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도경종요 大慧度經宗要

大慧度經宗要

釋元曉撰

< 분석 방향 >

將說此經六門分別 初述大意 次顯經宗 三釋題名 四明緣起 五者判敎 六者消文

앞으로 이경을 여섯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겠다.
먼저 대의를 말하고, 다음에는 경의 종지를 나타내고, 세번째에서는 재목을 풀이하고, 네번째
에서는 경을 설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다섯번째에서는 가르침의 위치를 분석하고, 여섯번째에
서는 경문을 풀이하겠다.

< 대의 >

第一述大意者. 夫波若爲至道也. 無道非道, 無至不至; 蕭焉無所不寂, 泰然無所不蕩.
是知實相無相故, 無所不相; 眞照無明故,無不爲明.

첫번째 대의라는 것.
반야를 지극한 도로 한다. 도라거니 도가 아니다거니가 없으며 지극하니 지극치 못하다가 없
이 시원스래 고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큼직하여 깨끗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앎의 진실한 모습은 일정한 상태가 없기 때문에 상태라 하지 못할 것이 없고, 참으로 무명
을 비추기 때문에 밝히지 못함이 없다.

無明無不明者 誰滅癡闇 而得慧明, 無相無非相者 豈壞假名 而說實相.
斯則假名妄相 無非眞性 而四辨不能說其相 實相般若玄之又玄之也 貪染癡闇 皆是慧明 而五眼不能
見其照 觀照波若損之又損之也.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은 것도 없는데 누가 어리석은 어둠을 없애고 지혜의 밝음을 얻었는가?
일정한 상태도 없으며, 일정한 상태가 아닌 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정적 개념으로 진실한 상태
를 설명 할 수 있는가?
이렇하다면 가정적 개념과 헛된 상태가 참다운 본질이 아닐수도 없어서 네가지로 거침없이 변
론을 해도 그 상태를 제대로 설명 할 수가 없으니 진실한 상태의 반야는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
가물하며, 탐냄의 더러움과 어리석음의 어두움이 다 지혜의 밝음이어서 다섯가지 눈으로도 그것
을 비추어 볼수가 없어서 살펴서 본 반야로 그것을 덜어내고 또한 덜어내야 한다.

今是經者 波若爲宗, 無說無示無聞無得, 絶諸戱論 之格言也.
無所示故 無所不示, 無所得故 無所不得.
六度萬行 於之圓滿, 五眼萬德 從是生, 成菩薩之要藏也, 諸佛之眞母也.

지금 이 경에서는 반야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설명할 수 없으며, 나타내 보일 수 없으
며, 들을 수 없으며, 얻을 수도 없어서 모든 말 장난이 끊어진 진실한 말이다.
나타난 것이 없으므로 보이지 못할 것이 없고, 얻은 것이 없으므로 얻지 못할 것도 없다.
육도 만행이 그것에서 완전해지며, 다섯가지 보는 능력의 온갖 덕스러움이 이것에서 생기니 보
리를 이루는데 중요한 근거며 모든 부처님들의 진실한 어머니이다.

所以無上法王 將說是經 尊重波若 親自敷坐, 天雨四華以供養 地動六變而警喜, 十方大士最 在邊
而遠來, 二界諸天 下高光而遐至 常啼七歲立之 不顧骨髓之 . 河天一座聞之 便得菩提之記.

그러므로 위없는 법의 왕께서 이경을 설하시려고 하심에 반야를 존중하시고 직접 자리를 펴시
니 하늘에서 네가지 꽃을 내려서 공양을 드리고, 땅이 여섯가지로 변화 하여 움직이며 삼가 기뻐
하고, 시방의 보살들이 그 곁에 머물며, 멀리에서도 오니 욕계와 색계의 모든 하늘들이 드높은
빛을 내려 멀리에 이르게하니 상제보살은 칠년동안 그곳 에 서서서 뼈가 부러져도 돌아보지 않았
으며, 갠지스강의 모래알 만큼 많은 하늘들이 한자리에서 그것을 듣고 문득 보리의 수기 얻었다.

至如唐虞 之蓋天下, 周孔之 冠群仙, 而猶諸天設敎 不敢逆於天則.
今我法王波若眞典 諸天奉而仰信 不敢違於佛敎. 以此而推去彼遠矣 豈可同日而論乎哉.

당나라와 우나라가 천하를 뒤 덮고 주공과 공자가 뭇 신선들을 뒤 덮은 것과 같고, 모든 하늘
들이 조칙을 내림에 하늘의 법칙을 어기지 않는 것과 같다하나, 이제 우리 법왕의 반야, 지실한
가르침을 모든 하늘들이 받들어 믿어 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거리가 그 것들과는 머니 어찌 같은 태양이라 말할수 있겠는가.

爾乃{信受四句 福廣虛空 捨恒沙之身命 所不能, 況起謗一念 罪重五逆 墮千劫之無間 猶不能償者
也}

그러므로 {사구게를 믿어 받으면 복과 덕이 허공과 같아서 갠지스강 가의 모래알 만큼 몸과 목
숨을 버리더라고 미치지 못하는 것이며, 혹시 한 생각 비방하는 생각을 일으키면 죄가 오역죄 보
다 무거워서 천겁 동안 쉼없이 무간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오히려 갚을 수가 없다} 했다.

< 반야의 의미 >

所言摩訶般若波羅蜜者 皆是彼語 此土譯之云大慧度.
由無所知 無所不知 故名爲慧, 無所到故 無所不到 乃名爲度. 由如是故 無所不能 能生無上大人
能顯無邊大果. 以此義故 名大慧度. 所言經者 常也法也.
常性無所有故 先賢後聖之常軌也 法相畢竟空故 反流歸源之眞則也

마하반야바라밀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다 인도 말이고 중국어로는 대혜도라고 한다.
아는 것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으므로 지혜라고 부르고, 도달할 곳이 없고 도달하지 못할
곳도 없으므로 이름을 도달하다라고 한다.
이와같은 까닭으로 능하지 못한 것이 없어서 능히 [위 없는 대인]을 낳고 능히 [끊없이 큰 결
과]를 나타내니 이로써 대혜도라고 부른다.
경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하며, 진리이다.
항상하는 것의 바탕은 일정하게 있지 않으므로 선대의 현인들과 후대의 선인들의 항상하는 법
칙이 된다.
법의 상태는 반드시 주체로써의 성질이 없으므로 흐름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가는 참된 법칙이
다.

< 과목의 기준 >

此經六百有十六分. 在前四百 以爲初分, 初分之內 有七十八品. 於中在前 明起經之緣.
故言初分緣起品第一.

이경 육백부에는 열여섯 부분이 있다. 앞에 있는 사백부는 초분이라고 하고 초분에는 일흔 여
덟개의 품목이 있다. 그 가운데에 앞에서는 이 경을 말씀하시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
므로 첫부분을 첫번째 연기품이라고 말한다.

< 경의 바탕 >

第二顯經宗者.
此經正以波若爲宗 通而言之 波若有三 一文字波若, 二實相波若, 三觀照波若.

두번째 경의 종지.
이경은 바로 반야를 바탕으로 삼았으니 개괄적으로 그것을 말하면 반야에는 셋이 있다.
첫째는 문자로 표현된 반야이고, 둘째는 진실한 상태로써의 반야이며, 세째는 관찰하여 살핀
반야이다.

今此經者 後二爲宗 所以然者 文字但是能詮敎故, 後二是其所詮旨故.
今欲顯是宗義 略作三門 一明實相, 二明觀照, 三者合明二種般若.

지금 이 경에서는 뒤의 두가지 반야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한 이유는 문자로 표현 된 반야는 다만 능히 가르침을 전하기만 하기 때문이며, 뒤의 두가
지는 그것이 전한 바 의미기 때문이다.
지금 이 바탕의 뜻을 간단히 세가지 방법을 써서 나타내겠다.
첫째는 진실한 상태인 반야를 설명하고, 둘째는 관찰하여 살핀 반야를 설명하고, 세째는 두가
지 반야를 함께 설명하겠다.

< 진실한 상태 그대로의 반야 >

初明實相般若相者.
諸法實相 說者不同. 有義 {依他起自性上 遍計所執自性 永無, 所顯眞如 是爲實相. 依他起性 實
不空故}

첫째 진실한 상태인 반야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인데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 같
지는 않다.
어떤 뜻에는 {다른 것에 의존하여서 발생한 것의 근본 바탕 위에서 두루 분석하고 판단하여 취
사선택하는 근본 바탕이 영원히 없이, 드러나는 진여. 이것이 실상이다. 다른 것에 의존하여 발
생하는 본질은 진실로 공허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瑜伽論云 {若諸名言 熏習之想 所建立識, 緣色等相事 計爲色等性. 當知此性 非實物有 非勝義有
唯是遍計所執自性, 當知假有. 若遣名言 熏習之想 所建立識, 如其色等相事 緣離言說性. 當知此性
是實物有 是勝義有 乃至廣說故}

유가사지론에서는 {모든 개념과 정의와 훈습된 생각으로 인식이 성립하여, 색등의 상태와 사실
에 반연하여 물질 등의 성질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성질은 실제로 어떠한 물건이 있는 것이 아니
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이것은 두루 헤하려서 집착한 것인 줄 알아야 하며,
가정으로써 만 존재한다고 알아야 한다. 만약 개념과 정의에 훈습된 생각으로 성립한 인식을 제
거하면, 그와같이 색등의 상태와 사실은, 정의로써 설명 가능한 것들에서 벗어난 성질에 반연된
것과 같다. 이러한 본질은 실제로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이며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이다고 알아야
한다}라고 자세히 이유를 설명하였다.

或有說者 {依他性空 眞如亦空 如是乃爲諸法實相}, 如下文言 {色無所有 不可得, 受想行識無所有
不可得, 乃至如法性實際無所有 不可得};
又言 {諸法實相 云何有, 諸法 無所有. 如是有是事不知 名爲無明 乃至廣說故};
或有說者 {依他起性 亦有亦空 世俗故有 勝義故空 空卽眞如 眞如不空 如是名爲諸法實相}, 如下
文云 {世俗法故 說有業報 第一義中 無業無報};
瑜伽論云 {於勝義上 更無勝義故};
或有說者 {二諦法門 但是假說 而非實相 非眞非俗 非有非空 如是乃名諸法實相}, 如下文云 {有所
得 無所得 平等 是名無所得};
論云 {若顚倒 少許有實者 第一義諦 亦應有實故}.

