주지가 되어 상당법문을 하였다.
"초당에서 6년 동안 숨 죽이고 살면서 마음 잊고 바깥 경계 고요하여 모든 인연 비웠노라.
정해진 업이란 어디에서 생겨나 예전처럼 나에게 조사의 종지를 잇게 하는지 알 수 없구
나."
그후 조산(曹山)과 소산(疏山)등의 주지를 지냈으나 대부분 늑담사에서 살았다. 그때의 나이
이미 83세였으나 여러 곳의 큰 선비와 뛰어난 도인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33. 나한상을 닮은 스님 / 자항 요박(慈航了朴)선사

자항 박(慈航了朴)선사는 민( )사람으로 훤출한 기골에 검은 얼굴로 마치 나한(羅漢)처럼
생겼다. 무시 개심(無示介諶)스님의 법을 이어, 처음엔 명주(明州)여산(廬山)의 주지로 있다
가 육왕사로 옮겼으며 얼마 후 세력있는 자의 주선으로 해하(海下)만수사(萬壽寺)로 옮겨왔
다.
응암(應菴曇華)스님이 천동사에서 입적하자 태수가 그의 소문을 듣고 그 자리를 잇도록 하
였는데, 그날 밤 태백산의 노스님들이 모두가 무쇠 나한[鐵羅漢]이 배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으며, 또한 그와 같은 옷을 입은 자가 글을 지어 올렸다.

예전에 무봉(峰:育王寺)에 오를 때는
나뭇잎새처럼 몸이 가벼워
내 얼굴 부끄러웠는데
지금 장경산(長庚山:천동사가 있는 太白山)에 올라오니
그의 도가 삼산(三山)보다도 무거워
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빛이 있구나
흔쾌히 불계산(佛 山)을 떠나
큰 파도를 건너
깊은 골짜기에서 큰 아름드리 나무로 옮겨가니
우리 불교 빛나도다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나라를 조그맣다 하니
그때는 정말로 그랬지만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昔去 峰而身輕一葉我無面見顔
今上長庚而道重三山人有喜色
快離佛
利涉鯨波
出幽谷而遷喬木
光乎此道
登東山而小魯邦
允也其時
自此以還未知

그 후 22년 동안 그곳에 주지를 하였는데 황제의 아들 위왕(魏王)을 비롯하여 사위공(史魏
公)이 모두 그의 도덕을 존중하였으며, 순희(淳熙:1174∼1189)초에는 효종(孝宗)이 태백명산
(太白名山)이라는 네 글자를 몸소 써서 하사하였다.
요박선사가 여산의 주지로 있을 때 상당법문을 하였다.
"덕산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몽둥이질을 하였고, 임제는 문에 들어서자마자 할을 하였다. 덕
산의 몽둥이에 귀가 먹고 임제의 할 소리에 눈이 멀었다. 그러나 한 번 누르고 한 번 쳐들
어 그런 가운데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구나."
그리고는 할을 한번 하고 주장자를 높이 들어 탁자를 내려친 뒤, "여러 사람에게 묻노니 이
것이 살리는 것이냐 죽이는 것이냐?"하였다.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군자가팔(君子可八)이로
다."하였다.

34. 운문의 도가 그에게서 끊기다 / 이암 심(已菴深)선사

이암 심(已菴深)선사는 영화(永和)사람이며, 치선 원묘(癡禪原妙)스님의 법제자이다.
한번은 치선스님이 송을 지어 그를 전송하였다.

그대 보내려니 회심(懷深:1077∼1132)사숙 그리워라
두 눈엔 예전처럼 두레박 소리 선하구나.
送君還憶深師叔 兩眼依前聽 ?

후일 그는 온주(溫州)보은사(報恩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동짓날 소참 법문을 하였다.

1 2 3 4 5
5 4 3 2 1
찬 바람이 얼굴을 후려치는데
울타리에 바람소리 을씨년하구나.
一二三四五 五四三二一
寒風劈面來 籬頭吹 栗

그리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내가 그 당시 객실에 있다가 그 법문을 듣고 그가 운문종(雲門宗)의 종지를 얻었음을 알았
는데 애석하게도 그를 이을 법제자가 없어 소양(韶陽:운문)의 도가 그에게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35. 너무 준엄하여 제자를 두지 못하다 / 월당 도창(月堂道昌)선사

월당 창(月堂道昌:1089∼1171)선사는 묘담(妙湛思慧:1071∼1145)스님의 법제자로 고고한 기
풍이 매우 준엄하여 스님을 찾는 학인이 드물었다. 도창스님은 여러 절 주지를 두루 역임하
다가 남산(南山) 정자사(淨慈寺)에서 입적하였다. 지문 광조(智門光祚)스님의 법의(法衣)가 7
대를 전해 내려오다가 도창스님이 열반한 후 아무도 그의 법통을 이을 만한 사람이 없어 고
이 법의를 접어 보관한 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러므로 할당 혜원( 堂慧遠)스님이 세
운 부도에 이런 구절이 있다.

30년 동안 용을 잡고 봉을 잡으려고 헛고생만 하였으니
불조의 혜명이 발바닥에 바르는 기름처럼 되었고
운문의 정종이 버선줄기 터지듯 끊어졌구나.
三十載羅龍打鳳勞而無功
佛祖慧命如塗足油
雲門正宗如折襪線

아!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36. 선림의 장원감/ 귀산 미광(龜山邇光)선사

귀산사(龜山寺)의 미광(邇光)선사가 양서암 묘희 스님에게서 공부할 무렵, 반년이 지나도록
입을 열 기회가 전혀 없었는데, 하루는 입실하자 묘희스님이 물었다.
"죽을 먹고 바리때를 씻었거든 이것 저것 가릴 것 없이 한 마디 해 보아라."
미광스님이 "찢어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묘희스님은 무서운 얼굴로 "또다시 여기와서 선
을 말할테냐?"라고 하였다. 미광스님은 그 말에 크게 깨치고 온몸에 땀을 흘리며 절을 올리
니 묘희스님은 게를 지어 인가하였다.

거북이 털을 뽑고 나서 하하하 웃는구나
일격에 만겹의 관문사슬을 열었도다
평생에 경사스러운 날 바로 오늘이로세
누가 말하랴, 나를 되팔아먹으려고 천리 길을 왔었다고.
龜毛拈得笑哈哈 一擊萬重關鎖開
慶快平生是今日 孰云千里 吾來

이에 대하여 미광스님은 `투기송(投機頌)"을 지어 올렸다.

기연만나 부딪치고 천둥소리 으르렁대니
놀라 일어난 법신 북두성에 몸 숨기네
드넓은 물결 위에 성난 파도는 하늘에 닿고
콧구멍을 뽑아내니 입을 잃었구나.
當機一 怒雷吼 驚起法身藏北斗
洪波浩渺浪滔天 拈得鼻軫失却口

묘희스님이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선림의 장원감이다" 하여 이를 계기로 미광스님은 `광장
원(光狀元)'이라 불리게 되었다.

37. 난리가 났는데도 / 자득 혜휘(自得慧暉)선사

자득 휘(自得慧暉:1097∼1182)스님이 장노 조조(長蘆祖照:1057∼1124)스님의 회하에 있을
무렵, 난리가 일어나 대중이 모두 흩어졌는데 스님과 종백두(宗白頭:1085∼1153)스님만이 꼼
짝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스님은 속으로 생각하기를, 참선이란 본래 생사와 대적하는 것이
니 어찌 이러한 난리로 도망할 수 있겠는가, 또한 나의 몸은 허약하니 피난을 간다 해도 도
중에 잡힐 것이 아닌가 하였다. 폭도가 쳐들어와 보니 대중들은 모두 떠나갔는데 오직 혜휘
스님만이 법당 안에 앉아 좌선을 하고 있기에, 다투어가며 화살로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
다. 혜휘스님은 고요히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화살 한 개가 스님의 소맷자락을
뚫고 궤짝에 맞았다. 이로부터 스님은 사지를 덜덜 떠는 병을 얻게 되었다. 종백두는 창고에
앉아 있었는데 도적이 그를 발견하고 결박지어 쏘아 죽이려 하자 한 직세승(直歲僧:회계를
맡아보는 스님)이 곁에 있다가 그들 앞으로 다가서며, 자기를 대신 죽여달라고 여러 차례
간청하니, 도적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저 사람과 어떤 관계냐?"
"이 스님은 참선을 해 마친 분이다. 뒤에 큰 선지식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 중생을 제도하실
터이지만 나는 참선을 하지 못하였으니 죽는다 하여도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대신
하고자 한다."
도적들은 그의 말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두 사람 모두 풀어 주었다.
후일 종백두가 명주(明州)취암사(翠巖寺)의 주지로 있을 때 그의 도가 크게 떨치게 되었다.
지난 날 목숨을 대신하겠다던 자도 그의 회하에 있었는데 종백두는 항상 그 사람이 자신을
다시 낳아 준 부모라고 하였다. 진실로 참선하는 이에게 바른 발심만 있다면 반야에 어찌
영험이 없겠는가.
*

38. 개선 도겸(開善道謙)선사의 전기

개선 겸(開善道謙)선사는 건령(建寧)사람이다. 처음 서울로 가서 원오 극근(圓悟克勤)스님
을 찾아뵈었으나 깨친 바 없었다. 그 후 묘희스님을 따라 천남산(泉南山)에 암자를 짓고 살
았는데 묘희스님이 경산(徑山)에 주지로 가자 도겸스님은 묘희스님을 모시고 그리로 갔다.
얼마 후 묘희스님이 그를 장사(長沙)에 보내 자암거사 장위국공(紫巖居士 張魏國公:張浚)에
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자 도겸스님이 스스로 생각해 보았다.
`내, 20년 동안 참선을 했지만 아무 것도 깨친 바가 없는데 다시 이 길을 가게 된다면 결정
적으로 나의 공부가 황폐해질 것이다.' 내심 가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의 도반 죽원암주
(竹原菴主)종원(宗元:1100∼1176)스님이 "길을 간다고 참선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대
와 함께 가겠다."하며 꾸짖었다.
이에 도겸스님은 마지못해 길을 떠났는데 길가는 도중에 종원스님에게 울면서 하소연하였
다.
"내, 일생동안 참선을 했지만 하나도 얻은 바 없었는데 또다시 길 위를 분주하게 돌아다니
니, 어떻게 깨칠 수 있겠느냐?"
"그대는 어찌해서 여러 총림에서 참구했던 것과 깨친 것과 또한 원오 · 묘희 두 스님이 그
대에게 말씀해 주신 이치를 모두 이해하지 않으려고만 하는가. 가는 길에 그대를 대신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 모두 대신해 주겠다. 그러나 오직 다섯 가지 일만은 대신해 줄 수 없으니
네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그 다섯 가지 일이란 무엇인가? 그 말을 듣고 싶다."
"옷입고 밥먹고 똥누고 오줌누고 이 시체를 끌고 길을 가는 일이오."
도겸스님이 이 말에 크게 깨치고 자신도 모르게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사형이 아니었다면
내 어떻게 이러한 경지를 얻었겠소"라고 하니, "그대가 이제야 비로소 자암거사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겠으니, 나는 돌아가겠다" 하고 종원스님은 곧바로 건상(建上)으로 돌아가고 도겸
스님은 그 길로 장사에 이르러 그곳에서 반년을 머물렀는데 진국부인(秦國夫人:장위국공의
어머니)도 스님으로 인하여 대사(大事)에 큰 마음을 일으켰다.
마침내 쌍경사(雙徑寺)로 돌아오자 묘희스님은 지팡이를 짚고 문에 기대 기다리고 있다가
도겸스님을 보자마자 말하였다.
"건주 아이야! 이번 길에 떠나갈 땐 이 노승을 원망만 했을 것이다마는 그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매일 더욱 깊은 경지를 쌓아 뒤에 현사산(玄沙山)의 주지로 나갔다.
한번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서축 땅 큰 신선의 마음은 동과 서가 은밀하게 맞는다고 하였는데 은밀히 맞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다시 말하였다.
"8월 가을날 어디가 덥단 말인가?"
다시 말하였다.
"부처를 설하고 법을 설함은 소경과 귀머거리를 속이는 일이며, 성품을 논하고 마음을 논함
은 스스로 함정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다. 몽둥이와 할은 세력을 힘입어 사람을 속이는 일이
며, 눈을 깜박거리고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은 들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아니라 해도 그것은 고함지르면서 산울림이 멈추기를 바라는 격이며, 별달리 대
단한 일이 있다 하여도 그것 또한 허공에 하소연하는 격이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인가? 흰
구름 다한 곳이 푸른 산인데, 저 길손, 또 다시 청산 밖에 있노라."

39. 달마스님 찬 / 정당 명판(正堂明辨)선사

정당 명판(正堂明辨:1085∼1157)스님은 불조(佛照)스님의 법을 이었다. 처음엔 그의 도가
떨치지 못했는데 그것은 초학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의 가풍이 매우 엄하였으므로 대중들은 그를 두려워하여 피하였다. 제삿날에는 패(牌)만 한
차례 걸어놓고 마니, 주사(主事)가 이에 대하여 언급하자 명판스님이 말하였다.
"내 이미 패를 걸어놓았는데 무엇하러 또 사찰의 자산을 낭비하는가? 금강권(金剛圈)과 율
극봉(栗棘蓬:밤가시)을 삼켜버릴 줄 모르거든 평상시 공양처럼 해야 한다."
주사는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그는 달마스님에 대해 찬(贊)을 썼다.

승원궁(양무제의 궁전)앞에서 부끄러워 말 못하다가
낙양봉(洛陽峯:소림사)아래에서 떠벌리도다
가죽과 골수 전하여 이야기거리가 되고
한쪽 신발을 묻을 곳이 없네
아! 보통 차가운 날씨가 아닌데
매화향기가 코끝에 스치는구나
昇元展前 ? 羅 洛陽峰畔乖張
皮髓傳成話 隻履無處埋藏
不是一番寒徹底 爭得梅華撲鼻香

설당(雪堂道行)스님이 이 찬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스승(先師)에게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이 찬(讚)만으로도 천하 사람의 혓바닥을 잘라 버릴 수 있겠다"라고 감탄하였다. 이
로 말미암아 납승들이 앞을 다투어 그의 회하로 달려갔으며 후일 삽주( 州)도량산(道場山)
에 있을 때는 대중이 500여 명에 이르렀다.

40. 죽원암주(竹原菴主)의 법문

죽원암주(竹原菴主:宗元)는 건령(建寧)사람이다. 출가하여 묘희스님을 찾아뵙고 종지를 깨
달은 뒤, 고향으로 돌아와 암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여러 사찰에서 주지로 그를 초청하였으
나 가지 않았다.
일찍이 법어를 여러 차례 남겼다.

"여러 총림에서 학인들을 지도하는 방편은 그들의 마음에 박힌 못과 말뚝을 뽑아주고 달라
붙은 것과 속박을 풀어주는 데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한결같이 못과 말뚝을 더 깊게
박아주고 더욱 달라붙게 하고 속박하여 그들을 깊은 연못 속으로 들여보내 스스로가 알도록
한다."

"참선이란 반드시 이 하나[一着子]를 투철하게 뚫어야 한다. 큰 법을 깨쳐도 밝지 못한 자가
반드시 있다. 큰 법을 비록 밝혔다 하여도 자기 발 밑의 세속 인연을 끊어버리지 못한 자가
즐비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여러 총림에서 이런 말을 듣고는 모두 이 노승에게 욕을 한
다. `이미 큰 법을 밝혔는데 또 무슨 발 밑의 세속 인연을 끊지 못하였냐'고 그들을 이상하
게 볼 수는 없지만 그들에겐 이 한 가지 깨달음이 부족하여 모든 게 의심이 되기 때문이
다."

"이 하나는 마치 살인자와 맞부딪치는 것과 같아서 그대들이 죽이지 못하면 그가 그대들을
죽일 것이다. 신통하구나. 대장부의 견해란 이런 것이다."

41. `한 번 찧은 쌀'이라는 별명이 붙은 스님 / 수암 사일(水菴師一)선사

수암 일(水菴師一:1107∼1176)선사는 무주(務州) 동양(東陽)사람이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
여 총림에서는 그를 `일조(一 :한 번 찧은 거친 쌀)'라 불렀다. 오랫동안 월암 선과(月菴善
果)스님에게 공부하였는데, 선과스님은 늘 `운문화타(雲門話墮)'의 화두를 가지고 물었다. 하
루는 그가 한마디를 던졌다.
"영산 회상의 수기는 모름지기 스님이라야 받겠습니다."
또한 일찍이 송을 지었다.

열여섯 곱디고운 아가씨 아름다운 몸매로
사뿐한 비단옷에 향기 휘날리며
꽃밭에 숨었다가 서서히 일어나니
노란 꾀꼬리 버들가지에 내려앉네.
二八佳人美態嬌 繡衣輕整暗香飄
偸身華圃徐徐立 引得黃鶯下柳條

월암스님이 큰 그릇으로 여겼는데 뒷날 도반들과의 불화로 그를 모함하는 사람이 있었다.
월암스님은 그들의 말을 믿고 사일스님을 내쫓으니 절을 떠나면서 게를 지어 월암스님을 풍
자하였다.

