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물흐르고 꽃피어난다.

작성자
busong
작성일
2018-02-06 19:01
조회
275
물흐르고 꽃피어난다.

한동안 집을 비우고 밖으로 나돌다가 돌아오니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턱 밑에 웬 벌레들이 득실거렸다.

모양은 노래기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역겨운 노린내

도 나지 않는 그런 벌레다. 몇 차례 쓸어내도 줄지 않다.

개울에서 부엌으로 끌어들인 수도를 날씨가 풀려 다시 이

어놓았는데 그전보다 물줄기가 약했다. 가물어서 개울물이

줄어든 탓이려니 했다.

문턱 밑에서 벌레를 쓸어내다가 문턱을 만져보니 전에 없

이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었다. 아하, 문턱 밑에 무슨 변고

가 생긴 모양이구나 싶어 시멘트로 바른 문턱 밑을 파냈

다. 수도관이 터져 물이 펑펑 새고 있었다.

얼음이 얼기 전에 개울에서 끌어들인 수도를 끊어놓는 것

이 초겨울 이 오두막의 연중행사인데, 지난 겨울이 너무 추

워서 수도관에 남은 물이 얼어서 터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수도관이 터

진 줄도 모르고, 물줄기가 약해진 것을 가뭄 탓으로만 돌

릴 뻔했다. 득실거리던 벌레들에게 기특하고 고마운 생각

이 들었다. 그런 연유도 모르고 귀찮게 여기면서 쓸어내 버

린 일이 미안하게 여겨졌다.

망가진 수도관을 잘라내고 이어 놓으니 물줄기가 다시 살

아났다. 벌레들도 이제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벌레들이 아니었다면 한동안 가뭄 탓만 하면서 찔

찔거리는 물로 불편하게 지냈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벌레들

이지만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고 있는 인연으로 내게 말없

는 가르침을 보인 것이다. 이래서 꿈틀거리는 미물들에게

도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한 것이다.

고랭지인 이곳은 5월 하순인 요즘에야 철쭉이 수줍게 문

을 열고 있다. 5월 초순께 벼랑 위에서 붉게붉게 타오르던

진달래의 뒤를 이어 철쭉이 피어나고 있다.

고랭지의 꽃은 그 빛깔이 너무도 선연하다. 남쪽이나 중

부지방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산뜻한 빛이다. 6월 중순께

피어나는 때늦은 모란도 그 빛깔이 너무도 선연해서 돌아서

기가 아쉽다.

고랭지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유리하우스를 보면서 왜 하

필이면 추운 지방에서 꽃을 재배할까 늘 의구심이 일었었

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꽃 빛깔을 보고 나

서야 이해가 되었다.

어찌 이게 꽃만이겠는가. 사람의 일도 이에 견줄 수 있

지 않을까 싶다. 집안과 그 환경이 풍족해서 어려움을 모르

고 자란 아이들은 체격도 좋고 얼굴도 희멀쑥하다. 그런데

조금만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어쩔 바를 모르고 이내 주저

앉고 만다. 한 마디로 의지력이 약하다. 체격은 멀쑥하지

만 그 체질과 기질은 나약하다.

그들은 온실 속의 꽃이나 다름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온

실의 관리인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스스로 딛고 일어설

의지력을 키울 수 없었다. 어려움을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대개 이기적인 성격이다. 참고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밖에 모른다. 남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

다.

과보호를 받으면서 자란 아이들은 이래서 인간미가 없

다.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려면 무엇이든지 그들의 요구

를 즉석에서 들어주라는 말이 있다. 미래의 인간은 아마 현

재보다 훨씬 이기적이고 나약할 것이다. 지금 돌아가는 세

상 추세로 미루어 능히 예측할 수 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소위 일류대학 출신들은 대부분 덜 인

간적이다. 인간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일

류만을 지향하면서 비정한 경쟁 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인

간적인 폭이나 여백이 생길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 선

민의식에 도취되어 이기적인 벽에 갇히기 쉽다. 그들한테서

는 인간다운 체취를 맡기 어렵다.

그러나 세칭 이류나 삼류쪽 사람들한테서는 보다 인간적

인 기량과 저력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을 대하면 우선 마음

이 편하다. 저쪽 마음이 곧 내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그

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후덕함과 여유가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네. 내 자신이 일류가 못되고 이류

나 삼류 또는 아류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고.

고랭지의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자신은 과연 어떤 꽃

을 피우고 있을까 되돌아 보인다. 제발 일류가 아닌 삼류

나 아류의 꽃이었으면 좋겠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

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 모진 추위와 비

바람과 뙤약볕에도 꺾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뎌낸 그 인

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소로우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

다.’

앞 뒤 창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한 바탕 쓸고 닦아냈다.

아침나절 맑은 햇살과 공기 그 자체가 신선한 연두빛이다.

가슴 가득 연두빛 햇살과 공기를 호흡한다. 내 몸에서도 연

두빛 싹이 나려는지 근질거린다.

새로 피어난 자작나무 어린 잎이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춤

을 추고 있다. 개울물 소리는 장단을 맞추며 흐른다. 개울

건너에서 검은등뻐꾸기도 한 몫 거들고 있다. 철쭉이 벼랑

에서 수줍게 웃음을 머금고 있다.

이곳이 어디인가. 바로 극락정토 아니겠는가. 그윽한 즐

거움이 깃드는 곳, 물 흐르고 꽃 피어나는 바로 그곳이 극

락정토 아니겠는가.

극락세계를 다른 말로 한없이 맑고 투명한 땅(無量淸淨

土) 또는 연꽃이 간직된 세상(蓮華藏世界)이라고 한다.

아, 하늘과 땅 사이에 물 흐르고 꽃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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