또 어떤 설명에서는 {다른 존재와 의존적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의 본질도 공하고, 진여도
또한 그 성질이 공하다. 이와 같은 것을 모든 법의 실제 상태라고 한다}고 했으니 아랫 글에서
{색은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얻을 수 없으며, 받아들임와 표상작용과 연상작용과 인
식작용도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얻을 수 없으며, 진리 그대로 진리의 바탕의 실제까
지도 진실하고 고정적 상태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므로 얻을 수 없다}고 한 것과 같으며,
또 말하기를 {모든 법의 실제 상태가 어떻게 존재 하겠는가? 모든 법은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
는다. 이와 같이 [있다고들하는 이러한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함의 이름이 무명이 된다]고 널리 설
명했기 때문이다}고 했으며,
또한 어떤 사람은 {다른 존재와 의존적 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것의 본질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
재하지 않기도 하다. 일반적 측면에서는 존재하고 본질론적 측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
지 않는 측면은 진여이고 진여는 존재하므로 이와 같은 것의 이름을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이라
고 한다}고 했으므로, 아랫 글에서 {세속적 법이기 때문에 모든 업과 과보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보편자로써의 의미에는 업도 과보도 없다}고 한 것과 같으며,
유가사지론에서 {보편자로써의 의미위에는 더이상의 보편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했으며,
또 다른 사람은 {두가지 측면의 진리는 다만 가정적으로 말한 것이고, 실제의 상태느 아니어서
참되지 않으며, 속되지도 않고 존재 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지도 않으므로 이러한 것을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라고 했으니, 아랫 글에서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가 평등하므로 이를 [얻을 것
이 없다]고 부른다}한 것과 같으며,
대지도론에서는 {혹 어리석어서 조금이라도 [실제로 있다]고 하면 제일보편자도 당연히 있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問; 諸師所說 何者爲實.
答; 諸師說皆實 所以然者 皆是聖典 不相違故. 諸法實相 絶諸戱論 都無所然 無不然故.

질문; 모든 스님들께서 말씀하신 것 중 어떤 것이 가장 진실합니까.
답; 모든 스님들께서 말씀하신 것이 다 진실하다. 왜냐하면 모두 성인의 가르침과 서로 모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는 모든 논쟁만을 위한 논의가 끊어져서 모두 그러함이 없으며 그렇지
않은 것도 없기 때문이다.

如釋論云 {一切實 一切非實, 及一切實 亦非實 一切非實 非不實. 是名諸法之實相}.
案云 {此說四句 是實相者 如其次第 許前四說 離著而說 無不當故. 若有著者 如言而取 無不破壞
故 非實相, 離絶四句 不可破壞 如是乃名諸法實相};
如廣百論頌曰
{有非有俱非 諸宗皆寂滅
於中欲興難 畢竟不能申}.

대지도론에서는 {모두가 진실이며 모두가 진실이 아니며, 모두가 진실이라 하는 것도 또한 진
실이 아니고, 모두가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진실하지 않은 것. 이를 모든 법들의 진실함이
라고 부른다}고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네 구절의 [진실한 상태]라는 것은 그 차례와 같이 앞에서의 네가지 설
을 인정하는 것이니 치우침을 벗어남 말은 옳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집착함이 있으면 말만을 취하는 것과 같아서 파괴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진실한
상태가 아니고, 네 구절을 잘라내면 파괴할 수 없어지므로 이러한 것이 모든법의 [진실한 상태]
이니, 광백론의 게송에서 {존재한다 거나 존재치 않는 다거나가 다 잘못이니/모든 근본은 다 적
멸하다/그 가운데서 어지러이 일으키려 하면/반드시 능히 펼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依此大般若經 {以如來藏 爲實相般若} 如下理趣分中言 {[爾時世尊 復依一切住持藏法如
來之相 爲諸菩薩 宣說般若波羅蜜多, 一切有情 住持遍滿 甚深理趣勝藏法門; 謂一切有情 皆如來藏
普賢菩薩自體遍故, 一切有情 皆金剛藏 以金剛藏 所灌灑故, 一切有情 皆正法藏 皆隨正語轉故, 一
切有情 皆妙業藏 一切事業加行依故] 佛說如是 住持甚深理趣 勝藏法巳; 告金剛手菩薩云 [若有得聞
如是遍滿 波若理趣勝藏法門 信解受持 讀誦修習 則能通達勝藏法性藏 速證無上正等菩提]};

또 어떤 사람은 이 대반야경에 의해서 {여래로써의 근본을 실제 상태 그대로의 반야로 삼는다}
했으니 아래의 이취분 가운데서 말한 {[이때에 세존께서 다시 모든 머무르고 지니는 근본 여래의
상태에 의하여서 모든 보살을 위해 반야바라밀다와, 모든 중생이 머무르고 간직할 두루하고 깊은
이론들과 훌륭한 근본진리의 방편을 자세히 설명했으니, 모든 유정들이 모두 여래의 근본이니 보
현보살이 본래 두루 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들이 다 금강장이니 금강으로써 이마를 씻어주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바른 법의 근본이니 모두 바른 말을 씀을 따라르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
들이 모두 미묘한 업의 근본이니 모든 일과 업에 행을 더하여서 의지 하기 때문이다]라고 부처님
께서 이와 같이 머무르고 간직하는 매우 깊은 이론들과 훌륭한 법의 본질을 말씀 하시고 나서 금
강수 보살에게 [만약에 얻어 들음이 있어서 이러한 반야의 이론들과 훌륭한 근본 진리가 두루한
방편들의 믿고 알고 받아서 지녀서 읽고 외우고 닦고 익히면 능히 훌륭한 근본과 법의 바탕인 근
본에 통달하여서 금방 위없고 바르고 평등한 진리를 증득 할 것이다]}고 한 것과 같으며,

如寶性論云 {無始世來性 作諸法依止, 依性有諸道 及證涅槃果}, 長行釋言 {此偈明 何義 無始世
來性者 如經說云 [諸佛如來 依如來藏 說諸衆生 無本際 不可得知]};
所言性者 如聖者, 勝 經云 {世尊如來藏者 是法界藏, 出世間法身藏, 出世間上上藏, 自性淸淨法
身藏, 自性淸淨如來藏}.

보성론에서 {시작된 적이 없는 본질이 모든 법들의 의지가 되니, 본질에 의하여서 모든 진리와
열반의 과정이 있다}하고 장항에서 해석하기를 {이 게송의 의미는 무엇을 설명한 것인가? 시작됨
이 없는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경에서 설명한 [모든 여래께서는 여래의 본질에 의하면 모든 중생
은 본질이 없으므로 알수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한 것과 같다.
이른바 바탕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스러운 것과 같으니, 승만경에서는 {세존 여래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법계의 근본이며, 세간을 벗어난 진리 근본이며, 세간을 벗어난 훌륭하고 훌륭한
근본이며, 본래 그대로의 맑고 깨끗한 진리의 근본이며, 본래 그대로 청정한 여래의 근본이다}라
했다.

依此五句 攝大乘論 及佛性論 以五義釋無相 論云 {[所言性者 自有五義 一自性種類義 二因義 三
生義 四不壞義 五秘密義] 乃至廣說… 今此經云 [一切有情 皆如來藏 普賢菩薩自體遍故]者 謂此菩
薩意 爲一切有情 唯一法界 無別有情, 由此道理 長時熏修 是故 自心變異 遍諸有情 以爲自體. 如是
菩薩 隨分觀心 尙能如是 況諸如來 圓滿觀心 是故諸有情 皆爲如來藏所攝 名如來藏} 如是釋也.
如佛性論云 {一切衆生皆在如來智內 皆爲如來之所攝持故, 說所攝衆生爲如來藏 如來所攝 名如來
藏故};

이 다섯 구절에 의해서 섭대승론과 불성론에서다섯가지 뜻으로써 무상을 해석 하였다. 론에서
는 {[말한 바 본질이라는 것에는 원래 다섯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본래 본질의 종류라는 뜻이고
둘째는 원인라라는 뜻이고 세째는 낳는다는 뜻이고 다섯째는 비밀스럽다는 뜻이다]라고 하고 넓
리 설명하기를,
지금 이경에서 [모든 유정이 다 여래의 근본이니 보현 보살이 중생의 몸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보살이라고 한 뜻은 모든 중생들이 되니 오직 한 법계일 뿐 달리 유정이
없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서 오랜 시간 훈습됨을 말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본래 마음이 변화
하해서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여 중생의 바탕이 된다. 이와 같이 보살은 분수를 따라서 마음을 관
찰함이 오히려 이렇게 능숙한데 하물며 모든 여래들께서 완전하게 마음을 관찰함이겠는가. 이것
때문에 모든 유정들이 다 여래의 본질에 포함됨을 여래의 근본이라 부른다}고 풀이 했다.
불성론에서는 {일체 중생이 다 여래의 지혜안에 있으니, 모두 여래께서 포섭하여 지님이 되기
때문이며, 중생을 섭수하는 것이 여래의 근본이 되며, 여래를 포함하는 것을 여래의 근본이라 하
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以金剛藏所灌灑故者; 謂佛地所有大圓鏡智 相應淨識 所攝種子 變異 爲諸有情 以爲等流果故 言所
灌灑故
皆隨正語轉故者; 普賢菩薩 變爲諸有情 時隨自正語 變異生故 諸有情 皆是正法也.
皆妙業藏者; 以如來藏自內熏習力故 生諸有情 二種業 謂避苦求樂 諸善事業 一切加行善心 皆依此
二業生故. 言一切事業加行依故. 由此道理 名爲妙業.

{금강의 근본으로써 이마를 ㅆ어주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부처님의 지위에 있는 대원 경지와
서로 맞는 아홉번째 깨끗한 인식에 포함되는 종자가 변화하여 모든 유정을 위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마를 씻어 준다고 말한 것이다.
{모두 바른 말씀을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보현보살이 변화해서 모든 유정이 되므로 때
때로 자신의 바른 말을 따라서 변화하여서 태어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이 다 바른 법이다.
{모두 미묘한 업의 근본이다}라고 한 것은 여래의 근본인 원래부터 증득해 있던 훈습력을 사용
하기 때문에 모든 유정이 두가지 업을 낳으니 괴로움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모든 좋을 일들
과, 모든 애써 실천 하는 좋은 마음이 다 이 두가지 업이 생김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일들을
애써 실천하는 의한다 한 것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서 이름을 미묘한 업이라 한다.

< 관찰하여 살핀 반야 >

次明觀照般若相者 如論說云 {諸菩薩從初發心 求一切種智 於其中間 知諸法實相慧是波若波羅蜜
總說雖然 於中分別, 如下論文 諸說不同 今於其中 略出四義.

다음에 관찰하여 살핀 반야라는 것은 지도론에서 말한 {모든 보살들이 처음 발심함으로부터 일
체 종지를 구하기까지 그 중간의 모든 법의 참다운 상태를 아는 지혜가 반야이다}라 한 것과 같
다. 개론적으로 설명하면 그렇지만 그 가운데를 자세히 나누면 아래 논문에서와 같이 그 모든 학
설들이 같지는 않으나 이제 그 가운데서 간단하게 네가지 의미를 나타내겠다.

