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서천축西天竺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서인도西印度 진제 삼장眞諦三藏 한문 번역 조선朝鮮 용성당龍城堂 진종震鍾 백상규白相奎 한글 역주 현석*✽ 옮김

목차

대승기신론 상권

제Ⅰ장 서분

제Ⅱ장 정종분
제1절 인연 부분
제1. 가르침을 일으키는 이익을 밝힘
제2. 논을 지은 인연을 밝힘
제3. 논을 짓는 의미를 밝힘
제2절 뜻을 세우는 부분
제4. 대승의 법과 뜻을 세움
제3절 해석 부분
제5. 해석 장 부문을 전체적으로 나타냄
제6. 심진여의 뜻을 밝힘
제7. 진여에 들어가는 방법을 밝힘
제8. 말에 의해 모습을 말함
제9. 공의 뜻을 자세히 풂
제10. 불공의 모습과 모습 없음을 밝힘
제11. 생멸하는 마음의 뜻을 밝힘
제12. 식에 의해 두 뜻을 나타내 거론함
제13. 본각과 시각의 연유를 밝힘
제14. 깨쳐지는 네 가지 모습의 다름을 밝힘
제15. 다른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제16. 머무는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제17. 나는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제18. 망념을 떠나 망념이 있음을 밝힘
제19. 마음의 근원을 깨침을 밝힘
제20. 모습을 없애 본성이 드러나는 뜻을 풀이
제21. 부사의한 업의 모습을 풀이
제22. 본각 자체의 네 가지 모습을 거듭 밝힘
제23. 여실하게 공한 거울을 풀이함
제24. 자신(因)을 훈습하는 거울을 풀이함
제25. (진여)법으로 벗어난 거울을 풀이함
제26. 중생(緣)을 훈습하는 거울을 풀이함
제27. 깨달음에 의해 깨닫지 못함이 일어나고, 깨닫지 못함에 대비하여 깨달음을 설함을 밝힘
제28. 깨닫지 못함에 의해 세 가지 모습이 생겨남
제29. 경계의 반연으로 생기는 여섯 가지 모습을 풀고, 지말(육추)를 맺어 근본(무명)으로 귀결시킴
제30.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같은 모습과 다른 모습을 밝힘
제31. 생멸 인연의 뜻을 밝힘
제32. 다섯 뜻을 상세히 밝혀 일심에 귀결시킴
제33. 생멸의 뜻을 묻고 해석하여 마음을 말미암음을 밝힘
제34. 앞의 (상속)식으로써 의식을 밝힘
제35. 깨달음의 대상을 들어 깨닫는 주체의 같지 않음을 밝힘
제36. 알기 어려운 까닭을 풀고 불변과 무명의 두 뜻을 해석함
제37. 오염된 미혹을 떠난 모습을 상세히 보여 환멸하게 하는 인연을 자세히 밝힘
제38. 앞의 상응과 불상응의 뜻을 풀이함
제39. 여기서는 오염된 마음과 무명이 장애가 되어 지혜를 장애하는 모습이 같지 않음을 보임
제40. 생멸하는 모습을 밝혀 ‘뜻을 세우는 부분’ 중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을 풀이함
제41. 문답으로써 마음의 모습은 없어지지만 마음의 바탕은 불멸함을 밝힘

대승기신론 하권

제42. 앞의 생멸하는 가운데 오염과 청정이 서로 훈습함을 자세히 밝힘
제43. 망습이 점차적으로 훈습하여 오염된 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힘
제44. 망습이 훈습하여 오염된 법이 일어나는 차별을 따로 밝힘
제45. 진여가 반복해서 도우면서 훈습하여 청정한 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힘
제46. 허망한 마음의 훈습으로 나아가는 것의 더디고 빠름을 따로 밝힘
제47. 진여의 자체와 작용의 훈습을 따로 밝힘
제48. 문답으로써 진여의 훈습은 평등하지만 믿고 이해하고 수행하고 깨침은 평등치 않음을 밝힘
제49. 인연이 서로 부족함에 의해 앞서의 따짐을 회통함
제50. 작용에 의해 두 가지 반연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면서, 먼저 차별연을 밝힘
제51. 평등연을 풀이함
제52. 두 가지 (믿음과 법의) 힘에 의지해 자체·작용의 상응과 미상응을 밝힘
제53. 오염된 것과 청정한 것의 끊어짐과 끊어지지 않는 뜻을 밝힘
제54. 진여의 자체와 모습을 밝힘으로써 ‘뜻을 세우는 부분’ 가운데 대승의 자체와 모습을 보임을 풀이함
제55. 덕스러운 모습의 차별이 곧 무차별임을 밝힘
제56. 생멸하는 오염된 모습의 차별에 의해 진여의 청정한 덕의 차별을 드러냄
제57. 진여의 용대를 밝힘으로써 ‘뜻을 세우는 부분’ 가운데 마하연의 작용을 보임을 풀이함
제58. 불과에 의해 인행을 밝혀 두 가지 작용을 따로 밝힘
제59. 보신과 응신의 같지 않음을 거듭 밝히면서 법신이 작용과 모습을 벗어났음을 나타냄
제60. 형상을 떠난 것이 형상을 나타내는 데 걸리지 않음을 밝힘
제61. 근기에 따라 나타낸 의보와 정보의 장엄이 두루 원융무애함에 나아가 진여의 큰 작용을 결론지음
제62. 생멸의 근본을 관찰케 함으로써 진여에 들게 함
제63. 아견에 의거해 두 가지 집착을 전체적으로 나타냄
제64. 공에 집착하여 성품으로 삼는 견해를 깸
제65. 성품은 공하고 형상은 있다는 견해를 깸
제66. 성품에 오염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깸
제67. 처음부터 끝까지 생멸한다는 견해를 깸
제68. 이승들의 법집에 대한 견해를 깸
제69. 절대적으로 말의 표현을 떠난 것과 빈말로 이끌어 들게 하는 취지에 대해 밝힘
제70.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 대해 전체적으로 나타내면서 먼저 믿음을 이루는 발심을 밝힘
제71. 낮은 근기의 인연이 모두 하열하여 발심이 고정적이지 않음을 밝힘
제72. 내어지는 마음을 밝힘
제73. 이치는 하나이지만 미혹은 다르기에 모름지기 온갖 선을 닦아야 함을 밝힘
제74. 바른 마음에 의지해 머무름 없는 방편을 닦음
제75. 깊은 마음에 의지해 그침의 방편을 닦음
제76. 대비심에 의지해 대원의 방편을 닦음
제77. 정사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자재함을 보이는 것을 밝힘
제78. 먼저는 방편설이요, 뒤에 실다운 덕을 드러냄
제79. 앎과 실천의 발심을 밝힘
제80. 깨달음의 발심을 밝힘
제81. 법신 정사의 방편과 실다운 덕을 밝힘
제82. 먼저 발심의 세 가지 상태를 밝히고, 다음으로 구경의 덕용을 밝힘
제83. 망념을 벗어났지만 종지라 이름함을 드러냄
제84. 작용이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밝힘
제4절 신심과 수행의 부분
제85. 앞의 낮은 근기에 의거해 신행을 밝힘
제86. 보시와 지계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제87. 인욕과 정진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제88. 지관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제89. 정좌에 의해 지를 닦게 함
제90. 나머지 반연에 의해 지를 닦게 함
제91. 먼저 지를 닦는 수승한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으로 악마의 짓을 간략히 들어 고치는 모습을 밝힘
제92. 악마의 짓을 자세히 들어 고치는 모습을 밝힘
제93. 거짓에 대해 참을 나타내면서 바른 선정을 닦길 권함
제94. 지를 닦아 얻게 되는 이익을 밝힘
제95. 치우쳐 닦는 과실을 들어 네 가지 관을 닦길 권함
제96. 중생들의 고통을 생각하길 권하면서 자비와 서원을 내게 하여 온갖 선을 닦게 함
제97. 네 가지 위의에 의지하여 지관을 원만히 닦기를 권함
제98. 겁을 내어 물러나는 근기를 위해 오로지 염불하는 방편을 보임
제5절 닦으면 이익이 있다고 권하는 부분
제99. 게을러 나아가지 못하는 근기를 위해 이익을 들고 수행을 권함
제100. 훼방의 죄를 들어 믿고 수행하기를 권함으로 결론지음

제Ⅲ장 유통분
대승기신론 상권
제Ⅰ장 서분1)
제Ⅱ장 정종분
제1절 인연 부분
제1. 가르침을 일으키는 이익을 밝힘

무슨 이익이 있어서 이 논장으로 설명하는가? 법이 있어서 능히 마하연의 믿음을 내게 하는 까닭에 마땅히 설한다.마하연은 대승이다.
이것을 다섯 부분으로 전체적으로 나타내 큰 뜻을 설명하겠다. 첫째는 인연의 부분이요, 둘째는 뜻을 세우는 부분이다. 셋째는 해석하는 부분이며, 넷째는 신심과 수행의 부분이요, 다섯째는 닦으면 이익이 있다고 권하는 부분이다.

제2. 논을 지은 인연을 밝힘

묻기를, 무슨 인연이 있어서 이 논을 짓는가? 답하기를, 여덟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인연의 전체적인 모습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떠나 완전한 즐거움을 얻게 한다. 또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둘째는 여래의 근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바르게 알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는 선근이 성숙된 중생들로 하여금 마하연 법을 잘 감당하여 믿음이 물러나지 않게 하는 때문이다.
넷째는 선근이 아주 적은 중생들로 하여금 신심을 닦게 하는 때문이다.
다섯째는 방편을 보여서 악업의 장애를 없애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여 어리석은 아만을 멀리 떠나 삿된 그물에서 나오게 하는 때문이다.
여섯째는 지와 관을 닦아 익힘을 보여서 깨달은 중생이 범부와 이승으로 하여금 대승의 지관법을 닦아서 마음의 허물을 치료하여 대각의 도를 갖추게 하고자 하는 때문이다.
일곱째는2) 대각을 생각하는 방편을 보인다. 비록 대승의 마음을 내어도 근기가 낮아 겁을 낼까 두려워하여 대각의 성스런 명호를 오로지 생각해 대각의 앞에 태어나 결정코 신심을 물러나지 않게 하는 때문이다.
여덟째는 이익을 보여서 게으른 중생들을 위하여 유익함을 말해 수행하기를 권하는 것이니 그로 하여금 위없는 도에 이르게 하는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논을 짓는다.

제3. 논을 짓는 의미를 밝힘

묻기를, 위에서 말한 갖가지 법문은 수다라경전에서 이미 갖추어 설명하였는데 어째서 거듭 설명하고자 하는가?
답하길, 수다라에 비록 이러한 법이 있을지라도 중생들의 근기가 높고 낮음이 있고, 마음 씀의 우열이 같지 않고, 또 중생들의 인연이 각기 다르고 이해하는 인연이 같지 않음을 어찌하리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중생들의 근기가 높을뿐더러3) 여래의 삼십이상 금빛 참된 몸과 크게 지혜로운 마음의 힘이 뛰어나셨다. 원음으로 한번 법을 설하시면 다른 종류의 중생들도 같이 알아들었으니 말할 것이 없다.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차별이 더욱 많아서 혹 어떤 중생들은 자기의 힘으로써 널리 듣고 아는 자가 있고, 혹 어떤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힘이 밝아서 적게 듣고 많이 아는 자도 있다. 혹 어떤 중생들은 자기 마음의 힘이 밝지 못하여 자세한 논장을 인해 아는 자들이 있다. 혹 어떤 중생들은 자세한 논장의 글을 번거롭게 여겨 싫어하고 적은 글로써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없는 뜻을 전부 가짐(總持)을 좋아해 능히 아는 자도 있다. 지금의 이 『대승기신론』은 여래의 광대하고 깊은 법의 끝없는 뜻을 전부 거두고자 하기에 마땅히 설하는 것이다.

