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高僧傳) 1~4권

고승전1~4, 5~8, 9~12, 13~14

고승전(高僧傳) 제1권

석혜교(釋慧皎) 지음
추만호 번역

1. 역경(譯經) ①

1) 섭마등(攝摩騰)
섭마등은 본래 중천축(中天竺)1)국 사람이다. 풍채 있는 거동이 훌륭하고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경(經)을 잘 알았다. 항상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일을 맡았다. 언제인가 천축국의 지배를 받는 작은 나라에 가서 『금광명경(金光明經)』2)을 강의한 적이 있다. 때마침 적국이 국경을 침범하였다. 섭마등이 말하였다.
“경에서 이르기를, ‘이 경을 강설하면, 지신(地神)의 보살핌에 힘입어 머무는 곳이 안락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막 싸움이 벌어지려 하니 이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에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 서원하고 몸소 가서 화친할 것을 권했다. 마침내 두 나라가 서로 즐거워하고, 섭마등도 이로 말미암아 지위가 높이 올라갔다.

한(漢)나라 영평(永平) 연간(58~75) 어느 날 밤에 명제(明帝)가 금빛 나는 사람[金人]이 공중에서 날아오는 꿈을 꾸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꿈꾼 바를 풀이하였다. 통인(通人)3) 부의(傅毅)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에 서역에는 부처[佛]라는 신(神)이 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꿈꾸신 바는 아마도 필시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곧 낭중(郞中) 채음(蔡愔)과 박사 제자(博士弟子) 진경(秦景) 등을 보내 천축국으로 가서 불법(佛法)을 찾도록 하였다. 채음 등은 그곳에서 섭마등을 만나보고 한(漢)나라로 갈 것을 요청하였다. 섭마등은 불법을 널리 펼 것을 굳게 마음먹은 터라, 피로함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고비사막 건너기를 무릅써서 낙양에 이르렀다.

명제는 후한 상을 내리고 접대를 잘해 성의 서쪽 문 밖에 정사(精舍)를 세워 거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중국 땅에 사문(沙門)이 있게 된 시초였다. 그러나 불법이 처음 전해질 때라 아직 믿어 귀의하는 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깊은 깨달음을 쌓아두기만 하고 가르침을 베풀어 펼칠 곳이 없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기(記)에서 말한다.
“섭마등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한 권을 번역하여 처음에는 난대(蘭臺) 석실(石室) 열네 번째 칸 안에 봉하여 두었다. 섭마등이 머무른 곳은 오늘날 낙양성 서쪽 옹문(雍門) 밖에 있는 백마사(白馬寺)이다.”

전하는 말에 이른다.
“일찍이 외국의 국왕이 여러 절들을 훼손하고 무너뜨릴 적에 초제사(招提寺)4)만이 미처 훼손되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흰 말 한 마리가 탑을 돌며 슬피 울부짖었다. 즉시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곧바로 여러 절을 무너뜨리는 일을 멈추었다. 이 일로 인하여 ‘초제’라는 절 이름을 고쳐 ‘백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러 절들이 이름을 지을 때에 대부분 그것을 본보기로 취한다.”

2) 축법란(竺法蘭)
축법란도 역시 중천축국 사람이다. 경론(經論) 수만 장을 외워 천축국 학자들의 스승이라고 자부하였다. 당시 채음 일행이 그 나라에 도착하고 난 뒤,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돌아다니며 교화[遊化]할 것을 약속하였다. 마침내 서로 따라서 한나라에 왔다. 그때 축법란에게 배우던 무리들이 그가 떠나는 것을 만류하고 막자, 그는 샛길로 빠져나가 이르렀다.
낙양에 도착한 이후 축법란은 섭마등과 함께 머물렀다. 얼마 지나 중국말을 잘하게 되었다.

채음이 서역에서 가져 온 불경에서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ㆍ『불본생경(佛本生經)』ㆍ『법해장경(法海藏經)』ㆍ『불본행경(佛本行經)』ㆍ『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다섯 부(部)를 번역하였다.
도적의 난리통에 도읍을 옮기느라 네 부는 없어져서 강좌(江左)에 전하지 않는다. 오직 『사십이장경』만이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이천여 글자 가량이 된다. 중국 땅에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이것을 시초로 삼는다.

또 채음은 서역에서 석가께서 기대어 계신 모습을 그린 그림을 얻었다. 이것은 우전왕(優田王)5)의 전단상사(旃檀像師)가 그린 네 번째 작품이다. 낙양에 이르자 명제(明帝)는 즉시 화공으로 하여금 베껴 그려서 청량대(淸凉臺)와 현절릉(顯節陵)에 걸어 두었다. 원래의 상(像)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예전에 한무제가 곤명지(昆明池)6)를 파다가 바닥에서 검은 재[黑灰]를 얻었다. 이것에 대하여 동방삭(東方朔)에게 물었더니 동방삭이 말하였다.
“자세히 알지 못하니, 서역 사람에게 물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축법란이 온 후에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축법란이 말하였다.
“세계가 종말을 맞을 때에 겁화(劫火)7)가 훨훨 불탑니다. 이 재가 바로 그것입니다.”
동방삭의 말이 증명되자 믿는 자들이 더욱 늘었다. 후에 축법란이 낙양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3) 안청(安淸)
안청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안식국(安息國)8) 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게다가 총명하고 민첩하게 공부하며 애써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외국의 전적(典籍) 및 칠요(七曜)9)ㆍ오행(五行)ㆍ의방(醫方)ㆍ이술(異術)과 날짐승이나 들짐승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안세고가 길을 가다가 한 떼의 제비를 보고는 문득 같이 가던 이에게 말하였다.
“제비가 ‘반드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지저귑니다.”
조금 있다가 과연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므로 빼어나게 남다르다는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에 퍼졌다.

안세고는 출가하기 전에도 계율을 받드는 것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인생의 괴로움과 헛됨[空]을 깊이 깨닫고, 걸림돌이 되는 육체를 꺼려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상복을 벗은 뒤에 마침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그는 경장(經藏)을 널리 알았다. 특히 아비담학(阿毘曇學)10)에 정통하고 선경(禪經)11)을 깨달아 간략하게 그 미묘함의 끝까지 다 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를 폈다. 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이에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옮겼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ㆍ『음지입경(陰持入經)』ㆍ대(大)ㆍ소(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ㆍ『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등이 그것이다.
과거 외국의 삼장(三藏)13)인 중호(衆護)가 경의 요점을 찬술하여 27장(章)을 지었다. 안세고는 여기에서 7장을 뽑아 한문으로 번역해 냈다. 바로 『도지경(道地經)』이 이것이다.

안세고가 앞뒤로 낸 경론(經論)은 모두 39부(部)이다. 이치를 밝게 분석하고 문자를 참으로 올바르게 썼다. 설명을 잘하면서도 화려한 데로 흐르지 않고, 표현이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았다. 이는 무릇 읽는 자들이 부지런히 힘쓰면서도 싫증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안세고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깊이 더듬어 저절로 인연의 업보를 알았다. 세상에서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신령한 자취가 많았다. 어느 때인가 안세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전생에도 이미 출가하였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벗 가운데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있었다. 걸식하러 다니다가 마뜩치 않은 시주(施主)를 만나면 그때마다 번번이 원한을 품었다. 내가 자주 꾸짖고 타일렀지만 끝내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월이 20여 년이 흐른 뒤 벗과 이별을 하며, ‘나는 광주(廣州)로 가서 전생[宿世]의 인연을 끝마치려 한다. 그대는 경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악한 몸을 받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를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광주에 이르니 도적 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 길에서 마주친 한 소년이 손에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며 말하기를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에게 숙명적인 빚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서 가졌던 생각이다’ 하고는, 목을 늘이고 칼을 받아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끝내 도적은 나를 죽이고 말았다.
길을 가득 메워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은 돌아와 안식국왕의 태자가 된 것이니 이것이 지금의 이 몸인 것이다.”

안세고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면서 경을 널리 펼치는 일을 마쳤다. 영제(靈帝) 말엽에 관락(關洛:關中ㆍ洛陽)이 몹시 어지러웠다. 이에 강남에 법을 전하려고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산(廬山)14)을 지나면서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벗을 제도해야만 한다.”
걸어 공정호(䢼亭湖)15)의 사당에 이르렀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위엄서린 신령[靈威]이 있었다.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사람들이 지체하여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사당 신령의 대나무[神竹]를 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처 허락을 받기 전에 마음대로 가져갔다. 배가 즉시 뒤집혀서 가라앉고 대나무[竹]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꺼려하여, 신령의 그림자만 비쳐도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함께 가던 삼십여 척의 배가 이 사당에 희생을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령이 내려와 축관의 입을 빌려 말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문을 어서 모셔 오라.”
선객들이 모두 크게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신령은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내가 전생에 외국에서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웠을 때, 곧잘 보시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성내어 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공정호의 사당신이 되어 주변 천 리를 제가 다스립니다. 예전에 보시한 공덕으로 진귀한 보물이 몹시 풍부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을 내던 성품 때문에 이처럼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벗을 만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수명을 곧 마칩니다만 보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큽니다. 만약 여기에서 죽으면 강호를 더럽히므로 산서(山西)의 못으로 가려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내게 있는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로 불법을 세우고 탑을 만들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제도하러 여기까지 왔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신령이 말하였다.
“몹시 보기 흉한 모습이라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까봐 그렇습니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다지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리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길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이무기였다. 그 꼬리가 안세고의 무릎까지 이르렀다. 안세고가 그를 향해 범어(梵語)로 몇 마디 나누고 몇 수 범패(梵唄)로 찬탄하였다. 이무기는 슬픔의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 비단과 보물을 거두어 이별하고 떠났다.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자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어 산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예장(豫章)에 당도하였다. 곧장 공정호의 사당에서 가지고 온 물건으로 동사(東寺)를 세웠다. 안세고가 떠나간 후에 신령은 바로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랐다. 안세고 앞에서 길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서 주원(呪願)을 받고는 문득 사라졌다.
안세고는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있던 소년이 바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인데, 흉한 모습에서 벗어났구려.”
이로부터 사당의 신령은 사라지고 다시는 영험한 일이 없었다. 뒤에 사람들이 산서(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에 이르렀다. 지금의 심양군(潯陽郡)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는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로 가서 전생[前世]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때의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안세고는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의 인과에 얽힌 일을 말하였다. 아울러 숙명의 인연을 들려주고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회계(會稽) 땅에 가서 그것을 다하려고 합니다.”
광주의 이 사람은 안세고가 비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이 환히 풀려서 이해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거슬러 올라가 뉘우치고는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시장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장 안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서로 치고 받는 자들이 잘못 주먹을 휘둘러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주 사람은 연거푸 두 가지 보응을 경험하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았다. 아울러 사연을 다 갖추어 이야기하니, 멀거나 가깝거나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비통해 마지않았다. 삼세(三世)에 걸친 인연이 징험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안세고는 왕족이면서 서역에서 온 손님이라서 모두 안후(安侯)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호칭한다.

천축국은 자칭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라 하고 말을 천어(天語)라 한다. 중국과는 아주 달라서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는다. 안세고 전후로 나온 번역들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안세고가 번역한 것만이 여러 번역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도안(道安)은 ‘경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밝은 덕을 지닌 분들께서도 다 같이 이처럼 찬탄하고 사모하신 것이다.
내가 여러 기록을 찾아보니, 안세고의 일을 기재하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고 빠져 있기도 하다. 아마도 권적(權迹)16)을 드러내거나 숨기기도 하고, 응하거나 응하지 않던 것[應廢]의 실마리가 너무 많기[多端] 때문이다. 간혹 전달하는 자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서로 내용이 어긋났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가지 차이를 함께 나열한다면, 그런 대로 논의를 할 만할 것이다.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17)에서는 말한다.
“안세고(安世高)는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서 영제(靈帝) 건녕(建寧) 연간(168~171)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에 30여 부의 경을 번역해 냈다.”

또 『별전(別傳)』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280~289) 말년에 안후(安侯)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다. 상원(桑垣)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여 냈다. 이윽고 함 하나를 봉하여 절에 두며 이르기를, ‘4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열어 보시오’라고 하였다.
오(吳)나라 말기에 양주(楊州)로 가서 사람을 시켜 물건 한 상자를 팔아 노비를 한 사람 샀다. 그리고 복선(福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선지식(善知識)18)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노비를 데리고 예장(豫章)으로 가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을 제도하고, 신령을 위해 절을 세우는 일을 마쳤다. 복선이 칼로 안후의 늑골을 찌르니,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상원 사람들이 이에 그가 봉한 함을 여니 나뭇결이 저절로 글자를 이루기를, ‘나의 도를 높일 사람은 거사(居士) 진혜(陳慧)요, 『선경(禪經)』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僧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이 바로 4년째 되는 날이다.”

또 유중옹(庾仲雍)의 『형주기(荊州記)』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초에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문이 공정호 사당 신령을 제도하여 재물을 얻었다. 형성(荊城)의 동남쪽 모퉁이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
송나라 임천(臨川) 강왕(康王)의 『선험기(宣驗記)』에서는 말한다.
“이무기[蟒]가 오(吳)나라 말에 죽었다.”
담종(曇宗)의 『탑사기(塔寺記)』에서는 말한다.
“단양(丹陽) 와관사(瓦官寺)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사문 혜력(慧力)이 지은 것이다. 후에 사문 안세고가 공정호(䢼亭湖) 사당의 보물로 수리하였다.”

그러나 도안(道安) 법사는 여러 경을 교열하고 나서 번역한 경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에서부터 진(晋)나라 태강(太康) 말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140여 년이 된다. 만약 안세고가 장수하였다면 혹 이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강승회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주석한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이 경은 안세고가 낸 것이지만,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 남양(南陽)의 한림(韓林)과 영천(穎川)의 문업(文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란 사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현인(賢人)은 독실하고 빈틈없이 도를 믿었다.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진혜(陳慧)의 뜻으로 미루어 나는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승회는 진(晋)나라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에 돌아가셨다. 그런데도 이미 “이 경은 나온 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또 안세고가 봉했던 상자에 나타난 글자에도 “내 도를 높일 사람은 진혜(陳慧)요, 『선경』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이다”라고 하였다.
『안반수의경』에서 분명히 한 바는 선업(禪業)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봉함의 기록이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조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바야흐로 불도(佛道)를 전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안세고가 강승회와 더불어 세상을 함께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또 『별전(別傳)』에서는 스스로 말한다.
“『선경(禪經)』을 전할 이는 비구 승회이다.”

승회는 이미 태강 초에 죽었다. 그러니 어찌 태강 말에 안후 도인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앞뒤의 말이 스스로 모순되거늘, 한 책에서 진(晋)나라 초(初)를 잘못 가리킨 것을 그대로 좇았다. 이로부터 후세의 여러 작자들이, 혹은 태강(太康)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吳)나라 말기라고도 하여 부화뇌동해서 덩달아 다투니,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진(晋)나라 초라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도 『담종기(曇宗記)』에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안세고가 바야흐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잘못된 설이 지나쳐도 너무나 동떨어졌다.