一有人; {無漏慧眼, 是般若波羅蜜相. 何以故 一切慧中 第一慧 是名波若波羅蜜 無漏慧根 是第一
故}

첫째; 어떤 사람은 {샘이 없는 지혜의 눈, 이것이 반야바라밀의 상태이다. 왜냐하며 모든 지혜
가운데 제일의 뜻 이것을 반야바라밀이라고 부르는데 샘이 없는 지혜의 뿌리 이것이 제일의 뜻이
기 때문이다}라 했으며,

二有人言 {般若波羅蜜 是有漏慧. 何以故, 菩薩至道樹下 乃斷結使 先雖有大智慧 有無量功德 而
諸煩惱未斷 是故菩薩波羅蜜 是有漏智慧}

두번째;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은 유루의 지혜다. 왜냐하면 보살이 보리수 아래에 이르러서
곧 얽매여 부림 당함을 끊어서, 먼저 비록 큰 지혜가 있고 헤아릴수 없는 공덕이 있지만 모든 번
뇌를 아직 끊지 못했다. 이러하기 때문에 보살의 바라밀은 유루의 지혜다}라고 했으며,

三有人言 {菩薩有漏無漏智慧 總名波若波羅蜜. 何以故, 菩薩觀涅槃行佛道 以是事故 應是無漏 以
未斷結使 事未成辨故 應名有漏}

세번째; 어떤 사람은 {보살의 유루와 무루의 지혜를 다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보살
은 열반을 관찰하고 부처님의 진리를 실천 하여 이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루이며, 얽매
여 부림당함을 다 끊지 않았으므로 일을 다 가려내지 ㅇ았으므로 당연히 유루라 해야 한다}고 했
으며,

四有人言 {是波若波羅蜜 不可得相 若有若無 若常若無常 若空若實. 是波羅波羅蜜 衆界入所不攝.
非有爲非無爲 非法非非法 不取不捨 不生不滅 出有無四句 適無所著. 譬如火炎 四邊不可觸以燒手故
波若波羅蜜 如是不可觸以邪見手燒故.

네번째; 어떤 사람은 {이 반야바라밀은 상태로써 증명할 수 없다. 있기도 없기도하며, 항상하
기도 항상치 않기도 하며, 텅비었기도 꽉 찼기도 하다. 이 般若波羅密에는 18계와 6입에 포함되
지 않는다. 유위도 아니며 무위도 아니며, 법도 아니면 법이 아니지도 않으며, 취할 수도 없으며
버릴 수도 없으며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서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네구절의 명제를 벗
어 나서 적당히 갖다 붙일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불꽃을 사방에서 잡을 수 없는 것이 손을 때우
기 때문인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이 직접 접촉 할 수 없는 것은 삿된 견해의 손을 때
우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問曰上種種人說波若波羅蜜 何者爲實?

질문; 위에서 여러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말했는데 어떠한 것이 진실한가?

答曰 有人言 各各有理 皆是實故, 如經說{五百比丘各各說二邊及中道義 佛言皆有道理}. 有人言 末
後答者 是實 所以者何 不可破 不可壞故. 若有法如毫釐許有者 皆有過失可破, 若言無亦可破, 是波
若波羅蜜 中有亦無 無亦無 非有非無亦無 如是言說亦無 是名寂滅無 無戱論法. 是故 不可破 不可
壞 是名眞實波若波羅蜜最勝無過者. 如{轉輪聖王降伏諸敵 而不自高, 波若波羅蜜亦如是 能破一切語
言戱論, 亦不有所破 出第十一三卽中

답; 그들이 말한 것에 각각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다 진실하므로 경에서 {오백 비구가 각각 이
변과 중도에 대해서 설명하자 부처님께서 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러나) 그들의 말에서 맨 뒤 대답이 가장 진실하다.
왜냐하면 깨트릴수 없으며 무너트릴수도 없다.
만약에 법에 조금이라도 존재의 실체성을 인정한다면 모두 그릇될것이며, 만약 존재의 실체
성이 없다고 말하더라도 또한 깨트릴 수 있을 것이니, 이 바라밀 가운데에는 존재도 없으며, 존
재치 않음도 또한 없으며, 존재치 않거나 존재의 실체성이 없다고 하지 않는것도 또한 없으며,
이러한 말들도 또한 없다.
이러한 상태를 적멸하여 걸림이 없어서 논쟁거리가 없는 진리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깨트릴 수
없으며 무너트릴 수도 없으므로 이를 진실한 반야바라밀인 가장 수승하여 잘못이 없는 것이라고
하므로 {전륜성왕이 모든 적을 무찌르고 스스로 뽐내지 않는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도 또한 이와
같이 능히 모든 언어와 논쟁들을 깨트리고도 또한 깨었다고 할 것이 없다. – 제 십일품 {셋이 중
도이다} 한곳에서 인용함.

案云 此中前三義者 依迹顯實 通取地前地上波若有漏無漏 隨義而說. 第四義者 唯顯地上無分別智
證會實相 絶諸戱論 超過四句 遠離五相. 故言末後答者爲實 是就最勝, 作如是說 而非盡攝一切智慧
故言諸說 皆有道理.

가만히 생각하니 이 가운데 앞의 세가지 뜻은 흔적에 이해서 진실을 드러내어서 십지 이전과
십지 이후 반야의 유루와 무루를 모두 취해서 그 뜻을 따라서 설명했다.
네번째 의미는 오로지 십지 위의 무분별지를 나타내고 있다.
진실한 상태를 증명하여 모았으며, 모든 논란들을 끊었으며, 네가지 명제를 뛰어 넘었으며, 다
섯가지 상태에서 벗었다. 그러므로 {맨 뒤의 답이 가장 진실하다}고 말 한 것은 가장 수승 한 것
을 기준으로 한것이며, 이러한 설명들이 일체종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말
에 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한 것이니,

如下文云 {波若波羅蜜 攝一切智慧. 所以者何 菩薩求佛道時 應學一切法 得一切智慧 所謂求聲聞
酸支佛佛智慧. 是智慧有三種 學, 無學, 非學非無學}. 非學非無學智者 如乾慧地 不淨 安般 欲界繫
四念處 法 頂法 忍法 世第一法等 乃至廣說

아래 글에서 {반야바라밀은 일체의 지혜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보살이 부처님의 진리를 구할
때는 당연히 모든 법을 배워야 하며, 모든 종류의 지혜를 얻어야 하니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지혜를 구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지혜에는 세가지 종류가 있으니 배운 것과, 배우지 않은 것,
배운 것도 아니고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이다}한 것과 같다.
배운 것도 아니고 배우지 않은 것도 아닌 지혜라는 것은 십지의 건혜지에서 부정관과 안반수의
와 욕계에 메인 사념처 法과 頂法과 忍法과 世第一法等에서 널리 말한 것들과 같다.

< 실제상태 그대로의 반야와 관찰하여 살핀반야 >

第三合明二種般若 由非一故 假說二種 而離能所 畢竟無異. 所以然者 菩薩修行般若之時 推求一切
諸法性相 若我若無我 若常若無常 若生若滅 若有若空 如是一切 都無所得. 不得一切所取相 不起一
切能取之見. 是時遠離一切相見 平等證會諸法實相 無二無別 無始無終 無生無滅 非有非空 超過一切
語言之路 永絶一切心行之處 云何於中 有二般若? 但一切諸法 無不同然. 是故强名諸法實相, 一切分
別 無所不離 是故亦名無分別智, 無智而非實相 無實相而非智.

세번째 두가지 반야를 함께 설명한다.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두가지라고 가정해서 말하지만 주관과 객관을 벗어나서 마침네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보살은 반야를 닦을 때 모든 법의 본질과 상태를 미루어서 구하는데, 주체가 있거나
주체가 없거나, 주체가 항상하다거나 항상하지 않다거나, 생긴다거나 사라진다거나등등 이러한
모두를 다 얻지 않는다.
모든 얻었다고 할 상태들을 얻지 않고, 모든 능히 얻었다는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다.
이때 모든 상태에 대한 견해에서 벗어나서 평등히 모든 법의 진실한 상태인 둘이 아니며 다르
지도 않고, 시작이 없고 끝도 없으며, 생기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실체가 있지 않으며 실체
가 없지도 않음을 증득해 알아서 모든 언어로써 표현한 것들을 뛰어 넘고 모든 마음이 움직이는
곳을 영원히 끊는데 어떻게 그 속에 두가지 반야가 있겟는가?
다만 모든 법은 같지 않음이 없을 뿐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억지로 모든 법의 실제 상태라고 부를 뿐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가
없다.
이 때문에 또한 분별이 없는 지혜라고 부르니 지혜가 없으면 실제 상태가 아니며 실제 상태가
없으면 지혜가 아니니,

如論說云 {菩薩觀一切諸法 非常非無常 非我非無我 非有非無等 亦不有 是觀 是名菩薩行般若波羅
蜜. 是義捨一切觀 滅一切語言 離一切心行. 從本巳來 不生不滅 如涅槃相 諸法亦如是 是名諸法實相
乃至廣說}

대지도론에서 {보살이 모든 법을 관찰함에 항상하지 않고 항상하지 않지도 않으며, 주체적이지
않고 주체적이지 않지도 않으며, 실체가 존재하지 않고 실체가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등도 또
한 있지 않으니 이러한 관찰을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부른다.
이는 모든 관찰을 버렸으며, 모든 언어가 사라졌으며, 모든 마음의 움직임에서 벗어났 다는 뜻
이다.
근본으로 부터 온 이래로 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은 열반의 상태와 같아서 모든 법도 또한 이
와 같은 이를 모든 법의 실제 상태다}고 하고 널리 말한 것들과 같다.

問觀照般若 若有三分不? 若有見分 何言無見, 若無見分 何名觀照,有自證分 證自體者 則此智體
不同實相 云何得言, 無二無別 若無見分 亦無自證 則同空 不得名慧.

질문; 관찰하여 살핀 반야에 혹 세가지가 있는가? 만약에 본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면 왜봄이
없다고 말하며, 만약에 보았다는 부분이 없다면 어떤 것을 관조라고 부르며, 스스로 증득하는 부
분이 있다면 스스로 증득하는 부분의 본질이라는 것은 바로 이 지혜의 본질이어서 실제 상태와는
다를 것인데 왜 얻었다고 말하며, 둘이 없고 다름이 없어서 보았다는 부분이 없다는 것도 또한
스스로 증득할 부분이 없을 것이므로 바로 허공과 같아서 지혜라고도 부를 수 없지 않겠는가?

答有義 {此智有見無相}, 有義 {此智無相無見, 唯有自證 證於自體}
或有說者 {若就有別 開分三分 俱無, 若依無異 假說三分 俱有} 謂卽於此平等之中無相爲相 無見
爲見 無別自證 非不自證. 如是自證 無所不證 諸法實相 無非自故. 故此自證 無非是見. 見實相者
是無所見, 有所見者 不見實故. 故此見分 無非實相. 如是三分 只是一味 若如是說 有見不見 無障無
卽是解脫. 若存能見 卽墮有邊 若無見分 則墮無邊 不離邊故 卽爲被縛.

답; 어떤 사람은 이 지혜를 {봄은 있고 상태는 없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이 지혜는 상태도
봄도 없어서 오직 스스로 증득함만이 있어서 본 바탕을 증득한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만
약에 다름이 있음을 기준하자면 세부분으로 분석됨이 모두 없고, 없음에 의하면 세부분으로 가정
하여 설명함이 모두 있다}고 했으니 여기서는 평등한 가운데 상태가 없는 것을 상태로써 삼고
봄이 없음을 봄으로 삼음을 말한다.
실제 상태를 본다는 것, 이 것은 보았다는 것이 없음이며, 본 것이 있다는 것은 실제를 본 것
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보았다고 하는 부분은 실제 상태가 아님이 없다.
이와같은 세가지 부분은 오직 같은 것일 뿐인데 만약에 이와 같이 봄이 있고 봄이 없다함에 장
애가 없다면 이것이 바로 해탈이다. 만약에 능히 본다 함이 존재한다면 그대로 존재한다는 실상
론에 떨어질 것이며 만약에 본다 하는 부분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허무론에 떨어 질것이
다.
한 쪽에 치우침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얽메임을 당하니,

如論偈云
{若人見般若 是卽爲被縛
若不見般若 卽亦名被縛
若人見般若 是則得解脫
若不見般若 則亦得解脫}
上來第二顯經宗竟

지도론의 게송에서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이것이 바로 얽메임을 당한 것이라면,
반야를 보지 못하는 것도 곧 또한 얽메임을 당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이것이 바로 해탈을 얻을 것이라면,
반야를 보지 못하는 것도 곧 또한 해탈을 얻는 것이다}고 한 것과 같다.