제2절 뜻을 세우는 부분
제4. 대승의 법과 뜻을 세움

이미 인연의 부분을 설명했으니 다음에는 뜻을 세우는 부분을 말하겠다. 마하연한자어로는 대승은 전부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법이라 말한 것은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이 체대와 상대와 용대의 뜻을 갖춘 때문에 법이라 한다. 이 마음이 오염된 반연을 따라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인간과 아수라와 하늘과 온갖 세간법을 내고, 청정한 인연을 따라 성문과 연각과 정사와 대각과 출세간법을 낸다.4) 이것이 생멸문이다. 이 마음을 의지해서 마하연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 무슨 까닭인가? 이 마음의 진여의 모습, 곧 (진여문은 세간과 출세간법을 융섭하여 오직 하나의 진여이기에 다시 다른 모습이 없는 것이니) 마하연의 바탕을 보인다. 이 마음이 진여와 생멸의 두 뜻을 갖춘 것이니 심진여의 뜻을 말한 것은 오직 바탕을 보인 것이고, 심생멸의 뜻을 말한 것은 (체·상·용) 삼대의 뜻을 보인다. 어찌 생멸이 능히 삼대의 뜻을 갖추겠는가? 진여는 모든 오염·청정, 생·멸, 이름과 모습이 없고 명수名數가 없거니 어찌 삼대의 명수가 있겠는가? 생멸은 연을 따르는 작용이다. 더럽기도 깨끗해지기도 하며, 성인도 범부도 될 수 있다. 업식과 분별사식을 의지한즉 인과응보의 작용이 분명히 또렷하고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이 많은 허망한 오염을 뒤집으면 공덕의 모습이 분명하기에5) 능히 마하연의 바탕과 모습과 작용을 보이는 것이다.
뜻은 세 종류가 있다. 모든 법의 진여가 평등하여 증감이 없는 까닭에 체대라 한다. 여래장이 한량없는 성품의 공덕을 갖춘 때문에 상대라 한다. 모든 세간과 출세간에 좋은 인과를 내는 까닭에 용대라 한다. 삼세 모든 대각께서 이 일심 삼대의 뜻을 타시어 정각을 이루셨고, 여러 큰 정사들도 이6) 를 타고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제3절 해석 부분
제5. 해석 장 부분을 전체적으로 나타냄

이미 뜻을 세우는 부분을 말했으니 다음에는 해석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세 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는 바른 뜻을 나타내 보인다. 둘째는 삿된 집착을 고친다. 셋째는 발심하여 도에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한다.
바른 뜻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일심법을 의지하여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있다.
이 마음이 곧 일체 세간과 출세간을 전부 거둔다. 일체 상대가 없는 일심이 진여문과 생멸문을 갖추었다. 진여문은 변하지 않는 뜻이요, 생멸문은 반연을 따르는 뜻이다. 변하지 않기에 생·멸, 오염·청정과 일체 이름과 모양이 없다. 반연을 따르기에 일체 의보·정보, 인·과 등이 전변하며 덕스런 모습과 과보의 작용이 업을 따라 앞에 드러난다. 진여는 온전히 생멸의 진여요, 생멸은 온전히 진여의 생멸이기에 이 두 부문이 각기 모든 법을 전부 거두니 어째서인가? 두 부문이 서로 벗어나지 않는 때문이다.

제6. 심진여의 뜻을 밝힘

심진여란 바로 일법계의 대총상 법문의 바탕이다. 이는 산수의 ‘일’이 아니라 모든 수를 깨기 위해 억지로 일컬은 것이다. 일 법성이 만법을 거두기에 법문의 바탕이라 한다.
이른바 심성이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허망한 생각을 의지하여 차별이 있다. 만일 망념을 떠나면 일체 경계의 모습이 없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본래부터7) 말이라는 모습과 이름이라는 모습, 마음의 반연이란 모습을 떠나, 결국 평등하여, 변함이 없어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일심인 때문에 이름을 진여라고 한다.8)

제7.9) 진여에 들어가는 방법을 밝힘

묻기를, “뜻이 이와 같다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따라야 잘 깨쳐 들어갈 수 있는가?”
답하기를, “모든 법을 비록 말하나 능히 말할 수도, 말할 만한 것도 없다. 비록 생각하나 능히 생각할 수도 생각할 만한 것도 없음을 알면 이것이 따르는 것이요, 만일 허망한 생각을 떠나면 마음의 바탕에 들어간 것이라 이름한다.”

제8. 말에 의해 모습을 말함

다시 진여란 말로 분별함에 의해 두 가지 뜻이 있다.위에서는 말을 떠나 바탕을 말했기에 ‘일법계 운운’이라고 했다. 첫째는 여실히 공空하다. 진여의 바탕이 망염을 떠나 능히 구경에 실함을 나타내는 때문이다. 둘째는 여실히 불공不空이다. 자체에 번뇌 없는 본성의 공덕을 갖춘 때문이다.

제9. 공의 뜻을 자세히 풂

공空이라 말한 것은 본래부터 본성이 공하여 온갖 오염된 법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니, 모든 차별의 모습을 떠나 허망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진여의 자성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며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모습이 있지 않은 것도 아니요 모습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며, 있거나 없음을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같은 모습도 아니요 다른 모습도 아니다. 같은 모습이 아닌 것도 아니요 다른 모습이 아닌 것도 아니며, 같거나 다름을 함께 갖춘 것도 아니다. 내지 전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중생들이 허망한 생각이 있기에 시시각각 분별하여 모두 진여의 성품과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이라 말한다. 만일 허망한 마음을 떠나면 실로 공이라 할 것도 없다.

제10. 불공의 모습과 모습 없음을 밝힘

불공不空이라 말한 것은 이미 법의 본체가 공해 허망함이 없음을 나타냈기 때문에 바로 진심이다. 항상 변하지 않아 청정한 법이 만족한 때문에 곧 이름을 불공이라 한다.
위에서부터 공을 말한 것도 실로 가히 공한 것이 없고, 이곳에서 불공을 말한 것도 또한 모습을 취할 것이 없다. 망념을 떠난 경계는 지혜가 이치로 그윽이 부합하고 경계가 정신과 회합하여 철저히 오직 깨친 사람이라야 상응하는 때문이다.

제11. 생멸하는 마음의 뜻을 밝힘

마음이 생멸한다는 것은 여래장을 의지하여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이른바 여래장의 생멸하지 않는 마음이 능히 움직임을 말미암아 생멸이 있으나 물과 파도가 두 바탕이 없는 것과 같다. 생멸하지 않는 것과 생멸이 화합하여 같지도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이름한다.

제12. 식에 의해 두 뜻을 나타내 거론함

이 식에 두 가지 뜻이 있어서 모든 법을 거두기도 하고, 모든 법을 낼 수도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깨달음의 뜻이고, 둘째는 깨닫지 못함의 뜻이다. 깨달음의 뜻이라 말한 것은 마음 자체가 허망한 생각을 떠나니, 허망한 생각을 떠난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어서 법계가 한 모습이다. 바로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니, 이 법신을 의하여 본래의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제13. 본각과 시각의 연유를 밝힘

왜냐하면 ‘본래 깨달음(本覺)’의 뜻은 ‘처음 깨달음(始覺)’에 대해 말한 것이다. 처음 깨달음이란 것이 바로 본래 깨달음과 같고, 처음 깨달음이란 것은 본래 깨달음을 의지한 때문에 깨닫지 못함이 있으며, 깨닫지 못함을 의지한 때문에 처음 깨달음을 말하기도 한다.
또 마음의 근본을 깨닫기 때문에 구경의 깨달음이라고 하고, 마음의 근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구경의 깨달음이 아님이라고 한다.위10) 는 깨달아 없애는 모습의 뜻이다.

제14. 깨쳐지는 네 가지 모습의 다름을 밝힘

이 뜻이 어떠한가? 범부는 앞생각에 악이 일어남(前念起惡)을 알기 때문에 뒷생각을 그쳐서 악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니 비록 깨달음이라고 이름하기는 하나, 생각의 바탕이 본래 공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각不覺이라고 이름한다.‘범부’ 아래는 깨달아 없애는 모습이다.

제15. 다른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이승의 관찰하는 지혜와 처음 마음을 낸 삼현 정사는 처음 깨달음의 지혜로 갖가지 꾀하는 집착이 생각이 달라진 것을 깨달아 생각에 달라진 모습이 없다. 거친 분별의 집착하는 모습만 버리는 때문에 유사한 깨달음11) 이라 한다.위는 깨달음의 다른 모습이다.

제16. 머무는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초지로부터 9지에 이르러 진여를 직접 깨친 ‘법신 정사’12) 는 다 처음 깨달음의 지혜로 생각의 네 가지 머무르는 모습을 깨쳤다. 대개 분별하는 모습(智相)은 온갖 법에 분별을 옮기고, 상속하는 모습(相續相)은 시시각각 분별을 계속하여 바깥 경계에 머물고, 법집에 굳건히 머문다. 능히 보는 것과 능히 나타남의 둘, 곧 분별하는 모습과 상속하는 모습이 자체의 성품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여 나타난 모습에 머문다. 지금 네 가지 모습이 자체의 성품이 없음을 깨달아 그 네 가지 모습이 지각하는 지혜를 따라 문득 잊기 때문에 생각이 머무는 모습이 없다. 그러나 삼현의 거친 모습과 달라서 분별을 떠났다고 하고, 십지에 미세한 것과 달라 거친 생각이라 하며13) 비록 진여를 깨쳤으나 구경의 깨달음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 ‘분수에 따른 깨달음(隨分覺)’이라고 한다.위는 깨달아 머무는 모습을 밝혔다.

제17. 나는 모습의 깨달음을 밝힘

십지 정사14) 는 수행의 방편을 만족하여 일념이 상응하고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것을 깨달아 마음에 처음 모습이 없다.
미세한 생각을 떠났기 때문에 심성을 보게 되어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게 되니 생멸이 본래 없으며 처음 깨달음과 본래 깨달음이 둘이 없기 때문에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이라 한다.위는 마음의 바탕을 의지하여 극히 미세하게 남을 지각하는 까닭에 나는 모습을 지각하는 것이다.

제18. 망념을 떠나 망념이 있음을 밝힘

이 때문에 수다라에 만일 중생이 능히 무념을 관찰하는 자는 곧 대각의 지혜로 향한다고 했다. 또 말씀하시되 지각하는 마음이 처음 일어나나 본래 깨달음의 마음 바탕은 망념이 본래 공하기에 망념이 처음 일어난 모습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극히 미세한 망념이 처음 일어남을 지각하며 이 망념의 바탕이 본래 공함을 깨쳐서 망념이 없는 곳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중생을 깨달았다고 이름할 수 없으니 본래부터 시시각각 상속하여 망념을 떠나지 못했기에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始無明)이라고 말한다.