4) 지루가참(支樓迦讖)
지루가참은 바로 지참(支讖)이라고도 한다. 본시 월지(月支)19) 사람이다. 행실이 순수하고 깊이가 있으며, 타고난 성품이 막힘 없이 툭 터지고 민첩하였다. 계율을 받아 지키는데 매우 정성스러워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여러 가지 경들을 암송하고, 불법을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한나라 영제(靈帝, 167~189) 때에 낙양에 노닐다가 광화(光和)20)와 중평(中平)21) 사이에 범문(梵文)을 옮겨 번역하여 『반야도행경(般若道行經)』ㆍ『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ㆍ『수능엄경(首楞嚴經)』 세 경을 냈다. 또한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ㆍ『보적경(寶積經)』 등 모두 십여 부의 경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어 기록한 것이 없어졌다.

도안(道安)은 예와 이제의 것을 교정(校定)하고 문체(文體)를 정밀하게 살피고 나서 말하였다.
“지루가참이 낸 것인 듯하다. 그가 번역한 이러한 여러 경들은 모두 본래의 뜻을 깊이 터득하여 쓸데없이 수식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루가참은 불법의 요점을 잘 베풀어 도를 널리 전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축불삭(竺佛朔)
당시에 천축국의 사문(沙門) 축불삭이 있었다. 그도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때에 『도행경(道行經)』을 가지고 낙양으로 가서 곧바로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당시에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 뜻이 잘못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는 내용을 꾸미지 않고 바탕을 보존하여 경의 뜻을 깊이 터득하였다.
축불삭은 또한 광화(光和) 2년(179)에 낙양에서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번역했다. 지루가참이 말을 옮기고, 하남(河南)과 낙양의 맹복(孟福)과 장련(張蓮)이 붓으로 받아썼다.

∙안현(安玄)
또한 당시에 우바새(優婆塞) 안현(安玄)이 있었으니 안식국 사람이다. 성품이 곧고 깨끗하며 이치에 깊이 잠겼다. 널리 여러 경들을 외우고, 훤히 익힌 바가 많았다. 역시 한나라 영제(靈帝) 말에 낙양에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공(功)이 있기에 기도위(騎都尉)라고 부른다.
그의 성품은 텅 비어 조용하고 온순하고 공손하였다. 항상 불법을 일삼는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여겼다. 점차 중국말을 알자 경전을 펴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항상 사문들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도위(都尉)라고 부른다.
안현은 사문 엄불조(嚴佛調)와 함께 『법경경(法鏡經)』을 번역했다. 안현은 입으로 범문(梵文)을 번역하고, 엄불조가 붓으로 받아썼다. 이치가 맞고 음이 정확하여 경의 미묘한 뜻을 다하여, 그 뛰어난 문학이 아름다워서 후대가 이어받았다.

∙엄불조(嚴佛調)
엄불조는 본래 임회(臨淮) 사람이다. 열두 살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민첩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세상에서는 안후(安候)ㆍ도위(都尉)ㆍ엄불조(嚴佛調) 세 사람이 옮겨 번역한 것을 칭찬하여, 그들의 뒤를 ‘이어받기가 어렵다’는 ‘난계(難繼)’라고 부른다.
엄불조는 또한 「십혜장구(十慧章句)」를 지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도안(道安)은 엄불조가 경을 번역한 것을 극찬하여 말한다.
“책 전체가 분명하면서도 번잡하지 않고 교묘하다.”

∙지요(支曜)ㆍ강거(康巨)ㆍ강맹상(康孟詳)
또한 사문 지요ㆍ강거ㆍ강맹상 등은 모두 한나라 영제(靈帝, 168~189)와 헌제(獻帝, 190~220) 연간에, 슬기로운 배움이 있다고 이름이 나서 서울 낙양(洛陽)까지 알려졌다. 지요는 『성구정의경(成具定意經)』ㆍ『소본기경(小本起經)』 등을 번역하고, 강거는 『문지옥사경(問地獄事經)』을 번역하였다. 모두 말이 올바르고 이치가 있으며 꾸미지 않았다.
강맹상은 『중본기경(中本起經)』과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을 번역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담과(曇果)가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에서 범본(梵本)을 얻자, 강맹상이 축대력(竺大力)과 함께 한문(漢文)으로 번역하였다. 도안은 말한다.
“강맹상이 번역한 것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그윽한 의미를 충분히 드러냈다.”

5) 담가가라(曇柯迦羅)
담가가라는 중국말로 법시(法時)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크게 부유하고 항상 청정한 복[梵福]을 닦았다. 담가가라는 어려서부터 재주 있고 슬기로우며 바탕이 남보다 뛰어났다.
책을 한 번 읽기만 해도 글의 뜻을 환히 깨달았다. 『사위타론(四圍陀論)』을 뛰어나게 배우고, 풍운(風雲)ㆍ성수(星宿)ㆍ도참(圖讖)ㆍ운변(運變)을 두루 꿰뚫지 않음이 없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천하 문장의 이치가 다 나의 가슴 속에 들어 있다”고 하였다.

나이 25세에 이르러 어느 승방(僧坊)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법승(法勝)22)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보았다. 그것을 가져다 보아도 아득하여 도무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은근하게 거듭 살펴보았으나 더욱 어두컴컴하기만 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배움을 쌓은 지 여러 해가 흘렀다. 분전(墳典)23)을 잘 안다고 자부하고 경서들을 자유자재로 요리하였다. 글의 뜻을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문장을 거듭 살펴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불서(佛書)를 보니, 문득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밖에서 나왔다. 반드시 이치를 깊이 더듬어서 따로 정밀하게 살펴봐야만 하겠다.”
이에 책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 어떤 비구에게 대략 해석해 줄 것을 청하였다. 드디어 인과를 깊이 깨닫고, 삼세를 매우 잘 이해하였다. 비로소 부처의 가르침이 넓고도 넓어 세속의 책들이 미칠 수 없음을 알았다.
이에 세상의 영화로움을 버리고 출가하여 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으로 수행하였으며, 대승ㆍ소승의 경과 여러 비니(毘尼)를 읽었다.

그는 항상 돌아다니며 교화하는 일을 귀하게 여겼으며,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위(魏)나라 가평(嘉平) 연간(249~254)에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위나라에는 불법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릇되게 바뀌어져, 뭇 승려들이 아직도 삼보에게 귀의하는 계[歸戒]를 받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깎은 것이 세속과 다를 뿐이었다. 설령 재참(齋懺)24)을 하더라도, 섬김에 있어서는 유교 의식인 사당에 지내는 제사[祠祀]를 본받았다.

담가가라가 오고 난 뒤부터 부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졌다. 당시 여러 승려들이 담가가라에게 계율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담가가라는 율부의 제도에 대한 자세한 말씀이 번잡하고 지나치게 범위가 넓다고 여겼다. 그래서 부처의 가르침이 번창하기 전에는 결코 그것을 받들어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승기계심(僧祇戒心)」을 번역하여 조석(朝夕)의 의례를 갖추었다. 그리고 다시 인도 승려[梵僧]에게 청하여 갈마법(羯磨法)을 세워 계를 받으니, 중국의 계율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후에 담가가라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강승개(康僧鎧)
당시에 또한 외국의 사문으로 강승개가 있었다. 역시 가평(嘉平, 249~254) 말에 낙양에 와서 『욱가장자경(郁伽長者經)』 등 4부의 경을 번역했다.

∙담제(曇帝)
또한 안식국의 사문 담제 역시 계율의 학문[律學]을 잘하였다. 위(魏)나라 정원(正元, 254~255) 중에 낙양으로 와서 『담무덕갈마(曇無德羯磨)』를 번역했다.

∙백연(帛延)
또 사문 백연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역시 재주 있고 총명하여 깊은 이해가 있었다. 위(魏)나라 감로(甘露, 256~260) 중에 『무량청정평등각경(無量淸淨平等覺經)』 등 6부의 경을 번역했다. 그 후에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6) 강승회(康僧會)
강승회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으로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교지(交趾)로 옮겨갔다. 강승회가 십여 세 무렵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극한 효자였다. 상복을 벗고서야 출가하여 매우 엄격하게 힘껏 수행하였다.
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뜻을 돈독히 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여 환히 삼장(三藏)을 이해하였다. 널리 육경(六經)을 보고, 천문(天文)과 도위(圖緯)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요점을 잘 분별하여 자못 글을 잘 지었다.
당시 손권이 이미 강남을 지배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아직 행해지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우바새인 지겸(支謙)이 있었다. 자는 공명(恭明)이고, 일명 월(越)이라고 하였다. 본래 월지의 사람으로 한나라에 와서 노닐었다. 과거 한나라 환제(桓帝)에서 영제(靈帝)에 이르는 기간에 지참(支讖)이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또 지량(支亮)이라는 인물은 자(字)가 기명(紀明)으로, 지참에게 배움을 받았다. 지겸은 또한 지량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널리 경서를 읽어 정밀하게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간의 기예(伎藝)를 익힌 것이 많았으며 다른 나라의 글도 두루 배워 여섯 나라의 말에 뛰어났다.
그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몸이 마르고 거무튀튀하였다. 눈은 흰자위가 많고 눈동자는 누런빛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랑(支郞)은 누런 눈동자에 몸이 비록 호리호리하지만 꾀주머니[智囊]이다.”
한나라 헌제(獻帝, 190~220) 말에 난리가 일어나자 오나라로 피하였다. 손권(孫權)이 그가 재주가 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만나보고 기뻐하였다. 벼슬을 주어 박사(博士)로 삼아 동궁(東宮)을 돕고 이끌도록 하였다. 위요(韋曜)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보탬이 되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한나라 바깥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지(吳志)』에는 실리지 않았다.

지겸은 불법의 큰 가르침이 행해지고는 있지만, 경들이 대부분 범문이라서 아직 번역이 미진하다고 여겼다. 외국어를 아주 잘하므로 여러 본들을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오나라 황무(黃武) 원년(元年, 222)에서 건흥(建興, 252~252) 중에 이르기까지 『유마경(維摩經)』ㆍ『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ㆍ『법구경(法句經)』ㆍ『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마흔아홉 가지의 경을 번역해냈다. 곡진하게 성스러운 뜻을 실었으면서도 말의 뜻이 운치가 있고 우아하였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하여, 「보리련구(菩提連句)」와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지었다. 아울러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당시 오나라에 처음으로 불교의 큰 법이 퍼졌으나, 풍속의 교화[風化]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였다. 강승회는 강남[江左]25)에 불도를 떨치어 탑과 사찰[圖寺]을 성하게 일으키고자 하여,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떠돌아다녔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8)에 처음 건업(建鄴)26)에 이르러 띳집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도를 행하였다. 당시 오나라에서는 사문을 처음 보았다. 이 때문에 그 모습만 보고 도(道)는 알지 못하여 이상하게 속이는 짓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담당 관리가 손권(孫權)에게 아뢰었다.
“어떤 오랑캐가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자칭 사문이라 합니다. 얼굴이나 복장이 보통과는 다릅니다. 이 일을 조사해봐야 하겠습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본 신(神)을 부처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섬기는 바가 어찌 옛날의 그것이 아니겠는가?”

즉시 강승회를 불러 꾸짖어 물었다.
“어떠한 영험(靈驗)이 있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느덧 천 년이 흘렀습니다. 유골인 사리는 신비하게 빛을 발하여 사방을 비춥니다. 옛날 아육왕(阿育王)27)은 탑을 세운 것이 팔만 사천 개입니다. 대개 탑과 절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께서 남기신 교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장되고 허황하다고 여겨서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마땅히 탑사를 세우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되고 망령된 것이라면 나라에서 정한 형벌대로 하리라.”
이에 강승회는 이레 동안의 기일을 청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법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는 모두 고요한 방에서 깨끗하게 재계하면서, 구리로 만든 병을 상에 놓고 향을 피워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이레의 기한이 끝났지만 고요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다시 이레 동안의 기간을 더 얻었으나 역시 전과 같았다. 손권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된 일이라 하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로 이레의 기간을 청하였다. 손권은 다시 한 번 특별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는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분이 남기신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는가?’라 하셨다.28) 법의 영험이야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다면, 왕이 벌을 내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마땅히 죽을 각오로 바라야만 할 것이다.”
21일 저녁 무렵에도 보이는 바가 없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5경(更)29)이 되자 문득 병 속에서 달그랑 달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승회가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사리가 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모두 모여 바라보았다.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사리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어지고 말았다. 손권은 몹시 두려워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상서로다.”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발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손권은 명령을 내려 그것을 시험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맹서하여 말하였다.
“진리의 구름이 사방을 덮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에 우러러 젖게 됩니다. 원하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시어, 널리 위엄 서린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하였다. 쇠로 된 다듬잇돌은 움푹 패이고,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고 즉시 탑사(塔寺)를 세웠다. 처음으로 절을 세웠기 때문에 건초사(建初寺)라고 부른다. 그곳의 땅 이름은 불타리(佛陀里)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강남에서 불법이 마침내 일어났다.

그 후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정사를 맡자 법령이 가혹해졌다. 부정(不正)한 제사를 모두 없애 버렸으며, 절도 아울러 헐어 없애고자 하였다. 손호가 말하였다.
“이런 절들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그 가르침이 참되고 올곧아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서로 맞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도를 받들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었다.
“부처의 위엄 서린 힘은 여타의 다른 신(神)과는 다릅니다.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께서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가볍게 여겨서 훼손한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손호는 장욱(張昱)을 절로 보내어 강승회를 꾸짖도록 하였다.

장욱은 본래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지라, 종횡무진으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강승회는 임기응변하여 대답을 펼쳐 나갔다. 말의 이치가 창날 솟구치듯 날카롭게 빼어나 막힘이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장욱이 그곳에서 물러나 돌아갈 적에 강승회가 문까지 배웅을 하였다. 마침 절 옆에 부정한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의 신묘한 가르침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어떤 까닭으로 이러한 무리들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치지 못하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뇌성벽력이 산을 부술 정도로 요란하다 할지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치가 통하면 만 리 밖에서도 응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것이 막혀 있다면, 간장과 쓸개처럼 아무리 가까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肝膽楚越]30)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욱은 돌아와 칭찬하였다.
“강승회의 재주와 명석함은 제가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왕께서 친히 살펴보소서.”

손호는 크게 조정의 인재를 모아 놓고, 마차를 보내어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강승회가 자리에 앉자 손호가 물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밝히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이란 무슨 뜻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무릇 훌륭한 임금이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가르치면, 붉은 까마귀가 날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납니다. 어진 덕으로 만물을 기르면, 예천(醴泉)이 솟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선한 행위를 하면 상서로운 일이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면 또한 그와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귀신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드러난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도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積善餘慶]’라고 합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복을 구하는 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네[求福不回]’31)라고 읊습니다.
비록 유가 경전의 바른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부처의 가르침에서도 나오는 사리 분명한 교훈입니다.”