이상은 경의 종지이다.

< 제목 >

第三釋題名者. 摩訶言大, 般若云慧, 波羅蜜者 名到彼岸 如論說也.
將釋此名 卽作三門. 先大, 次慧, 後到彼岸.

세번째는 제목을 풀이 한다. 마하는 크다는 말이고, 반야는 지혜라는 말이며, 바라밀은 저 언
덕에 도달한다고 하니 대지도론에서 설명 한 것과 같다.
이제부터 여기에서 제목을 풀이 함에 세가지 과정을 사용하다.
먼저 크다는 뜻을, 다음에는 지혜에 대하여, 마지막에는 저 언덕에 도달함을 (설명하겠다.)

所言大者 總而言之, 凡諸所有 大事大法 不可思議神力 威德 皆是般若之所成辦. 以是義故 名
之爲大 如下文云 {般若波羅蜜 爲大事故起 不可思議事故起 不可稱事故起 無有量事故起 無等等事故
起. 何以故 波若波羅蜜中 含受五波羅蜜 含受內空 乃至有法無法空 含受四念處 乃至八聖道分, 是深
般若波羅蜜中 含受佛十力 乃至一切種智 譬如[灌頂王 國土中尊 諸有官事 皆委大臣 國王安樂無事]
如是須菩提 所有聲聞 酸支佛法 若菩薩法 若佛法 一切皆在般若波羅蜜中, 般若波羅蜜 能成辦其事
乃至廣說}

크다고 하는 것을 총론으로써 그것을 말해 보면, 대게 모든 존재하는 큰 일과 큰 법칙과 불가
사의한 신통력과 위의와 덕은 다 반야가 이루어내고 가려낸것이다.
이러한 뜻이 되므로 이름이 큼이 되었으니 아래의 글에서 {반야바라밀은 큰 일을 하기 위한 때
문에 일어났으며,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일어났으며, 이름 지어서 부를수 없는 일 때문에 일어났
며, 한계가 없는 일 때문에 일어났으며, 같음이 없는 일 때문에 일어났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
가운데는 다섯가지 바라밀이 포함되있으며, 안의 공함에서부터 있다고 하는 것과 없다고 하는 것
들의 공함까지 포함 되있으며, 네가지 수행의 기준에서부터 여덟가지 진리의 길까지 포함되있으
며, 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에는 부처님의 열가지 힘으로 부터 모든 종류의 지혜가 포함 되어
있으니 마치 [관정왕이 국토에서 존귀하여 모든 관청의 일들을 다 대신들에게 대신 하게하고 자
신은 편안하여 할 일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같이 수보리에게 있는 바와, 성문과, 벽지불의 가
르침과, 보살의 가르침이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이거나가 모두 반야바라밀의 속에 있으니 반야바
라밀이 능히 그 일을 이루어 내고 가려 낸다]고 자세히 설명 한 것} 같다.

< 마하 >

別而論之 乃有衆多 今撮其要略 釋四義 有勝力故, 得多聞故, 生大人故, 與大果故.
有勝力故 名爲大者 謂諸菩薩 能學般若波羅蜜故 有不思議殊勝神力.
如經言 {欲以一毛擧三千大千國土中諸須彌山 擲過他方無量阿僧祗諸國土 不 生者 當學般若
波羅蜜故 得多聞故. 名爲大者 謂諸菩薩學般若故, 過去未來一切諸佛所說言敎 巳說當說 皆得遍聞}
如經言 {過去諸佛巳說 現在諸佛今說 未來諸佛當說 欲聞聞已自利亦利他人 當學般若波羅蜜}
論曰 {菩薩有三昧 名觀三世諸佛三昧. 入是三昧 皆見三世諸佛 聞其說法}

각론으로 그것을 설명하자면 많은 말이 있겠지만, 이제 그 요지를 간단히 잡아서 네가지 뜻으
로 풀이 하겠으니 수승한 힘이 있기 때문이며, 많이 듣기 때문이며, 위대한 사람을 낳기 때문이
며, 커다란 결과를 주기 때문이다.
수승한 힘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큼이 된다는 것은 모든 보살들이 능히 반야 바라밀을 배우기
때문에 불가사의하고 수승하며 신통한 힘이 있다는 말이니, 경에서 {하나의 털로써 삼천 대천 세
계의 국토 가운데 수미산를 들어서 다른 쪽으로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 여러 국토를 지나도록 던
지려 해도 중생들이 번거로워 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반야바라밀을 배웠기 때문이며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크다고 하는 것은 모든 보살들이 반야를 배우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의 모
든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말씀과 가르침인 벌써 말씀 하셨거나 앞으로 말씀하실 것들을 다 두루
듣는다는 말이다}한 것과 같으며, 경에서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미 말씀하셨고, 현제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지금 말씀 하고 계시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앞으로 하실 말씀으루 들
으려고 해서 듣고 나서는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또 남들도 이롭하는 것은 당연히 반야바라밀을
배웠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도 같으니,
논에서는 {보살에게 삼매가 있으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을 관찰하는 삼매라고 부른다. 이 삼
매에 들어가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을 뵙 그 설법을 듣는다}고 했다.

問過去未來 諸佛音聲 至現在故 菩薩得聞耶? 聲不至現 而三昧力 能聞已滅 未生音耶? 若彼音聲
至現在者 云何已滅 重生於現? 云何未生 先現於今? 若彼音聲 不至 今現 則彼音聲 已滅未生. 未生
已滅 卽是無聲 云何得聞於無聲耶?

질문;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의 말씀이 현제이 이르기 때문에 보살이 듣게 되는 것인가?
소리가 현제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삼매의 힘 때문에 능히 이미 사라졌거나 생기지도 않은 소리
를 듣게 되는가?
만약에 그소리가 현제에 도달한 것이라녀 어떻게 벌써 사라진 소리가 다시 현제에 생겼으며,
왜 미래에 생길 것이 지금 먼저 생기는가?
만약에 그 소리가 현제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이미 사라졌거나 생기지 않은 것이다.
생기지 않았거나 이미 사라진 것이라면 이는 소리가 없는 것이어니 어떻게 없는 소리를 듣겠는
가?

答彼過未音 雖不至今 而能得聞 三昧力故, 如障外色 雖物所隔 而能得見 天眼力故. 過未音聲 當
知亦爾. 雖時有隔 而能得聞 得聞曾有 當有之聲, 非聞已滅未生之無. 若彼過未 諸佛力故 聲至於今
而令聞者 凡夫二乘 皆得聽聞 非謂般若三昧之力.故此經言 {已說當說}. 當說卽 是當有之音 已說卽
是曾有之聲.

답; 그 과거와 미래의 소리가 비록 지금 도달하지 않았으나 은히 듣는 것은 삼매의 힘 때문이
니 밖의 색이 가려져서 비록 물질이 막고 있더라도 천안통의 힘 때문에 능히 볼수 있는 것과 같
다. 과거와 미래의 소리도 당연이 그렇게 알아야 한다.
비록 시간적으로 격리 되어 있지만 능히 듣는 것은 이미 있었던 소리와 앞으로 있을 소리를 듣
는 것이고 이미 사라졌거나 생기지 않아서 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그 과거와 미래 모든 부처님의 힘 때문에 소리가 현제에 도달하여서 듣게 된다면 평범
한 사람과 이승들도 다 들어야 할 것이므로 반야삼매의 힘 때문이라고 할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 {이미 말씀 하셨고 앞으로 하실 말씀}이라고 한 것이다.
앞으로 하실 말씀이라는 것은 앞으로 있을 소리이며, 이미 말씀하신 것은 알고있던 소리이다.

問菩薩現能聞於曾當 佛豈不能令聲至? 今若能令至 不離前難 重生逆理 不應理故

질문; 보살이 현제에 능히 과거와 미래의 것을 듣는다면 부처님께서 왜 소리를 현제에 이르도
록 하시지 않으셨겠는가? 지금 만약 능히 이르게 한신다면 앞에서의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이치를 거스르게 될것이니 이치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이다.

答誰言諸佛 不能令至! 但說聞至 非般若力. 當知諸佛法輪音聲 遍於三世 無所不至 能至所至 不可
得 故如華嚴經言 {譬如章文字 悉入一切數 所入無所入 法輪亦如是 如來轉法輪 三世無不至 所轉無
所轉 求之不可得}
雖去來音 至於今現 而非重生 亦非過理. 所以然者 佛知三世長遠之劫 卽是極促一念之頃 而不令
劫促 亦不令念長 是故 當知彼聲至今無重生逆理過失.
如彼經言 {無量無數劫 卽是一念頃 亦不令劫短 究竟刹那法}

답; 누가 모든 부처님들께서 능히 이르지 않게 한다고 했는가! 다만 소리가 이르러서 듣는다고
하면 반야의 힘이 아니다. 당연히 모든 부처님 법 바퀴 소리가 삼세에 두루하여서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도달한다거나 도달했다거나가 없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마치 문장과 글자들이 다
모든 수에 들어가서 들어간 것이 들어 갖다 함이 없는 것 같이 법의 바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여
래께서 법의 바퀴를 굴려서 삼세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어 굴리고도 굴렸다 함이 없어서 굴리고도
얻을 수가 없다}한 것과 같다.

且止乘論 還述本宗. 生大人故 名爲大者, 四種大人 皆從般若 而得生故.
如論說言 {一切世間中 十方三世諸佛 是第一大 次有菩薩酸支佛聲聞. 是四大人 皆由般若波羅蜜
生. 故名爲大}

그만 쓸데없는 논의는 그만 두고 다시 근본 종지를 논술 해보자.
큰 사람이 태어나기 때문에 이름이 큼이 된다고 하는 것은 네가지 큰 사람이 모두 반야로 부터
태어나기 때문이니 대지도론에서 {모든 세간에서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이 첫번째 크신 분이
되며 다음으로는 보살들과 벽지불들과 성문이 있다. 이 네 종류의 큰 사람들은 다 반야바라밀로
말미암아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이름이 큼이 된다}고 한 것과 같다.

與大果故 名之爲大者 能與一切衆生無邊無盡果故.
如論說言 {復次能與衆生大果報 無量無盡 常不變壞 所謂涅槃} 故名爲大, 餘五不能故不名大. 依
是四義 般若名大 六種釋中 是有財釋.

위대한 결과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부르기를 크다고 하는 것은 능히 모든 중생에게 끝이 없고
다함이 없는 결과를 주기 때문인데, 지도론에서 {다시 또 능히 중생들에게 커다란 과보를 주니,
헤아릴 수 없고 다함이 없으며 항상하여 변질되거나 무너지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
다}고 한 것과 같으므로 이름을 크다고 하고, 나머지 다섯가지 바라밀은 능히 (그러하지) 못하지
때문에 크다고 부르지 않는다.
이 네가지 의미에 의해서 반야를 크다고 부르는데 여섯가지 해석 가운데서 이것은 유재석이
다.