제19. 마음의 근원을 깨침을 밝힘

만일 마음의 바탕이 본래 청정하여 나고 머물며 달라지고 없어지는 것이 본래 공한 무념을 얻은 자는 깨달음 자체가 깨끗하고 밝은 까닭에 곧 마음 모습의 나고 머물며 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안다. 청정하고 무념인 때문이다. 실로 처음 깨달음과 다름이 없고 나고 머물며 달라지고 없어짐15) 이 한때에 있으나 다 자립이 없어 본래 평등한 것이니 동일한 깨달음인 때문이다.위는 오직 유일한 깨달음이기에 주체와 객체가 어찌 있겠는가?
또다시16) 본각(의 바탕이 망념이 본래 공하여 이름과 모습이 없되 깨닫지 못함을 의지하여)이 오염된 분별을 따라서 청정한 업의 두 가지의 모습을 내지만 저 본각과 더불어 서로 떠나지 않는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지혜가 청정한 모습(智淨相)이고, 둘째는 부사의한 업의 모습(不思議業相)이다.
지혜가 청정한 모습은 깨닫지 못함으로부터 오염된 연기緣起가 한량없음을 처음 깨달음의 지혜로 깨쳐 법력으로 훈습함에 의해 실답게 수행해서 세 가지 미세하고 여섯 가지 거친 방편을 만족한다. 때문에 세 가지 미세한 화합식의 모습을 깨뜨리고 여섯 가지 거친 상속심의 모습을 없애어 법신을 나타내 지혜가 순수하고 깨끗하다.

제20. 모습을 없애 본성이 드러나는 뜻을 풀이

이 뜻이 무엇인가? 모든 상속심, 육염, 화합식, 제8아뢰야 등 심식의 모습이 다 무명이다. 이 심식이 허망하게 움직이는 것이 다 불각을 의지해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말미암아 있는 것이다.
본각의 성품은 파괴할 수 없지만 무명의 심식은 파괴할 수 있으니17) 마치 큰 바닷물이 바람을 인해 파도가 움직임에, 물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떨어지지 않지만, 물은 본래 움직이는 성질이 아니다. 만일 바람이 그쳐 없어지면 움직인 모습은 곧 없어지지만 습성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자성청정심이 무명의 바람을 인해서 움직임에 마음과 더불어 무명이 다 같이 형상이 없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나 본각의 마음은 동요하는 성질이 아니니 만일 무명이 없으면 상속하는 것이 곧 없어지지만 지혜의 본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제21. 부사의한 업의 모습을 풀이

부사의한 업의 모습이란 지혜가 청정한 모습에 의지하여 능히 온갖 뛰어나고 묘한 경계를 짓는다. 이른바 한량없는 공덕의 상호가 장엄한 등 항상 끊어짐이 없어서, 중생의 근기를 따라서 저절로 상응하여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어 이익을 얻게 한다.

제22. 본각 자체의 네 가지 모습을 거듭 밝힘

또다시 본각 자체의 모습이란 것은 네 가지 큰 뜻이 있어서 허공으로 더불어 같으며, 마치 청정한 거울과도 같다.

제23. 여실하게 공한 거울을 풀이함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실하게 공한 거울과 같다. 마치 밝은 거울 자체가 투명하여 본래 온갖 모습이 없으며 또 자체가 나타남이 없는 것과 같아서 본성이 마음의 경계상을 멀리 떠나는 것도 18)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절대의 성품이라 깨달아 비추는 의미가 아니다.

제24. 자신(因)을 훈습하는 거울을 풀이함

둘째는 자신(因)을 훈습하는 거울이다. 여실하게 공하지 않아 온갖 세간의 경계가 다 그 밝은 거울 가운데 나타나되 출입이 없다. 잃지도 않고 무너짐도 없어서 일심에 항상 머무르니 모든 법이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또 온갖 오염된 법이 능히 더럽힐 수 없으니 지혜의 자체는 움직이지 않아 구족하게 번뇌가 없어서19) 중생들을 훈습케 하기 때문이다.

제25. (진여)법으로 벗어난 거울을 풀이함

셋째는 진여법으로 벗어난 거울이다. 공하지 않은 법이 번뇌의 장애와 지혜의 장애를 벗어나 화합상을 떠나서 순일하게 깨끗하고 밝기 때문이다.

제26. 중생(緣)을 훈습하는 거울을 풀이함

네 번째는 중생(緣)을 훈습하는 거울이다. 법20) 으로 벗어남에 의지하기 때문에 중생들의 마음을 두루 비추어서 선근을 닦게 하니 생각을 따라 나타내 보이는 때문이다.

제27. 깨달음에 의해 깨닫지 못함이 일어나고, 깨닫지 못함에 대비하여 깨달음을 설함을 밝힘

깨닫지 못함의 의미라고 말한 것은, 여실하게 진여의 법이 하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마음이 일어나서 망념이 된21) 것이다. 망념의 자기 모습이 따로 없다. 본각을 떠나지 않는 것이, 마치 미혹한 사람이 방향에 의지한 때문에 미혹하게 되었으나, 만일 방향을 떠나면 미혹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중생들도 또한 그러하여 깨달음에 의지하기 때문에 미혹하게 되었으나, 만일 깨달음의 성품을 떠나면 곧 깨닫지 못함도 없다. 깨닫지 못한 허망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름과 뜻을 알아서 참된 깨달음을 말하니, 만일 깨닫지 못한 마음을 떠난다면 참된 깨달음의 자기 모습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제28. 깨닫지 못함에 의해 세 가지 모습이 생겨남

또다시 깨닫지 못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모습이 생겨나니 저 깨닫지 못한 것과 상응하여 떠나지 않는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의 업상(無明業相)이니, 깨닫지 못한 것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업이라고 이름한다. 깨달으면 동요하지 않으나 동요하는 원인으로 고통의 결과가 있게 되니,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는 때문이다.
둘째는 주체적으로 보는 모습(能見相)이니, 동요함에 의하기 때문에 능히 보게 되는 것으로, 동요하지 않는다면 볼 것이 없다. 셋째는 경계의 모습(境界相)이니, 능히 보는 것에 의하기 때문에 경계가 허망하게 나타나지만, 보는 것을 떠나면 곧 경계는 없는 것이다.

제29. 경계의 반연으로 생기는 여섯 가지 모습을 풀고, 지말(육추)을 맺어 근본(무명)으로 귀결시킴

경계의 반연이 있기 때문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을 낸다. 첫째는 분별하는 모습(智相)이니, 경계를 의지하여 마음을 일으켜 따르면 좋아하고 거스르면 싫어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속하는 모습(相續相)이니, 분별하는 것에 의하기 때문에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는 것이다. 지각하는 마음이 망념을 일으켜 서로 응하여 끊어지지 않는 때문이다.
셋째는 집착하여 취하는 모습(執取相)이니, 상속에 의해 경계를 반연하여 생각하며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서 마음이 집착하는 때문이다. 넷째는 이름에 집착하는 모습(計名字相)이니, 허망한 집착에 의하여 가명과 거짓된 언설의 모습을 분별한다. 다섯째는 업을 일으키는 모습(起業相)이니 이름에 집착하는 것에 의해 이름을 찾아 집착하여 갖가지의 업을 짓는다. 여섯째는 업에 매어 고통 받는 모습(業繫苦相)이니, 업에 의해 과보를 받아서 자재하지 못하다. 무명이 능히 온갖 오염된 법을 내니 온갖 오염된 법이 다 깨닫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제30.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의 같은 모습과 다른 모습을 밝힘

또다시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에 두 가지의 모습이 있다. 첫째는 같은 모습(同相)이요, 둘째는 다른 모습(異相)이다.
같은 모습이란 비유하면 갖가지의 토기가 다 같이 미세한 먼지의 체성인 상태와 같다.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의 갖가지 업의 작용인 환상(業幻)이 다 같은 진여의 체성인 상태이다. 그러므로 수다라에서 이 진여에 뜻에 의하기에 설한다.
“모든 중생들이 본래 항상 머물러서 열반에 들어간다. 보리의 법도 닦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며 지을 수 있는 모습도 아니라 끝내 얻을 수 없고, 또한 색상을 볼 것이 없다. 색상을 봄이 있는 것은, 오직 오염된 업환에 따라 지은 것이다. 지혜의 색은 불공의 성질이 아니니 지혜의 모습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모습이란 갖가지의 토기가 각각 같지 않음과 같으니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이 오염된 환을 따라 차별(隨染幻差別)하며 성품 자체가 오염된 환의 차별(性染幻差別)인 때문이다.

제31. 생멸 인연의 뜻을 밝힘

또다시 생멸인연이란 이른바 중생들이 마음에 의해 의意와 의식22) 이 전변하는 것이다. 이 뜻이 어떠한가? 아리야식에 의지하여 무명이 있다고 말한다. 불각이 일어나서 능히 보고, 능히 나타내며, 능히 경계를 취하며,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 상속하기에 ‘의’라고 말한다.

제32. 다섯 뜻을 상세히 밝혀 일심에 귀결시킴

이 ‘의意’에 다시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업식이라고 이름하니, 무명의 힘으로 깨치지 못한 마음이 동요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식이라고 이름하니, 동요된 마음에 의해 능히 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이라고 이름하니, 이른바 온갖 경계를 나타내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이 색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현식도 또한 그러하여 그 다섯 경계를 따라서 상대하면 곧 나타나고 앞뒤가 없다. 어느 때나 저절로 일어나 항상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분별지의 식(智識)이라고 이름하니, 오염된 법과 청정한 법을 분별하는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이라고 이름하니, 허망한 생각이 상응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한량없는 세월 동안의 선업과 악업에 머물러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와 미래의 고통과 쾌락 등의 과보를 성숙시켜 어긋남이 없는 때문이다. 현재나 이미 지나간 일들을 갑작스럽게 생각하기도 하고 미래의 일을 지각치 못하면서 망령되이 염려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계는 허위이고 오직 마음이 지은 것(三界虛僞 唯心所作)이다. 마음을 떠나면 여섯 경계(六塵境界)가 없다.

제33. 생멸의 뜻을 묻고 해석하여 마음을 말미암음을 밝힘

이 뜻이 어떠한가? 일체법이 모두 마음을 좇아 일어나 망념이 생기는 것이니 일체의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 것이다.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니 모습을 얻을 수 없다. 마땅히 알라. 세간의 온갖 경계가 다 중생들 무명의 허망한 마음(無明妄心)에 의해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서 실체를 얻을 수가 없다. 오직 마음이요, 허망한 것이다. 때문에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도 없어지는 것이다.

제34. 앞의 (상속)식으로써 의식을 밝힘

또다시 의식이라고 말한 것은 곧 이 상속식이니 여러 범부들의 집착하는 것이 더욱 깊어지는 것에 의해 나와 내 것을 헤아려 갖가지로 헛되게 집착하며 일 따라 반연하여 여섯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에 의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분리식이라고도 이름하기도 하고, 또다시 사물을 분별하는 식(分別事識)이라고도 이름한다. 이러한 식이 견애번뇌에 의해 늘어나는 뜻이기 때문이다.

제35. 깨달음의 대상을 들어 깨닫는 주체의 같지 않음을 밝힘

무명의 훈습에 의지해 일어난 식은 범부가 능히 알지 못하며, 또한 이승의 지혜로 깨달을 것도 아니다. 정사가 처음의 바른 믿음으로부터 발심하고 관찰하여 법신을 증득해야 조금이나마 알 것이다. 마침내 보살의 구경지에 이를지라도 능히 다 알 수는 없으며 오직 대각께서만 궁극적으로 다 알 수 있다.

제36. 알기 어려운 까닭을 풀고 불변과 무명의 두 뜻을 해석함

무슨 까닭인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지만 이를 지각하지 못함으로 무명이 있고, 무명에 물들어서 오염된 마음이 있는 것이다. 비록 오염된 마음이 있으나 항상 변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이러한 뜻은 오직 대각만이 능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심성이 항상 허망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불변이라 이름하고, 하나의 법계임을 통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마음이 상응하지 못해 홀연히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기에 무명이라 이름한다.