손호가 다시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주공(周公)이나 공자가 이미 밝히신 것이니, 불교의 쓰임새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주공이나 공자의 말씀은 대략 우리와 가까운 자취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윽함과 미묘함이 몹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행하면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길이 극락세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을 권하고 악함을 막고자 밝혔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손호는 그때 그 말을 꺾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호가 불교의 바른 법을 들었다고는 하나, 어리석고 포악한 성질 때문에 그 잔학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숙위병(宿衛兵)들을 후궁(後宮)으로 보내어 정원을 수리하였다. 이때 땅 속에서 높이가 몇 자[數尺]나 되는 금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고는 손호에게 바쳤다.
손호는 불상의 깨끗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어 더러운 오물을 끼얹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온몸에 큰 종기가 생겼다. 특히 음부(陰部) 부분이 더욱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쳐서 말하였다.
“위대한 신을 범했기 때문이옵니다.”
즉시 여러 사당에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궁녀 중에 이전부터 불법을 받드는 자가 있었다. 궁녀가 손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절에 나아가 복을 빌어 보시지 않을는지요?”
손호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부처라는 신(神)이 그렇게 위대한가?”
그러자 궁녀가 말하였다.
“부처는 위대한 신이십니다.”

드디어 손호는 마음속으로 궁녀가 말한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궁녀는 즉시 불상을 가져다가 전(殿) 위에 모셔 두었다. 향내나는 더운물로 수십 번을 씻고 나서, 향을 사르고 참회하였다. 손호는 정성스럽게 베갯머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상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신을 절로 보내 도인(道人)을 찾아, 그에게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강승회가 그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손호는 예를 갖추어 죄와 복을 얻는 연유에 대하여 물었다. 강승회는 그를 위하여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였다. 그 말이 매우 정밀하고 요점이 있었다.
손호는 원래 뛰어난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서 사문의 계율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율의 내용이 비밀스러운 것이라서, 사문(沙門)이 아닌 자에게는 가벼이 알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본업(本業) 백삼십오원(百三十五願)을 취하였다. 그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중생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이백오십사(二百五十事)로 분류하였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크고도 넓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착한 마음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곧장 강승회에게 나아갔다. 5계(戒)32)를 받고 나서 열흘 만에 질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에 강승회가 머무는 절을 더욱 잘 꾸몄다. 종실(宗室)에도 반드시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널리 알렸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불법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손호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서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응보(應報)와 같이 알기 쉬운 일들을 이야기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강승회는 건초사(建初寺)에서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이른바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ㆍ『경면왕경(鏡面王經)』ㆍ『찰미왕경(察微王經)』ㆍ『범황경(梵皇經)』 등이다. 또한 『소품경(小品經)』ㆍ『육도집경(六度集經)』ㆍ『잡비유경(雜譬喩經)』 등을 번역했다. 모두 경의 본질을 신묘하게 터득하고 글의 뜻도 참으로 올바르다.
또 니원(泥洹)의 패성(唄聲: 범패소리)33)을 전하였다. 맑으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밝은 분위기여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ㆍ『법경경(法鏡經)』ㆍ『도수경(道樹經)』, 이 세 가지 경전에 주석을 달고 아울러 경의 서문을 지었다. 말의 취지가 바르면서 무르익고 뜻이 은근하고 그윽하여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오나라 천기(天紀) 4년(280) 4월 손호가 진(晋)나라에 항복하였다. 9월에는 강승회가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이때가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이다.
진나라 성제(成帝, 326~335) 함화(咸和) 중에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켜 강승회가 세운 탑이 불탔다. 사공(司空) 하충(何充)이 이를 수리하여 다시 지었다.

평서장군(平西將軍) 조유(趙誘)는 대대로 불법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삼보(三寶)를 업신여겼다. 이 절에 들어가서 여러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탑이 자주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헛되고 괴이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믿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직접 보게 된다면 더 따질 일이야 없겠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탑에서 즉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법당과 당간[堂刹]까지 비추었다. 조유는 두려워 털끝이 바짝 곤두섰다. 이로 말미암아 조유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절의 동쪽에 다시 작은 탑을 세웠다. 이는 멀게는 크나큰 성인[大聖]이신 부처님의 신령스런 감응이며, 가까이로는 역시 강승회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지금까지 전한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다.
님께서 남긴 범패 소리
참으로 아름다운 바탕일세
눈앞의 걱정 따위 사라지니
넉넉하고 편안할손

어두운 밤과 같은
허물 떨쳐 물리치시어
초연하게 멀리 나아가고
우뚝 높이 솟았구려.

어떤 기(記)에 이르기를, “손호가 사리(舍利)를 쳐서 시험한 것으로 보아, 손권의 시대는 아니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손호가 절을 부수려고 할 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답하기를,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 손권)께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사리의 신통함을 느끼게 된 일은 필시 손권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적은 전기(傳記)에서는 모두 말한다.
“손권이 오나라 궁중에서 사리의 신통함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신의 영험함을 시험한 것은 어쩌면 손호일 수 있다.

7) 유기난(維祇難)
유기난은 본래 천축국 사람이다. 대대로 다른 도를 받들어 불을 섬기는 일[火祠]을 올바른 것으로 알았다. 당시 천축국의 어떤 사문이 소승을 배우고 도술을 많이 행하였다. 먼 길을 다녀오다가 해가 저물자, 사문은 유기난의 집에서 묵으려 하였다. 유기난의 집에서는 다른 도를 섬겼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를 시기하였다. 그래서 문 밖 한데[露地]서 자고 가도록 하였다.
사문은 밤에 몰래 주술을 써서 유기난의 집에서 섬기는 불을 순식간에 타서 없앴다. 이에 온 집안사람이 모두 뛰쳐나왔다. 사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집에 들어가 공양할 것을 청하였다.

사문은 주문으로 불길을 다시 살렸다. 유기난은 사문의 신통한 힘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보고는, 불법에 나아가서 크게 믿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겼다. 드디어 본래 섬기던 바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다. 이 사문을 의지하여 화상(和尙)34)으로 삼았다.
삼장(三藏)35)을 수학(受學)하고 사함(四含:四阿含)을 매우 잘하였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교화하니 모두들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오나라 황무(黃武) 3년(224), 벗인 축률염(竺律炎)과 함께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담발경(曇鉢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갔다. 담발(曇鉢)은 곧 『법구경(法句經)』이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이 다 같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유기난은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벗인 축률염과 함께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축률염 역시 아직 중국말을 잘하지 못하여,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한 것이 제법 있었다. 뜻은 본래의 의미를 살리는 데 두었으며, 표현은 질박한 편이다.

∙법립(法立)ㆍ법거(法巨)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7) 말에 법립이라는 사문이 다시 번역하여 다섯 권으로 만들었다. 사문 법거가 붓으로 적었다. 그의 표현은 조금 화려하다. 또한 법립은 따로 『소경(小經)』을 냈다. 거의 백여 수(首)에 가깝다. 영가(永嘉, 307~313) 말년에 난리를 만나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8) 축담마라찰(竺曇摩羅刹)
축담마라찰은 중국말로 법호(法護)라 한다. 그의 선조는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본래의 성은 지(支)씨이다. 대대로 돈황군(燉煌郡)에서 살았다. 나이 여덟 살에 출가하여 외국 사문 축고좌(竺高座)를 스승으로 섬겼다.
경을 매일 만 자씩 읽고, 한 번 보기만 하여도 이해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절조 있는 행동은 깨끗하고 엄격하였다. 뜻이 돈독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만 리 밖에라도 스승을 찾아갔다. 이 때문에 6경(經)을 널리 보고 마음을 7적(籍)에 노닐었다. 아무리 세상에서 비방하거나 칭송하는 데 힘쓰더라도 일찍이 마음에 꺼린 적이 없었다.

이때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265~290)의 치세이다. 비록 서울에서 절과 불화와 불상이 존숭되기는 하지만, 심오한 대승의 경전들은 총령(葱嶺: 파미르 고원) 밖에 모여 있었다. 법호(法護)는 이에 한탄하여 분발하고, 불도를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그래서 스승을 따라 서역에 가서 여러 나라를 차례로 돌아다녔다. 외국의 언어가 모두 서른여섯 가지이다. 글씨도 역시 그와 같다. 법호는 그것을 두루 배웠다. 훈고를 철저히 익히고, 음과 뜻과 글자의 체까지 두루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드디어 많은 『범경(梵經)』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돈황(燉煌)에서 장안으로 돌아오면서 연도에서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그가 얻은 것은 『현겁경(賢劫經)』ㆍ『정법화경(正法華經)』ㆍ『광찬경(光讚經)』 등 165부이다. 부지런히 애쓰면서 오직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것[弘通]을 일삼았다. 평생토록 베끼고 번역하느라 힘이 들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경법(經法)이 중국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법호의 힘이다.

법호는 진(晋)나라 무제(武帝) 말년, 깊은 산에 숨어살았다. 산에는 맑은 시내가 있어 항상 깨끗이 목욕하고 양치질하였다. 후에 장작을 캐는 나무꾼들이 물가를 더럽혔다. 얼마 가지 않아 물이 말라 버렸다. 이에 법호가 배회하며 탄식하였다.
“사람이 덕이 없어 마침내 맑은 샘이 그쳤구나. 물이 영원히 말라 버린다면 참으로 살아갈 수 없으리라. 당장 옮겨가야겠다.”
말을 마치자 샘물이 솟아올라 시냇물이 넘실댔다. 그의 깊은 정성에 감응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지둔(支遁)은 그의 초상화에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님의 맑고 고요함이여,
도덕이 깊고도 아름다워라.
궁벽한 골짝 나직한 읊조림에
마른 샘 물 솟구쳐 응답했다네.

아득하여라, 님이여.
하늘이 내리신 크나큰 아름다움으로
고비 사막 건너
우리들 그윽한 경지로 이끄셨네.

뒤에 장안 청문(靑門) 밖에 절을 세우고 부지런히 도를 행하였다. 이에 덕스런 교화가 멀리까지 퍼지고,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뒤덮였다. 승려 수천 명이 모두 그를 종사로 섬겼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이르러 서쪽으로 달아났다. 관중(關中) 지방이 어지러워 백성들이 이리저리로 흩어졌다. 법호는 문도들과 함께 피난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민지(澠池)에 이르렀으나,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이때의 나이가 78세이다.

뒤에 손작(孫綽)이 『도현론(道賢論)』을 지었다. 인도의 일곱 승려를 죽림칠현(竹林七賢)36)과 빗대었는데, 법호를 산거원(山巨源)과 짝하였다. 『도현론』에서 논(論)하였다.
“법호공의 덕은 만물의 근본에 머물고, 산거원[山濤]의 위치는 도를 논하는 자리에 올라섰다. 두 분은 덕스런 자태가 높고도 원대하여 비슷한 분들이라 할 만하다.”
그가 후대 사람에게 기려지는 바가 이와 같았다.

∙섭승원(聶承遠)ㆍ섭도진(聶道眞)
당시 청신사(淸信士) 섭승원은 밝게 이해하는 재주가 있었고, 뜻을 돈독히 하여 불법에 힘썼다. 법호공(法護公)이 경전을 번역할 때 대부분 문구(文句)를 바로잡았다. 『초일명경(超日明經)』을 처음 번역할 적에 자못 번다하고 중복되는 것이 많았다. 섭승원이 깎아 내기도 하고 바로잡기도 하여 지금 쓰이는 두 권으로 만들었다. 그가 상정(詳定)한 바가 대부분 이와 같다.
섭승원에게는 도진(道眞)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역시 범학(梵學)을 잘 하였다. 이들 부자는 말을 엮는 데 아름다우면서도 무리가 없어서 원래의 책 내용에 누를 끼치지 않았다. 또 축법수(竺法首)ㆍ진사륜(陳士倫)ㆍ손백호(孫伯虎)ㆍ우세아(虞世雅) 등은 모두 법호의 뜻을 이어받아 집필하고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도안(道安)은 말한다.
“법호공이 번역하신 바가 만일 세밀하게 이 분들의 손과 눈을 거쳤다면 강령(綱領)이 반드시 바로잡혔을 것이다. 비록 번역한 경의 말이 미묘하거나 아름답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상이 드넓고 사리에 통달하여 시원하게 펼쳐 냈다. 특히 무생(無生)의 이치를 잘 알아 혜(慧)에 의존하고 수식을 하지 않았다. 그 표현이 질박하여 근본에 가깝다.”
칭찬함이 이와 같았다. 법호의 집안은 대대로 돈황에서 살았다. 그가 사람들을 교화하여 불법으로 두루 적셔주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모두 돈황 보살이라고 일컬었다.

9) 백원(帛遠)
백원의 자는 법조(法祖)이다. 본래의 성(姓)은 만(萬)씨로 하내(河內) 사람이다. 아버지인 위달(威達)은 유학(儒學)의 바른 의리로 이름이 알려져서, 고을에서 관리로 임명하려고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법조가 어린 나이에 도를 향한 마음을 일으켜서 아버지에게 출가할 것을 여쭈었다. 말하는 이치가 절실하고 지극하여 아버지가 그 뜻을 빼앗을 수 없었다. 드디어 옷을 바꾸어 입고 불도를 따랐다.
법조는 재주와 생각이 뛰어나고 민첩하며, 밝은 성격이 무리에서 빼어났다. 날마다 팔구천 글자의 경을 읽고, 대승을 닦아 뛰어나게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세속의 분소(墳素)37)도 대부분 해박하게 꿰뚫었다. 이에 장안에 정사(精舍)를 지어 강습을 일삼았다. 속인과 승려로서 가르침을 받는 이들이 거의 천 명이나 되었다.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말에 태재(太宰)인 하간(河間) 왕옹(王顒)이 관중(關中)에 주둔할 적에, 마음을 비워 공경하고 중하게 받들면서 사우(師友)의 예로 대하였다.
한가한 시간이나 조용한 밤마다 도덕(道德)에 대해서 맑게 강의하였다. 그때에 서부(西府)가 처음 지어졌다. 뒤로 갈수록 더욱더 성하였다. 말 깨나 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멀리까지 내다보는 능력에 대하여 탄복하였다.

법조는 군웅(群雄)들이 서로 다투어 바야흐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속으로 농우(隴右)에 숨어 지내며 우아한 지조를 보존하고자 뜻을 두었다. 때마침 장보(張輔)가 진주 자사(秦州刺史)가 되어 농상(隴上) 근처에 주둔함으로, 법조는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장보는 법조의 이름과 덕이 환하게 드러나고, 여러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믿고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승려의 옷을 벗겨 자기를 보좌하는 부하로 만들고 싶어하였다. 법조는 굳은 뜻을 바꾸지 않았다. 장보는 이로 말미암아 유감을 품었다.
이보다 앞서 고을사람 관번(管蕃)이 있었다. 법조와 함께 논의를 할 적마다 자주 법조의 의견에 굴복하였다. 그래서 관번은 깊이 부끄러움과 한을 품어 매번 없는 일을 꾸며대어 헐뜯었다. 법조가 길을 가다가 견현(汧縣)에 이르자 갑자기 도인(道人)과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며칠 뒤에는 전생의 인연을 갚으리라.”
그리고는 이별의 말을 하면서 유서[素書]를 써서 불경과 불상과 재물을 나누어 베풀었다.