< 지혜 >

第二釋慧義者. 解了義是慧義 能了一切所知境界故, 無知義是慧義 有所知者 不知實相故, 破壞義
是慧義 壞一切法可言性相故, 不壞義是慧義 不壞假名 而證實相故, 遠離義是慧義 永離一切取著相
故, 不離義是慧義 證會一切諸法相故. 復次無離無不離義是般若義 於一切法 都無所離無所不離故,
無壞無不壞義是般若義 於一切法永無所壞無所不壞故, 無知無不知義是般若義 由得無所知無所不知
故, 無義無非義義是般若義 不得一切義 不得非義故, 如是等義 如論廣說.

두번째 지혜의 뜻.
① 분명히 안다는 뜻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능히 모든 아는 바 경계를 알기 때문이며,
② 앎이 없는 뜻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앎이 있는 사람은 실제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③ 파괴의 뜻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모든 법의 말로 할 수 있는 성질과 상태를 깨트리기 때문이
며,
④ 파괴할 수 없는 뜻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가정적 명제 파괴하지 않고 실제상태를 증명하기
때문이며,
⑤ 멀리 벗어났다는 뜻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영원히 모든 집착하여 달라 붙은 상태에서 벗어났
기 때문이며,
⑥ 벗어나지 않았다는 의미 이것이 지혜의 뜻이니 모든 여러 법들의 상태를 증명하여 알기 때문
이다.
다시 또 ⑦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벗어나지 않음도 없다는 의미 이것이 반야의 뜻이기 때문이니
모든 법에서 모두 벗어난 것이 없으며 벗어나지 않는 것도 없기 때문이며,
⑧ 파괴함이 없으며 파괴하지 못함도 없는 의미 이것이 반야의 뜻이니 모든 법에서 영원히 파
괴한 것이 없고 파괴치 않은 것도 없기 때문이며,
⑨ 아는 것이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없지도 않는 의미 이것이 반야의 뜻이니 아는 것이 없
으며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얻었음으로 말미았기 때문이며,
⑩ 옳음이 없으며 옳지 않음도 없는 의미 이것이 반야의 뜻이니 모든 법에서 옳음을 얻을 수
없고 옳지 않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러한 의미들은 대지도론에서 널리 설명 한 것과 같
다.

如是十種般若之義 若約境智 非一之義 觀照名慧 是持業釋, 實相名慧 是依主釋. 若依能所 無二之
門 亦一實相般若 亦持業釋.

이와 같은 열가지 반야의 뜻은 만약에 경계와 지혜에 의하면 한가지 뜻이 아니다. 관조반야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 이것은 지업석이며, 실상반야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 이것은 의주석이다.
주체와 객체 둘이 없음에 의한는 것도 또한 실상 반야이니 또한 지업석이다.

問若彼般若之名 此土譯言慧者 何故論說 此二不稱 如下文云 {不亦稱者 稱名智慧 般若之實相 甚
深極重 智慧輕薄. 是故不能稱, 又般若多智 慧少故 不能稱. 又般若利益處廣 未成能與世間果報 成
已與道果報, 又究竟盡知故 名稱般若波羅蜜 無能稱知 若常若無常 若實若虛 若有若無 如是等 不可
稱義應知}

질문; 만약에 반야의 이름을 중국 말로 번역한 말이 혜라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지도론에서 말
하기를 이 두가지로 부르지 않고 아래 글에서와 같이 {또한 이름을 지혜라고 하지 않는 것은 반
야의 실제 상태는 매우 깊고 매우 무거우나 지혜는 경박하다. 이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으
며, 또 반야에는 지는 많고 혜는 적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으며, 또 반야는 이익되는 곳이
넓어서 능히 세간의 과보로는 이룰 수 없으며 진리의 과보로 이룰 수 있으며, 또 완전하게 다 알
기 때문에 이름을 반야라고 하며 능히 안다고 부르지 않는다 .
만약 항상하다거나 항상하지 않다거나 진실하다거나 헛되다거나 존재한다거나 존재치 않는다거
나 이와 같은 등의 뜻으로는 부를수 없다고 알아야 한다}고 했는가?

答此論文意 正明智慧之名不稱般若之體 非謂般若之稱 不當智慧之名 何者文稱名智慧者 是擧能稱
名爲智慧. 般若甚深極重者 是顯般若之體 離言絶慮. 智慧輕薄者 是明般若之名 不離言慮. 是故此
名 不能稱體. 又般若多智慧少者 般若之體 無量無邊 所知所證 無限量故, 智慧之名 有限有量, 能稱
能知 唯一名故. 是故少名 不稱多體.

답; 이 논문의 뜻은 바로 지혜라는 말로 반야의 본질을 제대로 나타내 못한다고 밝힌 것이지
반야라는 이름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글에서 지혜라고
부르는 것은 이를 의미하고 있음을 들어서 이름을 지혜라 하기도 한다.
반야를 매우 깊고 무겁다고 한 것 이것은 반야의 본질이 언어의 범주를 벗어났고 사고의 틀을
깨고 있음을 나타낸다. 지혜를 경박하다고 한 것 이는 반야라는 이름이 언어의 범주와 사고의 틀
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으로 능히 이 말은 (반야의) 체를 말하지 못한다.
또 반야에는 지는 많으나 혜는 적다고 한것은 반야의 본질이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어서 아는
것과 증득한 것이 한량이 없기 때문이며, 지혜라는 말은 한계가 있고 크기가 있어서 부를 수 있
고,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적다 하고 많은 본질을 말하지 못한다.

次言般若利益處廣者 是明般若之體 利益處廣 智慧之名 所不能詮. 是故言不可稱.
次言究竟盡知名稱者 是明智慧之體 名稱於盡知. 而般若體 都無所知 謂常無常 虛實有無 如是一切
不可得故. 是故言不可稱. 又釋盡知體相故 得以名稱其體相 而般若相無能知者 常無常等不可得故 由
是道理故 不可稱 以是四義釋 不可稱 是顯名體不得相稱也.

다음에 반야는 이익되는 곳이 넓다고 한것 이 것은 반야의 본질이 이익되는 곳이 광대한데 지
혜라는 말로는 (그것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혜라고는 하지 않
는 다는 것이다.
다음에 마침내 완전하게 다 아는 것이기 때문에 반야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 이것은 지혜의 본
질로 다아는 것을 부른다고 설명 한것이다. 그러나 반야의 본질은 모두 알았다할 것이 없으니 항
상하거나 항상하지 않거나 헛되거나 진실하거나 존재하거나 존재치 않거나 하는 이와 같은 모두
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혜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 아는 본질의 상태를 풀이하기 때문에 그 본질의 상태를 말하지만 반야의 상태에서는 능
히 아는 것이 없으니 항상하다거나 항상치 않다거나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렇게 부르지 않으며, 이러한 네가지 뜻 풀이로써 그렇게 부르지 않으니 이는 이름과 본
질이 서로 맞지 않음을 드러 낸 것이다.

問般若之體 無所知故 盡知之名 不得稱者, 則如前釋言 {無知義是慧義} 是名可稱般若之體?

질문; 만약 반야의 본질로는 알았다 할 것이 없기 때문에 다안다고 불러서는 맞지 않는다고 한
다면 앞의 해석에서 {앎이 없는 의미가 이 지혜의 뜻다}한 것과 같을 것이니 이름으로도 반야의
본질을 부를 수 있지 않은가?

答無知之名 亦不稱體. 直是遮詮 不能表示故 但遮於知 非表於無故.

답; 앎이 없다는 말로도 또한 본질을 나타내지 못한다. 바로 이는 부정적 표현 기법으로써 제
대로 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만 앎의 대상성과 작위성을 부정하고 있을 뿐 없음을 나타내
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問若爾甚深極重之言 是擧其體故 能表示, 能表示故 非不可稱. 若甚深言 亦不稱者 何謂此言 是擧
體耶?

만약 그렇다면 매우 깊다는매우 무겁다는 말, 이것으로 능히 그 본질을 들수 있기 때문에 (그
말로) 표시 할 수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표시랗수 있기 때문에 부를 수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에 매우 깊다는 말도 또한 맞지 않다면 어떻게 불러야 이말 이것이 본질을 들겠는가?

答甚深等言亦遮詮 但遮淺薄. 不得深故 是故此言 亦不稱體. 然論主意 向般若體而發此言. 就般若
名 說輕薄言 爲顯是意. 故言擧體 非謂甚深之言 能稱般若之體也.

답; 매우 깊다는 말도 또한 부정적 표현기법이다.
단지 천박한 표현을 막은 것이니 깊은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도 또한 본
질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논주의 뜻은 반야의 본질에 입각해서 이 말을 쓴 것이다.
반야라는 이름을 기준으로 경박한 말이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들었다고 하고, 매우 깊다는 말이 능히 반야의 본질에 맞는다고 하지 않았다.

問若如是者 前以十義 釋般若名 皆不稱實般若之體 亦不稱於般若之業, 云何而言是持業釋?

질문; 만약 이와 같다면 열의 열가지 의미로써 반야라는 이름을 해석 해도 다 진실로 반야의
본질에 맞지 않을 것미며 또한 반야의 업에 맞지도 않을 것이니, 어떻게 이것을 지업것이라고 하
는가?

答般若非然故 不當諸名 而非不然故 能當諸名. 又持業釋 且是假說 非謂實然故 不相違也.

답; 반야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이름들이 맞지 않지만 그렇지 않지도 않기 때문에 모든
이름들이 해당되기도 한다. 또 지업석도 또한 가설으로 실제로 그렇다고 한 것은 아니므로 서로
모순 되지는 않는다.