제37. 오염된 미혹을 떠난 모습을 상세히 보여 환멸하게 하는 인연을 자세히 밝힘

오염된 마음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집착과 상응하여 참된 성품이 오염(執相應染)되니, 이승의 해탈과 삼현 지위의 믿음과 상응하는 지위로부터 의식과 견사혹을 끊어 멀리 떠난다. 둘째는 부단히 상응하는 오염(不斷相應染)이니, 삼현 지위의 믿음과 상응하는 지위에 의해 방편을 닦고 배워 점점 능히 버리면서 번뇌를 떠난 초지인 정심지를 얻어 마침내 떠난다. 셋째는 분별지로 상응하는 오염(分別智相應染)이니, 번뇌를 떠난 제2 구계지로부터 점점 떠나면서 제7 무상방편지에 이르러 마침내 떠난다. 넷째는 현상과 상응하지 않는 오염(現色不相應染)이니, 물질에 자재한 경지로부터 능히 떠날 수 있다. 다섯째는 능견심으로 상응하지 않는 오염(能見心不相應染)이니, 마음이 자재한 경지에 의해 능히 떠날 수 있다. 여섯째는 근본업과 상응하지 않는 오염(根本業不相應染)이니, 십지로부터 여래지에 이르러서 능히 깨쳐 들어가서 능히 끝내 떠나게 된다.
일법계의 뜻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과 상응하는 경지(信相應地)로부터 관찰하여 배우고 끊으며 정심지에 들어가 분수에 따라 떠나며 여래지에 이르러서 능히 끝내 떠나게 된다.

제38. 앞의 상응과 불상응의 뜻을 풀이함

상응이라고 말한 뜻은 주관의 마음과 객관인 오염된 법이 다르나 오염과 청정한 것의 차별에 의해 아는 모습과 반연하는 모습이 같기 때문이다.
불상응이라는 뜻은 곧 마음 그대로가 불각이고, 항상 다름이 없어서 아는 모습(知相)과 반연하는 모습(緣相)이 같지 않은 것이다.
제39. 여기서는 오염된 마음과 무명이 장애가 되어 지혜를 장애하는 모습이 같지 않음을 보임

또 오염된 마음의 뜻이란 번뇌애라 이름하니 능히 진여의 근본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무명의 뜻은 지애가 되니 세간의 자연적인 업의 지혜23) 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뜻이 어떠한가? 오염된 마음에 의해 능히 보기도 하고, 능히 나타나기도 하며 경계를 부질없이 취하여 평등한 성품에 어기는 때문이다. 모든 법이 항상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없으나 무명으로 깨닫지 못해 허망하게 법과 어기기 때문에 능히 세간의 온갖 경계에 따르는 갖가지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제40. 생멸하는 모습을 밝혀 ‘뜻을 세우는 부분’ 중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을 풀이함

또다시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거친 것이니 마음이 바깥 경계로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미세한 것이니 마음이 바깥 경계로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거친 가운데 거친 것은 범부의 경계요, 거친 가운데 미세한 것과 미세한 가운데 거친 것은 정사의 경계이다.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것은 대각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이 무명으로부터 훈습하여 있는 것이니, 이른바 인因24) 을 의지하고, 반연을 의지하는 것이다. 인을 의지한다는 것은 깨치지 못함의 뜻이요, 반연에 의지한다는 것은 경계를 망령되게 만드는 뜻이다. 인이 없어지면 반연도 없어진다. 인이 없어지기에 상응하지 않는 마음(不相應心)도 없어지고 반연이 없어지기 때문에 상응하는 마음(相應心)도 없어진다.

제41. 문답으로써 마음의 모습은 없어지지만 마음의 바탕은 불멸함을 밝힘

묻기를, “만일 마음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상속할 것이며, 만일 상속한다면 어째서 마침내 없어진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없어진다고 말한 것은 오직 마음의 모습이 없어진다는 것이지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바람이 물을 의지하여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물이 없어진다면 곧 바람의 모습이 끊어져 의지할 것이 없거니와 물은 없어지지 않기에 바람의 모습은 상속한다. 오직 바람이 없어지면 움직이는 모습이 따라 없어지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무명도 또한 그래서 마음의 바탕에 의지해 움직이는 것이다. 만일 마음의 바탕이 없어진다면 곧 중생이 끊어져서 의지할 곳이 없지만 마음 바탕은 없어지지 않기에 마음이 상속하는 것이다. 오직 어리석음이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은 따라 없어지지만 마음의 본체(心智)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승기신론 하권25)
[제Ⅱ장 정종분]
[제3절 해석 부분]
제42. 앞의 생멸하는 가운데 오염과 청정이 서로 훈습함을 자세히 밝힘

또다시 네 가지 법이 훈습하는 뜻이 있기 때문에 오염된 법(染法)과 청정한 법(淨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는다. 첫째는 청정한 법이니 이름이 진여이고, 둘째는 온갖 오염의 원인이니 이름이 무명이다. 셋째는 허망한 마음(妄心)이니 이름이 업식이고, 넷째는 허망한 경계이니 이른바 여섯 대상이다.
훈습의 뜻은 세상의 의복이 사실 향이 없지만 사람이 향으로써 훈습하면 곧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진여의 청정한 법도 그러하여 실로 오염된 것이 없으나 다만 무명으로써 훈습하면 곧 오염된 모습이 있으니, 무명의 오염된 법도 실로 청정한 업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써 훈습하면 곧 청정한 작용이 있는 것이다.

제43. 망습이 점차적으로 훈습하여 오염된 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힘

어떻게 오염된 법을 훈습(染法熏習)하여 오염된 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게 하는가? 이른바 진여법에 의하기 때문에 무명이 있고, 무명의 오염된 법의 원인(無明染法因)이 있기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 훈습하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이 있고, 허망한 마음이 있기에 곧 무명을 훈습하니 진여법을 분명히 알지 못한 때문이다. 깨치지 못해 허망한 마음이 일어나고 허망한 경계(妄境界)를 나타낸다. 허망한 경계의 오염된 법의 반연이 있기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을 훈습하여 그 생각으로 하여금 집착케 하여 갖가지 업을 지어서 온갖 몸과 마음 등의 고통을 받게 한다.

제44. 망습이 훈습하여 오염된 법이 일어나는 차별을 따로 밝힘

이 허망한 경계 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장념훈습이며, 둘째는 증장취훈습이다. 망심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업식 근본훈습이니, 능히 아라한과 벽지불과 일체 정사들로 하여금 아리야식에 생멸 변역의 고통을 받게 한다. 둘째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을 키우는 훈습(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능히 범부들이 업에 매이는 고통을 받게 한다. 무명훈습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훈습이니, 능히 업식을 이루는 때문이요, 둘째는 일어나는 견애見愛의 훈습(所起見愛熏習)이니, 능히 분별사식의 뜻을 이룬다.

제45. 진여가 반복해서 도우면서 훈습하여 청정한 법이 일어나 끊어지지 않음을 전체적으로 밝힘

어떻게 훈습하여서 청정한 법을 일으켜 끊어지지 않는가?
답하기를, 이른바 진여법이 있기 때문에 능히 무명을 훈습하고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의 힘 때문에 곧 허망한 마음으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게 한다.
이 허망한 마음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구하는 인연이 있기에 곧 진여를 훈습한다. 자기의 본성26) 을 스스로 믿으며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임을 알고(知心妄動)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아 멀리 벗어나는 법을 닦는다(修遠離法).
여실하게 앞의 경계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갖가지 방편으로 수순하는 행을 일으켜 취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不取不念). 내지는 오랫동안 훈습해 온 힘(久遠熏習力) 때문에 무명이 곧 없어진다. 무명이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에 일어남이 없고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경계도 따라 없어진다. 인연이 함께 없어지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이 모두 다하니, 이를 열반을 얻어 자연업을 이루었다고 이름한다.

제46. 허망한 마음의 훈습으로 나아가는 것의 더디고 빠름을 따로 밝힘

허망한 마음의 훈습하는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분별사식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이승 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힘이 능한 것을 따라 위없는 도로 점차 나아가기 때문이다. 둘째는 의意훈습이니, 모든 정사들이 마음을 내고 용맹하게 전진하여 빨리 열반에 나아가는 때문이다.

제47. 진여의 자체와 작용의 훈습을 따로 밝힘

진여훈습의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체와 모습의 훈습이요, 둘째는 작용 훈습이다. 자체와 모습의 훈습이란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무루법을 갖추었으며 부사의한 업을 구비해 경계의 성품을 짓는다. 이러한 두 가지 뜻에 의해 항상 훈습하고, 힘이 있기 때문에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하게 하며 스스로 자기의 몸에 진여법이 있음을 직접 믿어 발심 수행하도록 한다.
제48. 문답으로써 진여의 훈습은 평등하지만 믿고 이해하고 수행하고 깨침은 평등치 않음을 밝힘

묻기를, 만일 뜻이 이렇다면 모든 중생들이 다 진여가 있어서 평등히 모두 같이 훈습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믿음이 있기도 하고, 믿음이 없기도 하며 한량없는 앞뒤의 차별이 있는가? 모두가 마땅히 일시에 진여법이 있음을 스스로 알아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평등하게 열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답하기를, 진여가 본래 하나이지만 한량없고 끝이 없는 무명이 있으니, 본래부터 자성에 무명의 차별이 두텁거나 얇은 것이 같지 않다. 그러기에 항하의 모래 수를 넘는 번뇌가 무명에 의지해 차별을 일으키며, 아견과 애염의 번뇌가 무명에 의지해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온갖 번뇌가 무명을 의지하여 일어나서 앞뒤로 한량없는 차별이 있으니 오직 대각께서만 능히 다 아실 수 있다.

제49. 인연이 서로 부족함에 의해 앞서의 따짐을 회통함

또 모든 대각의 법이 인과 연이 있으니, 인연이 갖추어져야만 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무가 비록 불의 바른 원인을 갖추었더라도27) 불쏘시개의 방편을 빌리지 않으면 능히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깨달음의 성품에 바른 원인으로 훈습하는 힘이 있을지라도 만약 모든 대각과 정사, 선각자들의 지도의 힘인 반연을 만나지 못하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가 없다.28) 외연의 힘이 있지만 안으로 청정한 법의 훈습하는 힘을 갖지 못한 자는 또한 능히 마지막까지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을 즐거이 구할 수 없다.
만일 인과 연이 갖추어지면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밖으로 또 모든 대각과 정사 등의 자비와 원력과 보호를 받기 때문에 능히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며 열반이 있음을 믿어 선근을 닦아 익힌다. 선근을 닦아 성숙한 때문에 모든 대각과 정사들이 보여 주고 가르쳐 주어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함을 만나 큰 이익을 얻어 법을 기뻐하는 마음이 생겨나 능히29) 열반의 도에 향하게 되는 것이다.