월암의 법장(法藏)부처님께 머리숙여
황금의 오묘한 모습 실로 볼만 하였는데
희멀건한 도깨비 일곱 여덟 놈이
이리저리 소반 위의 구슬처럼 구르는구나.
稽首月菴藏裏佛 黃金妙相實堪觀
白面夜叉七八箇 推轉如珠走玉盤

후일 태주 자운사(慈雲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아가 불지(佛智端裕:1085∼1150)스님의 법제
자가 되었는데, 이는 참정(參政)전단례(錢端禮)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전단례는 불지 스
님과는 속가의 친형제 사이다. 그러나 총림에서는 이를 스님의 단점으로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방장실에서 항상 "서천(西天)의 오랑캐는 어찌하여 수염이 없느냐?"는 화두로 학인들
을 시험하였다.

42. 분양스님의 십지동진(十智同眞)법문에서 깨치다 / 무명 법여(無明法如)선사

무명 여(無明法如)선사는 삼구(三衢)사람이며 운개 지(雲盖守智)스님의 법제자이다. 분양(汾
陽善昭)스님의 `십지동진(十智同眞)' 법문으로 도를 깨쳐 참선 이야기만 나오면 `십지동진'
을 설법하니, 총림에서는 그를 `여십지(如十智)'라 일컬었다. 뒤에 도량사(道場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수암(水菴)스님, 원극(圓極彦岑)스님 등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원극스님은 무명스님의 찬을 지었다.

생철로 된 얼굴 머물기 어려워
무심코 걸음을 옮겨도 천지가 들먹들먹
장난삼아 들어 말하는 `십지동진' 화두는
룡의 직계 손자임을 저버리지 않았도다.
生鐵面皮難溱泊 等閑擧步動乾坤
戱拈十智同眞話 不負黃龍嫡骨孫

후일 스님은 사계(思溪)원각사(圓覺寺)에서 입적하였으며 지금도 부도탑이 남아 있다.

43. 차암 수정(此菴守淨)선사의 대중법문

서선사(西禪寺)의 차암 정(此菴守淨)선사는 묘희스님 회하에서 공부하여 크게 깨친 이로
종안(宗眼)이 밝았는데 일찍이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싸움을 잘하는 자는 자신의 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잘하는 자는 반드시 공을 이룬
다. 공을 이루면 편히 앉아 태평을 이루고 태평을 이루면 베개를 높이 베고 아무런 근심이
없다. 석 자[尺]의 칼을 뽑아들지 않고 한 벌의 활을 어루만지지도 않고 말은 화산(華山)남
녘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들녘에 방목하니, 때맞은 비바람에 어부는 노래하고 나무
꾼은 춤을 춘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시대에 요순 같은 성군도 오히려 교화의 찌꺼기 있어
천지를 수용할 수 없음을 어찌하랴! 요순이 이름을 모르고 온 나라가 흥망의 일을 관여치
않아도 구름과 함께 동정호를 차지할 줄 알았으니…."
또 이런 법문을 하였다. "입을 꼭 닫아도 때때로 말을 하며 혓바닥을 잘라버려도 쉴새없이
재잘댄다. 가장 절묘한 것은 눈 속의 티끌이니 이미 절묘하다 해 놓고 어찌하여 눈 속의 티
끌이라 하는가? 깨달았다, 깨달았다 할 때 그것을 깨달았다 할 수 없고, 현묘하다, 현묘하다
하는 곳도 역시 꾸짖어야 한다."

44. 만암 도안(卍菴道顔)선사의 대중법문

만암 안(卍菴道顔:1094∼1164)스님은 사천 사람으로, 오랫동안 원오 극근(圓悟克勤)스님에
게 공부하였다. 하루는 고금의 화두를 거론하는데 원오스님이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는 참선을 하여도 바른 깨침을 구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정신없이 지껄여대는구
나."
도안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땀을 흘리고 그 길로 법당으로 돌아가 새벽까지 자지 않고 좌선
하다가 갑자기 크게 깨달았다. 원오스님에게 달려가 뵙고서 조금치도 막힘없는 논리를 휘두
르자 그제서야 원오스님은 머리를 끄덕였다. 이에 도안스님이 말하였다.
"어제도 그처럼 대답을 하였는데 스님께서 수긍하지 않으시더니, 오늘도 그처럼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머리를 끄덕이십니까?"
"이 바보야! 너는 어제 망상 속에 잡혀 있었다."
도안스님이 절을 올린 후 말하였다.
"원래 석가모니도 신통한 것은 없었군요!"
원오스님이 촉으로 돌아간 뒤에는 묘희스님에게 귀의하여 최상의 경지를 깨치고 경산사의
수좌가 되니, 그의 이름이 총림에 널리 퍼졌다. 그 후 변산사(卞山寺)의 주지로 나갔으며 그
다음엔 동림사(東林寺)의 주지를 지냈다. 일찍이 대중 법문을 하였다.
"조사들의 지침이나 성인들의 수단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배고픈 걸인의 밥을 낚아
채듯 호시탐탐하고 날쌨으니, 상앙(商:?∼BC338)의 형법이나 손무(孫武)의 명령처럼 법에 걸
리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오랫동안 모래밭에서 싸우고 칠사(七四)기연을 갖춰 형세를 바
라보고 결단을 내어, 진퇴존망을 아는 자만이 애오라지 한가닥 실마리가 트이리라. 만일 자
기 눈을 뜨지 못하고 두꺼비처럼 눈만 껌벅이는 자는, 무리에 끼어서 밥이나 먹지 자유자재
할 능력이 없다. 지금 여기에는 결단코 빼앗아 보겠다는 중이 없느냐? 이 산승의 목숨은 오
직 그대들의 손아귀에 있다.
또 이런 말을 하였다.
"법이란 일정한 형상이 없으므로 사물을 만나야 그 형태가 나타나며, 일이란 반드시 정해진
것이 없으니, 공이 이루어짐에는 주체가 없다. 때때로 바람이 높아 고요하고 텅 비어 가까이
도 멀리도 할 수 없고 때로는 자신이 물러나 남에게 굽히면 얕보거나 희롱하지 못하리라.
그렇게 하면 쉽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려우니, 세속법이나 불법이나 모두가 우스꽝스러운
희론이다. 그러므로 노승은 이곳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어디에 있
는가를. 도롱이 걸쳐 입고 일천 봉우리 밖에 비스듬히 섰다가 물을 끌어대어 오로봉(五老峰)
앞 채소밭에 부으리라."

45. 모르는 공안이 없었어도 무암 법전(無菴法全)선사

무암 법전(無菴法全)스님은 고소(姑蘇)사람으로, 야보 천금강(冶父川金剛)스님의 제자이다.
오랫동안 육왕사(育王寺)불지(佛智端裕)스님에게 귀의하여 자각 진(慈覺眞)스님과 도반이 되
었다. 고금의 공안을 거론할 때는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방장실에서의 기연은 깨치지 못하
여 밤낮으로 슬피 울며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어울려 세속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
이 없었다. 이와 같이 몇 해를 지내던 어느 날, 불지스님이 방장실에서 그의 멱살을 붙잡고
말하였다.
"유구무구(有句無句)는 나무에 얽힌 등넝쿨과 같다 하는데 말해 보아라. 빨리!"
법전스님이 무어라고 입을 열려 하는 순간, 불지스님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이에 밝게 깨치고 연거푸 큰소리로 윽! 윽! 하고 소리쳤다. 단유스님이 그제서야 멱살을 놓
아 주니, 송을 지어 올렸다.

북소리 피리소리 울리는데 한쪽 어깨 가사 벗고
용루에서 향기 뿜는 익주의 배
때로는 발을 담가 밝은 달을 희롱하고
5호의 물결 아래 하늘을 밟아 나가네.
鼓笛轟轟袒半肩 龍樓香噴益州船
有時著脚弄明月 蹈破五湖波底天

후일 그는 세상에 나아가 큰 사찰의 주지를 두루 지내다가 호구산(虎丘山)에서 입적하였다.

46. 태주 태수 우연지(尤延之)

시랑(侍郞) 우연지(尤延之)는 종문(宗門)에 마음을 크게 쏟은 사람이다. 처음 낭중(郞中)으
로 있다가 태주(台州)태수로 나갈 때 효종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경(卿)이 남태주(南台州)로 가는 길에는 어떤 명소가 있는가?"
"국청사(國淸寺)와 만년사(萬年寺)가 있습니다."
그러자 효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다시 농담 삼아 말하였다.
"그 사찰에는 500나한이 모셔져 있으며 그들은 원래 힘이 세다고 하는데 그들이 갑자기 한
꺼번에 나타나면 경은 무슨 법으로 맞서겠는가?"
그러자 우연지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곧추세우고 말하였다.
"신(臣)에겐 금강왕(金剛王)보검이 있습니다."
이에 효종은 기쁜 빛이 얼굴에 역력하였다. 우연지는 태주에 이르러 너그러움과 사랑으로
백성을 다스렸다. 백성들도 그를 몹시 사랑하였으나 남태주는 가뭄과 홍수가 잦은 곳이기에
우연지는 이에 대해 시를 지었다.

하루 아침만 비가 와도 온통 질퍽거리고
겨우 사흘 비 내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가뭄 걱정
예로부터 하늘의 일이란 어렵다 말하지만
하늘이 태주에 대해선 너무나 어렵게 하는구나
來雨一朝成汗漫 裳晴三日人憂乾
向來盡道天難作 天到台州分外難

그러나 고을의 정사를 다스리고 남은 여가에는 많은 시간을 보은사(報恩寺)에서 보내며 불
조(佛照德光)스님과 도를 논하였다. 불조스님이 뒷날 냉천사(冷泉寺)에 청을 받고 부임하자
그를 이어 이암 유권(伊菴有權:?∼1180)스님을 초빙하여 주지로 삼았는데 대중이 항상 4,5백
명이나 되었다.

47. 묘희스님의 인가를 받다 무착 / 묘총(無著妙總)선사

무착도인(無著道人) 묘총(妙總)은 소태사(蘇太師)의 손녀로서 여러 큰스님을 두루 찾아뵈었
고, 뒤에 경산사 묘희스님을 찾았다. 어느 날 묘희스님은 법상에 올라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라는 석두(石頭希遷)스님의 화두
를 들어 설법하였다. 그때 시랑(侍郞) 풍제천(馮濟川)이 법회에 있다가 갑자기 느낀 바 있어
방장실로 달려가 아뢰었다.
"스님께서 거론하신 석두스님의 화두를 이 풍즙(馮楫:풍제천, ?∼1153)이 깨달았습니다."
"시랑은 어떻게 깨달았소?"
"이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은 소로사바하.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다는 것은 시리사바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는 것은 소로시리사바하."
때마침 묘총이 밖에서 들어오자 묘희스님은 풍즙의 말을 그대로 전하니 묘총이 웃으며 말했
다.
"예전엔 곽상(郭象)이 `장자(莊子)"에 주석을 붙였다 하지만 유식한 자는 장자가 곽상의 글
에 주석을 붙였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묘희스님은 마음 속에 이 말을 새겨두었는데 그 이튿날 묘총이 방장실에 들어가자 묘희스님
이 물었다.
"옛 큰스님들은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밭에서 인절미를 먹을 수 있었느냐?"
"스님께서 저의 허물을 눈감아 주신다면 곧 스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그대의 허물을 눈감아 줄 터이니 한 번 말해 보아라."
"이 묘총이 스님의 허물을 눈감아 드리겠습니다."
"기름바른 인절미는 어떻게 하고?"
묘총이 할을 하고 밖으로 나가고 나서는 이어서 `투기송(投機頌)'을 지어 올렸다.

갑자기 진면목을 부딪치니
기량이 얼음 녹듯이 없어졌네
달마는 어찌하여 서쪽에서 왔는가
이조는 부질없이 세자리 헛 절을 올렸구나.
여기에 이럴까 저럴까 의문을 붙여
한무리 초적들이 대패하였지.
驀然撞着鼻頭 伎倆氷消瓦解
達磨何必西來 二祖枉費三拜
更問如何若何 一隊艸己大敗

이에 묘희스님은 북을 울려 그를 인가하고 게를 지어 주었다.

그대는 이미 조사의 뜻을 깨달아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버렸구나
기연에 임하여 하나하나 천진스러우니
세간이든 출세간이든 조금도 부족함 없기에
내, 이 게를 지어 증명하노라
사성 육범 모든 이가 놀라 자빠지리라
놀라 자빠질 것 없다
푸른 눈 오랑캐 중도 알지 못하니
汝旣悟得祖師意 一刀兩直下了
臨機一一任天眞 世出世間無欠少
我作此揭爲證明 四聖六凡盡驚撓
休驚撓 碧眼胡僧猶未曉

48. 40년 동안 산문을 나가지 않다 / 경수좌 瓊首座)

경(瓊)수좌는 사명(四明)사람이다. 여러 노스님을 두루 친견하고 설봉산(雪峰山)에서 40년
머무는 동안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오로지 선열요(禪悅寮)의 선판 자리를 차지하고 여름
이나 겨울이나 누더기 한벌로 지내니 아무도 그를 가까이하거나 멀리하지 못하였으며, 철암
(鐵菴)스님만을 모시고 있었다.
민현( 縣)태수 조여우(趙汝愚)가 그의 풍모를 우러러 여러 차례 큰 사찰의 주지자리를 마
련해 놓고 산에서 나오기를 청하였지만, 그는 굳이 산 속에 머물 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여우는 꼭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철암에게 부탁하여 계략을 꾸며 관아로 들어오게 하고는
크게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는 그 앞에서 자기 청을 들어 달라고 부탁하였지만, 경수좌는 끝
까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이에 조여우는 더욱 존경한 나머지 시를 지어 산으로 돌아가는
그를 전송하였다.

만길 높은 봉우리에 눈더미 쌓였는데
한 그루 차가운 나무 바윗가에 서 있노라
푸르고 푸른 절개는 사계절 변함없고
봄바람이야 불던말던 아랑곳하지 않네.
萬 峰頭雪作堆 一枝寒木倚巖常
靑靑不改四時操 任待春風吹不回

부판(府判)이하 관료가 모두 경하하였으니, 불법을 빛낸 그의 영광은 적지 않았다. 그는 소
개장을 써들고 다니면서 주지자리를 찾는 요즘 사람들과는 함께 논할 수 없다.

49. 여러 선지식을 천거하여 부처의 혜명을 잇다 / 이덕매(李德邁)

시랑(侍郞) 이덕매(李德邁)가 남태주(南台州)태수로 있을 때, 홍복사(鴻福寺)· 만년사(萬年
寺)·천선사(薦善寺)의 주지로 졸암(拙菴德光)·이암(伊菴有權)·철암(鐵菴祖證), 스님을 초
빙하여 세상에 나오게 하니 훌륭한 납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 후 국청사(國淸寺)의 주지
로 밀암(密菴咸傑)스님을 초청하니, 밀암스님은 당시에 구주(衢州) 오거사(烏巨寺)의 주지로
있었다. 이들은 오직 응암(應菴曇華:이덕매는 응암스님의 제자)스님의 법을 위해서 나왔으므
로 개당에 있어서는 모두 그럴만한 자질이 있었다. 참으로 이러한 일이란 각기 알맞은 사람
이 따로 있는 것이지, 인정으로 사대부의 환심을 산다하여 되는 일이 아니다.
뒷날 이덕매가 벼슬을 그만두고 번양(番陽)으로 돌아가 한가히 지낼 때 어느 사람에게 말하
였다.
"내(浩)가 비록 일생동안 벼슬하였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자급할 수 없었고, 재물이 없어 남
을 구제하지도 못했지만, 단구(丹丘:台州의 별칭)에 있을 때 세분의 선지식을 청하여 세상에
나오게 하고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
이다."

50. 법을 잇길 바랬지만 / 불조 덕광(佛照德光)스님

불조 광(佛照德光)스님이 처음 앙산사(仰山寺)의 야암 조선(野菴祖璇)스님의 회중에 있다가
태주(台州) 홍복사(鴻福寺)의 주지로 부임하는 길에, 삼구(三衢)를 지나 오거사(烏巨寺)에 이
르자 밀암(密菴咸傑)스님이 게를 지어 그를 전송하였다. 이는 응암(應菴曇華)스님의 법을 이
었으면 하는 의도에서였다.

눈먼 당나귀가 눈먼 새끼 낳아
악착스러워 그의 이름 사방에 사무치는데
또다시 소림(달마)의 구멍없는 피리를 잡았으니
사람 만나면 아마 바람을 거꾸로 부르리라.
驢生得 驢兒 齷齪聲名徹四維
更把少林無孔笛 逢人應是逆風吹

그가 무주( 州)보림사(寶林寺)에 이르렀을 때는 당시 월암(月菴善果)스님의 제자 혜원(轄
堂慧遠)스님이 그곳의 주지로 있었는데 운문(雲門)스님의 "말에 떨어졌다(話墮)"는 화두를
들어 그에게 가려 보라 하니 이는 그가 월암스님의 법을 이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
나 단구(홍복사)에 와서 개당함에 묘희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다. 총림에서는 모두 그가 묘희
스님의 문호가 높고 크기 때문에 그랬다고 비난했지만 그들은 애당초 원수에게는 상대가 있
고 빚에는 빚쟁이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었다.

51. 정수리에 뼈가 솟다 / 지책 도독(智策塗毒)스님

도독 책(塗毒智策)스님이 상주(常州) 화장사(華藏寺)의 주지로 있던 어느 날, 갑자기 머리
가 쪼개질 듯이 아프며 사흘 동안 그치지 않자, 문도들은 아마 뇌에 종양이 생긴 것이라 생
각하였다. 그러나 통증이 멎자 마침내 정수리 뼈가 솟아올라 마치 다른 뼈를 꼽아 놓은 듯
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열흘이 못되어 쌍경사(雙徑寺)의 주지로 임명하는 조서가 내려졌
다. 사람이 만년에 불과(佛果)를 이루게 되면 환골(換骨)의 징조가 있는 듯하다.
쌍경사로 가려는 차에 설림 자광(雪林慈光)이라는 스님을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불지(佛智
端裕)스님에게서 두 눈이 멀었기에 혜산사(慧山寺)에 머물고 있었는데, 게송 세 수를 지어
오봉(五峯)의 화장사로 보냈다.