이튿날 새벽에 장보에게 가서 함께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장보의 뜻을 거슬렀다. 장보는 그를 가두고 벌을 내리니, 사람들은 모두 괴이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다. 법조는 말하였다.
“나는 전생의 갚음을 하러 여기에 왔다. 이는 숙명의 오랜 갚음이다. 오늘의 일 때문만이 아니다.”
이에 부르짖었다.
“시방의 부처님과 조사님들이시여, 제가 전생에 몸으로 지은 죄업의 인연을 환희심으로 다 갚고자 합니다. 바라옵건대 다음 생에서는 장보와 함께 선지식이 되어 살인의 죄를 받게 마옵소서.”
드디어 채찍 50대를 맞고 갑작스럽게 목숨이 다하였다. 장보는 나중에 그 일을 모두 듣고는 크게 놀라서 안타깝게 여겼다.
과거에 법조가 도로써 교화하는 명성이 관롱(關隴)38)에 퍼졌다.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 오른쪽 지역에서는 그를 신처럼 받들었다. 그러므로 오랑캐들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한탄하고 통곡하여 장례하러 가는 길에서 눈물을 흘렸다.

농상(隴上)의 강족(羌族)과 호족(胡族)들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법조를 맞이하여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중간에 그가 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픔을 금할 길이 없어 모두들 분격하여 법조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장보가 군대를 상롱(上隴)으로 보내자, 강족과 호족들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맞아 싸웠다. 당시 천수(天水) 지방의 옛 창하독(涱下督)39) 부정(富整)이 드디어 분발하여 장보를 베었다. 여러 오랑캐들은 원한을 씻고 나서 칭선(稱善)하며 돌아갈 때에, 법조의 주검을 고루 나누어 가서 각기 탑묘(塔廟)를 세웠다.

장보의 자는 세위(世偉)이다. 남양 사람으로 장형(張衡)의 후예이다. 비록 재능과 학식은 있으나 잔혹하여 이치를 따르지 않았다. 천수의 태수 봉상(封尙)을 제멋대로 죽이니, 백성들이 의심하고 놀라서 난을 일으켜 그를 벤 것이다. 관번(管蕃)도 역시 끝내 마음을 쓰는 것이 삿되고 험악하기 때문에 패배를 불러들였다.
그 후에 얼마 되지 않아 이통(李通)이라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소생하여 말하였다.
“법조 법사(法祖法師)께서 염라대왕의 거처에 계시면서 염라대왕을 위하여 『수능엄경(首楞嚴經)』을 강의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경을 강의하는 일을 마치면 도리천(忉利天)으로 갈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좨주(祭酒: 벼슬 이름) 왕부(王浮)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명 도사(道士) 기공(基公)이라고도 하였다. 그가 온몸을 결박당한 채로 법조에게 참회를 구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예전에 법조가 평소 왕부와 더불어 매번 옳고 그름을 다툴 적에, 왕부가 막히는 일이 많자 성이 나서 스스로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불법을 왜곡하고 비방하였다. 그 재앙이 자신에게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죽어서 참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법조를 혜강(嵆康)40)과 짝하여 논평하였다.
“백조(帛祖)의 허물은 관번(管蕃)에게서 시작하고, 중산(中散)41)의 재앙은 종회(鍾會)에게서 생겨났다. 두 현인 모두 빼어난 기상을 지녔으나 자신의 몸을 도모하는 생각에 어두웠다. 세상 일 밖에 마음을 두느라 세상을 가볍게 여겼다. 그러므로 화를 불러들인 것이 자못 다르지 않다.”
법조가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다.

법조는 널리 책을 섭렵하고 익힌 것이 많아 범어(梵語)와 한문을 아주 잘하였다. 일찍이 『유체(惟逮)』ㆍ『제자본(弟子本)』ㆍ『오부승(五部僧)』 세 부(部)의 경을 번역하고, 『수능엄경』의 주(注)를 내었다. 또한 따로 여러 부(部)의 소경(小經)들을 번역하였다. 난리 통에 다 잃어버려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백법조(帛法祚)
법조(法祖)의 아우인 법조(法祚)도 역시 어려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박사(博士)로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나이 25세에 출가하여 불교의 이치를 깊이 꿰뚫어서 관롱(關隴)에서는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양주 자사(梁州刺史)는 장광(張光)이었다.
법조의 형이 옷을 바꾸어 입으려고 하지 않아서 장보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장광도 역시 법조(法祚)를 핍박하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일을 그만두게 하였다. 그렇지만 법조(法祚)는 뜻을 지키며 지조를 굳혀 죽기를 맹세하였다.
드디어 장광에게 해를 입었다. 이때 나이는 57세이다.
법조(法祚)는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주를 내었고, 『현종론(顯宗論)』 등을 지었다. 장광은 자가 경무(景武)이며 강하(江夏) 사람인데 후에 무도(武都)가 되었다. 저양(氐楊)의 난리에 적에게 포위되자 분개하여 죽었다.

∙위사도(衛士度)
당시 진(晋)나라 혜제(惠帝, 290~306) 때에 우바새 위사도라는 인물이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두 권을 번역해 냈다. 위사도는 본래 사주(司州) 급군(汲郡) 사람이다. 한문(寒門)에서 은거하고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면서 불법으로 마음을 삼았다. 그가 죽던 날에는 청정하게 몸을 닦고 천여 마디의 경을 읊었다. 그런 연후에 옷을 단정히 하고 시체처럼 누워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0)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
백시리밀다라는 중국말로 길우(吉友)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당시 사람들이 고좌(高座)42)라고 불렀다. 전(傳)에서는 말한다.
“국왕의 아들로서 마땅히 대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라를 아우에게 양보하고 남이 모르게 태백(太伯)43)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하늘의 계시를 마음속으로 깨달아 드디어 사문이 되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타고난 자태가 높고 밝았다. 신령한 풍채가 뛰어나서 직접 그를 대하면 남들보다 우뚝 빼어났다.

진(晋)나라 영가(永嘉, 307~313) 중에 처음 중국에 왔다. 난리를 만나자 양자강을 건너와서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 번 보자마자 기이하게 여겨서, 어울릴 만한 같은 무리로 생각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다. 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ㆍ광록(光錄) 주백인(周伯仁)ㆍ태상(太常) 사유여(謝幼與)ㆍ정위(廷尉) 환무륜(桓茂倫)은 모두 일대의 명사(名士)이다. 그를 보고 종일토록 여러 번 탄복하여 가슴을 열어 젖히고 관계를 맺었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라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백시리밀다라는 허리띠를 풀고 누워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말을 나누고 정신으로 교감하였다. 당시 상서령(尙書令) 변망지(卞望之)도 역시 백시리밀다라와 사이좋게 지냈다. 얼마 후에 변망지가 왔다. 백시리밀다라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용모를 꾸미고는, 단정하게 앉아 그를 대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백시리밀다라는 말하였다.
“왕공(王公)은 풍류의 도로써 대하기를 남에게 기대하고, 변령(卞令)은 법도를 따라 남에게 엄격하게 대하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입니다.”
뭇 귀족[諸公]들은 그제서야 그의 정신이 시원스러움과 엄격함의 둘 다에서 적당함을 얻었음을 칭찬하였다.
정위 환무륜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를 위하여 별명을 지으려고 하였다. 오래 지나도록 짓지 못하였다. 어떤 이가 백시리밀다라는 탁월하고 밝다는 탁랑(卓朗)이라고 하였다. 이에 환정위는 너무나 탄복하여 별명 붙이기의 극치라고 여겼다.

대장군(大將軍) 왕처중(王處仲)이 남하(南夏)에 있었다. 왕도ㆍ주백인 등 여러 제후들이 모두 백시리밀다라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일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백시리밀다라를 보자 기쁨이 마구 치달려서 한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경건함을 다 하였다.
주의(周顗)는 복야(僕射)가 되어 사람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부임하러 오다가 백시리밀다라를 방문하였다. 이에 백시리밀다라가 탄식하였다.
“만일 태평한 세상에 이러한 어진 이를 선발한다면, 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한이 없게 할 것이다.”
조금 지나서 주의가 살해를 당하였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의의 자식을 보살피러 갔다. 이에 마주 앉아 인도의 범패[胡唄] 세 계(契)를 지었다. 범패의 울림이 구름의 기운을 눌러버렸다. 다음으로 수천 글자의 주문(呪文)을 외웠다. 목소리가 높고 화창하면서도 얼굴빛이 변함이 없었다. 얼마를 지나 눈물을 흘리다가 거두었다. 그러나 신기(神氣)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가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일으키고 거두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공이 일찍이 백시리밀다라에게 말하였다.
“어울릴 만한 외국 사람으로는 그대 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백시리밀다라가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내가 그대들과 같았다면, 오늘 어찌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에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
백시리밀다라는 성품이 고상하고 간결하여 진(晋)나라 말을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제후들이 그와 더불어 말할 때에는, 백시리밀다라가 비록 번역을 통한다고 할지라도,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정신으로 깨닫고 뜻으로 이해하여 문득 그 의미를 다 알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의 타고난 빼어남과 깨달음[悟得]이 비상한 것을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는 주술(呪術)을 잘 하여서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과거 강남에는 주문을 외우는 법술이 없었다. 백시리밀다라가 『공작왕경(孔雀王經)』을 번역하여 여러 신주(神呪)를 밝혔다.
또한 제자 멱력(覓歷)에게는 높은 소리의 범패(梵唄)를 가르쳐 주었다. 지금까지 그 소리가 전한다.
진(晋)나라 함강(咸康, 335~342) 연간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여 세이다. 여러 귀족들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애통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환선무(桓宣武)가 매번 말하였다.
“어려서 고좌(高座)를 뵌 적이 있다. 그분의 정신은 당시에도 매우 뛰어나다고 칭송받았다.”
낭야(瑯琊) 왕민(王珉)은 백시리밀다라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를 위하여 서(序)를 쓰면서 말하였다.
“『춘추(春秋)』「필법」에는 오(吳)와 초(楚)를 자작(子爵)44)이라고 칭하였다. 『춘추』 3전을 지은 이들이 중국을 앞세우고 사방 오랑캐를 뒤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은주(夏殷周) 3대(代)의 중국인 후예들은 속된 것에서 벗어난 예를 행하지만, 탐욕스런 오랑캐는 어질게 양보하는 성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 우뚝한 빼어난 인물이때로 저쪽에서도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이 이곳의 인물들과 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늘이 뛰어나고 위대한 인물을 내려 줄 때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겠다.

이후 오직 한나라 때에 김일제(金日磾)45)가 있었다. 김일제의 훌륭함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충성스러우며, 덕이 있고 미더우며 순수하고 지극하다. 그러나 명석함과 통달함으로써 평가할 만한 인물감은 못된다.
백시리밀다라는 저 높은 마음의 산봉우리 끝까지 나아가신 분이다. 준수한 인걸들과 정신으로 교감을 나누시어, 바람처럼 맑게 번뇌를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셨다. 그래서 김일제와의 거리는 멀어도 너무나 멀다고 하겠다.”

백시리밀다라는 항상 석자강(石子岡)의 동쪽에 있으면서 두타(頭陀)46)를 행하였다. 그리고 삶을 마친 후에는 여기에 묻혔다. 성제(成帝)는 그의 풍모를 그리워하여 탑을 무덤에다 세웠다.
후에 관우(關右)의 어떤 사문이 서울에 와서 머물면서 비로소 무덤이 있는 곳에 절을 일으켰다. 진군(陳郡)의 사곤(謝琨)이 그 일을 도와 완성하고, 지나간 일을 추모하여 기리고자 고좌사(高座寺)라고 하였다.

11) 승가발징(僧伽跋澄)
승가발징은 중국말로 중현(衆現)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의지가 굳세어 깊고 아름다운 생각이 있었다. 뛰어난 스승을 두루 찾아다녔다. 삼장(三藏)을 갖추어 익히며 여러 경전을 널리 보았다.
특히 몇몇 경(經)에는 아주 밝았다. 『아비담비바사론(阿毘曇毘婆沙論)』을 암송하여 그 미묘한 의미를 꿰뚫었다. 항상 여러 곳을 돌아다니겠다는 뜻을 품고, 풍속을 살펴 널리 교화하였다.

부견(苻堅)의 건원(建元) 17년(381)에 관중으로 들어왔다. 이에 앞서 대승의 경전은 널리 퍼지지는 못하고, 선수(禪數)의 학문(學問)이 매우 성하였다. 그가 장안에 이르고 나니, 모두 그를 불법의 거장이라고 일컬었다.
부견의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正)은 불법을 높이 우러렀다. 외국에서는 『아비담비바사론』을 익혀야 할 으뜸으로 치는데, 승가발징이 이를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4사(事)47)의 예로써 공양하고, 범문(梵文)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마침내 이름난 덕[名德]48)을 지닌 법사 석도안(釋道安) 등과 함께 승려들을 모아 번역을 하였다. 승가발징이 불경 원본을 입으로 읊으면, 외국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붓으로 범문을 받아 적었다. 불도라찰(佛圖羅刹)이 번역하면, 진(秦)의 사문 민지(敏智)가 붓으로 받아 적어 한문본을 만들었다. 위진(僞秦) 건원(建元) 19년(383)에 번역하였다. 초여름에 시작하여 한가위에 끝마쳤다.

과거에 승가발징이 『바수밀경(婆須蜜經)』 범본(梵本)을 가지고 왔었다. 다음 해에 조정(趙正)이 다시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승가발징과 담마난제와 승가제바 세 사람이 함께 범본을 잡고, 진(晋)나라 사문 불념(佛念)이 번역하였다. 혜숭(慧嵩)이 받아 적고, 도안(道安)과 법화(法和)는 마주하여 함께 교정하였다. 이 때문에 두 가지 경전이 유포되어 전해져서 배움이 오늘에 이른다.
승가발징은 계율과 덕이 바르고 거룩하였다. 마음에 잡념이나 망상이 없이 세속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승려들이 모범으로 본받았다. 그 후 어디에서 돌아가셨는지는 모른다.

∙불도라찰(佛圖羅刹)
불도라찰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른다. 덕스런 일에 순수하고 경전을 두루 보았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노닐었기 때문에 중국어에 매우 익숙하였다. 그의 범문(梵文) 번역본이 부견(苻堅)의 시대에는 귀중하게 여겨졌다.