제50. 작용에 의해 두 가지 반연을 전체적으로 나타내면서, 먼저 차별연을 밝힘

작용 훈습이란 곧 중생들의 외연의 힘이니, 이러한 외연이 한량없는 뜻이 있으니 두 가지로 간략히 말하겠다. 첫째는 차별연이고, 둘째는 평등연이다. 차별연이란 이 사람이 모든 대각과 정사 등에 의지하여 처음 뜻을 내어 도를 구할 때로부터 대각에 이르기까지 그 가운데에서 보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혹 권속과 부모와 친척이 되기도 하고, 혹은 급사가 되든지, 혹은 원수가 되든지,30) 혹은 사섭법을 일으킨다. 내지는 모든 하는 것의 한량없는 행하는 반연에 이르기까지 대비로 훈습하는 힘을 일으킨다.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선근을 키우게 하니 보는 자와 듣는 자마다 다 이익을 얻게 한다. 이러한 연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까운 반연이니 빨리 제도를 받는 때문이요, 둘째는 먼 반연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제도를 받는 때문이다. 또 가깝고 먼 두 반연을 분별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행을 키우는 반연(增長行緣)이요, 둘째는 깨달음을 받게 하는 반연(受道緣)이다.

제51. 평등연을 풀이함

평등연이란 모든 대각과 정사 등이 다들 일체 중생들을 건져 주시길 원하여서 자연히 훈습하여 버리지 않는다. 동체 지혜의 힘으로써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을 따라 응해서 작업을 나타낸다.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에 의지해야 평등하게 모든 대각을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52. 두 가지 (믿음과 법의) 힘에 의지해 자체·작용의 상응과 미상응을 밝힘

이 체와 용의 훈습을 분별함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상응하지 못함이니, 범부와 이승과 초발의 정사들이 의와 의식의 훈습하는 것이니 믿는 힘에 의지하기 때문에 잘 수행을 하지만 아직 무분별심을 얻지 못했으므로 진여 자체와 상응하지 못하며 자재한 업 수행을 얻지 못했으므로 용과 더불어 상응하지 못한다.
둘째는 이미 상응함이니, 법신 정사가 무분별심을 얻어서 모든 대각의 지혜 묘용과 더불어 상응하나니 오직 법력을 의지하여 자연히 수행하고 진여를 훈습하여 무명을 없애는 때문이다.

제53. 오염된 것과 청정한 것의 끊어짐과 끊어지지 않는 뜻을 밝힘

또다시 오염된 법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훈습함이 끊어짐이 없되, 내지 대각을 얻은 후에 곧 끊어진다. 청정한 법의 훈습은 미래가 다하도록 끊어짐이 없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진여법이 항상 훈습하기 때문이니 허망한 마음이 곧 없어지고 법신이 나타난 뒤에 작용을 일으켜 훈습하기 때문에 끊어짐이 없다.허망한 마음이 이미 없어지고 큰 바탕과 큰 작용이 항상 드러나면서 미혹하지 않는다.

제54. 진여의 자체와 모습을 밝힘으로써 ‘뜻을 세우는 부분’ 가운데 대승의 자체와 모습을 보임을 풀이함

또다시 진여의 자체와 모습은 일체의 범부, 성문, 연각, 정사, 대각께서 증감이 없어 과거에 나는 것이 아니며, 미래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필경에 항상하여 본래부터 일체의 공덕이 자기 성품에 만족하다.31) 이른바 진여 자체에 대지혜 광명의 뜻,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32) 청량하고 불변하며 자재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떠나지도 끊어지지도 다르지도 않은 불가사의한 대각의 법을 갖추어서 마침내 만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름이 여래장이요, 또한 이름이 여래평등법신33) 인 것이다.

제55. 덕스러운 모습의 차별이 곧 무차별임을 밝힘

묻기를, 위에서 진여는 그 자체가 평등하여 모든 모습을 떠났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다시 진여의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말하는가?
답하기를, 비록 진실로 그러한 온갖 공덕의 뜻이 있으나 차별의 모습이 없어서 평등히 동일한 맛이며 유일한 진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분별하지 않고 분별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둘이 없다.

제56. 생멸하는 오염된 모습의 차별에 의해 진여의 청정한 덕의 차별을 드러냄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하는가? 업식의 생멸하는 모습에 의하여 보인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이는가? 모든 법이 본래 오직 마음뿐이다. 실로 망념은 없는 것이지만, 허망한 마음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 온갖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이라 말하는 것이다. 심성에 망념을 일으키지 않으면 곧 대지혜 광명의 뜻이다. 만일 마음이 요동하여 허망한 소견을 일으키면 곧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는 것이니, 심성이 허망한 소견을 떠나면 바로 이것이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 된다.
만일 마음이 동요하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동요하여 오염으로 변하면 청정한 자성이 오염으로 변한 것이다.
자성이 없어서 항상함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며 나도 아니고 청정함도 아니다. 이리하여 고통스럽고 붕괴하며 곧 자재하지 못한다. 내지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망념의 뜻이 갖추어지니, 이러한 뜻을 대하기에 심성이 요동치 않으면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온갖 깨끗한 공덕의 모습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 만일 마음이 일어남이 있어서 다시 생각할 앞 대상이 있다고 볼 것은 적거니와 이러한 청정한 법의 한량없는 공덕은 바로 한마음에서 성립된다. 다시 생각할 것이 없으니 이 때문에 청정한 법이 만족한 것을 이름하여 법신여래장이라고 한다.

제57. 진여의 용대를 밝힘으로써 ‘뜻을 세우는 부분’ 가운데 마하연의 작용을 보임을 풀이함

또다시 진여의 작용이란 이른바 모든 대각성존께서는 본래 인행의 과정에서 대자비심을 내시고 모든 바라밀을 닦으시어 중생들을 교화하신다. 큰 서원을 세워 모든 중생계를 평등히 다 건지고자 하신다. 또한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들을 건지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하면서도 중생상을 취하지 않으신다. 이는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들과 자기의 몸이 진여로 평등하여 다름이 없음을 진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의 지혜로써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에 자연히 불가사의한 업의 갖가지 작용이 있음을 본다. 곧 진여와 같이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한 때문이다. 또 작용하는 모습도 없으니 왜 그런가? 모든 대각은 오직 법신의 지혜로운 모습의 몸뿐이다. 제일의제요 세속제의 경계는 없어서 행하는 것을 떠났으되 다만 중생들의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에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제58. 불과에 의해 인행을 밝혀 두 가지 작용을 따로 밝힘

이 작용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현상을 분별하는 식(分別事識)에 의하니 범부와 이승의 마음에 보이는 것을 이름하여 응화신34) 이라 한다. 저들이 식이 굴러 나타났음을 알지 못하므로35) 여래 응화신의 모습 밖으로부터 온 것으로 알고, 대각의 한정된 모습에 집착하여 다 알지 못한다.
둘째는 업식에 의하니, 이는 모든 정사들이 초발심으로부터 좇아 정사의 구경지에 이르기까지 그 마음으로 보는 것을 보신이라 한다. 그 몸에 한량없이 많은 색이 있고 색에 한량없이 많은 형상이 있으며 상에 한량없이 많은 호가 있다. 머무는 곳인 의지처(依果)도 한량없이 많은 갖가지 장엄이 있다. 곳에 따라 나타냄이 곧 끝이 없고 다할 수 없어 차별의 모습을 떠났고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머물러 있어서 훼손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공덕이 다 온갖 바라밀 등 무루無漏의 행으로 훈습하는 것과 불가사의한 훈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무량한 좋아하는 모습을 갖추었기 때문에 보신이라 하는 것이다.

제59. 보신과 응신의 같지 않음을 거듭 밝히면서 법신이 작용과 모습을 벗어났음을 나타냄

또 범부들이 보는 것은 곧 거친 색이니, 육도를 따라서 각기 보는 것이 같지 않다. 갖가지 다른 종류들이 즐거운 모습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신이라 한다. 다음 초발의 정사 등이 보는 것은 진여법을 깊이 믿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본다. 저 색상과 장엄한 등의 일들이 오고 감이 없어서 차별을 떠났으니 오직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정사는 오히려 스스로를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아직 법신의 지위에 들어가지 못한 때문이다. 만일 청정한 마음을 얻으면 보는 것이 미묘하여 그 작용이 점차 수승해지며 내지 정사의 지위가 다함에 이르면 보신의 작용을 보는 것이 최고 극도로 미묘하여 보는 것이 완전하게 된다.
만일 업식을 떠나면 보는 모습이 없으니, 모든 대각의 법신은 피차의 색상을 서로 번갈아 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제60. 형상을 떠난 것이 형상을 나타내는 데 걸리지 않음을 밝힘

묻기를, 만일 모든 대각의 법신이 색상을 떠났다면 어떻게 색상을 나타내는가?
답하기를, 곧 이 법신은 색의 자체이기 때문에 능히 색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른바 본래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색의 본성은 곧 지혜이기에 색의 자체에 형상이 없는 것을 지혜의 몸이라 하며,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인 까닭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말한다.

제61. 근기에 따라 나타낸 의보와 정보의 장엄이 두루 원융무애함에 나아가 진여의 큰 작용을 결론지음

나타난 색이 차별이 없으니 마음을 따라 시방세계에 한량없이 많은 정사와 한량없이 많은 보신과 한량없이 많은 장엄이 각각 차별하되 모두 차별이 없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심식의 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재한 작용의 뜻이기 때문이다.

제62. 생멸의 근본을 관찰케 함으로써 진여에 들게 함

또다시 생멸문을 좇아 곧 진여문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이른바 오음을 추구하면, 물질과 마음이다. 육진경계는 필경 무념이다. 마음은 형상이 없으며 시방으로 구해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마치 사람이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말하지만 동·서·남·북 방향 자체는 실로 변화가 없는 것과 같다. 중생들도 또한 그러하여 무명으로 미혹하기 때문에 본연의 마음을 망념이라 하나 마음은 실로 동요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능히 관찰하여 마음이 무념임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문에 들어간다.

제63. 아견에 의해 두 가지 집착을 전체적으로 나타냄

삿된 집착을 고친다는 것은 온갖 삿된 집착이 다 아견에 의한 것이니, 만약 나를 벗어나면 곧 삿된 집착이 없을 것이다. 이 아견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아견이요, 둘째는 법아견이다.

제64. 공에 집착하여 성품으로 삼는 견해를 깸

인아견이란 모든 범부들에 의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말해진다. 첫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의 법신이 필경 적막하여 허공과 같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함을 모르기 때문에 오해하여 허공을 바로 여래의 성품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쳐서 말할까? 허공의 모습은 허망한 법이니 허공 자체가 없어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물질을 상대하여 허공이 나타나기 때문에 허공이란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니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할 뿐이다.
모든 물질의 법은 본래 마음이요 실로 바깥 물질은 없는 것이다. 만일 바깥 물질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는 것이다. 일체의 경계가 오직 마음이 허망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일 마음이 허망하게 동요되는 것을 떠나면 곧 일체의 경계가 없어지고, 오직 하나의 참된 마음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는 여래의 광대한 성품 지혜의 구경의 뜻을 말한 것이요, 허공의 모습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65. 성품은 공하고 형상은 있다는 견해를 깸

둘째는 수다라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필경에 자체가 공했으며, 나아가 열반, 진여의 법도 필경에는 공한 것이며 본래부터 스스로 공한 것이다. 일체의 모습을 떠났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임을 모른다. 그러기 때문에 곧 말하되 진여, 열반의 본성도 오직 공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 진여 법신은 자체가 공하지 않으며 한량없이 깨끗한 덕성을 갖추었음을 밝힐 것이다.
셋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은 증감이 없어서 자체 내에 일체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곧 여래장은 물질과 마음 법의 자기 모습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 오직 진여의 뜻에 의해 말할 것이다. 생멸하는 오염된 뜻을 원인으로 나타나는 것은 차별이라고 말할지언정 (그 덕성의 모습은 차별이 없다고 할 것이다.)36)

제66. 성품에 오염이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깸

네 번째는 수다라에서 “모든 세간의 생사의 오염된 법이 다 여래장에 의해 있다. 모든 법이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래장 자체에 일체 세간의 생사 등의 법을 갖추었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 여래장은 본래부터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온갖 청정한 공덕이 있어 떠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진여의 뜻인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은 번뇌의 오염된 법은 오직 망령되이 있을 뿐이고, 그 자성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여래장과는 일찍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여래장 자체에 허망한 법이 있다면 깨치더라도 길이 허망함을 쉬지 못할 것이다.