도독스님 작은 번뇌 모두 다하자
전우(도독의 스승)생각 불조 생각 모두 사라지고
웃으며 조칙 받들어 남쪽으로 떠나니
천고의 총림에 반짝거리는 등불이로다.
塗毒離微及盡 典牛佛祖俱亡
笑捧天書南去 叢林千古耿光

천태산 산마루 깎아지르듯 우뚝 섰고
큰 호수에는 백설같은 파도 꽃이 휘날린다
묻노니 오호의 스님들이여
오늘에 어느 누가 있단 말인가
台嶺危峰壁立 大湖雪浪華飛
試問五湖禪納 如今天下有誰

늙고 병든 이 몸, 스님의 덕 입었고
부처님께서 나의 소리를 거두셨네
천리마 꼬리에 붙어가는 파리처럼 그를 따라 갈석암 구경하니
용을 올라 타고픈 생각이 부질없이 일어나네.
衰殘正賴餘潤 紫泥 我賞音
附驥觀光喝石 攀龍徒有此心
*

52. `총림변영편" [叢林辨 篇] / 귀운 여본(歸雲如本)스님

귀운 본(歸雲如本)스님은 남태주(南台州)사람이다. 할당 혜원(轄堂慧遠)스님의 법제자로 금
릉 장간사(長干寺)에서 소산(疎山)으로 옮겨갔으며 도가 높다고 명성이 자자하였다. 과거에
서 장원급제한 유요부(劉堯夫)는 일찍이 여본스님에게 도를 물어 의기가 투합하였다.
상당하여 법문하였다.
"뼈아픈 몽둥이 한 대 맞고 깨달으니 나무 위에선 쌍쌍의 물고기가 놀라 날뛰고, 한마디 말
끝에 자재하니 바위 위엔 죽순이 죽죽 뻗어오르다. 이에 쓸 것 없음을 써서 항상 끝없는 법
륜을 굴리고, 할 것 없음을 해서 수없는 몸을 두루 나타낸다. 옛 사람은 힘을 써 볼 수 없는
곳에서 깨닫고 그림자 하나를 그어놓았다. 그리고는 하나의 달이 모든 물에 나타나고, 모든
강물의 달은 하나의 달 속에 있다고 말한다. 불법이 만일 이와 같다면 구름 나온 곳으로 돌
아가고자 한들 무슨 일을 하겠는가? 대중스님이 잠자코 있자 주장자로 탁상을 내려치고서,
"지금은 모두 분명히 앉아 있고 서 있는데, 일천 낚시꾼들이 낚시를 드리울 수 없는 곳, 그
자리에서 깨칠 수 있겠는가? 만일, 큰 바다가 만족할 줄 알면 모든 강물이 거꾸로 흐르게
될 것이다" 하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그는 `총림변영편(叢林辨 篇)"을 지었는데, 꼬리를 흔들면서 아첨하거나 환심을 사려는 당
시의 무리들을 풍자한 글로서, 문장과 의미가 뛰어나며 원극 언잠(圓極彦岑)스님이 발문을
썼다. 대중에 들어오는 후배라면 이를 몰라서는 안될 글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조정의 정국공(鄭國公) 부필(富弼)은 투자 수옹(投子修 )스님에게 도를 물었는데, 서
간문이며 게송이 무릇 열네 두루마리가 되며, 태주 홍복사(鴻福寺)양 회랑벽의 사이에 새겨
놓았다. 이것으로써 선배들의 법을 주관함이 준엄하였고, 왕족 귀인들의 도를 믿음이 독실하
였음을 또렷이 볼 수 있다. 정국공은 사직의 중신(重臣)으로서 만년에 이르러 갈 곳을 앎이
이와 같았으며 수옹스님은 보통 스님보다 뛰어난 인물이었다. 정국공은 스스로 "수옹선사에
게 깨우침을 얻은 바 있다"고 말하였다.
사대부 가운데 참으로 불도를 믿고 능히 나이를 잊고 세도를 부리지 않고서, 맹렬하고 예리
하게 분발하여 반드시 깨우침 얻으리라고 기약한 사람으로는, 시랑(侍郞), 양대년(楊大年),
도위(都尉)이화문(李和文)등이 있는데, 광혜 원련(廣慧元璉)과 석문 온총(石門蘊聰)및 자명
(慈明:石霜楚圓)노스님들을 친견하여 격려받고 글을 주고받았던 사실이, 여러 선서(禪書)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으며, 양무위(楊無爲)는 백운 수단(白雲守端)스님에게, 장무진(張無盡)은
도솔 종열(兜率從悅)스님에게 사사하여 모두 관문의 요소를 두드려 철저히 근원을 파헤쳤는
데, 이는 구차스럽게 한 것이 아니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시랑(侍郞) 장무구(張無垢), 참정(參政) 이한노(李漢老), 학사(學士)여거
인(呂居仁)등이 모두 묘희(妙喜)노스님을 친견하여 도의 경지에 올라 세속(方外)의 도우(道
友)라 일컫는다. 그들은 사랑과 미움 거슬림과 순탄함을 깡그리 휩쓸어버리고 세속의 구애
와 거리낌을 벗어났으니, 보는 사람은 옷깃을 여미고 그를 경외하여 그들 경지의 테두리를
엿볼 수 없다.
그러나 사대부 가운데에는 그저 한가하고 고요한 곳을 찾아 마음을 선적(禪寂)에 멈추고자
하는 자는 본래의 `유(有)'를 발휘해 낼 뿐이다. 후세에 이르러 예컨대 큰스님의 모범은 보
지 않고 오로지 아첨을 일삼아 아무쪼록 세상에 나아가기를 구하여, 무릇 주지로서 이름을
드날려 장로(長老)라 하는 자들이 이따금씩 명함에까지 어느 문파의 승려라고 기록하며 앞
사람들을 받들어 은부(恩府)라 하고서 사찰의 소유물을 꾸러미로 싸가지고 관가에 아첨하여
올리니, 식견이 있는 자들은 가엾은 마음으로 그를 비웃는 데에도 그들은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다.
아! 우리 총림의 승려는 하나의 병, 하나의 발우만을 들고서 구름이 흘러가듯 새가 날듯 떠
도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추위와 굶주림의 절박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녀가 있어 구
슬이며 비단에 연연할 것이 없는 데에도, 허리를 굽혀 빗자루를 움켜쥐듯, 허리가 시큰하도
록 하니 스스로가 모욕되고 비천한 일을 이처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들이 은부라 일컫는 것은, 개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 아무런 근거도 없는데, 부질없는 못
난 이가 앞에서 소리치면 백 사람의 못난 이들은 그 뒤를 따르며 `예, 예'하며 다투어 받들
듯하니 스스로 왜소해질 뿐이다. 이처럼 부처의 가르침을 깎아내리는 데에 있어서 아첨하는
사람보다도 더한 자는 없을 것이다. 아첨하는 데 잽싸게 잘한 자는 실제로 간사할 속임수의
조짐이다. 비록 단정한 군자일지라도 교묘히 그들의 함정에 들어가면 몸이 불의에 빠지게
되고 덕을 잃고 구제할 수 없게 되니,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법을 파괴하는 비구는 삿된 마귀의 기운들이 한 몸에 모여 미치광이처럼 거짓된 일을 태연
자약하게 하며 속임수로 선지식인 척 모습을 나타내어 선림의 큰스님들을 들먹거리면서 스
승이라 하고, 요로의 귀족에게 종문의 권속이라 아첨하며, 바라지도 않는 존경을 떠받치면서
불법을 파괴하는 실마리를 열어주고 나아가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선상(禪滅)에 올라가도
그 아래에서 절을 하여 성인의 제도를 어기고 종풍을 크게 욕되게 한다. 우리 불도의 쇠퇴
함이 지극하여 여기에 이르렀도다. 아 슬픈 일이다. 이는, 하늘에서 그를 죽이고 귀신이 그
의 죄를 기록할 만한 큰 죄악이니, 만번 죽는다 한들 어떻게 그 아첨의 죄를 속죄할 수 있
겠는가?
설숭(明敎契嵩)스님의 `원교론(原敎論)"에 이런 말이 있다.
"옛 고승은 천자를 만나도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편지나 문서를 쓸 때 공(公)이니 사
(師)이니 라고 말한다. 종산 승원(鍾山僧遠)스님은 황제의 가마가 산문에 이르렀는데도 선상
에 앉은 채 산문 밖에서 맞이하지 않았으며 호계 혜원(虎溪慧遠)스님은 천자가 심양(尋陽)
까지 이르러 조칙을 내렸는데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세상사람들은 그들의 인품을 가
상히 대하였고 그들의 덕을 존경하였으니 이 때문에 당시 성인의 도가 세상에 떨쳤다. 후세
에 이르러서는 고승을 추앙한다 하는 자들이 벼슬하는 자와의 사귀는 모습을 보면, 못난 선
비의 예우를 받는 데도 미치지 못하여 그들의 출신이나 처신은 "못난 선비들이 스스로 만족
하는 경지만도 못하다."하였으니 하물며 승원스님처럼 천자를 만날 수 있으며 또한 혜원스
님처럼 태연자약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서도 우리 불도가 흥성하고 우리의 도가 닦여질 수
있겠는가? 가르침이 있더라도 뒤따르는 사람이 없다면, 가르침이 있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
겠는가? 이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귀운스님은 희령(熙寧)5년에 입적하였다. 이 책에서는 불법이 쇠퇴되어 이를 짊어질 사람이
없음을 몹시 걱정하여 자못 파순(波旬:慾界 六天의 마왕)을 대한 듯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법문에 들어와 아첨하여 자신의 생각이 이뤄졌다 생각하는 것은 마치 사자의
몸에 벌레가 일어 사자의 몸을 갉어먹는 것과 같으니 어찌, 이 책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
가?
`수능엄경"에 의하면, "내가 입멸한 뒤 말법 속에는 이처럼 요사스러운 자가 많아 세간에 성
하여, 남 모르게 간악한 마음으로 속임수를 쓰면서 선지식이라 일컬을 것이다" 하였으며, 또
한 "어느 도적놈이 나의 옷을 빌어 입고 여래를 팔고 갖가지 악업을 짓는다"하였으니 모두
입으로는 불법을 말하지만, 이는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는 비구가 아니라 소승의 도를 행하
는 자들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 없는 중생에게 의심을 안겨주고 무간(無間)지옥으로 떨어지
게 한다.
순희(淳熙)정유(1077)에 내가 현은사(顯恩寺)의 주지를 그만두고 평전(平田) 서산(西山)이라
는 작은 산 언덕에 살면서 요사이에 보고 들은 일들이 거짓이 많고 옛 가풍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비록 나의 말이 이 세상에 무겁고 가벼운 것이 될 수는 없겠지만 다만 이 글을
적어 스스로를 경계하는 바이다.
귀운 여본(歸雲如本)씀.

원극 언잠스님의 발문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세상이 멀어짐에 따라 바른 법은 엷어지고 풍속과 행동이 잡되어 못하는 일이 없
게 되었다. 선배스님들은 돌아가시고 후세 사람 가운데는 뛰어난 이가 없어 총림의 규범이
거의 땅바닥에 떨어진 형편이다. 설령 이를 붙잡아 구하려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도리어
그를 오랑캐라 생각한다.
내가 소산(疎山)여본스님의 `변영(辨 )"이라는 글을 보니 문장이 심오하고 의미가 드넓어
간절하고 명백하니, 총림의 병폐에 대하여 지극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부질없고 못난 무리
들은 아는 게 없어 사악하고 아첨한 데에 마음이 취하여 있으니, 반드시 제호(醍 )를 독약
이라 여길 것이다.

순희 임인(1081)3월 5일
강좌(江左)오봉(五峯)에서 원극 언잠(圓極彦岑)쓰다.

53. 효종황제에게 종문사를 일깨우다 / 나암 도추(懶菴道樞)선사

나암 추(懶菴道樞)선사는 황룡 혜남스님 회하의 큰스님으로 도량사(道場寺)무전 거혜(無傳
居慧)스님의 법을 이었다. 처음 효종(孝宗)황제는 불교로 기울기는 하였지만 종문(宗門)에
특별한 일이 있는지는 몰랐었다. 그러나 후일 그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노스님의 인도
에 의한 것이었다. 할당( 堂慧遠)·졸암(拙菴德光)스님이 뒷날 효종을 인가한 것도 그 유래
를 알고 보면 모두가 도추스님의 힘이었다. 도추스님은 영은사의 주지를 그만 두고 후일 명
교(明敎)스님의 영안난야(永安蘭若)로 물러나 유유자적하게 지냈는데, 벽 위에 써놓은 절구
(絶句)한 수가 남아 있다.

흰눈 속의 매화는 봄소식이며
연못 속에 잠긴 달색은 밤의 정기라
근래에 아름다운 흥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풍을 남에게 보이지 마오.
雪裏梅華春信息 池中月色夜精神
年來不是無嘉趣 莫把家風擧似人

이 시에서 스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54. `빈 골짜기'라는 호를 가진 가난한 스님 / 송 공곡( 空谷)스님

송 공곡(宛空谷)스님은 여항(餘杭)사람이며 상전 연(象田演)스님의 회하에서 유나(維那)일
을 맡아보았다. 그의 인품은 청백하고 고고하여 몹시 가난한 생활을 꾸리며 겨울이면 갈대
꽃으로 이불을 삼아 덮었으니 본색 납자가 아니라면 결코 이처럼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상전 연 스님은 그의 법명 `공곡(空谷)'에 대하여 송하였다.

골짜기 비고 비어 골골마다 비고 비었구나
텅 빈 골짜기 온갖 만상 초월하니
흐르는 물 떨어지는 꽃잎마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맑은 바람 밝은 달이 어우러졌구나.
谷空空谷谷空空 空谷全超萬象中
流水落華渾不見 淸風明月却相容

그는, 뒷날 천동사(天童寺)에 있었는데 개울가를 따라서 자그마한 집을 짓고 조고암(弔古
庵)이라 이름하였다. 많은 도반들은 그의 풍류놀이를 따라 즐겼는데, 나는 그 당시 옥궤암
(玉 菴)졸암 덕광(拙菴德光)노스님 회중에 있으면서 송을 지어 그에게 보냈다.

듣자하니 그대 산기슭에 집을 짓고
저 멀리 용추사 야거나한을 조문한다지
굳이 깊은 산골에 몸을 숨기지 말고
한번 발길을 돌려 맑은 물결로 나와 보게나
빈 골짜기 노래가 전해오나 사람 이르기 어렵고
문 닫으니 산 꽃같은 눈마저 휘날리지 않네
내, 가을바람이 골짜기를 말끔히 쓸어버릴 때
명아주 지팡이 짚고 산천경계를 즐겨보리라.
聞君縛屋傍山阿 遠弔龍湫諾 羅
未必將身潛碧 且圖 足向淸波
韻傳空谷人難到 門掩山華雪不過
我待秋風洗巖壑 杖藜相與傲烟蘿

송스님의 맑은 기상은 뼈 속까지 사무쳐 마침내 산안개 산노을을 즐기는 고질병이 되었고,
마침내 태백산에서 세상을 마쳤다.

55. 오대산 초의문수상(五臺艸衣文像)

오대산의 초의(艸衣)문수상은, 이 나라(宋)의 원풍(元豊:1078∼1085)연간 때부터 있었다.
태위(太尉) 여혜경(呂惠卿)이 변방의 장수로 있을 때 오대산을 찾아왔다가 처음 그 모습을
보았는데, 위엄어린 동자가 거무스름한 몸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부들풀잎으로 발에서 어깨
까지 휘감았으며 오른 어깨는 드러내놓은 채 손에는 불경을 들고 있었다. 여혜경은 그와 `
화엄경"의 대의를 논하였지만 그가 보살인 줄을 몰랐는데, "범인의 생각으로 성인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느냐?"는 꾸지람 소리에, 비로소 깨어나 절을 올리자 동자는 마침내 문수보살
의 모습으로 변하여 황금사자를 타고 보일락말락하며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여혜경은 그 후로 후회와 한탄으로 집에 돌아와서도 한달이 넘도록 침울해 하였다. 뒤에, 지
성껏 기도하면 보살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부인의 말을 듣고 여공은 그 말처럼
정성을 다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반드시 보살이 현신하기를 기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니, 향탁자 위에 보살이 나타나 여공을 꾸짖었다.
"어찌 이다지도 상(相)에 집착하느냐?"
"세상 사람들에게 보살님께서 보여주신 참모습을 보였으면 해서입니다."
그리고는 급히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리도록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이리하여 그려진 그 화상은 경락(京洛)지방에 전해졌는데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서 이
따금씩 찾아볼 수 있다. 나도 그 중 한 폭을 보관하고 있는데 이는 오승(吳僧) 범륭(梵隆)스
님이 그린 것으로 이 몸이 다할 때까지 받들고자 한다. 일찍이 전우(典牛天遊)스님이 지은
찬을 기록해 두었는데 많은 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있다.