12) 담마난제(曇摩難提)
담마난제는 중국말로 법희(法喜)라 하며 도거륵(兜佉勒) 사람이다. 7ㆍ8 세 무렵에 속세를 떠났으며, 총명과 지혜를 일찍 이루었다.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외우며, 전심전력으로 업을 닦았다. 두루 삼장(三藏)을 보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암송하였다.
널리 알고 두루 들어 종합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여 감복하였다.
어려서부터 곳곳을 보고, 두루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항상 말하였다.
“불법을 크게 펴려면 아직 듣지 못한 곳에 베풀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멀리 고비 사막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의 보배를 품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부씨(符氏)49)의 건원(建元, 365~384) 중에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담마난제는 배움이 이미 넉넉하여 명성이 크게 났다. 그러므로 부견(符堅)이 깊이 예를 갖춰 대접하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의 여러 불경에는 아직 사함(四含:四阿含經)이 없었다. 부견의 신하로 무위태수(武威太守)인 조정(趙正)이 경을 번역할 것을 청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모용충(慕容冲)이 이미 모반하여 군사를 일으켜 부견을 공격하니 관중(關中)이 어지러웠다.
조정은 법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불도를 위하여 도안(道安) 등에게 청하여 장안성(長安城)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50) 승려들을 모았다. 그리고 담마난제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과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의 두 아함(阿含)을 번역해 낼 것을 청하였다.
아울러 이보다 앞서 『비담심론(毘曇心論)』ㆍ『삼법도론(三法度論)』 등 모두 106권을 먼저 번역했다. 불념(佛念)이 번역하고, 혜숭(慧嵩)이 붓으로 받아썼다. 여름에 시작하여 이듬해 가을까지 연속적으로 2년이 걸려 문자가 바야흐로 갖추어졌다.
그러나 요장(姚萇)이 관내(關內)를 침범하여 쳐들어오니 사람들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담마난제는 이에 그곳에서 작별을 하고 서역(西域)으로 돌아갔다. 그가 삶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조정(趙正)
그때에 부견(符堅)이 처음으로 패하자 여러 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요사한 오랑캐들이 멋대로 사납게 굴어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오히려 『대부(大部)』를 번역할 수 있었으니, 이는 대개 조정(趙正)의 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조정의 자는 문업(文業)이다. 낙양(洛陽) 청수(淸水) 사람이라고도 하고 제음(濟陰) 사람이라고도 한다. 나이 18세에 위진(僞秦)의 저작랑(著作郞)이 되었다. 후에 황문시랑(黃門侍郞), 무위태수(武威太守)에 올랐다.
그 사람의 모습이 수염이 없고 삐쩍 마르며, 처첩은 있으나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고자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 뜻과 국량이 민첩하고 통달하여, 배움이 불전과 외전(外典)을 겸비하였다. 성품이 나무라고 간하기를 좋아하여 말을 돌리거나 피하는 바가 없었다.

부견(符堅)이 말년에 선비족(鮮卑族)을 사랑하는 데에 빠져서 정사를 등한시하였다. 조정은 노래를 불러 간하였다.
예전에 들었어라. 맹진(孟津)51)의 강물은
한 굽이가 천 리에 이른다고[千里一曲].52)
이 물은 본래 맑았거늘
누가 어지럽혀 탁하게 했나.

부견이 낯빛이 변하여 말하였다.
“바로 짐이다.”

그러자 조정은 또 노래하였다.
북쪽 동산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있네.
잎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웠구나.
대추 겉이 살쪘어도 갈라보면
안에는 붉은 씨앗[赤心]53) 들어 있네.

부견이 웃으며 말하였다.
“조문업, 자네가 아닌가?”
그가 놀리는 말을 하면서도 기지(機智)가 민첩한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뒤에 관중(關中) 지방에 불법(佛法)이 성하자 조정은 이에 출가를 하고자 원하였다. 부견은 그를 아껴서 허락하지 않았다. 부견이 죽은 뒤에 이르러 바야흐로 그 뜻을 이루었다. 이름을 고쳐 도정(道整)이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송(頌)을 지었다.
부처를 따르는 생이 이리도 늦었건만
죽음은 한결같이 이리도 빠를까.
석가모니께 귀명(歸命)54)하여
오늘에야 불도에 몸담았네.

후에 상락산(商洛山)에 은둔하여 오로지 불경과 계율을 연구하였다. 진(晋)의 옹주자사(雍州刺史) 극회(郄恢)가 그의 높은 절개를 흠모하여 가까이에서 함께 노닐었다.
양양(襄陽)에서 삶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3) 승가제바(僧伽提婆)
승가제바는 중국말로 중천(衆天), 혹은 제화(提和)라고 한다. 음을 잘못 발음한 때문이다. 본래의 성(姓)은 구담씨(瞿曇氏)로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불도에 입문하여 배움을 닦으면서 멀리까지 훌륭한 스승을 구하였다. 배움은 삼장(三藏)에 뛰어났다. 특히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더욱 잘하여 그 섬세한 뜻까지 꿰뚫었다.
그는 항상 『삼법도론(三法道論)』을 읽으며 밤낮으로 감탄하고 음미하였다. 그것을 도(道)로 들어가는 곳집으로 여겼다.
사람됨은 빼어나고 밝으며, 깊이 사물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행동거지는 온화하면서도 공손하였다. 남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서 진실하면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부씨의 건원 연간(365~384)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와서 법으로 널리 교화를 펼쳐 나갔다.
과거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을 번역하고, 담마난제(曇摩難提)가 번역한 두 아함(阿含)ㆍ비담(毘曇)ㆍ광설(廣說)ㆍ삼법도(三法度) 등이 모두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모용(慕容)의 난리를 만나 오랑캐들이 어지러이 소란을 일으켰다. 게다가 번역하는 사람들도 일이 갑작스러워서 미처 세밀하게 잘하지 못하여, 뜻과 구절의 의미가 왕왕 극진하지 못하였다. 얼마 지나서 도안(道安)마저 세상을 뜨니, 미처 바로 고칠 수 없었다.
후에 산동(山東) 지방이 맑게 평정되었다. 승가제바는 이에 기주(冀州)의 사문 법화(法和)와 함께 낙양으로 가서, 4ㆍ5년간 앞서의 경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날들이 점차 쌓이면서 중국어에 두루 밝아졌다. 바야흐로 앞서 전역(傳譯)한 경들이 그 의미가 어그러지고 잘못된 것이 많음을 알았다. 법화는 미처 바로 잡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다시 승가제바로 하여금 아비담(阿毘曇)과 광설(廣說) 등 여러 경들을 번역하게 하였다.
조금 지나서 요흥(姚興)이 진(秦)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자, 불법과 관련된 일들이 매우 성하였다. 이에 법화가 관중으로 들어가고, 승가제바는 양자강을 건넜다.

이보다 앞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 법사가 대승 경전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 널리 경장(經藏)을 모았다.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멀리서 오는 손님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그가 이르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곧장 여산[廬岳]으로 들어올 것을 청하였다.
진(晋)나라 태원(太元, 376~396) 중에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과 『삼법도론(三法度論)』 등을 번역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에 승가제바는 반야대(般若臺)에서 범문(梵文)을 손수 손에 들고, 입으로는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화려함을 버리고 실질은 보존하여 그 본뜻을 드러내는 데에 힘썼다. 지금 전하는 바는 대체로 그의 문장이다.

융안(隆安) 원년(397)에 이르러 서울로 왔다. 진(晋)나라 조정의 왕들과 귀족들[王公]과 풍류를 즐기는 명사(名士)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공경의 예를 다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시에 위군(衛軍) 동정후(東亭侯)인 낭야(瑯琊)의 왕순(王珣)은 깊이가 있고 아름다우며 깊은 믿음이 있어서 불법을 늘상 지켰다. 정사(精舍)를 건립하고 널리 공부하는 대중들을 불러들였다.
승가제바가 온 뒤에 왕순은 곧 그를 맞이하였다. 정사에서 아비담을 강설할 것을 청하니,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모였다. 승가제바의 가르침이 이미 정밀한데다 뜻을 밝게 풀고 이치를 잘 펼치니, 모든 무리들이 기뻐하며 깨우쳤다. 당시에 왕미(王彌)도 역시 그 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다. 후에 다른 방에서 스스로 공부하였다.

왕순이 법강도인(法綱道人)에게 친애하는 왕미의 터득한 바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다.
승가제바가 대답하였다.
“대략 전체적으로는 옳습니다. 다만 작은 부분에서는 아직 자세하게 핵심을 파고들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설명과 분석이 분명하여 사람의 마음을 쉽게 열어주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해 겨울 왕순은 서울의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사문 석혜지(釋慧持) 등 사십여 인을 모았다. 다시 승가제바에게 『중아함경(中阿含經)』을 거듭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승가라차(僧伽羅叉)
계빈국(罽賓國)의 사문 승가라차가 범본(梵本)을 잡고, 승가제바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다음 해 여름에 그 일을 마쳤다. 그가 양자강과 낙양 근처에서 번역한 여러 경만 해도 백여 만 글자나 되었다.
북쪽과 남쪽을 차례로 돌아다녔다. 풍속(風俗)에 맞추어 조용히 기민하게 깨우치면서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잘 하였다. 그가 불도로써 중생들을 교화시켰다는 명성과 영예가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뒤에 생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14) 축불념(竺佛念)
축불념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했다. 맑고 굳건하게 뜻을 두었다. 밖으로 드러난 태도는 온화하고 내면은 밝아서 화통하며, 영특하고 민첩한 식견이 있었다. 많은 경전을 외우고 익혔으며, 거칠게나마 외전(外典)들을 섭렵하였다. 창아(蒼雅)55)와 훈고(訓詁)에 더욱 밝게 다다랐다.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 좋아하여 풍속(風俗)을 살펴 잘 맞추었다. 집안 대대로 서하(西河)에 살아, 서역 여러 나라의 말을 밝게 알았다. 중국어와 오랑캐말의 소리와 뜻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교리를 잘 이해한다는 명예는 비록 없었으나, 들은 바가 많다는 명성은 크게 드러났다.

부씨(符氏)의 건원(365~384) 중에 승가발징(僧伽跋澄)ㆍ담마난제(曇摩難提) 등이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조정(趙正)이 그들에게 여러 경들을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당시의 뛰어난 승려들도 번역할 능력이 없었다. 대중들은 모두 축불념을 추대하였다.
이에 승가발징이 범문(梵文)을 잡고 축불념이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의심나는 뜻은 판가름하여 고치니, 소리와 글자[音字]56)가 바야흐로 바로잡혔다. 건원 20년(384) 5월에 이르러 다시 담마난제에게 청하여 『증일아함경』과 『중아함경』을 번역했다.
장안성 안에 교리를 공부하는[義學] 승려들을 모아서 축불념에게 번역해 줄 것을 청하였다. 부연하며 분석하고 연구하며 밝혀 나간 뒤, 2년 만에야 끝을 맺었다. 두 아함(阿含)을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은 축불념이 번역하여 펴낸 공로에 힘입었다.

안세고(安世高)와 지겸(支謙) 이후로는 축불념을 뛰어넘는 이가 없었다. 부견(符堅)과 요홍(姚泓) 2대에 걸쳐 번역하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러므로 관중(關中)의 대중승려들은 모두 함께 그를 칭찬하였다.
뒤이어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ㆍ『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ㆍ『출요경(出曜經)』ㆍ『포태경(胞胎經)』ㆍ『중음경(中陰經)』 등을 냈다. 처음으로 안정되게 바로 잡기는 했으나 뜻에 미진한 곳이 많았다.
마침내 병이 들어 장안에서 삶을 마쳤다. 원근(遠近)의 승려들과 세속인들이 탄식하여 아쉬워 마지않았다.

15) 담마야사(曇摩耶舍)
담마야사는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열네 살에는 불야다라(弗若多羅)57)가 알아줄 정도였다. 커서는 기운과 재간이 높고 시원하며, 바르고 신령스런 지혜[神慧]가 있었다.
경전과 율장을 두루 보아 환하게 깨달은 것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8선(禪)을 도야하고 7각(覺)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부두바타(浮頭婆馱)에 비유하였다.
산택(山澤)에서 외롭게 수행하며 늑대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았다. 홀로 머물러 생각에 깊이 잠겨 자칫하면 밤낮을 바꾸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나무 아래에서 수행하며, 매양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 30에 이르도록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다니, 어찌 이리도 게으른가?”

이에 여러 날 동안 잠을 자지 않고 먹지 않았다. 오로지 고행으로 정진하며 예전에 지은 죄들을 참회하였다. 이에 꿈속에서 박차천왕(博叉天王)을 뵈었다. 그 분이 말씀하셨다.
“사문이란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널리 교화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기를 늘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렇거늘, 어찌 쩨쩨한 절개에 얽매여서 홀로 자기만을 착하게 할 뿐인가? 도는 여러 인연을 빌리고 다시 무르익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 분수가 아닌데도 억지로 구하면 죽도록 증험이 없으리라.”
곧 깨닫고 스스로 사유(思惟)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전수하고자 하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름난 곳을 지나고 여러 나라를 거쳤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당시 이미 나이가 85세이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85인이었다. 그때 청신녀(淸信女:優婆夷) 장보명(張普明)이 불법에 대해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담마야사는 그녀를 위하여 부처님 생애의 연기(緣起)에 대하여 설법하였다. 아울러 『차마경(差摩經)』한 권을 번역해 냈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당시에는 요흥(姚興)58)이 참람한 연호를 쓰면서 불법을 매우 존숭하였다. 담마야사가 그곳에 이르자 매우 특별하게 예우를 갖추었다.
마침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가 관중으로 들어왔다. 비슷한 이들끼리 서로 만났으므로[同氣相求]59) 완연히 옛 친구 같았다. 이 때문에 담마야사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60)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고요함을 맛보러 온 나그네 중에는 가시덤불을 헤치고 이른 자도 3백여 명이었다. 무릇 선비나 서민들 가운데, 비록 그 전에는 불교를 믿는 마음이 없었던 이라 할지라도, 뵙기만 하면 모두 공경하고 기뻐하였다. 담마야사는 스스로 말하였다.
“스승 한 사람과 제자 한 사람이 업을 닦아서[修業] 함께 나한(羅漢)의 경지를 터득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그 정확한 이름은 잊었다.

또한 일찍이 바깥문에서 문을 닫고 좌선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5ㆍ6명의 사문이 그 방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때로는 사문이 나무 끝에서 날아오는 것을 본 사람도 왕왕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신명(神明)과 교접(交接)하면서도 어리석은 속세 사람들을 굽어보아 함께 하였다. 비록 도의 자취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과(聖果)61)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축법도(竺法度)
담마야사에게는 법도라는 제자가 있다. 범어(梵語)와 중국어를 잘하여 항상 번역을 하였다. 법도는 본시 축바륵(竺婆勒)의 아들이다. 축바륵은 오랫동안 광주(廣州)에서 머무르며, 이득을 구하여 오갔다.
이렇게 오고 가는 도중에 남강(南康)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남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커서는 금가(金迦)라고 불렀다. 불도에 들어온 이후에는 법도(法度)라고 하였다. 법도는 처음에 담마야사의 제자가 되어 경법(經法)을 이어받았다.