제67. 처음부터 끝까지 생멸한다는 견해를 깸

다섯 번째는 수다라에서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생사가 있으며, 여래장에 의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는다.”라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하되 “중생이 비롯함이 있다고 하며, 비롯함을 보기에 여래가 얻은 열반도 다함이 있어서 도로 중생이 된다.”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 여래장은 과거가 없기 때문에 무명의 모습도 또한 시작이 없다. 만일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처음 일어남이 있다고 한다면 곧 외도 경의 설이다. 또 여래장은 끝이 없다. 모든 대각께서 얻은 열반도 그것(여래장)과 더불어 상응하여 끝이 없기 때문이다.

제68. 이승들의 법집에 대한 견해를 깸

법아견이란 것은 이승의 둔한 근기에 의하기 때문에 대각께서 다만 그들을 위하여 인무아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이 완전하지 못한 때문에 오음이 생멸하는 법이 있음을 보고 생사를 두려워하고 열반을 허망하게 취한다. 이런 사람을 어떻게 고칠까? 오음법의 자성은 나지도 않고, 없어짐도 없으니 본래 열반이라고 한다.
제69. 절대적으로 말의 표현을 떠난 것과 빈말로 이끌어 들게 하는 취지에 대해 밝힘

또다시 허망한 집착을 끝까지 다 떠난다는 것은 마땅히 알라. 오염된 법과 청정한 법이 모두 상대적이어서 자기 모습을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일체의 법이 본래부터 물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필경에 그 모습을 말할 수 없는데도 언설이 있는 것은 대각의 좋은 방편으로 말을 빌려 중생들을 인도하신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취지는 모두 허망한 생각을 떠나 진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온갖 법을 생각하는 것이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하게 하여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70. 발심의 세 가지 모습에 대해 전체적으로 나타내면서 먼저 믿음을 이루는 발심을 밝힘

발심하여 도에 나아가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모든 대각의 도에 모든 정사들이 발심, 수행하여 나아가는 뜻이다.
간략히 말하면 발심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을 이루는 발심이요, 둘째는 앎과 실천의 발심이며, 셋째는 깨달음의 발심이다.
믿음을 이루는 발심이란 어떤 사람에 의지하며 어떤 행을 닦아 믿음을 이루어 능히 발심을 할 수 있는가? 이른바 부정취 중생을 의지하여 선근을 훈습하는 힘이 있으므로 업의 과보를 믿고 능히 열 가지 선을 일으키며,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위없는 깨달음을 구하여, 모든 대각을 만나 직접 받들어 공양하고 신심을 수행한다. 일만 겁을 지나서 신심을 이루므로 모든 대각과 정사들이 가르쳐서 발심케 한다. 혹 큰 자비를 쓰는 때문에 스스로 발심을 한다. 혹은 정법이 없어지려 함을 원인으로 해서 법을 보호할 인연으로써 능히 스스로 발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심을 이루어 발심한 사람은 정정취에 들어가서 필경에 물러나지 않으니, 여래종에 머물러 바른 원인(正因)과 상응한다고 이름한다.

제71. 낮은 근기의 인연이 모두 하열하여 발심이 고정적이지 않음을 밝힘

만일 어떤 중생이 선근이 아주 적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깊고 두터우면 비록 대각을 만나 공양하더라도 인천의 종자나 이승의 종자를 일으킬 뿐이다. 설혹 대승을 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가 일정치 못하다. 혹 나아가기도 하고 혹 물러나기도 하며, 혹 여러 대각께 공양하되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않고도 중도에 연을 만나 또한 발심하는 자도 있다. 이른바 대각의 색상을 보고서 그 마음을 내기도 하며 혹은 여러 스님들께 공양함을 인하여 그 마음을 내기도 한다. 혹 이승인의 가르침으로 인해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혹 다른 사람에게 배우다가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발심들은 모두 확정되지 않아서, 나쁜 인연을 만나면 혹은 곧 물러나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기도 한다.

제72. 내어지는 마음을 밝힘

또다시 믿음을 이루어 발심하는 것은 어떠한 마음을 내는 것인가?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진여법을 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일체의 온갖 선행을 모으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대비의 마음이니 모든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기 때문이다.

제73. 이치는 하나이지만 미혹은 다르기에 모름지기 온갖 선을 닦아야 함을 밝힘

묻기를,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임을 말해 대각의 자체는 둘이 없다고 하였는데 무슨 까닭으로 오직 진여만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선행을 배우기를 구하게 하는 것인가?”
답하기를, “비유컨대 큰 마니보배가 그 체성이 맑고 깨끗한 것이지만 거친 광석의 때가 있다. 만일 사람이 비록 마니보배의 깨끗한 본성이 있는 것만 생각하고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갈고 닦지 않으면 끝내 청정해질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의 법도 그 체성이 비고 청정하나 한량없는 번뇌의 오염된 때가 있다. 만일 사람이 비록 진여가 있는 것만 생각하고 방편으로써 갖가지로 훈습해서 닦지 않으면 끝내 청정해질 수 없다. 더러움이 한이 없어 모든 법에 두루하기 때문에 온갖 선행을 닦아서 고쳐야 한다. 만일 사람이 온갖 선법을 수행하면 자연스럽게 진여법에 귀순하게 된다.

제74. 바른 마음에 의지해 머무름 없는 방편을 닦음

간략히 방편을 설명하자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의 근본인 방편이다. 모든 법이 자성이 생함이 없음을 보고, 허망한 소견을 떠나서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법이 인연으로 화합하여 업의 과보를 잃어버리지 않음을 관찰해서 대비를 일으켜 온갖 복덕을 닦아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는 법성의 머무름이 없는 것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제75. 깊은 마음에 의지해 그침의 방편을 닦음

둘째는 능히 그치는 방편이다. 부끄러워하고 허물을 뉘우쳐서 온갖 악법을 그치게 하여 더 심해지지 않게 함을 말한다. 이는 법성의 온갖 허물을 벗어난 것에 따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선근을 일으켜 더 자라도록 하는 방편이다. 삼보께 부지런히 공양하고 예배한다. 모든 대각을 찬탄하고 따라 기뻐하며 권청하나니, 삼보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순박하고 후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더 자라서 위없는 도를 구하는 데 뜻을 둔다. 또 불, 법, 승의 힘이 지켜 주는 것을 원인으로 업장을 능히 녹이고 선근을 물러나지 않게 하니, 이는 법성을 수순하여 어리석은 장애를 떠난 때문이다.

제76. 대비심에 의지해 대원의 방편을 닦음

넷째는 대원의 평등한 방편이다. 이른바 발원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고 제도하여 남김없이 모두 완전한 열반을 이루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성을 따라 단절됨이 없는 때문이다.
법성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둘이 없고, 피차를 생각하지 않으며 마침내 적멸하기 때문이다.”

제77. 정사는 수명의 길고 짧음에 자재함을 보이는 것을 밝힘

정사가 이 마음을 내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보게 되니, 법신을 보기 때문에 그 원력에 따라서 능히 여덟 가지를 나타내어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한다. 이른바 도솔천으로부터 나와서 모태에 들어가고 모태에 머물며, 모태에서 나와서 출가하여 도를 이루고 법륜을 굴리며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정사를 아직 법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그가 과거 한량없는 세상으로부터 오면서 유루有漏의 업을 아주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태어난 것에 따라서 미세한 고통과 서로 어울렸으나 또한 업에 매인 것은 아니니, 큰 원의 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제78. 먼저는 방편설이요, 뒤에 실다운 덕을 드러냄

저 수다라에서 ‘혹 나쁜 곳에 떨어진다’고 말한 것은 실제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처음 배우는 정사들로서 아직 바른 지위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자들을 위해 두려워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용맹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정사들은 한번 발심한 후에는 겁이 많고 마음이 약한 것을 멀리 떠나 이승의 지위에 떨어지는 것을 끝내 두려워하지 않는다. 혹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에 어려운 행들을 부지런히 애써야만 열반을 얻는다는 말을 듣더라도 겁내거나 약해지지 않으니, 모든 법이 본래부터 그 자체가 열반임을 믿어 알기 때문이다.

제79. 앎과 실천의 발심을 밝힘

앎과 실천의 발심이란 (앞서는 십신이 원만하여 십주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십행이 원만하여 십회향에 들어갔기에) 마땅히 더욱 훌륭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정사는 처음 바른 믿음을 가질 때부터 제1아승기겁이 장차 성만하려고 하므로 진여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앞에 드러나 닦는 것이 상相을 떠났다. 법성의 자체가 간탐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시바라밀을 수순하여 수행한다. 법성은 오염이 없어 다섯 가지 욕망의 허물을 떠난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에는 고통이 없어서 분노를 떠난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은 몸과 마음의 상이 없어 게으름을 떠난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은 항상 안정되어서 그 자체에 어지러움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한다. 법성은 자체가 밝아서 무명을 떠난 줄을 알기 때문에 그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제80. 깨달음의 발심을 밝힘

깨달음의 발심이란 번뇌를 떠난 정심지로부터 정사의 마지막 경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계를 깨쳤는가? 이른바 진여이니 전식에 의하여 경계라고 말하나 이 깨달음은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의 지혜뿐이므로 이름하여 법신이라고 한다.

제81. 법신 정사의 방편과 실다운 덕을 밝힘

이 정사가 일념의 순간에 시방의 남김 없는 세계에 이르러서 모든 대각께 공양하고 법륜을 굴리기를 청한다. 그것은 오직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지 문자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지위를 뛰어넘어서 빨리 정각을 이루는 것을 보이니 이는 겁내고 마음 약한 중생들을 위한 때문이다. 혹은 ‘내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에 불도를 이룬다’고 설한 것은 게으르고 교만한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무수한 방편이 불가사의함을 능히 보이지만 실로 정사는 종성과 근기가 같으며 발심이 같고 깨달음도 또한 같아서 초과하는 법이 없다. 모든 정사들이 다 삼 아승지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 세계의 같지 않음과 보는 바와 듣는 것과 근기와 욕망과 성품이 다름에 따라서 행을 보임에도 또한 차별이 있는 것이다.