딱한 남전(南泉)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하잘것 없는 문수사리라고 철위산 밑으로 쫓아내니
지금까지 머리도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은 채
온몸이 하나가 되어 풀 속에 앉았는데
멍청한 여공(呂公)이 그것도 반짝 깨닫지 못하고
황금사자를 가리키다가 그자리에서 자기를 잃고 나자빠졌구나
소로시리……

56. 수묵관세음보살상[水墨觀音]

수묵화 관세음보살상은 당(唐) 오도자(吳道子)와 이백시(李伯時)이후로는 오승(吳僧) 범륭
무종(梵隆茂宗)스님이 가장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 그러므로 효종은 일찍이 그를 칭찬하였
다.

물결도 일지 않고 불꽃도 잠잠하니
범륭의 뛰어난 그림 덕명에게 내리노라.
水波不動 火光不興
梵隆妙絶 授之德明

그리고는 내시[中官] 황덕명(黃德明)에게 하사하였다.
범륭스님에게 지협(至犀)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도 관음상을 잘 그렸으며, 근래에 들어서
는 민( )땅 덕원(德源)스님의 필치가 절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당시의 고관 사승
상(謝丞相), 태사(太師) 조언유(趙彦逾)등이 모두 그가 그린 관음상에 찬을 쓴 바 있는데 사
승상의 찬은 다음과 같다.

보고 들음을 모두 거두어 들이고
가부좌한 채 앉았으니
붓끝에서 그려져 나와
모양에서 `나'를 보느냐 하네
천백억 개의 몸이
가할 것도 불가할 것도 없으니
중언부언 게를 쓴다는 것은
엄연히 군말에 불과하리.

조태사의 찬은 다음과 같다.

생각을 뛰어넘어 관음상 그렸으니
붓끝에서 현묘함을 이루었네
진면목을 깨달으면
지혜의 빛이 온 누리에 두루 빛나리
만일 모습으로 도를 구하면
모습을 보고 선한 생각이 생겨나
생각 생각 모두 순수하고 온전하면
참모습은은 여기에서 나타나리다.

57. 백당 남아(柏堂南雅)선사의 대중법문

백당 아(柏堂南雅)선사는 민( )사람이며 나암 정수(懶菴鼎需)스님의 법제자이다. 처음 자
택사(紫택寺)의 주지로 있을 무렵 불조(佛照德光)스님이 냉천사(冷天寺)의 주지로 있었는데,
서로는 숙질(叔姪)사이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특별히 가서 덕광스님을 보좌하며 2년 동안 좌
원(座元)으로 힘쓰니, 많은 형제들이 그를 따랐으나 남아스님은 성품이 강직하여 덕광스님이
그를 꺼려하였다.
그 후 용상(龍翔) 영암사(靈巖寺)의 주지를 하는 동안 그의 도는 크게 떨쳤다.
스님은 대중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였다.
"서봉산(瑞峰山)산마루 서봉정(棲鳳停)곁에 한 그릇 묽은 죽으로 서로 의지하며 백군데 기운
누더기를 머리에 덮어쓴 채 앉아 있는데, 이조(二祖:慧可)는 삼배를 올리고 제자리에 서 있
으니, 이미 제자들이 빙 둘러 있구나. 비린내나는 달마 늙은이가 가죽과 뼈를 모두 나누어주
니,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나머지 무리들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나의 이러한 이
야기로 여러 스님의 꾸지람을 피할 수 있을른지……. 그러나 안목을 갖춘 이는 가려낼 것이
니, 하마터면 죄인을 오랫동안 취조하지 않아서 꾀만 늘려줄 뻔했다."
또 이렇게 말하였다.
"자주빛 고사리는 여린 주먹 펴고 죽순은 가지가 돋히는데, 버들꽃 다한 뒤에 녹음 우거지
네. 분명한 달마의 한마디 말을 꾀꼬리는 나뭇가지에서, 제비는 둥지에서 재잘댄다. 여기에
투철히 보고 믿는 이가 있다면 그는 제방 어디를 가든지 분명 밝은 창 밑의 첫 자리를 마련
해 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용상(龍翔)의 문하에서는 일격에 쳐 죽일 것이다. 무슨 까닭인
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대체로 승려와 속인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
기 때문이다."

58. 근본이 단정하며 / 광교 회(廣敎會)스님

광교 회(廣敎會)스님은 사천 사람으로 석두 회(石頭自回)스님의 법제자이다. 처음 호국사
(護國寺)의 차암(此菴守淨)스님에게 귀의하였는데, 한 행자가 철판같이 고집을 피우면서 떠
나가자 모두 송을 지어 그를 전송했다. 당시 회스님의 송은 다음과 같다.

괜스레 두 주먹 휘두르며 저처럼 떠나가니
한덩이를 만들어 가지고 속히 돌아오게나
삼봉 정상에 다시 걸망을 걸을 땐
어지러운 봄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리.
空奮雙與?去 打成一片早回頭
歸來 在三峯頂 惱亂春風來未休

도반들이 모두 이 송을 애송하였다.
그는 후일 운거산(雲居山) 천복사(薦福寺)의 주지를 지냈는데 항상 2∼3백여 명의 대중이
살았다. 이는 그의 근본이 단정하여 지말까지도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59. 백장야호화두에 붙인 게송 / 삼봉 인(三峰印)선사

삼봉 인(三峰印)선사는 무주( 州)사람이며 깨달은 경지가 뛰어났다. 일찍이 `백장야호(百
丈野狐)'에 대하여 송하였다.

떨어지지 않는다느니 어둡지 않다느니 함은 사람을 속이는 죄
어둡지 않다느니 떨어지지 않는다느니 함은 오랏줄 없이 묶이는 꼴
가엾어라 버들강아지 봄바람 따라서
곳곳에서 이리저리 나부끼는구나.
不落不昧誣人之罪 不昧不落無繩自縛
可憐柳絮逐春風 到處自西還自東

총림에서 이것을 애송하는 이가 많았다. 순희(淳熙)초 내가 산음(山陰)능인사(能仁寺)에 있
을 무렵 서암사(瑞巖寺)의 위당 법윤(葦堂法潤)스님과 함께 그분이 설법한 곳을 찾아가 보
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분을 만나보지 못했다. 후일 그에 대한 도독(塗毒智策)노스님의 송을
살펴보니,

큰 횃불을 잡아들고
허공을 불사르니
달마도 그의 뜻을 알지 못하여
눈이 멀고 귀가 먹었도다.
秉大火炬 燒太虛空
遠磨不會 眼 耳聾

고 하였다. 이는 더욱이 인스님의 이마 위에서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60. 대나무를 노래함 / 자득 혜휘(自得慧暉)선사

자득 혜휘(自得慧暉:1097∼1182)선사가 장로사(長蘆寺)조조(祖照)스님의 회중에 있을 무렵,
대중 요사채에서 대나무를 가꾸다가 문득 송 한 수를 지었다.

그 높은 절개, 깊은 구름마저도 감추지 못해
그윽한 님, 작은 창가로 옮겨 심노라
신령한 뿌리 서기어린 입새 뭇사람 놀라게 하여
맑은 바람이 푸른 하늘에 돌게 하도다.
高絶深雲藏不得 幽人移向矮窓前
靈根瑞葉驚群目 將著淸風動碧天

이 송은 즉흥으로 우연히 지은 글이지만 사람들은 앞다투어 애송하였다. 만년에 유두사(乳
竇寺)에 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80여 세 고령이었지만 뜻밖에 칙명을 받들어 정자사(淨慈
寺)의 주지가 되자 사람들은 모두가 그때 지은 `죽송(竹頌)'은 자신에 대한 예언이라 하였
다. 이에 대중과 작별하면서 상당법문을 하였다.

한결같이 산중에 머문 지 40년
늙으막에 날마다 한가한 생각 뿐이었는데
오늘 아침 뜻밖에 군왕의 부름을 받아
학인들을 작별하고 옛 관문을 떠나가네.
구름은 무심히 산마루를 나가고
날개짓에 지친 새는 옛 둥지로 돌아온다.
득의양양 돌아올 뒷날에
솔바위 속에서 손님이니 주인이니 모두 잊으리.
一住山中四十年 老來無日不思閑
今朝誤被君王詔 珍重禪流出故關
雲無心而出岫 鳥倦飛而知還
他年得意歸來也 賓主相忘松石間

남병산(南屛山)에 와서 조동종(曹洞宗)의 종풍을 크게 일으키고 후일 설두산 쌍탑암(雙塔
庵)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하였다. 과연 그가 떠나면서 한 말처럼 되었
으니 이를 두고 `마음에 두고 있으면 뜻을 이룬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마음에 잊
지 않으면 그것이 곧 뜻이 된다'는 말이다.

61. 감 이암(鑑口夷菴)스님

감 이암(鑑口夷菴)스님은 현 재암(賢在菴)스님과 함께 심문 운분(心聞雲賁)스님의 법제자이
다.
감스님은 계빈국왕( 賓國王)미라굴(邇羅掘)이 사자존자(師子尊者)의 목을 베었다는 공안에
대하여 송하였다.

존자는 어찌하여 오온이 공함을 터득하여
계빈왕의 칼날에 봄바람 가르듯 목이 잘렸는고?
비온 뒤 복숭아꽃 이리저리 떨어져
흐르는 개울물을 온통 붉게 물들였네.
尊者何嘗 得蘊空 賓刃下斬春風
桃華雨後恣零落 染得一溪流水紅

총림에서는 앞다투어 이 송을 애송하였다.
현스님은 조주스님이 오대산 노파를 감파한 화두를 들어 송하였다.

빙설같이 아름다운 모습 이상도 하다
옥피리 옆에 들고 사람에게 불어대니
곡조엔 한없는 꽃 마음이 꿈적거려도
첫째 가지에 봄을 맞이하였네.
氷雪佳人貌最奇 常將玉笛向人吹
曲中無限華心動 獨許東君第一枝

묘희스님은 이 게송을 보고서 매우 칭찬하였다.
"운분노스님에게 이런 아들이 있었다니… 황룡스님의 법이 아직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구
나!"
선배들이 후진을 이끌어주는 일을 보건대, 공론(公論)으로 하였지 애초에 종파를 나누지는
않았다.

62. 불성법태(佛性法泰)스님의 념고(拈古)
불성 태(佛性法泰)스님은 용아(龍牙居遁:835∼923)스님이 취미(翠微無學)스님과 임제(臨濟義
玄)스님에게 물었던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공안을 들어 송하였다.

자경(子卿)이 선우(흉노의 우두머리)에게 허리 굽히지 않고
끝까지 한나라의 절개를 지켰네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의 절개를 알고
어려운 일을 겪어야 바야흐로 대장부를 알아볼 수 있는 법.
子卿不下單于拜 始末常遵漢帝儀
雪後始知松栢操 事難方見丈夫兒

그의 말은 간절하고도 분명하다 할 만하다. 내 지난날 옥궤산(玉山)에 있을 무렵 불조(佛
照)스님께서 이 송을 들어 말할 때에는 으레 두번 세번 칭찬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고칙(古
則)을 송하는 격식이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뒤에 그의 어록을 보니 `노파가 조주스님의
죽순을 훔치다'는 화두에 붙인 송도 있는데 이것을 좋아한다.

앵두가 갓 익을 무렵 울타리 곁에 죽순이 돋아나니
숲 속에서 두 도인 서로 만났네
웃음을 참느라고 바른 명으로 금하질 못하니
편의를 얻은 것이 곧 편의를 떨어뜨린 것.
櫻桃初熟筍穿籬 林下相逢老古錐
忍俊不禁行正令 得便宜是落便宜

63. 개선 도겸(開善道謙)선사의 `송고(頌古)'

개선사(開善寺)도겸(道謙)스님은 `마음은 부처가 아니며 지혜는 도가 아니다[心不是佛 智不
是道]'는 공안을 들어 송하였다.

태평시절 해마다 풍년이라
나그네 봇짐엔 양식 걱정 없고 집마다 문단속 않네
큰 길에 사람 없고 밤에는 달빛 없는데
노래하며 돌아오니 삼경이나 되었을까.
太平時節歲豊登 旅不齎粮戶不
官路無人夜無月 唱歌歸去恰三更

묘희스님이 이 송을 가장 좋아하였다. 금산사의 기도자(奇道者:道奇師)는 별봉 보인(別峰寶
印:1109∼1190)스님의 법제자인데 그 또한 이 공안을 들어 송을 지은 바 있다.

기나긴 봄볕에 강산경개 아름답고
훈훈한 바람결에 꽃과 풀이 향기롭다
진흙땅 풀리자 제비는 날고
모래 사장 따뜻하니 원앙새가 꾸벅꾸벅.
遲日江山麗 春風華艸香
泥融賑燕子 沙暖日坐鴛鴦

이 송 또한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그 당시에는 모두 스승의 경지를 뛰어넘은 작품
이라 하였다.

64. 한림학사 범치령과의 만남 / 원통 도민(圓通道旻)스님

원통사(圓通寺)의 도민(道旻:1047∼1114)스님은 흥화(興化)선유(仙遊)사람이며 늑담사(潭寺)
의 응건(應乾)스님을 친견하였다. 좌승상(左丞相) 범치령(范致靈)이 처음 한림학사[內翰]로
있다가 예장(豫章)태수로 나가는 길에 후계(侯溪)를 지나게 되어 스님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 범공이 탄식하며 "이 늙으막에 벼슬길에 있자 하니, 생사대사를 알기에는 점점 멀어
만 간다"라고 하자, 도민스님은 대뜸"내한(內翰)!"하고 불렀다. 범공이 "예" 하고 대답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멀어진 것도 아니군요."
"참 좋습니다. 더 가르쳐 주십시오."
"이곳에서 홍도(洪都)까지는 나흘 길입니다."
내한이 생각에 잠기자, 도민스님이 말하였다.
"보려거든 즉시 보아야지 생각하려 하면 어긋납니다."
내한은 몹시 기뻐하였고 이로부터 깨달아 들어가게 되었다.

65. 추밀원 정사 / 오거후(吳居厚)

추밀원(樞密院) 정사(政事) 오거후(吳居厚)는 왕명을 받들어 종릉(鍾陵)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민(道旻)스님을 만나 말하였다.
"내 지난 날 성시(省試)를 보러 원통사 조주관(趙州關)을 지나면서 전임 주지 거눌(居訥)스
님에게, `관문을 꿰뚫고 나가는 일은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거눌스님은 `벼슬이나
하러 가라'고 하였는데, 벌써 나도 모르는 사이에 5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도민스님이 말하였다.
"관문을 꿰뚫고 나가는 일은 밝혔습니까?"
"여덟 차례나 그곳을 지나가면서 항상 마음에 두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시원스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도민스님이 오공에게 부채를 주면서 "부채나 부치시오"라고 하자, 오공이 부채를 부치니 도
민스님이 말하였다.
"시원하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소?"
오공은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말후구(末後句)를 가르쳐 주십시오."
도민스님이 두 차례 부채를 부쳤다.
"친절하십니다."
"길료새(桔료:앵무새)는 혓바닥이 삼천리지."

66. 관음경을 사경하다 진팽공 여림(陳彭空汝霖)

간의대부(諫議大夫) 팽공(彭公)진 여림(陳汝霖)이 손수 관음경을 베껴 써서 도민스님에게
올리자 도민스님은 책을 들고서 말하였다.
"이것은 관음경이니, 무엇이 간의대부입니까?"
"이것은 제가 직접 쓴 것입니다."
"쓴 것은 글자인데, 무엇이 경전입니까?"
팽공이 웃으면서 "정말 모르겠습니다"하자 도민스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재상의 몸으로 나타나서 설법을 하십니다."
"사람마다 분수가 있습니다."
"경전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도민스님이 경전을 들어 보이자 팽공은 손뼉을 치면서 껄껄대며 하! 하고 감탄하였다.
도민스님이 "그래도 모르겠다고 하겠나?"라고 하니, 팽공은 스님에게 절을 올렸다.

67. 도민스님을 뵙다 / 안상국(安相國)

안상국(安相國)이 남부지방으로 좌천되어 지나는 길에 도민스님을 만나서 탄식하였다.
"일생동안 벼슬하다가 지금와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깨고 보니 이제까지의 일이
한바탕 꿈이었습니다."
"상국께서는 꿈을 깨셨습니까?"
"이것이 모두 본디 있는 것이나 다만 몰랐을 뿐입니다."
"상국!"
안상국이 고개를 들자 스님이 말하였다.
"알았습니까?"
"여러 가지 맡은 일은 어떻게……"
"서울에서 며칠 만에 이곳까지 오셨소?"
"42일입니다."
"어디에서 일을 얻어왔소?"
상국이 웃으며 말하였다.
"조금 알성 싶습니다."
"지금 당장 그대로 누리십시오."
"어떻게 누려야 합니까?"
"아침마다 똑같고 날마다 일반입니다."
안상국이 마침내 합장을 하자 도민스님이 말하였다.
"가진 것을 다 비우고 없는 것을 채우지 마시오. 대체로 이와 같이 하면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오."