담마야사가 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법도는 문득 잘못된 곳을 바로잡는다고 홀로 고집하여 일정한 규칙으로 남들을 이끌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로지 소승(小乘)을 배워야 한다. 대승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한다. 오직 석가만을 예불하라. 시방불(十方佛)에게는 하지 말라. 먹을 때는 구리 발우를 써라. 따로 응기(應器)62)를 두지 말아라.”
또한 여러 비구니들에게 명하여 서로 잡고 길을 다니게 했다. 죄를 뉘우치는 날에는 단지 땅에 엎드려서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다. 오직 송(宋) 땅의 옛 단양(丹陽) 지사 안원(顔瑗)의 딸 법홍(法弘)비구니, 교주 자사(交州刺史) 장목(張牧)의 딸 보명(普明)비구니가 처음으로 그 법을 받았다. 지금 서울의 선업(宣業)과 홍광(弘光) 같은 여러 비구니들이 그가 남긴 가르침을 익혔다. 동쪽 땅의 비구니들에게도 당시 그러한 법을 전했다.

주석
1 인도를 가리키는 말. 인더스 평원과 강물을 보고 경탄하는 소리를 한 신두(Sindhu, 물ㆍ큰 바다라는 뜻)라는 말이 이 강과 이 지방의 이름이 되고, 이것을 중국에서 신두(辛頭) 또는 천두(天頭) 등으로 음역하였다. 이것이 차차 변하여 한나라 때부터 천축(天竺)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
2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서 신상보살을 위하여 부처님의 수명이 한량없음을, 견뢰지신(堅牢地神)을 위하여 찬탄하는 게송을, 그 밖에 사천왕ㆍ대변천신(大辯天神)ㆍ공덕천(功德天) 등을 위하여 이 경이 미묘하여 여러 경의 왕인 까닭을 말하고 있다. 옛적부터 나라를 수호하는 미묘한 경전으로 존숭되었다.
3 학식(學識)이 깊고 넓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4 범어로는 Caturdesa라고 한다. 여러 곳에서 모여 오는 스님들이 쉬어가도록 마련한 절이다. 초(招)는 원래 척(拓)이던 것이 쓰는 이의 잘못으로 언제인지 모르게 초(招)로 되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상권에 의하면 인도와 서역에 초제(招提)가 있고, 중국에서는 낙양의 백마사가 초제사였다는 기록이 있다.
5 범어로는 Udayana이다. 옛날 석존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니를 위하여 설법을 하셨는데, 구섬미국(拘睒彌國)의 우전왕이 그 일을 사모하여 석존의 모습을 붉은 전단목(旃檀木)에 새겼다. 그 일은 『서역기(西域記)』에 실려 있다.
6 한 무제가 신독국(身毒國: 옛 인도의 음역으로 천축국을 말한다)과 교통하고자 하였으나 월휴(越雟)와 곤명(昆明)의 방해를 받았다. 이에 곤명의 전지(滇池)를 본떠서 장안(長安) 근교에 땅을 파서 곤명지를 만들고 수전(水戰)을 준비하였다. 호수의 주위가 40리요, 너비가 332경(頃)이다.
7 대삼재(大三災)의 하나. 세계가 괴멸하는 괴겁(壞劫) 때에 일어나는 큰 화재로 이때에 일곱 개의 해가 하늘 위에 나타나 초선천(初禪天)까지는 모두 이 화재로 불탄다고 한다.
8 페르시아 지방을 말한다.
9 일(日)ㆍ월(月)ㆍ수(水)ㆍ금(金)ㆍ화(火)ㆍ목(木)ㆍ토성(土星)의 운행에 대한 학문.
10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삼장(三藏) 중의 하나인 논장(論藏)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존재의 진실상(眞實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비담(毘曇)ㆍ아비달마(阿鼻達磨)라고도 한다.
11 심신을 안정시키고 생각을 정지시켜 진실한 지혜의 움직임을 얻는 것을 설하는 경전을 말한다.
12 재위 기간은 147년부터 167년에 이른다.
13 경ㆍ율ㆍ논에 통달한 스님.
14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구강시(九江市) 남쪽에 있다.
15 여산(廬山) 동쪽에 위치한 파양호나 동북방에 있는 원호 또는 용호로 짐작된다.
16 절대적 본체인 본지불(本地佛)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자취를 보인 것.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일부러 여러 가지 다른 모양으로 화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함.
17 여기에서의 『경록(經錄)』은 『경록중경(經錄衆經)』의 준말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18 부처님의 교법(敎法)을 설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고통 세계를 벗어나 이상경(理想境)에 이르게 하는 훌륭한 스승.
19 인도 북서방에 있는 나라이다.
20 후한(後漢) 178~183년.
21 후한 184~189년.
22 인도 사람 달마시리(達摩尸利). 2세기의 학승(學僧)으로 유부(有部)의 교의(敎義)를 넓혀 『아비담심론』 4권을 지었다.
23 삼황 오제(三皇五帝)의 전적(典籍)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오래된 옛 고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24 본 뜻은 신ㆍ구ㆍ의의 삼업을 경계하여 악업을 짓지 아니함을 말한다.
25 강좌(江左)는 양자강의 동쪽 지방을 가리키는데, 지금의 강소성(江蘇省) 지역을 말한다.
26 오나라의 수도로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27 B.C. 2세기 인도 마가다국 아쇼카왕의 한자명(漢字名)이다. 불교를 보호하고 융성하게 하였다.
28 『논어(論語)』「자한편(子罕篇)」에 나오는 말이다. 이 내용은 광(匡)땅 사람들이 공자를 양호(陽虎)라는 인물로 착각하여 해치려고 하던 상황에서 공자가 한 말이다. 여기서 문(文)은 도(道)가 드러난 것을 뜻하는 것으로 공자가 스스로를 낮추어 도라고 하지 않고 문이라고 한 것이다. 문왕(文王)의 도(道)가 자신에게 전해졌으니, 이는 하늘이 문(文)을 없애려고 하지 않은 것이며 하늘이 없애려고 하지 않았으니, 광땅의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29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로 곧 날이 밝을 녘을 말한다.
30 『장자(莊子)』「덕충부(德充符)」에 있는 말.
31 『시경』「대아(大雅)의 한록(旱麓)」편에 있는 시구로 군왕의 복록(福祿)을 축복하는 매우 경사스런 노래이다.
32 재가 신도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 불살생(不殺生)ㆍ불투도(不偸盜)ㆍ불사음(不邪淫)ㆍ불망어(不妄語)ㆍ불음주(不飮酒).
33 열반성(涅槃聲)과 같은 것으로서 범음(梵音)이다.
34 사전의 해석에 따르면 본래 수계사(授戒師)를 말하는 것이나, 뒤에는 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키는 뜻으로 바뀐다. 수계사로 쓰인 한 번을 제외하고는, 『고승전』전편 내내 화상(和尙)은 자신의 스승 또는 스승에 준하는 덕이 높은 승려를 일컫는다. 여기의 화상 역시 유기난의 스승을 말한다.
35 불교 전적(典籍)의 총칭으로, 경장(經藏)ㆍ율장(律藏)ㆍ논장(論藏)이 있다.
36 진(晋)나라 초세(初世)에 노장허무(老莊虛無)의 학문을 숭상한 일곱 사람으로, 완적ㆍ혜강ㆍ산도ㆍ향수ㆍ유령ㆍ왕융ㆍ완함이다.
37 고대 전적(古代典籍)을 범칭하는 말.
38 관중(關中)과 감숙성(甘肅省) 동부 일대를 말함.
39 군중(軍中)ㆍ관좌(官佐)의 일종.
40 위나라 때 사람으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당시는 위진의 교체기여서 통치 계급의 싸움이 심하였다. 그는 노장을 숭상하였고 강직하며 악을 혐오하였기 때문에 남의 미움을 많이 받았다. 뒤에 모함을 받아 끝내 사마소(司馬昭)에게 살해당하였다.
41 혜강이 중산 대부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중산이라고 불렀다.
42 강(講)하는 자리를 말하는데, 강을 듣는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43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큰 아들로서 태백(泰伯)이라고도 한다. 그는 왕위를 사양하고 막내인 공계(公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공자도 『논어』에서 이러한 덕을 찬양하였다.
44 다섯 등급의 작위 중에 네 번째 위치로 백작의 아래이며 남작의 위이다.
45 한나라 무제 때 사람이다.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이다. 무제가 시중 벼슬을 준 뒤로 수십 년 동안에 과실(過失)이 없었다. 사람이 매우 신중하여 황제의 신임과 사랑을 받았다.
46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열두 종의 행(行)이 있다.
47 네 가지 공양이란 의복ㆍ음식ㆍ탕약(湯藥)ㆍ와구(臥具)를 말한다.
48 덕이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
49 부견(符堅)을 말한다. 부견의 자(字)는 영고(永固)인데 문옥(文玉)이라고도 한다. 승평(升平) 원년에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고 칭하였다.
50 명상(名相)과 훈의(訓義)의 학. 명목을 세우고 수를 정하여 인과 계급을 의논하여 모든 법의 모양을 말하고 문자를 해석하는 학문.
51 옛날 황하(黃河)의 나루 이름.
52 옛날부터 전하기를, 황하는 곤륜산(崑崙山)에서 흘러 나와 9곡(曲)을 이루며 흐르는데, 그 한 굽이[曲]가 천 리에 이른다고 한다.
53 대추 씨앗을 가리키면서 한편으로는 임금을 향한 충성된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54 범어로는 namas라고 한다. 나무(南無)라고 음역하는데, 나의 신명을 던져 의탁한다는 뜻이다.
55 삼창(三蒼)과 이아(爾雅)를 말한다.
56 음(音)을 표기하기 위해서 같은 음, 혹은 음이 비슷하여 쓰는 글자로, 뜻은 없고 음만 있다.
57 범어로 Punyatara라고 하며 공덕화(功德華)라고 번역한다. 경ㆍ율ㆍ논 삼장을 구비하여 통달하였고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요진의 홍시(399~415) 때에 중국에 와서 장안에서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률』 번역에 종사하여 3분의 2쯤 이루고 병으로 입적하였다.
58 후진(後秦)의 왕으로서 신분에 넘치는 칭호를 자칭(自稱)하였다.
59 『주역(周易)』「건괘(乾卦)」에 나오는 말로 천지 사이에 서로 감응(感應)하여 각기 그 기류(氣類)를 좇는 것을 말한다.
60 요씨의 나라를 정통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저술자의 사관 때문에 위(僞)라는 표현을 썼다.
61 성자(聖者)가 되는 수행을 쌓아서 얻은 진정한 과(果).
62 범어(梵語) patra의 의역(意譯)이며, 음역(音譯)으로는 발다라(鉢多羅)라고 한다. 발우를 의미하는 말로, 비구가 자신이 먹을 양을 헤아려 먹는 걸식기(乞食器)이다.
『고승전』 1권(ABC, K1074 v32, p.764b01-p.774c01)

고승전(高僧傳) 제2권

1. 역경 ②

1) 구마라집(鳩摩羅什)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 동수(童壽)라 하며 천축국(天竺國)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名聲)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에 사양하고 출가(出家)하여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구자국(龜玆國) 왕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다.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鳩摩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구마염을 핍박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하는 것을 자각(自覺)하였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王室)의 귀부인들과 덕행(德行)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재(齋)를 청하여 법문(法門)을 들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되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리불(舍利佛)이 뱃속에 있을 때의 증험(證驗)을 설법하였다.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모친은 즐거이 출가(出家)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불사제바(弗沙提婆)라고 불렀다.
뒤에 성(城)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다. 무덤 사이에 마른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사유(思惟)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약 머리를 깎지 못한다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엿샛날 밤에 이르자 기력(氣力)이 실낱같이 쇠약해졌다. 자칫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이르지 못할 듯했다. 이에 남편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녀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삭발을 해 주니 그제야 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계(戒)를 받았다. 선법(禪法)을 좋아하여 애오라지 정진하고 나태하지 않아, 초과(初果)를 배워 터득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暗誦)하였다. 한 개의 게송(偈頌)이 32자(字)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비담(毘曇)을 암송한 뒤에, 스승이 그 뜻을 전수하였다. 즉시 통달하여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龜玆國)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를 피하여 구마라집을 이끌고 떠났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렀다. 이름난 덕을 지닌[名德] 법사(法師)인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왕(罽賓王)의 사촌 아우이다.
깊고 순수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九部)를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偈頌)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은 계빈국에 이르러 곧 그를 스승의 예로써 존숭하였다. 그에게서 『잡장(雜藏)』ㆍ『중아함경(中阿含經)』ㆍ『장아함경(長阿含經)』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자, 마침내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공격하여 힐난(詰難)하게 하였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外道)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不遜)하였다. 구마라집이 틈을 타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雙),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斗], 소(酥) 여섯 되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外國)에서는 상등(上等) 공양에 해당한다.
구마라집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住持)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沙彌) 열 명을 보냈다. 비로 쓸고 물 뿌리는 일을 맡겨, 구마라집의 제자같이 하게 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龜玆國)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로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북쪽 산(山)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나한은 구마라집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항상 이 사미(沙彌)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이다.”

구마라집이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頂戴].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곧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사륵국에 일년 간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하였다.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品)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하였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沙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하여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龜玆國) 왕은 필시 ‘구마라집이 우리나라 출신(出身)인데, 저들이 구마라집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友好)를 교환할 것입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집을 청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과연 구자국 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하여 두터운 우호에 보답하였다.

구마라집은 설법하는 여가에 외도의 경전들을 탐색하였다. 『위타함다론(圍陀含多論, vedasastra)』을 잘 익혀서, 글을 짓고 묻고 답하는 따위의 일에 매우 밝았다. 또 사위타(四圍陀)의 전적들과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널리 읽었다. 음양(陰陽)ㆍ성산(星算:天文曆數)까지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吉凶)에도 미묘하게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으니, 수행자(修行者)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자연스런 마음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사거왕자(莎車王子)와 참군왕자(參軍王子), 형제 두 사람이 나라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형은 자(字)를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자를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라고 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오로지 대승(大乘)으로써 교화하였다. 그의 형과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도 역시 수리야소마를 존숭하고 받들었다. 가까이 하여 좋아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수리야소마는 뒤에 구마라집을 위하여 『아뇩달경(阿耨達經)』을 설해 주었다.
구마라집은 스승에게서 “음(陰)ㆍ계(界)ㆍ제입(諸入)은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相)하다”는 설법을 들었다. 괴이쩍게 여겨 질문하였다.
“이 경에는 다시 무슨 뜻[義]이 있기에, 모든 현상을 있는 족족 모두 파괴해 버립니까?”

수리야소마는 답하였다.
“안(眼) 등의 모든 현상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마라집은 이미 ‘안근(眼根)이 존재한다’고 집착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인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 실체는 없다’는 데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깊이 궁구하여 밝혀[硏覈], 서로 주고받는 문답이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되었다.