< 저 언덕 >

第三釋到彼岸義者 到彼岸義乃有衆多 依此經論 略出四義
一者從生死此岸到 到涅槃彼岸故 名到彼岸 如論釋言 {三乘之人 以是般若到彼岸涅槃 滅一切憂苦}
以是義故 名波羅蜜.
二者從有相此岸到 無相彼岸故 名到彼岸 如論釋言 {是般若波羅蜜等 以色心二法 推求破壞 不得堅
實} 以是義故 名波羅蜜.
三者從未滿智此岸 到究竟智彼岸故 名到彼岸, 如論釋言 {彼岸 名盡一切智慧邊智名不可破壞相.
不可破壞相者 卽是如法性實際. 以其實故 不可破壞} 是三事 攝入般若中故 名波羅蜜.
四者從有此彼岸到 無彼此岸 無所到故 名到彼岸 如下文言 {此彼岸不度故 名般若波羅蜜} 金鼓經
云 {生死涅槃 皆妄見 能度無餘故 名波羅蜜}

세번째 저 언덕을 풀이 한다.
저 언덕이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있으나 대반야경과 지도론에 의해서 간략히 네가지 뜻을 드러
내겠다.
첫째; 나고 죽는 이 언덕으로 부터 열반의 저언덕에 도달 하므로 저언덕이라고 부르니 지도론
의 해석에서 {삼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반야의 이 언덕 열반에 도달하므로써 모든 근심과 괴로
움들을 없앤다}고 한 것과 같이 이러한 뜻으로써 바라밀이라고 하며,
둘째; 상태가 있는 이 언덕에서 상태가 없는 저 언덕에 도달 하기 때문에 지도론의 해석에서
{이 반야바라밀등은 물질과 마음 두가지 법으로써 미루어 구하면 부서져서 견실함을 얻을 수 없
다}고 한 것과 같이 이러한 뜻으로써 바라밀이라고 하며,
세번째; 가득 차지 않은 지혜의 이 언덕에서 최고의 지혜인 저 언덕에 도달 하기 때문에 저 언
덕이라고 하니 지도론의 해석에서 {저 언덕은 모든 지혜와 변지를 다했다고 부르는 것이며, 파괴
될 수 없는 상태를 부르는 것이다. 파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것은 법 본질의 실제와 같은
것이다. 그 실다움 적용되었기에 파괴될수 없다}고 한 것과 같이 이러한 세가지 사실이 반야에
포함되 있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한다.
네번째 존재의 이 언덕에서 존재의 실체가 없는 저 언덕에 도달해서 도달 한 곳이 없기 때문에
저 언덕에 도달 했다고 하니 아래 글에서 {이 언덕과 저 언덕을 건너가지 못하기 때문에 바라밀
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으니 금고경에서는 {나고 죽음과 열반은 모두 헛된 견해이나 능히 남
김없이 건넜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此四義中 第一第三 因中說果 是有財釋 第二第四 說其已到 是持業釋也.
若以此大慧度之名目能詮者 是依主釋也.

이 네가지 의미 가운데서 첫째와 세째는 원인 가운데 경과를 설명 한 것이니 이는 유재석이며
둘째와 네째는 그 이미 도달했음을 말한 것이니 이는 지업석이다.
만약에 여기에서 대혜도라는 이름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면 이는 의주석이다.

< 경의 연기 >

第四明說經因緣者 如論說云 {問曰佛以何因緣故 說摩訶般若波羅蜜經 諸佛之法 不以無事 及小因
緣 而自發言 譬如[須彌山王 不以無事 及小因緣 而動] 今有 何等大因緣故 佛說是經? 答中廣出衆多
因緣 今撮其要 略出六因. 一爲廣示菩薩行故, 二爲不違諸天請故, 三爲欲斷諸人疑故, 四爲欲治衆生
病故, 五爲欲說第一義諦故, 六爲欲伏諸論議師故}

네번째 경전을 설하게 되신 인연이라는 것은 지도론에서 말한 {질문하자면 부처님께서 무슨 인
연으로써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씀 하셨는가?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아무런 일 없거나 사소
한 조건 때문에 스스로 말씀 하시지 않으셨으니 비유하자면 [수미산왕 은 아무일도 없이 사소한
일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어떠한 큰 이유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 하셨는가?
그 가운데는 널리 많은 이유들이 나오지만 이제 그 요점만을 집어서 간략히 여섯가지 이유를
말하겠다. 첫째는 널리 보살들의 실천을 보이시기 위한 때문이며, 둘째는 모든 하늘들의 부탁을
저버리려 않으시기 위한 까닭이며, 세째는 모든 사람들의 의심을 끊으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며,
네째는 중생의 병을 다스리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가장 훌륭한 진리를 말씀 하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며, 여섯째는 모든 외도 논사들을 항복 받으시려고 하시기 때문이다}고 한 것과 같
다.

初爲廣示菩薩行者 如論說言 {佛於三藏中廣引種種譬喩 爲聲聞說法 而不說菩薩道 唯中阿含 本業
經中 佛記彌勒 當得作佛 亦不說種種菩薩行 今欲爲彌勒等 廣說諸菩薩行故 說是經}

먼저 널리 보살의 실천을 보이시기 위한 것은 지도론에서 {부처님께서는 삼장 가운데 널리 갖
갖지 비유를 인용하여서 성문들을 위하여 진리를 말씀 하셨으나 보살들을 위해서는 말씀 하시지
않으셨으나 오직 중아함경과 본업경에서 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 하셨으나 또한 갖가지 보살의 실천은 말씀 하시지 않으셨고 이제서야 미륵보살등을 위하여
널리 보살의 실천들을 말씀하시려는 까닭으로 이경을 말씀 하셨다}고 하신 것과 같으며,
二爲不違諸天請者 論說言 {爾時菩薩菩提樹下 降魔衆已 得無上覺. 是時三千大千世界主梵天王名
尸棄 及色界諸天等 釋提桓因 及欲界諸天等 皆詣佛所 請轉法輪 亦念本願 及大慈悲故 受請說法 諸
法甚深者 般若波羅蜜是. 以是故 說此經}

두번째 모든 하늘들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으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지도론에서 {이때에 보살
께서 보리수 하래서 마군의 무리에게 항복을 받고 나서 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에 삼천 대
천세계의 주인인 범천왕은 시기라 불리는 이와색계천의 모든 왕들과 석제 환인과 욕계천의 여러
하늘등이 모두 부처님 계신 곳에 와서 법륜을 굴리시기를 부탁 드렸고 또한 본래의 서원를 생각
하시고 큰 자비 때문에 법을 말씀 해달하는 부탁을 받으시고 모든 법에서 가장 깊은 것이 반야바
라밀 이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경을 말씀 하셨다}고 했다.

三爲欲斷諸人疑者 論云 {有人疑佛 不得一切智 所以者何? 諸法無量無數 云何一人能知一切法? 佛
住般若波羅蜜實相 淸淨如虛空, 無量無數法中 自發誠言 [我是一切智人 欲斷一切衆生疑] 以是故 說
此經}

세번째 모든 사람의 의심을 끊어주기 위한 것에 대하여서 지도론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서 일체종지를 얻지 못하셨다고 의심하였으니 이유가 무었인가? 모든 법은 될 수 없으며 헤아릴
수 없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모든 법을 알수 있겠는가?하니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의 진실한 상
태 맑고 깨끗하여서 허공과 같이 머르시다가 될수 없으며 헤아릴수 없는 가르침 가운데서 스스
로 진실한 말씀을 하시기를 [나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어서 모든 중생들의 의심을 끊어주려고
한다]하셨으니 이 때문에 이설을 설하셨다}고 했다.

案云此中發誠言者 謂不妄語 有長舌故 喩如世共知有長舌者, 如世典云 {舌長覆鼻必不妄語}. 依此
比量 證成道理 證知如來所言非妄. 是故如來有一切智 以是斷除衆生疑也.

가만히 생각 해보니 진실한 말씀을 한다는 것은 긴 혀가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세간에서
모두 혀 긴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과 같으며, 세간의 서적에서 {혀가 길어서 코를 덮으면
반드시 헛 소리를 하지 않는다}한 것과 같다. 이러한 비교 분석에 의해서 도리를 증명하여 여
래께서 말씀하신 바가 헛되지 않은 줄 증명하여 안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에게는 모든 종류의
지혜가 있고 이로써 모든 중생들의 의심을 끊어서 없앤다.

四爲欲治衆生病者 論云 {一切衆生 爲結使病之所煩惱 無始已來 無人能治 常爲外道惡師所誤 我今
出世 爲大醫王 集諸法藥 汝等當服 以是故 說此經}

네번째 중생의 병을 다스리기 위하여는 지도론에서 {모든 중생이 얽매고 부리 는 병으로 번뇌
하니 무시이래로 사람으로써 능히 다스린 사람이 없어서 항상 외도와 그릇된 스승들에 의해서 잘
못되므로 내가 이제 세상에 나아가서 위대한 의사가 되어서 모든 진리의 약들을 모았으니 너희들
에게 앞으로 먹일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경을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五爲欲說第一義諦者 論云 {佛欲說第一義悉檀相故 說是般若波羅蜜經 有四種悉檀何者爲四 一者世
界悉檀, 二者各各爲人悉檀, 三者對治悉檀, 四者第一義悉檀, 此四悉檀 攝一切十二部經八萬四千法
藏 皆是實不相違背.

다섯번째 가장 훌륭고 옳은 진리를 설명하시려고 하신것은 지도론에서는 {부처님께서 가장 훌
륭하고 옳은 진리의 상태를 말씀 하시려고하시기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경을 말씀 하셨으니 네가
지 종류의 범주가 있다. 어떤 것들이 네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세계를 기준으로한 범주이며, 둘
째는 개별적으로 사람을 위한 범주이며, 세째는 상대하여 다스리는 범주이며, 네째는 본질에 관
한 범주이다. 이 네가지 범주는 모든 여두 부분으로 구성된 경전의 팔만 사천진리의 바탕을 포함
하고 있어서 다 진실하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 세계라는 범주 >

世界悉檀者 有法從緣和合故 有無別性. 如車轅輻軸輞和合故, 有無別事 人亦如是五衆和合故 有無
別人也.

세계라는 범주는 법이 화합으로부터 존재하므로 특별한 본질이 있지 않다. 수레라 하는 것을
바퀴 통과 바퀴살과 축과 테등이 화합한 까닭인 것과 같이, 별다른 사실 있지 않고 사람도 또한
이와 같이 다섯가지 무리가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별달리 사람이라 할것이 있지 않다.

問曰如經說言 [一人出世多人蒙度] 又佛二夜經中說 [佛從得道夜 至涅槃夜 是二夜中間 所說經敎
一切皆實 而不顚倒] 若實無人者 云何說人等?

질문; 경에서 [한사람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제거 한다}고 한것과 같고
또한 이야경에서{부처가 도를 얻은 반으로 부터 열반에 드는 밤 까지 니 두 밤 사이에 말한 경전
의 가르침은 모두 다 진실하여서 모순됨이 없다}고 했는데 만약에 진실로 사람이 없다면 왜 사람
들이라는 말을 하셨겠는가?

答曰人等世界故有 第一義故無, 如如法性 實際世界故無 第一義故有. 人等亦如是第一義故無 世界
故有. 所以者何 五衆因緣有故有人 非如一人第二頭第三手無其因緣而有假名. 如是等相名世界悉檀.
답; 사람등은 세계를 기준으로는 있고, ㅂ제일의체를 기눙으로는 없으며, 여여한 법의 본질은
실제세계를 기준으로는 없으며 제일의제를 기준으로는 있다. 사람등도 또한 이와 같아서 제일의
제를 기준으로는 없으며 세계를 기준으로는 있다. 왜냐하면 다섯 무리의 원인과 조건이 있기 때
문에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에게 두번째의 머리와 세번째의 팔은 그 원인과 조건이 없이 가정적
이름으로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
이와 같은 등의 상태와 개념이 세계라는 범주이다.

< 사람을 위하는 범주 >

云何各各爲人悉檀 觀人心行 而爲說法 於一事中 或聽 或不聽 如經中說 [雜報業故 雜生世間 得雜
觸 得雜受]. 又餘經說 [無人得觸 無人得受 前爲斷見人 後爲常見人]. 如是等相名爲各各爲人悉檀.

무엇을 개별적으로 사람을 위하는 범주라고 하는 가?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를 위
하여 법을 설한다.
한가지 사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못하하니 경에서 [잡된 과보와 업
때문에 잡되이 세간에 태어나고 잡된 접촉을 하고 잡되이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것과 같으며, 또
다른 경전에서 [어떤 사람은 접촉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니 앞의 경우는 허무론
이며 뒤의 경우는 존재론이다]고 했다. 이러한 등의 상태와 개념이 개별적으로 사람들을 위한 범
주가 된다.