68. 드센 터를 누르고 살다 / 이령암주(二靈菴主)

이령암주(二靈菴主)는 소주(蘇州)사람이다. 처음 진정(眞淨克文)스님을 찾아뵙고 후일 늑담
응건( 潭應乾:1034∼1096)스님에게 공부하여 깨친 바 있었다. 동절(東)지방으로 돌아가 설
두산 중봉암(中峰庵)에 주석하였는데 그의 자리 아래에는 항상 호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처음 천동 보교(天童普交:1048∼1124)스님과 동행하면서 두 사람 다 결단코 세상에 나가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는데 후일 보교가 맹세를 어기고 세상에 나가 태백산(太白山)의 주지를
하자, 지화(知和:이령암주)스님은 마침내 그와 절교하고 중봉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그 산
은 몹시 드세어서 얼마 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지화
스님은 호미로 산맥을 잘라버렸다. 그러나 대제(待制) 진공(陳空)이 시로 유인하여 이령암의
주지로 있게 하자 1∼2년이 못되어 많은 납자들이 몰려와 작은 절을 이루게 되었다. 그의
명성이 궁중에까지 알려져 여러 차례 천자의 조칙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다.
지금도 유적이 남아 있으며 많은 게송과 법문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이령암은 근강(勤江)월
파(月波)가운데에 있는데 순희(淳熙)연간(1174∼1189)에 별봉 보인(別峰寶印)스님이 유두사
(乳竇寺)에서 경산사로 부임하는 도중에 그곳을 지나면서 게를 지었다.

일만 이랑 너른 호수 잔잔한 물결 위에
이령산의 산빛이 겹겹이 푸르러라
돛단배 너울너울 하늘가를 향하노니
머리돌려 바라보나 지화스님 뵐 낯 없네.
萬頃湖光 艶中 二靈山色翠重重
片帆我欲天邊去 回首和公有 容

스님의 높은 도풍을 상상해 볼 수 있다.

69. 인종(仁宗)이 대각 회련(大覺懷蓮)선사를 뵙다

대각(大覺懷蓮:1009∼1090)스님이 궁중에 들어가 심법(心法)을 논하던 차에 인종황제(101
2∼1064)는 게를 지어 하사하였다.

초조(달마)께서 소림사에서 참선할 제
경전의 가르침 전하지 않고 심법만을 전하였네
후세 사람이 진여본성(眞如本性)깨달으니
비밀한 인장은 원래 묘한 도리 깊구나.
初祖安禪在少林 不傳經敎但傳心
後人若悟眞如性 密印由來妙理深

70. 효종(孝宗)이 경산 도잠(徑山道潛)스님에게 칙서를 내리다

효종황제는 경산(徑山道潛)스님을 궁으로 불러들이고 송을 지어 하사하였다.

나오는대로 설법하되
수백 마디 모두가 으뜸가는 종지라
스님이 절로 돌아가자 너무나 고요해
한 글자도 부칠 곳이 없구나.
信手拈來說 宗乘數百句
僧歸寺寂寥 一字無著處

국역 총림성사 상권 종(國譯 叢林盛事卷之上 終)

총림성사 下

1. 꿈 속에 본 시구절 보봉 경상(寶峰景祥)스님

보봉사(寶峰寺)경상 차수(景祥叉手:1062∼1132)스님이 동자였을 때, 두 노스님이 밤중에 이
야기를 하던 차에 옛날 큰스님의 송을 거론하는 것을 들었다.

수렛소리 덜그럭거리며 강남 땅 지나더니
잠시 유해를 늑담에 머물려 두네
진령(秦嶺)의 자욱한 모래 아직도 가라앉지 않았는데
달밝은 밤 괜스레 선승의 암자에 자물쇠를 채우네.
征輪軋軋過江南 暫把遺骸寄 潭
秦嶺烟沙猶未息 月明空鎖定僧菴

경상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느낀 바 있어 눈물이 맺혔다. 노스님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얼마 전 꿈 속에서 이 시구(詩句)를 보았는데, 아마 이는 저의 전신이 지은 것인 듯
싶습니다."
"그대는 뒷날 반드시 늑담사의 주인이 될 것이다."
그 후 경상은 비구가 되어 몇 해 동안 대중 속에 있다가 과연 늑담사의 주지로 세상에 나갔
고 여러 차례 명산 대찰의 주지를 지냈다. 이어서 정강(紛康)의 난(금나라의 침공)으로 천태
산(天台山)에 피신하여 고암 선오(高菴善悟:1074∼1132)스님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연화봉에
서 입적하니 그곳은 천태 덕소(天台德韶)국사가 선정(禪定)에 들었던 곳으로 전후의 사실이
모두 지난날 게송에서 들은 바와 같았다.
교종(敎宗)에서는, 보토(報土:과보의 영역)는 모두 옛 원력이 나타난 것이어서 모두 정해진
몫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세속의 못난 무리들 중에는
주지를 하고자 구차스럽게 명성과 이권에 영합하여 늙어 죽으면서도 제 분수를 모르는 경우
가 많다. 내가 지난날 태백산 밀암(密菴咸傑)스님의 회중에 있을 때, 한번은 꿈속에서 일련
(一聯)의 게를 지어 벽 위에 써 붙인 적이 있다.

난간에 눈 내리니 절 집은 초록빛 유리 아래 있고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니 사람은 연꽃으로 돌아간다.
雪點欄干寺在翠瑠璃之下
雲橫 漢人歸紅 之中

이 글을 지은 지도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껏 세파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나의 보토
(報土)는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차! 꿈 이야기는 하는 게 아닌데….

2. 살아서 복이 아무리 많았어도 / 보자 온문(普慈蘊聞)선사

보자 문(普慈蘊聞)선사는 예장(豫章)사람으로 용모가 남달랐다. 처음에는 삼구(三衢)오거사
(烏巨寺)의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을 찾아 뵈었고, 그 다음엔 호상(湖相)지방으로 들어와
회안봉(回雁峰)아래에서 묘희스님을 뵙고 함께 갖은 어려움을 겪어냈다. 장원급제했던 왕성
석(汪聖錫)과도 두터운 교분이 있었는데, 왕씨는 상요(上饒)땅 사람이었으므로 문선사를 회
옥산(懷玉山)의 주지로 천거하니 그곳은 황룡 혜남스님이 공부했던 곳이기도 하다.
왕성석이 뒷날 민주( 州)자사가 되자 곧 온문스님을 상골산(象骨山:雲峰寺)으로 초청하였으
며, 건도(乾道:1165∼1173)연간에는 칙명으로 쌍경사(雙徑寺)의 주지가 되어 천자의 부름으
로 여러 차례 궁궐에 들어가 설법하였다. 천자는 기뻐하여 특별히 혜일선사(慧日禪師)라는
법호를 하사하였으며, 만년엔 또다시 칙명으로 설봉산으로 돌아왔는데 고산사(鼓山寺)노스님
차산 승(次山昇)이 그에 대하여 소(疏)를 지었다.

선기(璇璣)가 움직이지 않고서도
잠깐 사이에 하늘의 바람과 구름을 돌리고
대용(大用)이 앞에 나타나
종횡무진, 일월을 걸어놓았도다
백년에나 한 번 있을 만남이 반가우니
천년에 다시 모여 이 복을 누리소서
덕이란 나날이 새로워지지만
사람이란 오로지 옛사람을 구하는 법
그대의 도는 남쪽 민지역(南 ) 이절(二浙)지방에 전해졌고
그대의 인연은 설교(雪嶠) 오봉(五峰)과 맞았으니
사형사제 전후하여 주지를 이어오며
각기 아름다운 명성을 얻어
예전에 떠나가고 이제 돌아옴에
모두가 천자의 칙명으로 불법을 일으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천지의 마음을 보았도다
그러나 홀로 성주의 지우(知偶)를 만나니
명공대작 모두가 스님을 우러르네
바야흐로 과녁 위를 나는 봉황을 따르다가
갑자기 놀라 합포에 구슬 안고 돌아옴이여
백마타고 오신 님을 보았으니
옷자락 땅에 끄는 아름다운 시녀가 필요하겠나
일천여명의 용상(龍象)스님이
우두커니 코끼리수레로 돌아오는 스님 바라보니
삼백년 조사의 도량에
또 한번 나무공을 굴려 불법 일으킴을 보리라
바라건대 밀인(密印)을 가지고
아랫사람의 염원에 부응케 하소서!

온문스님은 복이 많기로는 근세에 따라갈 사람이 없었으나, 그의 향상(向上)경지에 대해서
는 총림의 신임을 얻지 못하여 죽은 후엔 명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3. 세속과 어울리지 않는 성품 / 철암 일대(鐵菴一大)선사

철암 일(鐵菴一大)선사는 건창(建昌)사람이다. 불조 담(佛照少曇)도인과 동행하여 처음엔
월암 과(月菴善果)스님을, 후엔 응암 화(應菴曇華)스님을 찾아뵈었다. 담화스님이 귀종사(歸
宗寺)에 주지로 있을 때 철암스님이 시자로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담화스님은 그의 성품이 고
고하여 세속과 어울리지 않음을 좋아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모습에 대해 이런 글을 지어 주
었다.

불자(拂子)를 걸어두기도 하고 세워들기도 하니
완전한 기틀이 출몰하고
한마디 할(謁)에 귀머거리되어
사흘 동안 귀가 멍멍하더라니
말하라
그것은 마조의 귀가 멍멍한 것인가
아니면 백장의 귀가 멍멍한 것인가
종일시자는 이렇게만 말했다오.

건도(乾道:1165∼1173)연간에 태주(台州)경선사(慶善寺)의 주지로 나왔다가 다시 구주(衢州)
상부사(祥符寺)로 옮겨 마침내는 월암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는데, 이는 그가 깨달음을 얻게
된 바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님의 초상화에 찬을 썼다.

사대 오음을 뒤집어 걸어놓고
최고의 경지를 깨쳤도다
마음을 쏟아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보이지 않게 도리어 비웃음 받았다네
눈동자 속의 사람이 쇠피리 불어대는구나
작은 바가지로 바닷물을 뜨자니 부질없이 심신만 고달프다
다리미 불에 차 끓이는 사람과는 찻잔을 함께 않네.

그 후 스님은 가화(嘉禾)절에 있다가 소산(疎山)과 앙산(仰山)으로 자리를 옮겼고, 두 차례
나 설봉산(雪峰山)의 주지를 지낸 후 입적하였다.

4. 행자에게 들려준 법어 / 설당도행(雪堂道行)선사

설당 행(雪堂道行)선사의 법어 가운데 원우(元友)행자에게 들려준 말이 있다.
"운거산(雲居山) 고암(高菴善悟)노스님이 용문산 불안(佛眼)스님 회하에 수좌로 있을 무렵
대중에게 으레 `모름지기 유식한 사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뒷날 내가 고암스님
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시봉할 때 그 뜻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
다. `많은 대중 가운데에는 못난 사람들이 항상 많고 식견이 있는 자는 항상 적다. 못난 이
들은 익숙해지기 쉽지만 식견이 있는 자와는 친하기 어렵다. 그러한 사이에서 스스로 크게
뜻을 세운다는 것은, 마치 한 사람이 만명을 대적하는 일과 같다. 용렬하고 천박한 버릇이
모두 없어졌을 때 참으로 헤아릴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다.' 나는 그 후로부터 오
늘날까지 그 말씀을 되새겨오고 있다.
기질이 의지를 이기면 소인이며, 의지가 기질을 이기면 똑바른 인물이랄 수 있지만, 의지와
기질이 균형을 이루어야만 도를 얻은 성현이 된다. 어떤 사람이 남의 충고나 가르침을 받아
들이지 않고 사납고 괴팍한 성깔을 부리는 것은 그의 기질때문에 그처럼 된 것이다.
기파(耆婆:옛날 부처님 당시의 명의)가 죽으려 하자 모든 풀들이 울면서 `기파가 살아있을
때는 우리가 쓸모 있었지만 그가 죽은 후엔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라고
개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데, 이는 바로 오늘날의 세간사를 비유한 것이다.
내가 출가하기 전, 20세가 못되어 독(獨)거사를 만났는데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속에 주인이 없으면 바르지 못하고, 밖에 주인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이 말을 들은 뒤로 일생동안 이 말을 실천해 오고 있다. 세속에 있으면서 입신양명할
때나 출가하여 도를 배울 때나 나아가 만년에 대중을 다스릴 때까지 이 가르침을 따랐다.
마치 저울로 물건의 경중을 헤아리고 둥글고 굽은자[規矩]로 모나고 둥근 것을 만드는 것처
럼, 이를 버리면 모든 일에 기준을 잃게 된다. 원우(元友)여! 노력하여라."

5. 소자유(蘇子由)의 게송들

영빈선생(穎濱先生)소자유(蘇子由)는 한때 균양(筠陽)땅에 유배되어, 진정(眞淨克文)스님과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그는 일찍이 두 수의 송을 지어 향성사(香城寺) 순(上藍順)스님에게
올렸다.

끝없이 많은 일을 녹여
다해서 하나의 마음을 만들었으나
그 마음마저 두지 않고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르렀구나.
融却無窮事 都成一片心
此心仍不有 從古至如今

보일 듯 하다가 다시 없는 듯
몇 차례 서로 만나 웃음을 지었던고
여기엔 머리도 꼬리도 없으니
몇자 몇치를 헤아리지 마오
동파노인을 알고 싶거든
당당한 대장부임을 알아 두시오
근래에 와서 이 일을 알고서
전혀 글을 읽지 않았다오.
如見復如亡 相逢 幾場
此間無首尾 尺寸不須量
欲識東坡老 堂堂一丈夫
近來知此事 也不識文書

당시 소동파도 유배지에 있었다. 소자유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져 그가 사는 곳을 `동헌
(東軒)'이라 이름 지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서 놀려 주었는데, "동헌 장로를 수북이 담
아 왔다[盛取東軒長老來]"라는 구절이 있다. 소자유가 이에 대하여 답하였다.
 ̄"설령 수북이 담아 와도 아무 쓸모없고 설당(雪堂)엔 원래 노스님이 계시는 곳[縱使盛來
無用處 雪堂自有老師兄]"
또 한번은 도연명(陶淵明)시에 화운(和韻)하였다.

중원 땅에 불법이 전해지자
유학자들은 얘기하는 것마저 부끄러워하였지만
그 공덕 보이지 않는 가운데 펼쳐 있으니
어찌 그 당시를 잊으오리까
이곳은 더러운 풍습으로 뒤범벅되어
흐리멍텅 이름난 스님이 없어
살림살이나 도닥거리며 가산만 지키려 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앉아서 의심하게 만드네
술 고기 나쁜 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생사를 떠난다고
우리 민 땅엔 이런 풍조 만연하여
불사란 생각할 수조차 없네
영특한 아들 많이 낳아
부처님의 보응이 너를 속이지 않았다하나
때로 바른 법안을 지닌 스님이
한번 나오셔서 이를 밝혀 주리
누가 그 고을의 부호라고 말하는가
바라건대 나의 이 시를 읊조려보오.
佛法行中原 儒者 論玆
功施冥冥中 而何負當時

此方舊染雜 渾渾無名緇
治生守家室 坐使斯人疑

未知酒肉非 寧與生死辭
熾然吾 中 佛事不可思

生子多穎悟 得報不汝欺
時有正法眼 一出照曜之

誰謂邑中豪 請誦我此詩

6. 3교의 가르침 / 광록대부(光祿大夫) 조형(晁逈)

광록대부(光祿大夫) 조형(晁逈)은 불경과 그 밖의 서적들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만년에는 `
법장쇄금(法藏碎金)"을 저술하였으며, 유·불 양가에 널리 유행되었다. 그의 말은 교화에 큰
도움을 끼쳤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유교에서는, 뜻있는 선비라면 학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서에 서도 `
학문이 없는 자는 그 도리를 분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말만을 이해하고 되는대로 자포자기
를 한다면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유·불·도 3교의 서적을 대략 훑어보니,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뜻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 유교의 `주역(周易)"에서는 `군자는 덕업을 닦는다[君子進德修業]'하였고 도교의
`노자(老子)"에서는 `으뜸 선비는 도를 깨치고 부지런히 이를 실행한다[上士聞道勤而行之]'
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마치 큰 용이 할 일을 다 마치고 무거운
짐을 벗어 제 물을 얻은 것과 같다[猶如大龍 所作已辨 捨於重擔 殆得已利]' 고 하였다.
나는 이로 인하여 이 3교를 빠뜨림없이 참구해 보니, 비록 그 문구들이야 서로 다른 점이
없지 않지만 덕이 반드시 학문에서 나온다는 데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에 더하
여 7·80 노령에 이르도록 그 뜻이 심오하여 무궁히 이르게 될 것이다."

맨 마지막의 한마디는 만겁토록 바뀔 수 없는 말이라 하겠다.

7. 산 제사를 받고 입적하다 / 대원 지(大圓智)선사

대원 지(大圓智)스님은 사명(四明)땅 사람이며, 도림 요일(道林了一)스님의 법제자이다. 요
일스님은 우산 법거(祐山法거)스님을, 법거스님은 황룡 혜남스님을 친견하였으니 대원스님은
몸소 황룡파의 종지를 얻은 셈이다. `황룡삼관송(黃龍三關頌)"과 `염고(拈古)"를 지었는데 그
법어들은 총림에 성행하였다.
처음 묘희스님은 그의 성품이 털털하여 절 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를 썩 좋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염고"를 보고서 마침내 의자를 만지작거리면서 "참으로 황룡을 정통으
로 전한 것이다"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염고집" 뒤에 큰 글씨로 4구게송을 썼다.