제82. 먼저 발심의 세 가지 모습을 밝히고, 다음으로 구경의 덕용을 밝힘

또 이 정사의 발심하는 모습에는 세 가지 마음의 미세한 모습이 있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참된 마음이니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의 마음이니 자연스럽게 두루 행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업식의 마음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또 이 정사는 공덕을 이루어 색구경처에서 모든 세간 중 최고 큰 몸을 보인다. 일념에 상응하는 지혜로써 무명을 단번에 없애는 것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며, 자연히 불가사의한 업이 있어서 능히 시방에 나타나서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

제83. 망념을 벗어났지만 종지라 이름함을 드러냄

묻기를,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중생들이 끝이 없으며 중생들이 끝이 없기 때문에 마음 씀의 차별도 또한 끝이 없다. 이와 같은 경계는 범위를 나눌 수 없어서 알기 어렵고 난해하다. 만일 무명이 끊어진다면 마음의 생각(心想)이 없거니 어떻게 능히 알아 일체종지라고 이름하겠는가?”
답하기를, “온갖 경계는 본래 한마음이다. 생각을 떠났지만, 중생이 경계를 허망하게 보기 때문에 마음에 차별한 범위가 있다. 상념을 허망하게 일으켜서 법성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지 못한다. 모든 대각께서는 보는 모습을 떠나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요 바로 모든 법의 본성이다. 그 자체가 온갖 허망한 법을 환하게 비추어 큰 지혜의 작용이 있어 한량없는 방편으로 여러 중생들이 마땅히 아는 것에 따라서 여러 가지 법의 뜻을 다 열어 보인다. 이 때문에 일체종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제84. 작용이 오직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밝힘

또 묻기를, “만일 모든 대각께 자연업이 있어서 능히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을 이익 되게 하신다면 모든 중생들이 그 몸을 보든가, 혹 신통한 변화를 보거나, 혹 그 말씀을 듣게 되면 이익을 얻지 못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세상에서 많은 이들이 능히 보지 못하는가?”
답하기를, “모든 대각의 법신이 평등하여 온갖 곳에 두루하되 의지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자연’이라고 말하지만, 다만 중생들의 마음에 의지하여 나타난다. 중생들의 마음이란 마치 거울과 같으니, 거울에 만약 더러움이 있으면, 색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중생들의 마음에도 만약 더러움이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제4절 신심과 수행의 부분(總說)
제85. 앞의 낮은 근기에 의거해 신행을 밝힘

이미 해석분을 설명했으니, 다음에는 신심과 수행의 부분을 말하겠다. 여기에서는 아직 정정취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에 의거하기 때문에 신심과 수행을 말한다.
어떤 것이 신심이며,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략히 말하자면 신심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대각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어서 항상 가까이 하기를 생각하여 공양하고 공경하며 선근을 일으켜서 일체 지혜를 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으니, 항상 온갖 바라밀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능히 바르게 자리이타를 수행할 것을 믿으니 항상 모든 정사 대중들을 친근하기를 좋아하여 여실한 수행을 배우려고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수행에 다섯 가지 부문이 있어, 이러한 믿음을 능히 이룬다. 첫째는 보시문이요, 둘째는 지계문이며, 셋째는 인욕문이다. 넷째는 정진문이요, 다섯째는 지관문이다.

제86. 보시와 지계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어떻게 보시문을 수행할 것인가? 만약 일체 와서 구하고 찾는 사람을 보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에 따라 베풀어 줌으로써 스스로 탐내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려서 저들로 하여금 환희케 한다. 만약 액난이나 공포, 핍박을 당하는 사람을 보거든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대로 두려움을 없애 준다. 만일 중생이 와서 법을 구하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잘 아는 대로 방편으로 설한다. 마땅히 명리나 공경을 탐내어 구해서도 안 되고 오직 자리와 이타만을 생각하여 보리에 회향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지계문을 수행할 것인가? 이른바 죽이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음행을 하지 않는다. 이간질을 하지 않고,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다. 탐내거나 질투하거나 속이거나 아첨하고, 성내거나 삿된 견해를 멀리 벗어난다. 만약 출가자라면 번뇌를 굴복시키기 위한 까닭에 마땅히 시끄러운 것을 멀리 떠나고 항상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적은 욕심으로도 만족할 줄을 알고, 두타행 등을 닦아 익힐 것이다. 마침내 작은 죄라도 마음에 두려움을 내어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여서 대각께서 제정하신 금계를 가벼이 하지 않는다. 마땅히 다른 사람의 혐오를 막아 중생들로 하여금 허망하게 허물을 일으키지 않게 해야 한다.

제87. 인욕과 정진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어떻게 인욕문을 수행할 것인가? 이른바 마땅히 남의 괴롭힘을 참아서 마음에 보복을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마땅히 이익과 손해, 훼손과 기림, 칭찬과 비난, 괴로움과 즐거움 등 여덟 가지 바람의 경계를 참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정진문을 수행할 것인가? 이른바 온갖 착한 일에 대하여 마음을 게으르게 하지 말며, 뜻을 세운 것을 굳고 강하게 하여 겁내거나 마음 약한 것을 멀리 떠나야 한다. 그러면서 마땅히 오랜 과거부터 온갖 몸과 마음에 큰 고통을 헛되게 받아 아무런 이익이 없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마땅히 온갖 공덕을 부지런히 닦아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을 행하여 온갖 고통을 빨리 떠나는 것이다.
또다시 만약 사람이 비록 신심으로 수행하였어도 전생으로부터 중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 때문에 삿된 마구니와 온갖 귀신들에게 마음이 혼란해지기도 한다. 혹은 세상의 사무에 갖가지로 뒤얽힌다. 혹은 병고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되어 공부에 장애를 입기도 한다. 이와 같은 등 온갖 많은 장애들이 있다. 이 때문에 마땅히 용맹정진하여 밤낮 여섯 때37) 에 모든 대각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큰 법을 연설해 주시길 권청하고 따라 기뻐하며 보리에 회향하되 항상 쉬지 않아야 온갖 장애를 면하고 선근이 늘어날 것이다.

제88. 지관의 모습을 묻고 풀이함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할 것인가? 지止라고 한 것은 온갖 경계상에 머물게 함을 말하니 사마타관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관觀이라고 한 것은 인연생멸의 모습을 분별함을 말하니 위파사나관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어떻게 따르는가? 이 두 가지 뜻으로써 점점 닦아 익혀서 서로 떠나보내지 않으면 쌍으로 앞에 나타날 것이다.

제89. 정좌에 의해 지를 닦게 함

만일 지를 닦고자 하는 자는 고요한 곳에 머물러서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하여 호흡, 기식, 형색, 공, 지·수·화·풍 사대를 의지하지 말라. 내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에 의지하지도 않아야 한다. 일체 온갖 생각을 따라서 다 없애고, 또 없앤다는 생각마저도 없애야 한다. 모든 법은 본래 형상이 없다. 시시각각 나는 것도 아니고 시시각각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마음을 따라 바깥으로 경계도 생각하지 말 것이며 그 뒤에 마음으로써 마음을 없애는 것도 말 것이다. 마음이 만약 산만해진다면 곧 거두어서 정념에 머물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정념은 오직 마음뿐이요, 바깥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기 모습이 없어서 시시각각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90. 나머지 반연에 의해 지를 닦게 함

만일 앉은 데에서 일어나 가고 오거나, 나아가고 머무는 것에 행하는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여 수순하고 관찰하여 오래 익혀서 능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 것이다. 마음이 머무르기 때문에 점점 용맹스러워져서 진여삼매에 따라 들어가게 된다. 번뇌를 깊이 굴복시키고 신심이 증대되어 속히 물러나지 않게 된다. 오직 의혹하거나 불신하고 비방하거나 중죄와 업장을 짓고 아만과 게으른 사람은 제외할 것이니, 이러한 사람들은 능히 들어가지 못한다.

제91. 먼저 지를 닦는 수승한 능력을 나타내고 다음으로 악마의 짓을 간략히 들어 고치는 모습을 밝힘

또다시 이 같은 삼매에 의지하기 때문에 곧 법계가 한 모습임을 안다. 모든 대각의 법신이 중생들의 몸과 더불어 평등하여 둘이 없으니 곧 이름하여 ‘일행삼매’라고 한다. 진여가 이 삼매의 근본임을 마땅히 알 것이니, 만일 사람이 수행하면 점점 능히 무량한 삼매를 낼 것이다.
혹 어떤 중생이 선근의 힘이 없으면 온갖 마구니와 외도와 귀신들에 의하여 혼란해지게 된다. 혹 앉은 데서 어떤 공포스러운 형상을 나타내거나 혹 단정한 남녀 등의 모습을 나타내거든 마땅히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하면 경계가 곧 사라져서 마침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제92. 악마의 짓을 자세히 들어 고치는 모습을 밝힘

천마와 악귀들이 혹 천상과 정사의 형상을 나타내거나 대각의 형상을 지어서 상호가 구족하기도 한다. 혹 다라니를 말하기도 하며, 혹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하기도 한다. 혹 평등하고 공하며 형상이 없고 서원도 없다. 원수나 친함, 원인도 결과도 없어서 필경 공적한 것이 참으로 열반이라고 설한다. 혹은 사람들에게 숙명통으로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도 다 알게 한다. 남의 마음을 알게 하는 지혜를 얻게 하며, 변재가 걸림이 없어서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의 명성과 이득 되는 일을 탐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쁘게 해서 성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한다.
혹 자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도 많아서 그 마음이 게을러지기도 한다. 혹은 갑자기 정진하려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뒤에는 문득 그만두어 불신하며 의심이 많고 생각이 많게 한다. 혹 본래의 뛰어난 행위를 버리고 다시 잡업을 닦고, 혹은 세상사에 집착하여 갖가지로 뒤얽히게 한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삼매를 얻게 하되 조금 비슷한 듯하지만 모두 외도들이 얻은 것이지 참다운 삼매가 아니다. 혹 다시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내지 칠일까지 선정에 머물게 하여 자연히 향기로운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쾌적하고 배가 고프지도 않고 갈증 나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애착하게 한다. 혹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먹는 것이 한이 없게 하여 과식하다가 소식하기도 하며, 소식하다가 과식하기도 하면서38) 안색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러한 뜻에서 수행자는 항상 마땅히 지혜로써 관찰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금 삿된 그물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마땅히 부지런히 바르게 마음을 챙겨서 취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면 곧 능히 이러한 온갖 업장을 멀리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제93. 거짓에 대해 참을 나타내면서 바른 선정을 닦길 권함

외도가 지닌 삼매는 모두가 소견과 애착과 아만심을 떠나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리와 공경을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는 소견의 상에 머물지 않고 얻었다는 상에도 머물지 않으며 내지는 선정에서 벗어나서도 게으름과 교만이 없어서 가진 번뇌가 점점 엷어지게 된다. 만일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익히지 않고 여래의 종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맞지 않다. 세간의 모든 선과 삼매를 닦되 흔히 거기에 탐닉하여 아견에 의지하여 삼계에 얽히면 외도와 더불어 함께하는 것이다. 만일 선지식이 보호하는 바를 떠나면 곧 외도의 소견을 일으키게 된다.

제94. 지를 닦아 얻게 되는 이익을 밝힘

또다시 정근하여 전심으로 이 삼매를 수학하는 이는 현세에서 마땅히 열 가지 이익을 얻을 것이다. 첫째는 항상 시방의 모든 대각과 정사의 호념하는 바가 되고, 둘째는 온갖 마구니와 악귀들에게 공포심을 받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아흔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들에게 의해 산란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매우 깊은 법을 비방함에서 멀리 떠나 중죄와 업장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다. 다섯째는 일체의 의심과 온갖 나쁘고 조악하거나 자세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요, 여섯째는 모든 대각의 경계에 대한 믿음이 증대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근심과 뉘우침을 멀리 떠나 생사에서 용맹하게 겁내지 않는 것이요, 여덟째는 그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하여 교만함을 버려서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받지 않는 것이다. 아홉째는 비록 선정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온갖 때나 온갖 경계처에서 곧 능히 번뇌가 줄어서 세간을 좋아하지 않으며, 열째는 만일 삼매를 얻으면 외연의 온갖 소리에 놀라서 동요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제95. 치우쳐 닦는 과실을 들어 네 가지 관을 닦길 권함

또다시 만약 사람이 오직 지만 닦으면 곧 마음이 침몰한다. 혹 게으름을 일으켜 온갖 착한 일을 즐거워하지 않고 대비심을 멀리 떠나게 된다. 이것은 나와 남 둘 다 이롭게 하는데 게을러 큰 병이 된다. 이 때문에 지만 닦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관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관을 닦아 익히는 자는 마땅히 모든 세간의 함이 있는 법은 오래 머무름이 없어서 잠깐 동안에 변하여 무너지며, 온갖 마음 작용이 시시각각 생멸함을 관찰할 것이다. 이 때문에 고통이니,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정신이 아득하여 꿈과 같은 줄 관찰할 것이며,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갯불과 같음을 관찰해야 한다.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마치 구름과 같아 급히 일어남을 관찰해야 하며, 세간의 모든 몸이 모두 다 깨끗하지 못하고 갖가지로 더러워 하나도 좋아할 만한 것이 없음을 관찰해야 할 것이다.