< 상대하여 다스리는 범주 >

云何爲對治悉檀 有法對治卽有 實性則無 如[不淨觀 欲病中 是善對治 於瞋病中 不名爲善 非對治
法 如是慈心 於瞋是善 於欲非善] 如是等相名爲對治.

어떤 것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범주라고 하는가? 어떤 법은 상대하여서 다스리자면 있지만 진실
한 본질로는 없으니, [부정하다고 관찰하는 것은 애욕이라는 병에 대해서는 잘 상대하여서 다스
리지만 성내는 병에 대해서는 좋다고 할수가 없으니 상대하여 다스리는 방법이 되지 않으며 이
와 같이 자비심은 성냄에 대해서는 좋으나 애욕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것]과 같다. 이러한 등의
상태와 개념을 상대하여 다스리는 범주라고 한다.

< 진리의 범주 >

云何名第一義悉檀 一切法性 一切論議 一切是非 一一可破, 諸佛酸支佛阿羅漢所行眞實法 不可破
不可壞. 且於三悉檀中 所不通 此中皆通 乃至廣說.

어떤 것을 진리의 범주라고 하는가? 모든 것들의 본질과 모든 논의들과 모든 옳다거나 그르다
거나 하는 것들은 낱낱이 깨부술 수가 있으나, 부처님과 벽지불과 아라한들이 실천 하는 진실한
가르침들은 부술 수가 없고 무너뜨릴수도 없다. 또한 이상의 세가지 범주에서는 서로 모순 되는
것들이 이 범주에서는 모두 통한다}고 널리 설명 했다.

< 각 범주의 상호관계 >

案云總而言之 一切敎門 不出二宗 所謂二諦. 但於世諦 有多差別 故於其中 分出二種
此二之餘 皆屬初一. 中二悉檀 有何界者? 通而言之 爲人悉檀 無非對治 對治悉檀 亦是爲人. 然於
一事中 有無異說 是由人界故 名爲人 不由病異 以授別藥 唯一事故 不名對治.
若說別法 以治異病 病別藥異故 名對治 非於一事中 爲人異說 故於中 不名爲人 除此二種 說世俗事
皆是世界悉檀所攝.

가만히 그것들을 생각해보니 모든 가르침의 영역들이 두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두가
지 범주라고 하는 것이다. 오직 세속적 범주는 많은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운데를 두가지로
나눈다.
이 두가지 말고 나머지는 모두 처음의 하나에 소속된다. 그 가운데서 두가지 범주는 어떤 한계
가 있는가? 개괄적으로 그것들을 말하자면 사람을 위한다는 범주는 상대를 다스리지 않음이 없으
며 상대를 다스린다는 범주도 또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에 대해서 다른 설명
할 수 없고 이것은 사람이라는 영역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 범주’라고 하며, 병의
다름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약을 주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한가지 사실 때문에 상대하여서 다스린다
고 부르지 않는다.
만약에 특별한 가르침을 말해서 병을 상대하여서 다스린다면 병이 다름으로 약이 다르기 때문
에 상대하여 다스린다고 부르니, (이) 한가지 사실에서 사람을 위해서 달리 설한것이라 하지 않
는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니 이 두가지를 제외하고 세속적
사실을 말하는 것은 모두 이 세속적 범주에 포함된다.

問諸佛說法 無不爲人 無非對治 衆生病者 云何初後二種悉檀 不名爲人 不名對治

질문; 모든 부처님들께서 진리를 말씀 하심이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님이 없고 중생의 병을 상대
하여서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는데, 왜 처음과 마지막을 두가지 범주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하
지 않고 상대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答通相而言 有如來問 但爲直示世俗假名 又爲直顯勝義實相. 如是二種 由諦故異 不由人異 不由病
別. 是故別立初後二也.

대답; 개괄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이 여래에게 물으면 다만 세속의 가정적 개념으로 그대로 드러
내 보이시며, 또한 진리의 실제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하셨다. 이와 같은 두가지는 진리를
말미암은 까닭으로 다른 것이지 사람의 다름으로 인 한 것이아니며 병의 다름으로 인 한 것도 아
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따로 처음과 마지막의 두가지를 세웠다.

問若說人等世諦故有 非如一人第二頭等者 蘊界處中 何法所攝? 又若有人 卽是有我 何異犢子部所
立耶?

질문; 사람등이 세속전 진리 때문에 있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두번째 머리 등과 같지 않은것
은 5온 12처 18계 가운데서 어느 곳에 포함 되는가? 또 만약에 사람이 있다면 이는 객체적 실
체가 있다는 말이니 어떳게 독자부에 의해 성립 된 이론과 다른가?

答薩婆多宗 說無有人 如第二頭 蘊界處法 所不攝故.
犢子部說 實有人法 不卽不離 雖蘊界處之所不攝 而在第五不可說藏.
今大乘說因緣故有 而無別性. 色心等法 皆亦如是. 若實有人 是增益邊, 若都無人 是損減邊 大乘
不爾. 從緣有故 離損減邊, 無別性故 離增益邊.
蘊界處中 何法攝者? 心不相應 行蘊中攝, 二十四中 衆生同分攝. 當知法界法處所攝.

답; 살바다종에서는 사람이 있지 않다. 두번째 머리 같이 5온 12처 18계에 포함 되지 않기 때문
이다라 했으며,
독자부에서는 실로 사람과 법이 있어서 밀착하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으며 비록 5온과 12처와
18계라는 곳에 포함 되지 않으나 다섯번째 설명할 수 없는 근본에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는 대승의 인연법칙을 설명하기 때문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독립적인 특별한 본질은 없
다. 물질과 마음등의 법칙도 다 또한 이와 같다.
만약 실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자꾸 늘어만 가는 쪽이고 만약에 사람이 없다면 자꾸 줄어드는
쪽이다.
대승은 그렇지 않다. 조건으로부터 존재가 있으므로 줄어드는 쪽에서 벗어나며 특별한 본질이
있는 것이 안니므로 늘기만 하는 쪽에서도 벗어난다.
5온과 12처와 18계 가운데서 어느 법에 해당 되는가? 마음은 서로 부합되지 않는 행온 가운데
포함 되며 스물 네가지 불상응 행법가운데 중생들의 공통적 부분에 포함 된다. 당연히 법계와 법
처에 포한 되는 것이다.

且止乘論 還述本宗. 六爲欲伏諸論議師者 論云 {欲令長爪梵志等 大論議師 於佛法中 生信故 說
是經. 彼若不聞般若氣分離絶四句, 第一義法 小信尙不得 何況得道果 乃至廣說} 長爪梵志 論議因緣
此中應廣說, 其餘諸緣 廣如論說. 說經因緣 略述如是.

그만 쓸데없는 논의는 그치고 근본 취지를 말해보자.
여섯번째 모든 외도논사들의 항복을 받기 위한 것이다라는 것은 지도론에서 {장조와 범지등 위
대한 논사들을 불법 가운데서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 이 말한다. 만약에 반야의 기와 위치가
네 구절의 명제를 끊어서 벗어났음을 듣지 않는다면, 가장 수승한 진리는 어정쩡한 믿음으로는
얻을 수가 없으니 어찌 하물며 진리의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널리 자세히 설명했다}고 했
다.
장조와 범지와 논의한 원인과 조건들은 여기에서 자세하게 설명 했으며 그 나머지 여러가지 인
연도 자세히 논에서 설명 한 것과 같다.
경을 말씀하신 원인과 조건을 간단히 이와 같이 말한다.

< 가르침의 갈래 >

次第五判敎者 分判佛敎 諸說不同. 今且略出二說 平章是非 有人說言 {一化敎門 不出二途 一者
頓敎 二者漸敎. 漸敎之內 有其五時 一四諦敎 二無相敎 三抑揚敎 四一乘敎 五常住敎 從淺至深 漸
次而說 今此經等 諸般若敎 在第二時 名無相敎}

다음 다섯번째 가르침의 갈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석하여 가린 학설은 여러 이론이 같지 않
다. 또 이제 간단하게 두 가지 학설을 인용해서 내용의 옳고 그름 을 평가하겠다.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한평생 가르침은 두가지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한꺼번에 이루
게 하는 가르침이고 둘째는 차차 이루게 하는 가르침이다. 차차 이루게 하는 가르침 속에는 가
다섯가지 시간적 구분이 있다. 첫째는 네가지 명제로 가르치신 때이며, 둘째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신 때며, 세번째는 억제하도록 하기도하고 권장하기도 하시며 가르치신 때며, 넷
째는 한가지 통합적 가르침으로 가르치신 때며, 다섯째는 항상 머무름을 가르친 때이니 엷은 가
르침으로부터 깊은 가르침에 이르도록 차차 말씀하셨으며 지금 이 경전등 모든 반야의 가르침은
두번째 두번째 가르치신 때에 해당되어서 상태가 없는 가르침이라고 부른다}고했다.

或有說者 出世敎門 不過三品. 所謂經說 三種法輪 如解深密經言 {勝義生菩薩 白言世尊 初於一時
在波羅泥斯仙人墮處施鹿林中 唯爲發趣聲聞乘者 以四諦相 轉正法輪 雖是甚奇 甚爲希有 而是法輪
有上有容 是未了義, 是諸諍論 安足處所. 世尊在昔 第二時中 唯爲發趣修大乘者 依一切法 空無自性
無生無滅 本來寂靜 自性涅槃 以隱密相 轉正法輪 而是法輪 亦是有上 是未了義, 是諸諍論 安足處
所. 世尊 於今第三時中 普爲發趣一切乘者 依一切法 空無自性 無生無滅 本來寂靜 自性涅槃 無自性
性 以顯了相 轉正法輪 無上無容 是其了義 非諸諍論 安足處所 今此大品 幷諸般若 皆是第二法輪所
攝}

또 어떤 사람은 {세간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범주는 세가지를 넘지 않는다. 경에서 설한 세가지
법의 수레바퀴를 말하는 것이니 해심밀경에서 말한 [승의생 보살이 스스로 부처님께 말씀 드리기
를 처음 한 때에 바라니사 선인이 떨어져서 머물러 있던 사슴을 놓아준 숲 가운데서는 오직 뜻을
낸 성문들을 위해서 네가지 명제의 상태로써 바른 가르침의 바퀴를 굴려서 비록 이 것이 매우 특
이하고, 매우 드문 것이지만 이 법의 수레 바퀴는 더 높은 법이 있고 또한 모양이 잇는 것이므
로 이는 완전한 뜻이 아니며 이는 여러 가지 논쟁이 발붙일 장소입니다. 세존께서 옛날 두번째
시절에는 오직 대승을 수행하려고 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가르침의 텅비어서 본래의 바탕이 없
고 생김이 없고 사라짐도 없는 본래의 고요하고 고요한 본래 바탕인 열반에 의해서 은근히 배어
나오는 상태로써 바른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으나 이 법의 수레바퀴도 또한 더 높은 법이 있어
서 완전한 뜻이 아니며 이것도 모든 논쟁들이 발붙일 곳입니다. 세존께서 이제 세째 시절에 널리
모든 가르침을 수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가르침의 텅비어서 본래의 바탕이 없고 생
기기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본래 고요하고 고요한 본래 바탕의 열반의 본래 바탕이 없는 성질
에 의해서 완전한 상태를 나타냄으로써 바른 진리의 바퀴를 굴리시니 더 이상 위가 없으며 모양
이 없습니다. 이는 완전한 뜻이어서 여러 가지 논쟁들이 발붙일 곳이 아닙니다] 했으니 지금 이
대품반야경과 아울러 모든 반야경들은 모두 두번째 진리의 수레바퀴에 포함된다}고했다.