칠불의 명맥과
모든 조사의 눈동자가
이 어록을 보기만 한다면
모두 앞에 나타나리.
七佛命脈 諸祖眼睛
但看此錄 一切現成

이를 계기로 학인들은 바야흐로 두 분 스님의 묘용처(妙用處)가 애당초 다르지 않음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지(智)스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고 묘희의 경지는 예전의 암두(巖頭全¡), 사심(死心悟新)스님에게 뒤지지 않으니, 백대의
스승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아직껏 이 노승과 그 일로는 맞딱뜨려보지 않았는데, 만일 이 노
승을 한 차례만 만난다면 앞 뒤가 끊기게 해주리라."
그러나 두 스님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지선스님은 석상산(石霜山)에서 세상을 마쳤는데 열
반하기 10일 전에 미리 제자들에게 살아서 제사를 받고 법좌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여
기에서 대혜 묘희스님이 사람을 가볍게 인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8. 묘도도인(妙道道人)의 법문

묘도도인(妙道道人)은 연평(延平) 황씨(黃氏)의 딸이다. 여러 큰스님을 두루 친견한 후 경
산(徑山)에서 묘희스님을 찾아뵈었다. 한번은 묘희스님이 방장실에서 어느 스님에게 묻기를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자 그 스님은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마침 묘도도인이 문밖에서 이 말을 듣고 환하게 깨친 바 있어 묘희스님께 아
뢰자 "화살이 뽕나무에 꽂혔는데 닥나무에서 즙이 나왔군!"하며 깨친 바를 인가해 주었다.
후일 그는 홍복사(洪福寺)의 개당 법문에서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선이란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뜻을 세우면 종지에 어긋난다. 도란 공훈과는 동떨어
지니, 공을 세우면 도의 분수를 잃게 된다. 소리 밖의 말을 생각 속에서 구하지 말고 조용
(照用)의 기틀을 지니고 불조의 감추(金甘鎚)를 쥐고서 부처가 있는 곳에선 서로 손님과 주인
되고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바람이 냉랭하다. 마음이 편안하고 생각이 태연하면 메아리는
순조롭게 소리에 화답하니, 말해보라. 이와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 있는가를……"
한참동안 말없이 있다가 송하였다.

도롱이 걸치고 천 봉우리 밖에 비껴 섰다가
오노봉 앞 채소밭에 물줄기 끌어주다.
披 側立千峰外引水 蔬五老前

또다시 설법하였다.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잘못은 눈뜨고 침상 위에다 오줌싸는 격이요, 현성 공안
을 함부로 쓰는 것은 꾀 많은 계집아이가 정조를 잃은 격이라, 도무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것이며, 신령한 거북이가 꼬리를 질질 끄는 일이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
건도 아니라' 함은 허공에 못질하는 것이요, 부서진 집을 떠난다 해도 오히려 썩은 물 속에
잠겨있는 용과 같은 꼴이다. 깊은 물을 쏟고 높은 산을 무너뜨리는 한마디를 어떻게 말할
까? 거령(巨靈:黃河의 水神)이 손을 올리는 것은 대단찮은 일이나 화산(華山)을 천겹만겹 산
산조각 내었노라."
후일, 수암(水菴師一)스님은 한 스님이 이 법문 거론하는 걸 보고서 손을 이마 위에 얹고 먼
곳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 일은 남녀 등의 상(相)에 관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대장부들이 10년이고 5년이고 대중
가운데 살며 캐보아도 알지 못한 경지이다. 그는 비록 여인이지만 의젓이 대장부의 일을 해
내었으니, 수많은 엉터리 장로들보다도 훨씬 낫다."

9. 간당 행기(簡堂 行機)선사의 살림살이

간당 기(簡堂行機)선사는 처음 요주(饒州) 완산사(莞山寺)에 주지로 있었는데 17년 동안 화
전을 일구어 밭갈이를 하면서 갖은 고초를 맛보았다. 스님이 살던 곳은 사방이 자연 그대로
의 상태였으므로 적막함을 즐길 수 있었으며, 세상의 부귀영달에 마음 쓰지 않고 베옷과 나
물밥으로 변함없는 절개를 지켜 왔다. 이에 세상에서는 그를 `기도인'이라 불렀다. 뒤에 스
님은 구강(九江) 원통사(圓通寺)에 살며 차암(此菴景元:1094∼1146)스님의 도를 크게 폈다.
그의 대중법문은 다음과 같다.
"원통사엔 생약가게를 열지 않고 다만 죽은 고양이 머리를 판다. 그 값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먹기만 하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지."
그곳에서 태평선원(太平禪院)의 은정암(隱靜庵)으로 옮겨갔는데 비록 대중은 많아도 부엌
· 창고 등은 쓸쓸하였으나 대중들은 아무도 이를 불평하지 않았다. 절의 소임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황룡 노스님의 법을 따라 새벽 죽공양이 끝나면 바리때를 걸어놓고 승당에서
시자에게 목탁을 치게 한 뒤 "누가 무슨 소임을 맡아주기를 바란다"고 하면, 어느 누구도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혹시라도 명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여기 나의 회중에서 일을
맡지 않고 네가 어디 가서 일을 맡겠느냐?"라고 꾸짖었다.
아! 선배들은 그 도가 높아 사람 쓰는 것이 이처럼 쉬웠는데 어찌하여 오늘날엔 수없이 빌
고 절하여도 맡을 생각이 없고 오히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니, 괴롭습니다, 부처님이
여!

10. `납승 노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서림 조증(西林祖證)선사

서림사(西林寺) 조증(祖證)스님의 별명은 노납(老衲)이며 장사(長沙)사람으로 월암(月菴善
果)스님의 법제자이다. 월암스님이 도림사(道林寺)에 있을 때 조증스님은 책임자로서 몸소
형제 학인들을 위하여 명패를 걸고[掛牌] 입실하였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정중하게 학인을
지도하였는데, 비록 혼자 있을 때도 마치 큰 손님을 마주하듯 하였으며 형제들이 그를 보면
항상 정중한 모습이었다.
뒤에 스님은 서림사(西林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도를 폈는데 `운문화타(雲門話墮)' 공안에
대하여 송하였다.

부싯돌 번뜩이는 섬광 속에서 질문을 던지노니
투철히 깨닫지 못하면 얼마나 어려움이 많을지
만일 정수리에 금강눈을 갖추면
옆사람에게 낚싯대 잡히는 꼴을 당하리라.
石火光中立問端 不能透脫幾多難
頂門若具金剛眼 肯被傍人把釣竿

이러한 경지는 그가 친히 월암스님의 설법을 들었고 또한 고정된 격식을 훌쩍 벗어났기 때
문에 얻어진 것이다.
처음 보안사(保安寺)가봉(可封)스님 또한 월암스님을 찾아뵈었는데 그는 견지(見地)가 더욱
뛰어났다. 그 또한 `운문화타' 공안에 대하여 송하였다.

세모에 거문고 안고서 어디로 가려 하오
낙양 땅 삼십육봉 서쪽으로…
일생동안 선생 얼굴 뵙지 못하여
한번도 `오야제'를 듣지 못했소.
歲暮抱琴何處去 洛陽三十六峰西
生平未識先生面 不得一聽烏夜啼

이는 참으로 유하혜(柳下惠)를 잘 본받고도 그의 발자취를 스승 삼지는 않았다고 할 만하
다. 정수리에 금강눈을 갖춘 이라면 분명히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11. 매천 순(罵天詢)스님과 불감(佛鑑)스님과의 문답

매천 순(罵天詢)스님은 견처가 분명한 분이었다. 일찍이 불감(佛鑑慧懃)스님 시봉을 들었는
데 불감스님은 수순스님의 얼굴이 검고 모습이 추하다고 하였으며, 관상가 또한 그에게 복
이 없다고 하였다. 어느 날 불감스님이 우연히 수순스님에게 말하였다.
"한 알의 보석을 너같은 거렁뱅이가 줍다니 아깝구나!"
"스님께서 단단히 거두어들이지요."
또 어느 날 그에게 말하였다.
"일체 중생이 언제 깨달은 적이 있었느냐?"
"일체 중생이 언제 미혹한 일이 있었습니까?"
그때 갑자기 한 행자승이 그들 앞을 지나가자 불감스님이 행자에게,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불감스님이, 언제 깨달은 적이 있었느냐
고 다시 묻자 수순스님이 얼른 행자를 불러세우고서 말하였다.
"방참(放參)은 하였는가?"
"방참하였습니다."
"언제 미혹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자, 불감스님은 버럭 성을 내며 행자에게 고함을 쳤다.
"이 축생[業種]아, 나가!"
이에 수순스님이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소리를 좀 낮추십시오. 바깥 사람들이 우리 두 부자가 여기에서 깨쳤다느니 미
혹하다느니 다투는 소리를 들을까 두렵습니다."
불감스님은 크게 웃어댔다.

12. 미치광이 중 분암주(分菴主)의 하안거 결제법문

검문(劍門) 분 암주(菴主)는 민( )사람이다. 어린 나이부터 도에 대하여 스스로 깨친 바
있어 마침내 삭발하고 고향을 떠나버리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미친중이라 하였지만 분스님
은 개의치 않았다. 처음엔 나암 정수(懶菴鼎需)스님을, 그 후엔 쌍경사 묘희스님을 찾아갔었
는데 묘희스님은 그가 미쳤다는 말을 듣고, 끝내 참당(參堂)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분암주는
분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였다. 전당(錢塘)가에 이르러 배를 빌
려 절강정(浙江亭)가에 우두커니 서서 눈물을 흘리며, "내, 분주히 오령(五嶺)을 넘어 묘희스
님을 찾아갔었지만 대중 속에도 들어가지 못함은 전생에 반야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하고
있는데 뜻밖에,
"시랑(侍郞)행차요!"하는 수행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스님은 여기서 활짝 크게 깨치고 송을
지었다.

몇 해 동안 이 일이 가슴에 걸려
여러 총림 물어봐도 눈뜨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갑자기 창자가 터져
강가에 울려오는 시랑행차시오 하는 소리
幾年箇事 胸懷 問盡諸方眼不開
今日肝腸忽然破 一聲江上侍郞來

그 길로 양서암(洋嶼菴)으로 돌아가 나암(懶菴)스님에게 귀의하니, 나암스님은 그의 깨침을
인가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갑자기 그곳을 떠나가려 하자 나암스님이 게를 지어 전송하
였다.

강머리 세찬 바람 물결이 나부끼는데
남북의 많은 사람 만나도 반갑지 않더니만
오로지 안분선자 뛰어난 수단 지녀
힘들이지 않고 과거급제 하였네.
江頭風急浪華飛 南北相逢不展眉
獨有分禪英悛手 等閑尊得錦標歸

그 후 칠민(七 )땅에서 거짓으로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며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고 때로는
고기전에 들어가니, 아무도 몰랐으나 함께 참례하던 목암 영(木菴永)스님만은 만날 때마다
반드시 스승처럼 그를 섬겼다. 한번은 다음과 같은 대중법문을 하였다.
"이 한 돼기 밭을 너희들은 한번 말해 보아라. 천지가 나누어지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
당장에 이를 깨치면 이 안분상좌를 꼼짝 못하게 하겠지만 만일 머뭇거리거나 헤아려본다면
천리만리 날아가는 흰구름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다."
갑자기 주장자를 뽑아들고 후려치면서 대중을 모두 쫓아버렸다.
또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15일 이전엔 하늘의 별들이 모두 북극성을 향하여 돌고 15일 이후엔 이 세상의 물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간다. 이전이니 이후이니 하는 것을 뽑아버리니, 가는 곳마다 지방의 말씨가
다르더구나."
이어 손가락을 꼽으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열
넷…"
하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 형제들이여, 말해 보라. 오늘이 몇 일인가?"
한참을 잠자코 있다가 말하였다.
"이 가게에서는 푼돈갖고 외상줄 수는 없지."

13. 이암 유권(伊菴有權)스님의 하안거 결제법문

이암 권(伊菴有權)스님은 임안(臨安) 창화현(昌化顯)사람이며 무암 법전(無菴法全)스님의
법제자이다. 만년사(萬年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아가 9년 동안 한 자리에 머무는 사이에 법
회가 크게 떨쳤다. 그러나 유권스님은 몸소 계율을 지키며 대중을 받들고 언행이 모두 법도
가 있었다. 대체적으로 불지 단유(佛智端裕), 수암 수(誰菴粹)스님의 법을 따랐으며 회하에
는 항상 500대중이 안주하였다.
스님은 진영에 스스로 찬을 썼다.

코는 메부리를 닮아
천리 밖의 사람과 마주하도다
만년사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이것이 바로 그것이라네
鼻如鷹 對面千里
要識萬年 只這便是

총림에서 모두 이 찬을 애송하였으며 그 후 스님은 상주(常州) 화장사(華藏寺)로 옮겨갔다.
여름결제 때 대중법문을 하였다.
"오늘 아침 포대의 주둥이를 꽁꽁 묶어 놓았으니, 눈 밝은 납승들은 이리저리 달아날 생각
을 말라. 마음 작용이 꺼진 곳에서 몸을 뒤집을 줄 알면, 재채기 소리도 사자후가 되리라.
전단림(총림)에서야 마음대로 하랴마는 눈썹을 치켜세우면 정수리에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집안 망신만 들통나겠구나."

14. 고종·효종의 미륵찬[高宗孝宗贊邇勒]

고종(高宗)·효종(孝宗)황제는 모두 미륵대사(邇勒大士)의 찬을 썼는데 총림에서 도가 있다
하는 스님네들이 모두 이 찬에 대하여 회답을 하였으나 두 황제의 마음에 계합되는 글은 적
었다.
황제의 찬은 다음과 같다.

푸른 하늘 한조각 구름
구만리 장천에 외로운 달
세간의 바깥에서 머무시니
오묘하도다. 그윽한 생활이여!
저자에 잘도 숨어사니
기이하다, 영웅 호걸이여
따르노니 주장자와 포대 하나 뿐
굶주린 배 채우는 데야 술이든 날고기든 무엇이 나쁘랴
그만두어라,
옥전누각에 흰눈이 나린다.
碧落片雲 長天孤月
能樓物外 妙兮幽絶
慣隱市廛 奇哉英傑
隨行兮 惟有 杖布袋
充飢兮 何妨酒肉腥血
別別玉殿瓊 樓更加雪

포대 속에 천지를 담고
지팡이로 일월을 떠받치네
지독스런 장난꾸러기 성인 중에 으뜸이요
미련하고 바보같기는 스님 가운데 으뜸일세
명령 행하니 매맞는 곳마다 맷자국이 또렷하고
형틀에 묶어두니 뺨을 칠 때마다 손자국이 선명하구나
그만두어라
이글거리는 화로 위에 내리는 눈 한송이.
袋貯乾坤 杖挑日月
聖中絶
癡癡 僧中傑
令行兮一棒一條
逗機兮一 一掌血
別別恰似紅爐一點雪

건도(乾道:1165∼1173)연간에 직도인(直道者:庵善直禪師)이 보령사(報寧寺)의 주지로 일찍이
이 찬에 화답한 일이 있다.

도량(度量)은 허공을 감싸고
눈에는 일월이 달려있네
하늘나라 있으니 하늘에서 으뜸이요
인간세계 사니 사람 가운데 호걸이라
포대를 내려놓고 사대부주(四大部洲)에 눌러 앉아
주장자 뽑아드니
온누리를 피바다로 만들만 하네
그만두어라
분명한 이 도리를 알기 어려워라.
量包太虛 眼懸日月
往天宮兮 天中之絶
居人間兮 人中之傑

放下布袋兮 坐斷四大部洲
拈起柱杖兮 直得大地流血
別別明明有理難分雪

이범사(李范使)가 이 찬을 올리자 효종은 대단히 기뻐하고 돈 5백만 전과 쌀 백 석을 하사
하여 대중의 공양에 보태 쓰도록 하였다.

15. 보인 별봉(寶印別峰)스님의 게송들

별봉 인(別峰寶印)스님이 금산사(金山寺)에서 유봉사(乳峯寺)로 옮겨갈 때, 의사 육안(陸安)
이라는 사람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보인스님은 달관 담영(達觀曇潁)스님의 후신이라
고 일러주었다.
스님은 한가한 성품을 타고났으며 화장사(華藏寺) 안민(安民)스님의 법을 이었다. 촉(蜀)땅
에서 나와 쌍경사(雙徑寺)에 이르러 묘희(妙喜大慧)스님을 뵙자 묘희스님은 말하였다.
"어디에서 왔느냐?"
"서천(西川)에서 왔습니다."
"그대가 검관(劍關)을 나오기 전에 몽둥이 30대를 맞았어야 하는건데."
"스님께 폐를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
묘희스님은 그에게 능가실(楞伽室)에 숙소를 정하도록 하고 매우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뒤
에 큰 사찰의 주지를 두루 지냈으며, 만년에는 칙명으로 경산사(徑山寺)의 주지가 되어 줄곧
9년 동안 머물면서 항상 `화엄경"으로 불사를 하였다.
소흥 경진년(紹興:1160)에 창포전(菖蒲田)에서 입적하였는데, 경산사의 도독(塗毒智策)스님에
게 영결을 고하자 도독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언제 가시렵니까?"
"물이 이르면 시내를 이루는 법이다."
그리고는 옷을 갈아 입고서 단정히 앉아 열반하시니, 그해 12월 8일이다. 열반하려는 차에
문도가 게를 청하자 큰 글씨로 써주었다.

천마디 만마디 법문이
모두가 허튼소리
나에게 한마디 있으니
죽은 뒤에 들어보이리라
千偈萬偈 總是熱荒
我有一句 死後擧揚

도독스님이 급히 감(龕)을 받들고 경산사로 돌아와 법당의 정침(正寢)에 안치하고 7일 후
에 당대 장례 법식에 따라 다비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 후 2년이 지
나 도독스님이 입적하자 사람들은 그의 덕에 보답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보인스님은 산중생활의 회포에 대해 글을 지은 적이 있다.