구마라집이 비로소 이치의 돌아감을 알고는 마침내 오로지 대승 경전을 힘써 공부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옛날에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구나.”
그러고는 대승에서 중요한 것들을 널리 구하여, 『중론(中論)』ㆍ『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외웠다.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나아가 온숙국(溫宿國)에 이르렀다. 바로 구자국의 북쪽 경계였다. 당시 온숙국에는 한 도사(道士)가 있었다. 신묘(神妙)한 말솜씨가 빼어나서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쳤다.
그는 제 손으로 왕의 큰 북을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였다.
“논쟁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목을 잘라서 사죄하겠다.”
구마라집이 이른 뒤에 둘이 서로 다른 논쟁을 벌여 따졌다. 도사는 헷갈리고 얼이 빠져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歸依)하였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의 명성이 파미르 고원 동쪽에 가득하였다. 명예가 황하[중국] 밖에서는 널리 퍼졌다.
구자국왕은 몸소 온숙국까지 가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구자국으로 돌아왔다. 널리 여러 경들을 강설하니, 사방의 먼 지방에서 존숭하고 우러러 아무도 그를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당시 한 왕녀(王女)가 비구니가 되었다. 자(字)를 아갈야말제(阿軻耶末帝)라고 한다. 그 비구니는 많은 경전들을 널리 보았다. 특히 선(禪)의 크나큰 요체를 깊이 알았으며, 이미 2과(果: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하였다. 그 비구니는 구마라집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줄 것을 청하였다.
구마라집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다 공하여 내가 없음[皆空無我]을 미루어 변론하였다. 음(陰)이나 계(界)는 임시 빌려 쓴 이름이지 실제가 아님[假名非實]을 분별하였다. 당시 모인 청중들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슬프게 느끼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라마집의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왕궁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안 되어 쇠망(衰亡)할 것입니다. 나는 이곳을 떠납니다. 천축국에 가서 3과(果: 아나함과)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승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하여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하겠니?”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利益)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大化]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신사(新寺)에 거주하였다. 후에 절 곁의 오래된 궁중에서 최초로 『방광경(放光經)』을 얻었다. 즉시 책장을 펼쳐서 읽으려고 할 때에, 마라(魔羅, Mara)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종이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마라의 소행인 줄 알고는,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자 마라가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다. 인하여 『방광경』을 익히고 암송하였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마라이다.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와 같아 굴러가게 할 수 없다.”
구자국의 신사(新寺)에 머물렀다. 머무른 2년 동안 널리 대승의 경론(經論)들을 외우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金師子)의 법좌(法座)를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에 올라 설법하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스승님도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스승님께 교화를 하고자 합니다. 이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승인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구자국에 이르렀다.
왕이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어찌 이리도 먼 길을 방문하셨습니까?”
반두달다가 대답하였다.
“첫째는 제자 구마라집의 깨달음이 범상(凡常)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대왕께서 불도(佛道)를 널리 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신령스런 나라로 달려온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방문으로 인해 본디부터 품던 회포를 풀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덕녀문경(德女問經)』을 설법하여 모든 현상이 대부분 인연(因緣)ㆍ공(空)ㆍ가(假) 임을 밝혔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모두 믿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강설한 것이다.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현상을 보았기에 그렇게도 숭상하려고 하는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맑아, 모든 존재하는 현상이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구분하여, 여러 가지 빠뜨려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하였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一切皆空]’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떻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꼭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그 미치광이가 실을 잣는 이에게, 실을 잣되 최대한으로 가늘면서도 보기 좋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실 잣는 이가 정성을 기울여 먼지처럼 가늘게 실을 자았다. 미치광이는 그것도 오히려 굵다고 원망하였다.
실 잣는 이는 크게 노하여 허공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가는 실입니다.’라고 하니, 미치광이는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실 잣는 이는 ‘이 실은 너무 가늘어 우리 중의 솜씨 좋은 장인(匠人)조차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치광이는 크게 기뻐하였다. 보이지 않는 그 실로 베를 짜 달라고 베 짜는 이에게 부탁하였다. 베 짜는 이도 역시 실 잣는 이를 그대로 흉내내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상(賞)을 받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너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구마라집은 계속해서 비슷한 것끼리 연관지어[連類] 진술하였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지 한달 남짓 지나자, 스승이 마침내 믿고 받아들였다.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바로 여기에서 증험하는구나.”
이에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화상(和上)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에 엎드려 복종했다. 매년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法座) 옆에 꿇어 엎드렸다.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오르게 하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당시 부견(符堅)이 관중(關中)에서 외람되이 천자라고 일컬었다[僭稱]. 외국(外國)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龜玆王)의 동생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하였다. 부견이 두 왕을 알현하였다.
이 두 왕이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서역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산출됩니다.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가 평정하여 속국이 되기를 요구하십시오.”

부견의 건원(建元) 13년(378)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襄陽)에는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을 찾았다.

17년 2월에, 선선왕(鄯善王)과 전부왕(前部王) 등이 또다시 부견에게 군사를 청하여 서역을 정벌하자고 달래었다.
건원 18년(382) 9월,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과 능강장군(陵江將軍) 강비(姜飛)를 파견하였다. 전부왕(前部王)과 거사왕(車師王) 등을 거느리고 군사 7만 명을 이끌어서 서쪽으로 갔다. 구자국(龜玆國)과 언기국(焉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을 건장궁(建章宮)에서 전별(餞別)하면서 여광에게 말하였다.
“대저 제왕(帝王)은 천명(天命)에 응하여 다스리고 창생(蒼生)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愛]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도의를 품는 사람[懷道]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 이들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에게 진언했다.
“구자국의 국운은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마침내 여광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동생 백진(白震)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하여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하였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密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집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광은 또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집이 진언하였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비밀스럽고 남다르게 여겼다.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진언하였다.
“이곳은 흉망(凶亡)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運數)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이 요장(姚萇)에게 시해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여광의 삼군(三軍)은 상복을 입고 양주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이리하여 여광은 관외(關外)에서 참칭(僭稱)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칭하였다

태안(太安) 원년(385) 정월, 고장(姑臧)에 큰바람이 불었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바람입니다. 반드시 간특한 반란(叛亂)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갑자기 양겸(梁謙)과 팽황(彭晃)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죽어 사라졌다.

여광의 용비(龍飛) 2년(396)에, 장액(張掖) 임송(臨松)의 노수호(盧水湖)에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사촌아우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모반하여, 건강 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서자(庶子)인 진주자사(秦州刺史)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다.
“단업(段業) 등은 까마귀떼처럼 규율이 없고, 여찬에게는 위세와 명망이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여광이 구마라집에게 상의하니,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번 출행을 관찰해 보건대 아직 그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여찬은 합리(合梨)에서 크게 패하였다. 갑자기 또 곽형(郭馨)이 난리를 일으켰다. 여찬은 대군(大軍)을 내버리고 몇몇 군사들만을 데리고 귀환하다가, 다시 곽형에게 패배 당하였다. 겨우 자신의 몸만 벗어날 수 있었다.
여광의 중서감(中書監) 장자(張資)는 문필(文筆)이 있고 온화하며 아담하였다. 여광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장자가 병이 들자, 여광은 널리 병을 낫게 할 훌륭한 의사를 구하였다. 외국의 도인 라차(羅叉)가 말하였다.
“장자(張資)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여광은 기뻐하여 그에게 매우 많은 금품을 하사하였다.
구마라집은 라차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라차의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갓 번거롭게 재물을 낭비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구마라집은 오색실로 새끼를 만들어 매듭을 짓고 태워서 잿가루를 물 속에 던졌다.
“만약 재가 물에 떠올라도 도로 새끼 모양이라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재가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원래의 새끼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라차의 치료는 효험이 없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자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여광도 죽었다[卒].
여광의 아들 여소(呂紹)가 왕위를 이었다. 수일이 지나자 여광의 서자 여찬이 여소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연호를 함녕(咸寧)이라 일컬었다.

함녕 2년(400), 돼지가 머리 셋 달린 새끼를 낳았다. 용이 동쪽 곁채의 우물 속에서 나와 대전(大殿) 앞에 몸을 서렸으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찬은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대전을 용상전(龍翔殿)이라 불렀다. 얼마 후 또 검은 용이 당양(當陽)의 구궁문(九宮門)에서 승천했다. 여찬은 이 구궁문을 용흥문(龍興門)이라 개칭하였다.

구마라집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요즈음 물 속에 잠겨 있는 용[潛龍]이 출몰하고 돼지도 괴이한 일을 보입니다. 용은 음한 생물로서 드나드는 일정한 때가[出入有時]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주 나타나는 것은 재앙이 있을 징조입니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반하는 변괴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사욕을 극복하고[克己]덕을 닦아[修德], 하늘이 보여주는 타이름에 보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찬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찬이 구마라집과 바둑을 두었다. 여찬이 구마라집의 바둑돌을 희롱하며 죽이고 말하였다.
“오랑캐 놈[胡奴]의 머리를 벨 것이다.”

구마라집은 말하였다.
“오랑캐 놈의 머리는 베지 못할 것입니다. 오랑캐 놈이야말로 사람의 머리를 벨 것입니다.”
이 구마라집의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여찬(呂纂)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여광(呂光)의 아우 여보(呂保)에게는 여초(如超)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여초(如超)의 어렸을 적의 이름이 호노(胡奴)였다. 뒤에 과연 여찬(呂纂)의 목을 베고, 자기 형 여륭(呂隆)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구마라집의 예언을 증험하였다.

구마라집이 양주(凉州)에 체류한 지 수 년이 되었다. 여광(呂光) 부자가 도를 널리 펴지 않는 까닭에,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弘道]이 없었다. 부견(苻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구마라집과 끝내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요장(姚萇)이 관중(關中)을 참칭하고 소유하였다. 그도 역시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워서 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들을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姚萇)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요청하였다. 요흥(姚興)의 홍시(弘始) 3년(401) 3월, 궁중의 광정(廣庭)에 연리지(連理枝)가 나고, 소요원(逍遙園)의 파가 변하여 난초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슬기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5월에 이르러 요흥(姚興)이 농서공(隴西公) 요석덕(姚碩德)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여륭(呂隆)을 정벌하게 하였다. 여륭(呂隆)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자, 9월에 여륭(呂隆)이 표문을 올리고 항복하였다. 비로소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관중(關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요흥(姚興)이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은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노라면[晤言] 머무르는 것이 오래 걸려 하루 해가 지나갔다.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니,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나는 줄 몰랐다.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文字)에 막혀서, 뜻을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姚興)은 어려서부터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웠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이른 뒤에 요흥(姚興)은 그에게 청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하였다.

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을 살펴보니,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이전에 먼저 번역한 경전들이 바른 의미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姚興)은 사문 승략(僧䂮)ㆍ승천(僧遷)ㆍ법흠(法欽)ㆍ도류(道流)ㆍ도항(道恒)ㆍ도표(道標)ㆍ승예(僧叡)ㆍ승조(僧肇) 등 8백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姚興)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흡족하여 기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姚興)은 불도(佛道)가 깊고 오묘하며, 그 착함을 실천하여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요흥(姚興)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었다.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 모두가 그의 풍모를 흠모하고 찬탄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상산공(常山公) 요현(姚顯)과 좌군장군(左軍將軍) 안성후(安城侯) 요숭(姚嵩) 등은 모두 인연(因緣)과 업(業)을 독실하게 믿었다. 여러 번 구마라집을 장안 대사(長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였다.

계속해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ㆍ『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ㆍ『십주경(十住經)』ㆍ『법화경(法華經)』ㆍ『유마힐경(維摩詰經)』ㆍ『사익경(思益經)』ㆍ『수능엄경(首楞嚴經)』ㆍ『지세경(持世經)』ㆍ『불장경(佛藏經)』ㆍ『보살장경(菩薩藏經)』ㆍ『유교경(遺敎經)』ㆍ『보리경(菩提經)』ㆍ『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ㆍ『보살가색욕경(菩薩呵色欲經)』ㆍ『자재왕경(自在王經)』ㆍ『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ㆍ『신현겁경(新賢劫經)』ㆍ『선경(禪經)』ㆍ『선법요(禪法要)』ㆍ『선법요해(禪法要解)』ㆍ『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ㆍ『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ㆍ『십송률(十訟律)』ㆍ『십송비구계본(十訟比丘戒本)』ㆍ『보살계본(菩薩戒本)』ㆍ『대지도론(大智度論)』ㆍ『성실론(成實論)』ㆍ『십주론(十住論)』ㆍ『중론(中論)』ㆍ『백론(百論)』ㆍ『십이문론(十二門論)』 등 3백 여 권을 번역해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신묘한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발휘하였다. 당시 사방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이[義學之士]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두 다 우러러보는 바이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 놓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과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매양 승예(僧叡)를 위하여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마음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까지 퍼지고
오동나무에 외로이 깃든 슬픈 난새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커다란 게송 10게를 지었으니, 게송에서의 글의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집은 평소 대승(大乘)을 좋아하여, 대승(大乘)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維摩經)』에 주를 내었다. 말을 내어 문장을 이룬 것[出言成章]은 깎아 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簡明)하여, 그윽하고 깊숙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透徹)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진나라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의 총명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기녀(妓女)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 이후로부터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모든 것을 풍부함이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양 강설(講說)할 때에는 먼저 스스로 설하였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예전에 구마라집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중국 땅에 지중한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부분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학도들이 저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여 있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또 비구 배도(杯渡)가 팽성(彭城)에 있었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탄식하였다.
“그대와 내가 장난처럼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다. 그렇건만 이 생에서는 아득히 기약이 없구려. 더디지만 내생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라오.”

구마라집이 아직 임종하기 전 어느 날, 약간 온몸이 상쾌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에 곧 입으로 세 번 신주(神呪)를 외웠다. 게다가 외국 제자들에게도 이 주문을 외우게 하여, 병을 나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한층 더 위독해졌음을 알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승려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위진(僞秦:前秦) 홍시(弘始) 11년(409) 8월 20일 장안(長安)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는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熙) 5년(409)이다.
곧바로 소요원(遡遙園)에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焚身之後舌不燋爛]. 후에 어떤 외국 사문이 와서 말하였다.
“구마라집이 암송한 것 중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과거 구마라집은 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였다. 외국의 이름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었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둘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죽은 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같지 않다. 혹자는 홍시(弘始) 7년(405)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8년, 혹자는 11년이라고도 한다. 고찰해 보건대, 칠(七)자 와 십일(十一)자는 혹 글자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록(譯經錄)』의 전(傳) 속에도 1년으로 된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세 가지 주장의 어느 쪽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할까 두려워 딱히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

2) 불야다라(弗若多羅)

불야다라는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을 잘 지키는 행실로 칭찬 받았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 부(部)1)에 정통하여 외국에서 으뜸가는 스승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으뜸가는 손님의 예로 대우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그 계행의 본보기에 절하며 두터이 존경하였다. 이에 앞서 비록 경법(經法)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율장(律藏)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미 불야다라가 이 율부에 빼어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 사모하였다.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병에 걸려 갑작스러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큰 일이 미처 성취되지 않았을 때 뛰어난 분이 돌아가셨으므로, 대중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깊이가 보통의 아픔을 넘어섰다.