問是二師說 何者爲實

질문; 두 스님의 말에서 어떤 것이 옳은가?

答二種敎門 三種法輪 是就一途 亦有道理 然其判 此大品經等 皆屬第二時攝. 第二法輪者 理必不
然 違經論故. 故此論釋 畢定品言 {須菩提聞 法華經說 [若於佛所 作小功德 乃至戱 一稱南無佛
漸漸必當作佛]} 又聞阿 跋致品中 {有退不退} 如法華經中. 畢定 餘經說 {有退有不退. 是故 今問
爲畢定 爲不畢定 乃至廣說} 以是驗知 說是經時 在法華後 卽示第二時者 不應道理也.

답; 두가지 가르침의 구분과 세가지 진리의 수레바퀴 이것은 한가지 길을 기준으로는 또한 이
유가 있다. 그러나 그 분석들에서는 이 대품반야경등을 다 두번째 가르침의 시기에 포함했다.
(그러나) 두번째 시기라 하나 이론상으로는 반드시 그렇다 할 수만도 없으니 반야경과 지도론
에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론에서는 필정품의 {수보리가 법화경의 [만약에 부처님 계신 곳에서 아주 작은 공
덕을 짓거나 재미 삼아서 한번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면 차차 반드시 미래에 부처가 될 것이다]
고하신 말씀을 들은 것}과 또한 아비발치품에서 {물러나고 물러나지 않음에 대해서 들었다는 것
은 법화경에서와 같은데 필정품에서는 나머지 경에도 {물러남이 있고 물러나지 않음이 있다}고했
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금 질문은 정할 수 있는가 정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된다며 자세히 설명했
다} 이로써 검토해 보면 이 경전을 말씀하실 때는 법화경을 말씀하신 다음이니 {두 번째시기에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問若判此經 在法華後者 是說云何通如仁王經言 {時大衆各相謂言 大覺世尊前已 爲我等大衆 二
十九年說摩訶般若 金剛般若 天王問般若 光讚般若波羅蜜. 今日如來 放大光明 斯作何事}

질문; 만약에 이경을 법화경이 있은 다음이라고 분석한다면 이 말이 어떻게 인왕경에서 {이 때
에 대중이 각각 서로 말하기를 대각 세존께서 앞에서 이미 저희들 대중을 위해서 29년간 마하반
야와 금강반야와 천왕이 질문한 반야와 광찬 반야바라밀을 말씀하시고도 오늘 여래께서 대광명을
놓으시니 어떠한 일을 하시려 하십니까}라고 한 것 같은 말에 어떻게 통하겠는가?

答摩訶般若 非一衆多. 有在前說 有在後說 如論說言 {此經二萬二千偈 大般若十萬偈 若龍王宮 阿
修羅宮 天宮中者 千億萬偈 乃至廣說} 以是義故 不相違也.

답; 마하반야는 한가지가 아니고 많다. 앞에서 말한 것도 있고 뒤에서 말한 것도 있으니 지도
론에서 {이 경은 이만 이천 게송이며, 대반야경은 십만 게송이니 만약 용의 궁전과 아수라의 궁
전과 하늘의 궁전의 것은 천만 게송이라고 널리 설명한 것}과 같다. 이러한 뜻으로써 모순되지
않는다.

又此論云 {復次有二種說法 一者諍處 二者無諍處. 諍處者 如餘經 [今欲明無諍處故 說是摩訶般若
波羅蜜經]}. 以此證知 今此經者 同於第三顯了法輪 非諸諍論 安足處故. 而判此經等 示第二法輪 是
卽此經 爲諍論處, 不應謂論 {說是無諍}.

또 이 지도론에서 {다시 또 두가지 설법이 있다. 첫째는 논쟁하는 곳이며, 둘째는 논쟁하지 않
는 곳이다. 논쟁하는 곳이라는 것은 다른 경에서 [지금 논쟁하지 않는 곳을 밝히려고 하지 때문
에 이 마하반야바라밀경을 말한다]}고했다.
이로써 증명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경은 세번째 완전한 진리의 수레바퀴를 나타내 것
과 같으니 모든 논쟁들이 발붙일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을 분석해서 두번째 법의 수레 바퀴를 보인다고 하면, 이는 이 경이 쟁론하는 장소가
되어서 지도론에서 {이 경전에 논쟁할 곳이 없다}고 말한 것이 옳지 않다.

又此經言 {欲求三乘菩提 當學般若波羅蜜}, 又言 {波若波羅蜜中 雖無法可得 而有三乘之敎} 乃至
廣說, 如解深密經中 亦言 {一切聲聞獨覺菩薩 皆是一妙淸淨道} 當知此經 同彼第三爲發趣一切乘者
以顯了相 轉正法輪 而彼第二法輪中 言唯爲發趣修大乘者 何得以此屬彼第二?

또한 이 경에서는 {삼승의 진리를 구하려면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했으며, 또 {반
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비록, 법을 얻을 수가 없지만 삼승의 가르침은 있다}고 하고 자세하게 설명
했으며, 해심밀경에서도 또한 {모든 성문들과 독각들과 보살들은 다 한가지 미묘하고 맑고 깨끗
한 진리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경이 세번째, 모든 가르침을 배우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분명한 상태를 드
러냄으로써 바른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고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번째 진리의 수레바퀴는
오직 대승만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어떻게 이 경전이 그 두번째 시기에 속하겠는
가?

< 열반의 본질 >

又此經 如化品言 {若法有生滅者 如化, 若法無生無滅 所謂無?相 涅槃. 是法非變化 須菩提言
[如佛所說一切諸法性空 非聲聞作 乃至非諸佛作 云何涅槃一法非如化] 佛言 [如是如是 一切法性常
空 若新發意菩薩 聞一切法 皆是性空 乃至涅槃 亦皆如化 心卽驚怖 爲是新發意菩薩故. 分別生滅者
如化, 不生滅者 不如化]. 須菩提言 [世尊云何 令新發意菩薩 知是性空] 佛告 [須菩提 諸法先有今
無耶]}? 以是文證 當知此經說 涅槃法 亦無自性, 而彼第二法輪中 言{一切諸法 無生無滅 本來寂靜
自性涅槃} 不言涅槃 無自性性

또한 이경의 화품에서 {어떤 것이 나고 죽음이 있다면 허깨비와 같으며, 어떤 법에 남이 없고
사라짐도 없으면 속임이 없는 열반이어서 이 법은 변화하지 않는다. 수보리가 말하기를 [부처님
께서 말씀하신 바 모든 법의 본질이 텅비었음은 성문들이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부처님들께서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열반 한가지만이 허깨비 같지 않습니까]하니 부처님께서는 [그렇다. 그
렇다. 모든 법의 본래 바탕은 항상 텅비었다. 만약에 새로 뜻을 세운 보살이 들은 모든 법은 다
본질이 텅비었며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허깨비와 같다고 들으면 마음은 놀라고 두려워 할 것
이다. 새로 뜻을 세운 보살을 위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분별하는 것은 허깨비와 같고 나고 죽음
을 구별하지 않는 것은 허깨비와 같지 않다]고하시니 수보리가 [세존께서는 왜 새로 뜻을 일으킨
보살이 이 본질의 텅비었음을 알게 하십니까]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야 모든 법은 있다가
이제 없는가]}라 했다. 이 문장을 증거로 함으로써 이경에서는 열반도 또한 자체로써의 바탕이
없다고 했음을 알 수가 있으나, 그 두번째 진리의 수레바퀴에서 {모든 여러 법은 생기지도 않고
사라짐도 없이 본래 고요하고 고요한 본래의 성품인 열반이다}라고 했으나 열반은 본래 바탕이
없음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지 않았다.

第三了義法輪中 言{一切諸法 無生無滅 乃至涅槃 無自性性}. 以是故 知今此經宗 超過第二 同第
三也.
又華嚴經云 生死及涅槃 是二悉虛妄 愚智亦如是 二皆無眞實}, 今此經云 {色受想等 如幻如夢. 乃
至涅槃 如幻如夢. 若當有法 勝涅槃者 我說亦復 如幻如夢} 當知此經 同彼華嚴 無上無容 究竟了義
但其敎門 各各異一耳. 第五判敎 略述如之.
第六消文 依論廣釋.

세번째 완전한 진리의 수레바퀴에서 {모든 여러 법은 생기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열반까
지도 본 바탕이 없음을 바탕으로 한다}고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이 경의 근본 뜻이 두번째 시기
와 다르고 세번째 시기와 같은 줄 알 수 있다.
또 화엄경에서 {나고 죽음과 열반 이 둘이 모두 헛되며 어리석음과 지혜로움도 또한 이와 같아
서 둘에 다 진실함이 없다}고했고 지금 이 경전에서는 {물질과 받아들임과 표상작용등은 허깨비
와 같으며 꿈과 같다. 열반에 이르기까지도 허깨비 같고 꿈 같다. 만약에 어떤 법이 열반보다 훌
륭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또한 다시 허깨비 같고 꿈 같다고 말하겠다}고했으니 당연히 이 경전이
그 화엄경과 같이 더 높은 것이 없으며 모양이 없어서 최고의 완전한 의미이지만 다만 그 가르친
방법이 다를 뿐임을 알 것이다.
다섯번째 가르침의 갈래는 간단히 이와 같이 논술했다.

여섯째 경문을 해석함은 지도론에 의해서 자세히 풀이한다.

大慧度經宗要終.

번 역 후 기

이상 대혜도경은 원효스님의 저술로써 한국불교전서 1권에 실려 있다.

이 논문은 먼저 제목에서부터 원효스님의 특이한 안목을 느끼게 한다.
중국에서도 감히 번역하기를 꺼려했던 마하반야바라밀다라는 말을 과감히 한자로 번역해서 제
목으로 했으니 말이다.
또 전통 교상판석상 반야경의 위치를 나름 데로 분석하였다.
교상판석의 결론으로 원효스님은 대반야경의 위상을 화엄경과 동일하다고 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본인에게는 상당히 신선한 자료였다.
이 자료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전통교상 판석의 본질론적 문제’와, ‘불교철학의 개념과 정의에
대한 구체적 접근 방법’등 교학탐구의 중요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자료를 번역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선행 조건이 있어 많은 힘을 덜 수 있었다.
우선 전산 입력된 자료를 활용하였는데, 전산 입력된 자료는 1994년 8월 버클리대학의 랑카스
터교수에 의해 중국에서 입력한 자료다.
이 자료를 장경연구소를 통해 입수한 코드 변환기를 이용 글 코드로 바꾸어서 본인이 교정한
자료이다.
번역 과정에서 국역 원효성사전서2권과 불교대사전등을 참고로 하였다.

해인사 원 창.

한글대장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