한결같이 숲 사이에서 단잠을 실컷 자고
마음대로 기염 토하니 햇빛이 뜨겁구나
병 없는 사람은 스스로 병을 구하지 말라
그것은 속박을 벗어나려다 도리어 얽매이는 격

어설프게나마 나찬스님처럼 토란을 구워 먹고
향엄스님처럼 송곳 하나 꽂을 땅도 없어라
베개머리 맡에 청산이 있으니
비갠 뒤에 뚝뚝 떨어지는 처마의 푸른 빗방울들.
一味林間飽黑甛 敎氣焰日炎炎
不將無病自求病 多是解粘添得粘

粗有芋 如懶瓚 更無錐卓昭香嚴
枕邊留得靑山在 雨後層層翠滴

또 한번은 `농부취타도(農夫醉打圖)'에 글을 썼다.

농부여, 어이하여 천지자연 저버리오
취한 뒤엔 으레껏 격양가를 부르도다
그 옛날 유방(劉邦)항우(項羽)의 흥문 밖 잔치에서
가슴 속에 제각기 창칼을 품은 것과는 다르구나.
農夫何事損天和 醉後依前擊攘歌
不似當年劉項飮 胸中各自有干戈

16. 도독스님 방옹(塗毒)스님을 애도하는 시와 영정찬 / 방옹(放翁)

도독(塗毒智策)노스님이 감호사(鑑湖寺)에 있을 때 방옹(放翁:陸遊)과 가장 교분이 두터웠
다. 소흥(紹興)임자년(1162)7월 27일에 도독스님이 입적하자 방옹이 조시(弔詩)를 짓고 통곡
하였다.

높고 높은 용문산, 만길이나 솟아 있고
사뿐사뿐 한쪽 신발 또 한번 서쪽으로 가네
흰 불자엔 먼지 앉고 선상은 싸늘한데
푸른 솔에 이슬지니 스님 부도 세워졌소
다시 오실 날 저 멀리 생각해 봐도 사대육신 아닐테니
서로 만날 수 있는건 삼생(三生)이겠소
나는 수행이 매우 부족하여
인간의 슬픈 이별 참기 어렵소.
??龍門萬衲傾 翩翩隻履又西行
塵侵白拂繩牀冷 露滴靑松卵塔成

遙想再來非四八 應當相見是三生
放翁大欠修行力 未免人間愴別情

또한 스님의 영정에 찬을 썼다.

골격이 빼어나고
정신 또한 맑아서
용모는 엄숙하면서도 온화하고
말은 많지 않으나 할말 다하네
그려낼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쏘아오는 그의 영기(英氣)이지만
그릴 수 없는 것은
정수리 위의 한쪽 눈.
骨格王貴奇 精神瀟灑
貌肅而和 語盡而簡

畵得者英氣逼人
畵不得畵者頂門上一隻眼

17. 조동의 종지를 깨친 분 / 석창 법공(石窓法恭)선사

석창 공(石窓法恭:1102∼1181)선사는 총림을 두루 참방하고 오랫동안 황룡 법충(黃龍法
忠:1084∼1149)도인에게 의지하다가 뒷날 굉지(宏智正覺)스님에게 귀의하였다. 정강(紛
康:1126)에 호상(湖湘)에서 동월(東越)로 돌아갈 때 법충스님은 송을 지어 그를 전송하였다.

모래섬에 놀던 그 옛날 부질없이 회상하며
손꼽아 헤아려보니 어느덧 40년
그대 석창사에 가거든 조용히 묻게나
이 많은 풍월을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를
閑思昔日戱沙洲 屈指于今四十秋
君到石窓閑借問 許多風月付誰收

법공스님은 월주(越州)보은사(報恩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다가 뒤에 서암사(瑞巖寺)
로 옮겨와서 스님의 도는 크게 펼쳐졌다. 스님은 괴로움을 이겨가며 학인을 가르쳤고 베옷
과 나물밥으로 추위와 더위를 견디면서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몸소 하여 총림의
질서를 갖추니, 납승들은 그의 덕망을 우러러 마음 깊이 굴복하였다. 한번은 불탄절에 이런
송을 지었다.

오천축국에서 쏜 한가닥의 쑥대 화살이
중국의 백만병사를 휘저어놓았네
운문의 바른 명령 행하지 못하면
자칫 저울눈금을 잘못보게 되리라
五天一隻蓬蒿箭 攪動支那百萬兵
不得雲門行正令 幾乎錯認定盤星

총림에서 이 송이 널리 애송되었다.
철백두(徹白頭:了堂思徹)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삼구(三衢)사람이며, 법공스님과 함께 굉지스
님 문하로서 절개있고 결백하여 세속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한번은 태백사(太白寺)를 찾
아갔는데 묘희스님은 그를 보고 매우 준수한 인물이라 하여 마음 속으로 기뻐한 나머지 꾀
를 써서 옥궤산(玉山)을 지나도록 유도하였지만 그는 소신을 바꾸지 않고 마침내 천동사(天
童寺)노스님에게 귀의하였다.
건도(乾道:1165∼1173)연간 초에 법공스님이 철백두스님을 자기의 제자로 생각하여 몸소 명
주(明州)보은사(報恩寺)의 주지에서 물러나면서 그에게 넘겨주었다. 주지된 지 2년만에 사방
의 훌륭한 스님들이 모두 귀의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굉지스님의 법통을 이었다. 이 때문에
법공스님은 그를 불쾌하게 생각하였지만 철백두스님 또한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 후 무주( 州) 화장사(華藏寺)의 주지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으나 길을 떠나려는 즈음
에 입적하였다.
임종시 유게(遺偈)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지금 이 한마디에는
다시는 회호(回互)가 없도다
달은 차가운 연못에 떨어지는데
저녁노을은 옛 나루터에 아득하여라.
當陽一句 更無回互
月落寒潭 烟迷古渡

참으로 동상(洞上:曹洞宗)의 종지를 깨친 스님이지만 안타깝게도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다.

18. 효종과 불조(佛照德光)선사와의 만남

효종(孝宗)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27년 동안에 항시 여러 사찰의 노스님을 맞이하여 도를
논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유독 불조(佛照德光)스님만은 가장 큰 대우를 받아왔다. 순희(淳
熙:1174∼1189)초에 불조스님이 냉천사(冷泉寺)의 주지로 있을 때 그를 선덕전(選德殿)으로
불러들여 종문(宗門)의 일을 논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궁중에 머무르도록 했는데 이는 예전
에 없던 일이다. 이에 불조스님이 효종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여러 노스님을 불러 도를 논하였는데 어떻습니까?"
"장로 만큼 직절하고 민첩한 대답은 얻기 어려웠습니다."
"신(臣)은 산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말씨가 거칠고 서투니 폐하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여 주
십시오."
"괜찮소. 여기에선 잊고 도나 논합시다."
효종이 여러 스님에게 하사한 게송이 많지만 불조스님에게 내린 글 만큼 존경의 마음을 담
은 글은 일찍이 없었다. 효종의 글은 다음과 같다.

무더위에 쇠붙이도 돌도 녹아버리고
매서운 바람, 나는 구름도 얼어붙어라
매화 향기 저 멀리 퍼져가면
한가지 나무 위에 봄이 있는 걸.
大暑流金石 寒風結凍雲
梅華香度遠 自有一枝春

이 게에 대하여 불조스님은 화답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효종은 불조스님에게 글로 전하여
물었는데, `세존께서 설산에서 6년간 수도를 하여 이룬 것이 무엇입니까? 스님은 분명하게
설명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는 내용이었다. 때마침 불조스님은 어느 시주 집의 공양에
참석하였다가 갑자기 황제의 사신이 와서 곧 회답해 줄 것을 바라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폐하께서 잊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가히 스승이 없이 자연히 얻은 지혜[無師自然智]라 할
만합니다."

19. 바른 안목으로 종지를 밝게 깨치다 / 수암 연(誰菴演)스님

수암 요연(誰菴了演)스님은 민( )사람이다. 처음 회안봉(回上峰)아래에서 묘희스님을 찾아
뵙고 종지를 밝게 깨치니 묘희스님이 말하였다.
"이 원숭이가 뒷날 반드시 사람을 떠들썩하게 할 것이다."
그 후 묘희스님의 회하를 떠나가면서 게를 지었다.

철마를 거꾸로 타고 소상강을 건너갈 제
바위틈새 풀꽃들도 숨지 않는구나
높고 높은 회안봉 꼭대기를 몸소 올라보니
다시금 헤아릴 불법이 없구나.
倒騎鐵馬度瀟湘 磵草巖華不覆藏
回上峰高親到頂 更無佛法可商量

그는 뒷날 강상(江上) 용상사(龍翔寺)의 주지가 되었는데, 대중들이 많이 귀의하였다. 수암
(水菴師一)스님이 이에 대해 게를 지었다.

요즘 강상에 뛰어난 인물이 있어
학인을 가르침에 그대로 끊어버리는 기봉만을 쓴다네
江上如今得白眉 爲人偏用截流機

그러나 요연스님은 게송을 잘 지었고 안목 또한 발랐다. 스님이 신창(新昌) 석불(石佛)에
쓴 게송은 다음과 같다.

숱한 세월 우러러 본 석불상
오늘에사 다시 보니 모든 의심 사라졌네
모든 모습이 다만 이와 같으니
도리어 삼생을 뚫고 나왔나 생각했었지.
積念有年憺石佛 今朝一見絶疑猜
都盧面目只如此 却謂三生鑿出來

또한 용추(龍湫:폭포)에 쓴 게는 다음과 같다.

아라한 큰 용추에 눌러 앉았으니
그 기량 길 잘못 들 리는 없겠지만
오로지 높은 바위 위에 쏟아지는 폭포만을 보았으니
청산 밖에 맑은 경계 어찌 알았으랴.
羅坐斷大龍湫 伎倆却無錯路頭
只見高巖傾瀑布 那知碧 外淸幽

20. 선재동자를 노래함 / 별봉 운(別峰雲)스님

별봉 운(別峰雲)스님은 소계 수정(少溪守淨)스님의 법제자이다. 순희(淳熙:1174∼1189)연간
에 복주(福州) 지제사(支堤寺)의 주지가 되자 강제(江 )일대에서 도에 뜻을 둔 사람들이 모
두 귀의하였다. 선재동자가 남쪽에서 선지식을 찾아다닌 것을 송하였다.

쌍 상투도 또렷한 이 어린애가
뱃심 좋군! 네 아는 게 무엇이냐
53 선지식을 속여먹고
낭패본 걸 모두 그들에게 돌려주었네.
角分明者小兒 皮好待 聞知
他五十三知識 敗闕都盧納向伊

총림에서 이를 다투어 애송하였다.
뒷날 스님은 보양(蒲陽) 화엄사(華嚴寺)로 옮겨가, 그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21. 조운사 우연지(尤延之)에게 주지자리를 내놓고 / 혜홍(慧洪)수좌

흥(慧洪)수좌는 임천(臨川)사람으로 불조(佛照德光)스님의 법을 이었다. 홍주(洪州)광효사
(光孝寺)의 주지로 세상에 나갔는데 이는 조운사(漕運使) 우연지(尤延之)의 부름에 응한 것
이다. 그다음 우연지가 태수(太守)에 임명되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의 공참(公參)때에 여러
스님을 관청으로 불러들여 큰 절을 한 후 물러가게 하였다. 혜홍스님은 이 말을 전해듣고
불쾌하여, 천하에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북을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 법상
에 올라가 주지직을 사임하고 떠나면서 송을 지었다.

조사의 살림살이 원래 큰 것이었는데
누가 감히 자질구레 허리 굽히랴
안녕하소서. 현명하신 예장태수님!
나는 죽장에 짚신 신고 마음껏 노닐려 하오.
祖翁活計元來大 誰敢區區 折腰
珍重豫章賢太守 芒鞋竹杖任逍遙

태수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부끄럽게 여겨 사람을 보내 다시 청하였지만 혜홍스님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으며 강서 땅 모든 사찰이 그 후로부터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뒷날 스님은
길주(吉州) 상부사(祥符寺)의 주지를 지냈고 개복사(開福寺)로 자리를 옮긴 후 그곳에서 입
적하니, 시랑(侍郞)우연지는 몸소 스님의 전기를 썼다.

22. 자칭 `시골뜨기 중' / 설소 법일(雪巢法一)스님

설소 법일(雪敖法一:1084∼1158)스님은 스스로를 `시골뜨기 중(村僧)'이라 하였으며 초당
선청(草堂善淸)스님의 법제자이다. 오랫동안 평전사(平田寺)의 주지를 지냈고 뒤에 장노사
(長蘆寺)의 주지가 되어달라는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다가 여회 교(如晦皎)스님
의 서신 한 장을 받고서야 부임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절은 결코 작은 절이 아니고 `시골뜨기 중' 또한 그저 그런 중이 아닙니다. 당우가 죽
이어져 있고 게다가 경치 좋고 우수한 인재가 있는 곳을 얻으려 하십니까? 생철면피(生鐵面
皮)라는 아무 스님은 명성이 하늘까지 뻗칩니다.
그는 온누리를 주물러 하나의 사원을 만든다 하여도 전부가 아니라 하고 항하수 모래로 납
승을 만들고도 할(喝)한번 하지 않습니다. 자, 광화(光火)보살의 얼굴을 보십시오. 또한 타거
나한( 距羅漢)을 후려쳐 보십시오.
이곳에 오시어 밑없는 배를 버티어 주시고 갈대꽃 숲(절이름 長蘆寺)에 길고 긴 물결을 일
으켜, 향상구(向上句)를 들고서 금지옥엽 귀하신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어줌이 좋을 것입니
다."

설소스님은 그곳에서 일년 동안 주지하다가 그 이듬해 다시 만년사로 돌아온 후 얼마되지
않아 관음원(觀音院)에서 입적하였는데 입적할 무렵 미리 널 속으로 들어가 자물쇠를 채우
면서 게를 읊었다.

올해 나이 일흔다섯
돌아와 암주가 되었으니
안녕하소서, 관세음보살!
진흙뱀이 돌범을 삼켰도다.
今年七十五 歸作菴中主
珍重觀世音 泥蛇呑石虎

스님이 평전(平田)땅에 있을 무렵 대중은 항상 5백명쯤 되었다. 그때 강서 늑담사에 한 화
주가 나타나 대적탑(大寂塔:마조스님의 탑)을 수리하자 대중들은 모두 송을 지어 이를 찬양
하였다. 그당시 한 좌주(座主)가 처음 선종으로 전향하여 대중으로 들어왔다가 이를 계기로
게송 한 수를 지었다.

강서 땅 늙은 스님에게 이르노니
그날부터 날씨가 무덥고 비바람이 불어오리라
자손들의 헤아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얼음 녹듯 기왓장 무너지듯 할 때를 보아야 하리
寄語江西老古錐 從他日炙與風吹
兒孫不是無料理 要見氷消瓦解時

또한 `동짓날에(冬日卽事)'라는 시를 읊었다.

모진 삭풍은 사람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
바위 앞 고목가지에 불어온다
깊은 밤 화로 가득히 불 주시니
도리어 내 마음 게을러집니다.
朔風也解知人意 吹落巖前古樹枝
惠我一爐深夜火 轉敎心性懶趨時

설소스님은 이 시를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납자들이 30년 동안 이곳 대중의 밥을 먹었지만 이런 시를 짓지 못했다. 뒤에 그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
뒷날 과연 스님의 말대로 그 좌주(座主)는 동액사(東液寺)의 주지가 되어 남악 천태(天台)의
가르침을 크게 일으켜 세웠는데, 그가 신조(神照)스님이다.

23. 송원 숭악(松源崇岳)스님의 게송

송원 숭악(松源岳:1132∼1202)스님이 동호사(東湖寺)에 살 때, 다른 법당을 맡은 이가 송을
청하자 스님은 큰 글씨로 써 주었다.

황금 부처님 아래로 눈 내리감은 채
온갖 방법으로 편의를 찾네
이제 나의 몸 붙일 것 없어
도리어 자손에게 덮어달라 보채네.
黃面瞿曇眼目答目蚩 千方百計討便宜
于今無著渾身處 却要兒孫盖覆伊

한 관리에게 지어준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과 도와 문장까지 얘기하며
숲 아래에서 만나 웃은 지 그 몇 번이런가
우리집 빗장문을 밟고
평민이 재상을 뵈는 일 또한 예사 일.
說禪說道說文章 林下相逢笑幾場
踏著吾家關子 白衣拜相也尋常

세상사람들은 이 게송을 앞다투어 애송하였다.

24. 담광 남(曇廣南)스님의 `소금을 만들며'라는 게송

담광 남(曇廣南)스님은 오랫동안 밀암(密菴咸傑)스님에게 귀의하였다가 뒤에 불조(佛照德
光)스님의 회중에서 요원(寮元:大衆寮의 監事)을 맡아보았다. 그는 `소금을 만들며[化鹽頌]'
라는 게송을 지은 적이 있다.

물과 진흙 뒤섞어 한 곳에 끓이니
물과 진흙 사라진 곳 새하얀 소금꽃 피네
하늘에 닿을 듯 높은 값 불러대나
공정한 값 분명하니 누가 감히 다투랴
合水和泥一處烹 水泥盡處雪華生
便能索起遼天價 公驗分明誰敢爭

불조스님은 이 송을 보고 기뻐하여, "이 광남(廣南)땅 오랑캐 역시 거칠구나!"라고 하였다.
후일 그는 삽주( 州) 도량사(道場寺)의 주지를 지내다가 그의 도가 떨칠 무렵 어느 세력자
에게 쫓겨났으며, 얼마 후 냉천사(冷泉寺)에서 입적하였다.