제96. 중생들의 고통을 생각하길 권하면서 자비와 서원을 내게 하여 온갖 선을 닦게 함

이와 같이 마땅히 생각할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비롯함이 없는 과거로부터 다 무명에 훈습한 바가 된 때문에 마음으로 하여금 생멸케 하여 이미 온갖 몸과 마음의 큰 고통을 받았다. 현재에도 곧 한량없는 핍박이 있으며, 미래의 고통도 한계가 없어서 버리기 어렵고 떠나기가 어렵되 이를 깨닫지 못한다. 중생들도 이와 같아서 매우 불쌍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여 곧 마땅히 용맹하게 다음과 같이 큰 서원을 세울 것이다.
“원컨대 저의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을 떠나 시방에 두루해서 일체의 온갖 좋은 공덕을 수행케 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할 것이며, 한량없는 방편으로써 고뇌 받는 모든 중생들을 건져서 그들에게 열반 제일의 즐거움을 얻도록 하리다.”
이러한 서원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때와 장소에서 가진 온갖 선을 자기의 감당함을 따라 버리지 않고 수학하여 마음에 게으름이 없다. 오직 앉을 때에 지에 전념하는 것을 제외한다. 나머지 일체에서는 다 마땅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관찰할 것이다.

제97. 네 가지 위의에 의지하여 지관을 원만히 닦기를 권함

다니거나 머물거나 눕거나 일어남에 모두 마땅히 지와 관을 함께 행할 것이다. 이른바 비록 모든 법의 자성이 생기지 않음을 생각하나, 다시 곧 인연으로 화합한 것인 선악의 업과 고락 등의 과보를 추호도 잃거나 무너짐이 없음을 생각한다. 비록 인연과 선악의 업보를 생각하나 또한 생각의 본성은 얻을 수 없음을 생각한다.
지를 닦는 사람은 범부들이 세간에 집착하는 것을 고치고, 이승의 겁내거나 마음 약한 소견을 능히 버릴 수 있다. 관을 닦는 사람은 이승이 대비심을 일으키지 않는 비루하고 졸렬한 허물을 고치고, 범부가 선근을 닦지 않음을 멀리 떠나게 한다. 이러한 뜻을 쓰기에 이 지와 관 두 문이 함께 서로 도와 이루어서 서로 떠나보내선 안 되는 것이다. 만일 지와 관을 함께 갖추지 않으면 곧 능히 보리의 도에 들어가지 못한다.

제98. 겁을 내어 물러나는 근기를 위해 오로지 염불하는 방편을 보임

또다시 중생이 이 법을 처음 배워서 바른 믿음을 구하고자 하나 그 마음이 겁내거나 마음 약한 이는 이 사바세계에 머물러서 항상 모든 대각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지 못할까 스스로 두려워한다. 또 “신심을 이루기가 어렵다.”라고 두려워하여 뜻을 물러나고자 하는 이는 대각의 뛰어난 방편으로 신심을 보호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염불하는 인연에 뜻을 오로지하여 서원에 따라 타방의 불국토에 태어나 항상 대각을 친견하여 악도를 영원히 벗어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수다라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전념하여 닦은 선근을 회향하여 저 세계에 나기를 원하고 구하면 곧 왕생하게 된다.”라고 했다. 항상 대각을 친견하기 때문에 끝내 물러나지 않는다. 만일 저 부처님의 진여법신을 관찰하여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왕생하게 되어 바른 선정에 머문다.
제5절 닦으면 이익이 있다고 권하는 부분(勸正信)

제99. 게을러 나아가지 못하는 근기를 위해 이익을 들고 수행을 권함

이미 신심과 수행 부분을 말하였으니, 다음으로 닦으면 이익이 있다고 권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와 같은 대승의 모든 대각의 비밀 창고를 내가 이미 모두 말하였다.
만일 중생이 대각의 매우 깊은 경계에 바른 믿음을 내어 비방을 멀리 벗어나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할진댄 마땅히 이 논을 지녀 생각하고, 닦아 익히면 최후에는 위없는 도에 도달할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겁이 많거나 나약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결정코 대각의 종자를 이어서 반드시 모든 대각의 수기를 받을 것임을 마땅히 알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열 가지 선을 행하게 한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한 차례의 음식을 먹을 만한 시간에 이 법을 바로 생각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앞의 공덕을 초과하여 비유가 불가하다. (열 가지 선으로 교화하는 공덕을 비하면 백분이나 천분 내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치지 못한다.)
또다시 만일 사람이 이 논을 받아 지녀서 관찰하고 수행하되 만 하루 동안이라도 닦아 익혀 가진 공덕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말로 할 수가 없다. 가령 시방의 모든 대각께서 각기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에 그 공덕을 찬탄하시더라도 또한 능히 다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이르자면 법성의 공덕이 다함이 없는 때문이니 이 사람의 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끝이 없다.

제100. 훼방의 죄를 들어 믿고 수행하기를 권함으로 결론지음

그 어떤 중생이 이 논을 훼방하고 믿지 않으면 얻은 죄보로 한량없는 시간을 지나도록 큰 고뇌를 받을 것이다. 이 때문에 중생들은 다만 마땅히 신앙을 할 것이지 훼방하지 말 것이다. 자신을 깊이 해치고 또한 남까지 해치게 하며 모든 삼보의 종자를 끊어지게 할 것이다.
모든 대각께서 다 이 법을 의지하여 열반을 얻으셨기 때문이며, 모든 정사들이 이 법으로 인하여 수행하여 대각의 지혜에 들어가는 까닭이다.
마땅히 알라. 과거의 정사들이 이미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었다. 현재의 정사들도 이제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루며, 미래의 정사들도 마땅히 이 법을 의지하여 청정한 믿음을 이룰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중생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수학해야 할 것이다.
제Ⅲ장 유통분-회향송

모든 대각의 매우 깊고 광대한 뜻을
내 지금 분수대로 다 말했으니
이 공덕을 법성과 같이 회향하여
널리 모든 중생계를 이롭게 하겠습니다.

주석
001 용성 선사는 『대승기신론』의 「서분」에 해당하는 귀경게를 생략하였다. “시방에서 가장 뛰어난 업으로 두루 아시며 색에 걸림이 없이 자재하시며 세상을 건지시는 대비하신 분과 그 몸의 바탕과 모습인 법의 성품 진여의 바다와 한량없는 공덕들과 실다운 수행자들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중생들로 하여금 의혹을 없애 삿된 집착을 버리고 대승의 바른 믿음을 일으켜 대각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자 합니다.” 이하에 『대승기신론』의 원문을 생략한 부분은 각주로 밝혀 둔다.
002 용성 선사는 “오로지”를 생략하였다.
003 용성 선사는 “설법자도”를 생략하였다.
004 『대승기신론』 원문은 ‘거둔다’는 의미의 ‘攝’이다.
005 용성 선사는 “마음의 생멸하는 인연의 모습은”을 생략하였다.
006 용성 선사는 “법”을 생략하였다.
007 『대승기신론』 원문의 “從本已來”를 용성 선사는 “本을 從하야 來함으로”라고 했다. 전부 12회 나온다.
008 용성 선사는 “왜냐하면 일체의 말은 임시적인 이름일 뿐 실체가 없고, 다만 허망한 생각을 따른 것이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여라 말한 것도 모습이 없다. 이르자면 말의 궁극은 말로 인해 말을 버리는 것이다. 이 진여의 바탕은 버릴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이 다 ‘진’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세울 수도 없으니 모든 법이 다 ‘여’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말로 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이름했음을 알 것이다.”를 생략하였다.
009 용성본에는 “제6”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출판상의 교정 오류로 바로잡는다.
010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가는 세로쓰기에서 “右”로 되어 있는 것을 ‘위’로 바꾸었다.
011 ‘상사각相似覺’을 말한다.
012 원효의 『기신론소』에서는 제1지에서 제10지까지의 보살을 말한다.
013 『대승기신론』 원문은 “以離分別麤念相”으로 “분별하는 망념의 모습을 떠났다.”란 의미로 새겨진다.
014 『기신론소』에서는 무구지無垢地를 지칭한다. 등각을 무구지라고도 한다.
015 용성 선사는 “네 가지 모습”을 풀어 썼다.
016 ‘부차復次’란 용어가 수십 군데 등장하는데, 이는 ‘또다시’, ‘재차’의 뜻이다.
017 용성 선사는 “무명의 모습은 본각의 성질을 떠난 것이 아니어서 무너뜨릴 것도 아니며 무너뜨리지 않을 것도 아니다.”를 생략하였다.
018 용성 선사는 “법이 나타남이 없으니”를 생략하였다.
019 『대승기신론』 원문은 ‘具足無漏’로 ‘무루를 갖추어서’로 새겨진다.
020 용성 선사는 “말하자면 진여”를 생략하였다.
021 『대승기신론』 원문은 ‘있다’의 의미인 ‘有’이다.
022 심·의·식으로 제8식인 마음과 제7식인 의와 제6식인 의식.
023 ‘自然業智’는 즉 후득지를 말하는데 용성 선사는 ‘業智’라고 하였다.
024 무명의 씨앗.
025 용성본이 의거한 『대승기신론찬주』는 여기서부터 하권으로 분류했다. 진계, 『대승기신론찬주』 (『卍속장경』 권71, 상권 pp.889상~916하. 하권 pp.917상~949하); (『대일본속장경』 권45, 상권 pp.336중~350상. 하권 pp.350중~366하).
026 용성본에서는 “己往”이라고 하였으나 ‘己性’의 오류인 듯하다.
027 용성 선사는 “만약 사람이 알지 못하여”를 생략하였다.
028 용성 선사는 “만약”을 생략하였다.
029 용성 선사는 “진보하여”를 생략하였다.
030 용성 선사는 “혹은 잘 아는 벗이 되기도 하며,”를 생략하였다.
031 『대승기신론』 원문은 “自性滿足一切功德”으로 “자기 성품에 일체의 공덕이 만족하다”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032 용성 선사는 “진실하게 아는 뜻, 자성청정심의 뜻, 상락아정(항상함과 즐거움, 참 나, 청정함)의 뜻”을 생략하였다. 진여의 여섯 가지 공덕이다.
033 『대승기신론』 원문은 “如來法身”이라고 했다.
034 『대승기신론』 원문은 “應身”으로 되어 있다.
035 『대승기신론』 원문은 ‘以不知轉識現故’로 “전식의 나타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로 새겨진다.
036 『대승기신론』에는 이 부분은 없으며, 용성 선사가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037 밤낮 여섯 때 : 아침(신조), 오전(일중으로 사시), 일몰, 초저녁(초야), 밤중(중야), 밤 12시 이후(후야)를 말한다.
038 『대승기신론』 원문은 “乍多乍少”로 ‘혹 과식하거나, 혹 소식하며’로 새겨진다.

불기(大覺應世) 2957년(1930) 윤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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