25. 책 만들며 암자에 살다 / 뇌암 정수(雷菴正受)수좌

뇌암 수(雷菴正受) 수좌(首座)는 평강(平江)사람이다. 용모가 훤출하였으며, 오랫동안 월당
(月堂道昌:1089∼1171)·요당(拗堂)스님 등 여러 큰스님들에게 귀의하였다. `보등록(普燈錄)"
30권을 편집하였고, `능가경(楞伽經)"에 주석을 붙이기도 하였다. 삽주( 州) 조씨암(曹氏菴)
에 주석하면서 서산거사(抒山居士) 유계고(劉季高)의 조카 유평(劉平)과 가장 가까이 지냈는
데, 경원(慶元:1195∼1200)연간 초에 다시 서호(西湖)에 암자를 짓고 살았다. 유공이 단구(丹
丘)에 부임하자 건자봉(巾子峰) 보은사(報恩寺)의 주지로 그를 부르니, 송을 지어 마다하였
다.

띠풀집 짓고서야 기뻐서 소나무에 기대니
베갯머리 맑은 바람에 단잠을 잔다.
참선이란 도리를 터득하는 것에도 무심함을 높이 사는데
어이하여 이내 몸을 시끌대는 절간에 넣으려 하오.
結 方喜倚長松 一枕淸風睡正濃
禪道尙無心理會 肯將身入鬧藍中

유공이 이 글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다시 사람을 보내 굳이 청하며 아울러 화답의 시를 보
냈다.

높고 깊으신 모습 우뚝한 소나무에 기대어
노년에 맑은 그늘 스스로 무르익네
홍진세계에 잠시 발 붙이시어
웃음지며 얘기한들 무엇이 나쁘겠소.
昻藏骨相倚喬松 晩歲淸陰只自濃
好向紅塵姑著脚 何妨都在 談中

그러나 스님은 끝까지 가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고상하다고 하였다. 주지가 되려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아첨을 하는 오늘날, 어떻게 이런 사람이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26. 행자 조경(祖慶)에게 써준 대혜스님의 게송

대혜 고(大慧宗 )스님이 쌍경사에 주석할 무렵, 1,700명의 훌륭한 스님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조경(祖慶)이라는 행자가 있었다. 그가 모친의 제삿상을 차려놓고 대혜스님에게
송을 청하자 대혜스님은 그의 골상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서 송 한 수를 지어 주었다.

저 하나를 꿰뚫고 나면
부처님도 수용하기 어려우니
호랑이가 길에 앉아 있노라면
여우 토끼는 저절로 자취를 감추게 되지.
透過那一著 佛赤不能容
猛虎當路坐 狐兎自潛

조경은 20여 세의 어린나이로 남원사(南源寺)의 주지가 되어 세상에 나갔다가 도림사(道林
寺)로 옮겼다. 어느 날 저녁 보지(寶誌:418∼514)스님이 젓가락 20개를 주는 꿈을 꾸었는데
깨고 나서 그 뜻을 알 길이 없었다. 이때 추밀참정(樞密參政) 유홍보(劉洪父)가 금릉 태수로
부임하여 조경을 종산사(鐘山寺)의 주지로 맞이하였다. 그 후 20년 동안 그곳에서 주지를 지
냈으며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새로 지었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경원(慶元:1195∼
1200)연간 초에 불조(佛照德光)스님이 오봉산(五峰山:徑山)에서 육왕사(育王寺)로 옮겨가자
조경이 그 뒤를 이어 경산사의 주지를 하다가 2년 후에 입적하였다. 참으로 묘희스님의 말
은 틀림이 없었다.

27. 시자에게 남긴 임종게 / 회암 혜광(晦菴慧光)선사

회암 광(晦菴慧光)선사는 설당 도행(雪堂道行)스님의 법을 이었다. 귀봉사(龜峰寺)의 주지
를 하다가 천주 (泉州)법석사(法石寺)로 옮겨왔는데 이는 참정(參政) 주규(周葵)의 부름에
의한 것이다.
그는 임종 때 제자 원총(元聰)에게 송을 남겼다.

총림의 독종 원총시자야!
우리 종문을 일으키지 못하면 너에 가서 우리는 멸망하리
나는 편히 누워 아무런 근심 없으니
총아! 너는 수시로 도독고를 울려라.
叢林毒種元聰侍者 耐吾宗滅汝邊也
吾今高枕百無憂 聰汝時 塗毒鼓

원총은 그 후 오랫동안 밀암(密菴咸傑)스님에게 귀의하여 경산사의 수좌로 있다가 홍주(洪
州) 보은사(報恩寺)주지로 세상에 나왔으며, 뒤이어 운거산(雲居山), 은정사(隱靜寺), 설봉사
(雪峰寺)등으로 옮겨다니다가 만년에는 칙명으로 경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회
암스님이 부질없이 그를 인가한 것이 아니라고들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자비를 실천하신 설
당스님께서 남긴 음덕이라 하겠다.

28. 강원에 있는 원오스님에게 처음 행각을 권하다 / 승상 범백재(范伯才)

원오(圓悟克勤)스님이 처음 성도(成都) 강원에 있을 때, 승상 범백재(范伯才)가 스님의 그
릇이 비범함을 보고서 장편의 글을 지어, 그에게 남방으로 행각의 길을 떠나도록 격려해 주
었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물을 보려거든 더러운 연못물을 보지 말라
더러운 연못물에 사는 고기와 자라는 천하기도 하다
산을 오르려거든 낮은 산일랑 오르지 말라
낮은 산엔 초목마저 흔치 않다
물을 보려거든 곧장 넓은 바다를 보고
산을 오르려거든 곧바로 태산 정상에 올라가거라
얻은 바 적지 않으려니와 보는 바 드높으리
이처럼 힘을 다함이 헛 노력이 아니라
남방엔 다행히도 부처 뽑는 곳 있나니
그곳에서 오묘한 뜻을 깨침이 좋으리라
후일 큰그릇 되어 무너진 기강 바로 잡는다면
대장부 출가의 뜻 저버리지 않게 되리
대장부여! 머뭇거리지 말라
어이하여 헛된 이름을 위하여 몸을 망치려 드는가
즐겁게 떠들며 놀 때는 고생 많지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덧없는 세월 흘러간다
성도 땅이란 더구나 번화한 곳이니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계집과 술의 유혹 때문
우리 스님은 본디 티끌 세속 벗어난 인물이니
악착스런 소인배와 어울려 묻히려 하겠는가
우리 스님 다행히 높은 뜻이 있으니
결코 흙탕물에 헛딛지 않으리라
그대는 보지 못하였나
배를 삼키는 고기는 작은 여울에 몸을 숨기지 못하고
아름드리 나무가 어찌 벌거숭이 동산에 살 수 있겠나
붕조(鵬鳥)한번 나래치면 구만리 날아가는데
제비며 갈매기 따위와 함께 날으려 하는가
쏜살같은 천리마로
옛 가지 연연하는 뱁새를 본받지 마오
설령 그대가 수많은 경전을 논하여도
선종의 두번째 기틀[第二機]에 떨어지리라
흰 구름은 본디 높은 누대 그리워하여
아침 저녁 자욱하게 잠시도 흩어지지 않는 것은
온 백성 염원하는 비를 내려주기 위함일세
그때가 되면 한가히 산을 나오게나
그대 또한 보지 못하였나 형산의 아름다운 옥석은
뛰어난 옥공을 만나기 전엔 덤풀 속에 버려져 있었음을
그당시 초나라를 떠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진나라의 열 다섯 성보다도 값이 높았겠는가.

29. 사대부들이 쓴 큰스님의 어록서문[士大夫序尊宿語]

이 나라의 사대부로서 당시 큰 스님들의 어록에 서를 쓴 분 중에 참신한 문장가로는 산곡
(山谷:黃庭堅)· 무위(無爲:楊次公)· 무진(無盡:張商英), 이 세 사람을 앞설 사람이 없다. 오
늘에 이르러선 촉 땅 풍당가(馮當可)가 종문에 깊은 조예가 있으며, 그가 지은 석두 자회(石
頭自回)스님 어록의 서문은 강호의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의 서문은 아래
와 같다.

5조(五祖:法演)스님은 만년에 남당(南堂元靜)스님을 만났다. 남당스님의 거칠고 사나운 성
미는 혜근(佛鑑慧懃)스님과 청원(佛眼淸遠)보다도 더 심하였고, 기세는 하늘에 닿고 땅마저
비좁았으며, 대수(大隋:사천성에 있음)땅에서 노년을 보냈다. 그의 제자 자회도인은 망치질
하고 돌 다듬던 솜씨로 그 높고 견고한 남당의 문을 쳐부수었다. 그가 쏟아낸 힘은 너무나
커서 단 한번의 망치로 곧장 뚫고 나간 후 조어산(釣魚山)으로 돌아와 좌정하니, 그의 가파
른 절벽은 스승보다도 열곱이나 험준하였으며, 비상같은 독은 입에 넣을 수 없었다.
그의 문도 언문(彦聞)이 다시 눈 깜박할 사이에 스승의 남은 독을 모두 거둬다가 여러 총림
에 뿌렸다. 나는 후세 사람들이 편치 못하고 스스로 나ㄷ굴어질까 두려웁다. 그러므로 그의
독약에 표지를 붙여, 뒷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바이다.
진운야노(縉雲野老)는 서를 쓰다.

30. 무구거사(無垢居士) 장구성(張九成)의 법문

무구거사(無垢居士)장구성(張九成)은 묘희스님에게 공부하여 큰 깨침을 얻었고 종지를 보
는 눈이 분명하였다. 일찍이 노대가(老大家)로서 큰소리를 쳤다.
3승 12분교(三乘十二分敎)8만 4천여 권의 경전이라도 이 사람 면전에서는 제대로 침 한번
뱉지 못하고, 10신 10주와 10행 10회향과 등각 묘각이라도 이 사람 면전에서는 단 한 차례
도 앞에 내놓지 못한다. 다년간의 사냥한 과보로 다섯마리의 범을 키웠더니 그들이 사해를
누비면서 당(唐)나라에 일본에 또는 신라에다 똥 오줌을 뿌렸다. 그러자 천지가 칠흑처럼 어
둡고 해와 달이 분주하며 수미산이 겹겹이 솟아오르고 사해에 파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들은 부질없이 거문고 가락을 고르며 잠시 앉아 있으니 그들의 얼굴과 주둥이를 보면 영락
없이 무식한 촌놈인데도 그들의 기용(機用)은 모진 바람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 천둥번
개 번쩍이고 뇌성벽력 진동하는 가운데 피리불며 활활타는 불을 끌고 간다. 아차! 이게 무
슨 쓸데없는 짓이냐!

31. 장산 찬원(蔣山贊元)스님의 법제자들

장산 원(蔣山贊元:?∼1086)스님은 자명(慈明:石霜楚圓)스님의 법제자이다. 찬원스님은 후일
설두 법아(雪竇法雅)스님에게, 법아스님은 자각 선인(慈覺善印)스님에게 법을 전하였고, 혼융
연(混融然)스님은 실로 이 법통을 이었다. 그는 건도(乾道:1165∼1173)연간에 금릉 천희사(天
禧寺)의 주지로 있었다. 당시 치선 원묘(癡禪元妙)스님은 보령사(保寧寺)에, 대선 요명(大禪
了明)스님은 장산사(蔣山寺)절의 주지로 있었는데 요명스님은 연스님이 황룡(黃龍慧南)· 양
기(楊岐方會)스님의 직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를 박대하였다.
한번은 공식석상에서 서로 언쟁을 하였다. 연스님은 논변이 민첩하였으므로 요명스님이 큰
곤경을 겪게 되었는데 치선스님의 도움으로 화해하였다. 연스님의 도량은 여느 사람보다도
뛰어났으나, 너무 일찍 세간에 나와 여러 총림의 문호를 두루 다니지 못하여 종안(宗眼)이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총림에서는 그를 박대하는 이가 많았다.
후일 그는 남화산(南華山)에 주지다가 오양산(五晳山)에서 입적하였다. 임종시 깨끗히 해탈
하였고 그 고을 사람들이 침향목(沈香木)을 쌓아 다비를 하였는데 적지않은 기적이 있었다.
연스님은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그의 스승 자각(慈覺)스님을 위하여 지은 수준높은 제문이다.

건염 3년(1129),
내 갑자기 미친병으로
복두건 눌러 쓰고
허리띠 잡아 매고
깊은 밤 스승의 뜨락에서 도적질하다가
스승에게 붙잡혔지만
이미 아무 물건도 없어
공연히 3배만 올렸네
그 후로 물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한 마음 적지 않구나
누군가 혹 스승을 욕하기를
`늙어 중얼거리지 못하고
전혀 깨친 바 없다'고 하면
나는 곧 머리 들고
하늘을 우러러 의심한다
누군가 스승을 칭찬하기를
`그의 도는 부처를 뛰어넘고
도량은 바다보다도 드넓다'고 하면
나는 곧 지팡이 쳐들고
그의 머리를 갈겨 부순다
이런가 저런가 하며
잘못 안 사람 많구나!
삼가 박주(薄酒)한잔을 올리오니
스님이여! 크게 한번 웃으소서.

스님의 제자 대기(大驥)스님은 순희(淳熙)연간에 구주(衢州) 영요사(靈曜寺)에 주지를 하였
다. 당시 조정에서는 마침 부역법(賦役法)을 시행하여 이절(二浙)과 강회(江淮)및 처주(處州)
지방에 모두 차출을 명하였는데 대기스님은 구주(衢州)·무주( 州)·처주(處州)세 고을의
비구 비구니와 도사(道士)를 모두 이끌고 조정에 찾아가 이를 면제받도록 하였다. 오늘날의
모든 승려와 도사들이 국가의 부역에 나가지 않고 평안을 얻게 된 것은 대기스님의 힘이었
다. 뒷날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은 중이라면 마땅히 그 연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대기스님은 후일 천태산 평전사(平田寺)의 주지를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2. 긍당 언충(肯堂彦充)선사의 문장

긍당 충(肯堂彦充)스님은 만암 도안(卍菴道顔)스님에게 공부하였다. 성품이 예리하고 견식
이 해박하였으며 고금의 일을 널리 통달하여 이런저런 많은 문장을 지었다. 그 가운데 전우
(典牛)스님 어록의 서문을 받고자 간초거사(簡初居士) 우시랑(尤延之)에게 한 스님을 보내면
서 지은 글(詞)이 있다.

민아산(珉峨山)아래 뿔 세 개 돋힌 호랑이가
남방에 뛰어드니 그 누가 업신여기랴
늑담사 문준노스님 눈에서 빛을 놓고
남몰래 손을 뒤로 돌려 삼만근짜리 활을 쏘니
한 방에 맞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 후로 사람 깨물어도 이빨 보이지 않네
무령산(武寧山)에 40년을 살았으나
어찌 유독 강서의 길에만 눌러앉으랴
경산사 도독(塗毒)스님 한 차례 물려
여지껏 남은 이빨자국 설욕할 수 없네
제자를 비야성에 보내어
거사를 찾아 한마디 구하노니
거사가 칭찬을 해도 당장 벙어리될 것이오
거사가 욕을 해도 당장 눈이 멀 것이다
거사여! 칭찬도 욕도 미치지 않는 경지에서
그를 위하여 어록의 서문을 써주소서.

33. 꼿꼿한 성격 때문에 / 공안 조수(公安祖殊)선사

공안 수(公安祖殊)스님은 사천(四川)사람이며, 그 또한 만암 도안(卍菴道顔)스님의 법제자
이다. 그는 성격이 꼿꼿하여 아무도 그를 가까이할 수 없었다. 건도(乾道:1165∼1173)연간에
호상(湖湘)지방에서 도를 폈는데, 한번은 진영에 스스로 찬을 썼다.

달빛은 산골짜기를 비추고
개울 물소리는 절벽에 떨어진다
물빛 산빛깔 속에
나는 한덩이 썩은 나무토막
月色照山容 泉聲落斷崖
水光山色裡 一塊爛奇柴

늙은 학 메마른 연못에 들어와
날개를 잘 접을 줄 알고
하늘에 등이 닿도록 솟아오르니
선계(仙界)의 천지도 비좁기만 하구나.
老鶴入枯地 善解藏羽
點著背摩天 壺中天地窄

34. 서암 순(瑞巖順)선사의 상당법어

서암 순(瑞巖順)스님은 수암 일(水菴師一)스님의 법제자이며 법호는 위당(葦堂)이다.
처음 지주(池州) 매산사(梅山寺)에 있을 때 일찍이 상당법어를 한 적이 있다.
"오늘은 5월 15일, 하룻밤 장마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숲 속의 도인들은 서로 만나 무슨
얘기 주고받는지 알 수 없구나. 만일 들어 말하면 가슴팍을 쥐어박고 뺨따귀를 갈겨 주어야
지! 무엇 때문이냐고? 황금이 풀무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어떻게 선명한 빛이 날 수 있겠는
가. 열흘에 입실하고 오일만에 법당에 올라도 못난 이놈들을 묻어 둘 곳이 없구나, 아! 이놈
들은 끌어다가 끓는 가마솥에나 처넣자!"
뒷날 스님은 태주(台州) 서암사(瑞巖寺)에서 입적하였다.

35. 뒤를 이를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 만수 요수(萬壽了修)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