3) 담마류지(曇摩流支)

담마류지는 중국말로 법락(法樂)이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율장(律藏)으로 명성을 날렸다.
홍시 7년(405) 가을에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과거 불야다라가 『십송률』을 외워 내다가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산의 석혜원은 달마류지가 비니(毘尼: 율장)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율부를 완성하기를 희망하였다. 곧 그에게 편지를 띄워 교유(交遊)를 통하였다.
“불교가 흥기하여 먼저 그대의 나라에서 행해지다가 갈래가 나뉘어져 흘러들어온 이후로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문의 계율에 있어서는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지난번 서역의 도사 불야다라는 계빈국 사람입니다.
그는 『십송률』의 범본을 외웠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이것을 옮겨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송률』의 글이 막 절반을 넘기 시작할 때 불야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일을 중도에 그쳐서 완성할 수 없자, 개탄스럽고 한스러움이 참으로 깊었습니다.

이제 ‘어진 분께서 이 경을 가지고 몸소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운수가 이른 것입니다. 어찌 사람이 일삼아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도를 널리 펴고자 때에 감응하여 움직이셨으니,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인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계율을 배우는 무리들을 위하여 이 경본을 완성시켜서, 청정한 행을 열어 보여 그들의 눈과 귀를 씻어주시고, 처음 번뇌의 물결을 건너려는 이들로 하여금 위없는 나루를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수승(殊勝)한 업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해와 달보다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은혜가 깊고 덕이 두터운 것이니, 사람이나 신(神)이나 다 함께 감동할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우시어,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뜻을 천에 하나나 만에 둘이라도 어기지 않으셔서, 여러 도인들이 아뢰는 뜻을 살펴 주기를 원합니다.”
담마류지는 혜원의 편지를 받은 데다 요흥(姚泓)의 도타운 요청을 받자,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률』을 함께 번역하여 모두 끝마쳤다.

자세하게 연구하고 엄격하게 고증하여 계율의 조목을 자세히 정했다. 구마라집은 문장이 번잡하여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입적하여, 깎아 내어 다듬을 수 없었다.
담마류지는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혜관(慧觀)이 강남의 서울인 건강(建康)으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담마류지는 말하였다.
“그 땅에는 그럴 만한 사람도 있고, 그럴 만한 법도 있어서, 충분히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계율의 가르침이 없는 곳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이에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다. 그가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혹자는 양주[凉土]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4) 비마라차(卑摩羅叉)

비마라차는 중국말로 무구안(無垢眼)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침착하고 조용하며 뜻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출가해서 도를 실천하여 괴로움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 힘써 이루었다. 그는 전에 구자국에 있으면서 율장을 널리 선양하였다.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와서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구마라집도 역시 거기에 참여하였다.
구자국이 함락당하자 비마라차는 그곳을 피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으면서 크게 경장(經藏)을 널리 알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비마라차 자신도 비니(毘尼: 율장)의 수승한 품(品: 가르침의 내용)을 동쪽 나라에 두루 미치게 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지팡이 짚고 고비 사막을 건너 위험을 무릅쓰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위진 홍시 8년(406)에 관중에 도착하였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여 대접하고, 비마라차도 먼 땅에서 제자와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자 비마라차는 관동(關東) 지역으로 떠났다. 수춘(壽春)에 체류하여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율학을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대하게 비니(毘尼)를 떨쳤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률』 본(本)은 58권이다. 그 최후의 한 게송[訟]은 ‘명수계법 급제성선법사(明受戒法及諸成善法事)’이다. 그 뜻의 요점을 좇아 줄여서 선송(善誦)이라 이름한다. 비마라차는 그것을 석간사에 가지고 갔다. 선송을 더 늘려서 58권을 61권으로 만들고, 최후의 한 게송의 이름을 고쳐서 ‘비니송(毘尼誦)’이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선송과 비니송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그대로 쓰인다.

그 후 남쪽 강릉(江陵)으로 가서 신사(辛寺)에서 하안거를 지내면서 『십송률』을 개강하였다. 비마라차는 이미 중국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할래야 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이 신묘한 판본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다.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구하는 자들이 숲처럼 모여들었다. 계율의 조목에 밝고 금계(禁戒)를 아는 자의 수도 아주 풍성해졌다. 율장이 크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비마라차의 힘이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깊이 종지(宗旨)를 총괄하여, 비마라차가 제정한 내금(內禁: 계율)의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기록하고 편찬해서, 2권을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 비구와 비구니들이 읽고 익히면서 다투어 서로 옮겨 베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속어로 말하였다.
“비마라차의 촌스러운 말을 혜관이 재치 있게 기록하니, 온 장안 사람들이 베껴 적느라 종이값이 구슬같이 귀해졌다.”
오늘날까지도 세상에 행하여 후학들의 법이 되었다.
비마라차는 덕을 기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시끄러움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 그 해 겨울 다시 수춘의 석간사(石澗寺)로 되돌아가 그 절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7세이다.
비마라차는 눈이 파래서 당시 사람들이 푸른 눈[靑眼]의 율사라고 하였다.

5) 불타야사(佛陀耶舍)

불타야사는 중국말로 각명(覺明)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대대로 외도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에 와 걸식하였다.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람들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였다.
갑자기 아버지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어진 분을 범하는 죄에 걸려서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즉시 이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니, 며칠 후 문득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하여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이다. 항상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하였다. 어느 날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고 하였다. 불타야사는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필시 사람을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것이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15세가 되어 경을 외우자 하루에 2, 3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는 항상 밖으로 탁발(托鉢: 걸식)을 나갔다. 이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였다. 그러자 한 나한이 그의 총명함과 민첩함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빌어다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소승(大小乘) 경전 수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오만하였다. 꽤 지견(知見)이 있다고 자처(自處)하였다.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승려들에게서 존중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어도 계단(戒壇)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向立之歲]에도 여전히 사미(沙彌)였다. 외삼촌에게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다.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을 일삼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였다. 오히려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었구나”라고 말하였다. 그의 애오라지 정진함이 이와 같았다.

뒤에 사륵국(沙勒國)의 국왕 불여(不悆)는 3천 명의 승려들을 청하여 재를 베풀었다. 마침 불타야사도 그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로 중국어로는 법자(法子)라 했다. 불타야사의 용모와 복장이 말끔하고 우아한 것을 보고 불타야사에게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깨끗하여 태자가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궁궐 안으로 청하여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는 대우를 융숭히 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수학하면서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구자국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붕어하여 달마불다 태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구자국을 정벌하였다. 구자왕이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불타야사에게는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뒷일을 맡겼다.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함락되었다. 사륵왕은 귀국하여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懷抱)를 다 풀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서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불타야사는 사륵국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뒤에 동쪽으로 구자국에 가서 불법으로 매우 성대하게 교화하였다.

그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다.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자, 나라 사람들이 만류하여 다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야겠다. 비밀리에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한다.”
제자는 말하였다.
“내일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풀었다. 수십 글자의 주문을 외운 뒤 제자와 더불어 그 물로 발을 씻었다.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다.
“오직 몹시 센 바람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입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을 주어 발을 씻기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 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였지만,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했다.

걸어서 고장(姑臧)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이미 장안(長安)으로 들어간 뒤였다.
요홍(姚泓)이 구마라집을 핍박하여 여자를 두어 정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구마라집은 고운 솜과 같은 존재이다. 어찌하여 그를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게 한단 말인가.”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홍(姚泓)에게 권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요홍이 아직 구마라집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요홍은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아뢰었다.
“대저 불교의 교법(敎法)을 널리 선양하려면, 글 뜻을 두루 통달해야 합니다. 빈도(貧道)는 비록 경전의 글은 외울 수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그윽한 이치를 깊이 통달하였습니다. 지금 고장에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부르십시오. 한 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핀 뒤에 붓을 대어, 교법의 미묘한 말씀을 망실하지 않아, 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홍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초빙하였다. 그러나 불타야사는 모두 다 받지 않고 웃으며 말하였다.
“임금의 밝으신 말씀이 내려져, 수레 가득 싣고 사신이 달려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시주께서 소승을 대우하심이 이미 후하십니다. 다만 현재 구마라집이 처해 있는 것을 보니,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대로 자세히 아뢰었다. 요홍은 그의 기미를 살피고 삼가함에 탄복하여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타일렀다. 바야흐로 장안에 도착하였다. 요홍이 몸소 나가 방문하여 안부를 물었다. 별도로 소요원(逍遙園)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네 가지 공양물[四事]로 공양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탁발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들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였다. 한 달 남짓 동안 의문이 나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느라 미처 붓을 잡지 못하였다. 불타야사가 이르고 나서는 함께 명백하게 따져서 해결하였다. 문장의 조리가 방정하게 바로잡혀서, 승려와 속인 3천여 명이 모두 그 요점에 딱 들어맞는다고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코밑수염이 붉고 『비바사(毘婆沙)』를 능숙하게 해석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코밑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다.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또한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도 호칭하였다.
의발(衣鉢)과 와구(臥具) 등의 네 가지[四事] 공양이 삼칸 집에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불타야사는 관심(關心)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홍은 그 공양물들을 팔아서 성 남쪽에 절을 지었다.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므로, 위사례교위(僞司隸校尉) 요상(姚爽)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홍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였다. 불타야사에게 시험 삼아 오랑캐들이 기록한 약방문 5만 글자 가량을 외우게 하였다. 이틀 후 그것을 암송하게 하였는데, 옆에서 책을 잡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그의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 12년(410)에 『사분율(四分律)』 44권과 『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번역하여 내었다. 양주(凉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중국어로 번역하고, 도함(道含)이 붓으로 받아 적었다. 15년(413)에 이르러 역장(譯場: 번역하는 곳)을 해산하였다. 요홍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도함과 축불념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이름난 사문 5백 명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하직하고 외국으로 돌아갔다. 계빈국에 이르러 『허공장경(虛空藏經)』 한 권을 구해서 상인에게 부쳐, 양주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했다. 후에 그가 어느 곳에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한다.

6)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할아버지는 달마제바(達摩提婆)로서 중국에서는 법천(法天)이라 한다. 일찍이 북천축국(北天竺國)에 장사하러 갔다가 그대로 거기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달마수리야(達摩修利耶)로서 중국에서 법일(法日)이라 하며 젊어서 죽었다.
각현은 세 살에 고아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다섯 살에 또 어머니를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종조부(從祖父) 구바리(鳩婆利)는 각현이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어버이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이슬 맞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데려다가 득도시켜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17세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여러 사람들과 경전을 익히고 암송하기를 일삼았다. 대중들에게 한 달 걸리는 것을 각현은 하루 만에 암송하여 마쳤다. 그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각현의 하루는 서른 사람의 하루에 필적하는구나.”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수업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대부분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승가달다는 비록 각현의 재주에 감복하지만, 아직 그 사람 됨됨이는 측량하지 못하였다.
뒤에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할 때, 홀연히 각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승가달다는 놀라서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각현이 대답하였다.
“잠깐 도솔천에 가서 미륵보살님께 예경을 드리고 왔다.”
말을 마치자 문득 사라졌다. 이에 승가달다는 각현이 성인(聖人)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 깊고 낮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뒤에 여러 번 각현의 신비한 변화를 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각현이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각현은 항상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고, 두루 각 나라의 풍속을 관찰하기를 원하였다. 마침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서쪽으로 와서 계빈국에 이르렀다. 대중들의 청정하고 수승한 모습을 보고, 이에 탄식하면서 동쪽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리 동료들은 모두 도를 구하려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트이지 못하였습니다.”
곧 계빈국의 대중들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동쪽 땅에 교화를 널리 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였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석씨(釋氏)성을 이어받았고, 대대로 도학(道學)을 준수하였습니다. 이갈이 할 무렵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미 경론(經論)을 통달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대선사 불대선(佛大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전부터 계빈국에 있었습니다.”

다시 또 지엄에게 이르기를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불타발타라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엄이 간절히 요청하므로 각현은 마침내 딱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대중들을 떠나 스승에게 하직하고, 양식을 싸 가지고 동쪽으로 갔다. 걷고 달린 지 3년 동안에 추위와 더위를 연이어 겪었다. 이미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다. 여섯 나라의 군주들이 멀리 떠나는 교화자를 기꺼워하며, 마음을 기울여 물자를 바쳤다.

교지국(交趾國)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갔다. 배가 어떤 섬을 지나갈 때 각현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낫겠습니다.”
선장은 말하였다.
“길을 떠난 사람은 하루의 시간이라도 아낍니다. 순조로운 바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2백여 리쯤 나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배가 도로 그 섬으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신통력을 깨닫고 모두 스승으로 섬겼으며, 배의 진퇴를 물었다.

뒤에 순풍을 만났으므로 동행하는 배들은 모두 출발하였다. 그러나 각현은 말하였다.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선장은 곧 멈췄다. 이미 앞에 출발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뒤에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선박들을 모두 출발하게 하였다. 아무도 기꺼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각현은 스스로 일어나서 닻줄을 풀었다. 이 배 한 척만이 출발하였다. 얼마 후 해적들이 쳐들어와,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탈당하였다.

얼마 후 청주(靑州)의 동래군(東萊郡)에 이르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크게 기뻐하며 함께 불법을 논하면서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계발하여, 깨달아 터득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의 해석은 보통사람의 뜻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찌 반드시 말이 훌륭해서 칭찬하는 것이겠습니까.”
구마라집은 항상 의심스러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당시 후진(後秦)의 태자 요홍(姚泓)은 각현의 설법을 듣고자, 많은 승려들에게 명하여 동궁에 모여 논의하였다. 구마라집과 각현의 논의가 여러 차례 오갔다.
구마라집이 물었다.
“현상이 어째서 공(空)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극미(極微)가 모여 색(色)이 성립되었으므로 색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비록 색이라고는 하더라도 항상 공입니다.”
구마라집은 다시 물었다.
“이미 극미를 가지고 색을 파하여 공이라 한다면, 어째서 또 극미를 파합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승려들은 하나의 극미를 부셔 쪼개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구마라집은 또 물었다.
“극미는 바로 상(常)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하나의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많은 극미는 공(空)이며, 많은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하나의 극미도 공입니다.”
당시에 보운(寶雲)이 이 대화를 통역하였다. 보운 자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각현이 헤아리는 미진(微塵)은 바로 상(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장안의 학승들은 다시 해석해 주기를 청하였다. 각현이 말하였다.
“무릇 법은 스스로 생하지 않으며, 연(緣)이 모이기 때문에 생하는 것입니다. 일미진(一微塵)에 인연하기 때문에 많은 미진이 있으며, 미진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공입니다. 어찌 일미진을 파하지 않고, 상(常)이어서 공이 아니라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답의 분명한 뜻이었다.

후진(後秦)의 임금 요홍은 오로지 불법에 마음을 써서 3천여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였다. 모든 승려들이 궁궐에 왕래하면서 성대하게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오직 각현만은 고요함을 지켜 대중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젯밤 고향에서 배 다섯 척이 출발하는 것을 보았노라.”
제자는 그것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렸다. 관중(關中)의 기존 승려들은 모두 각현이 괴이한 일을 나타내어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또 각현이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선업(禪業)을 크게 홍포하자, 사방에서 선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이르렀다. 다만 배움에 젖어듦에 깊고 얕음이 있고, 법을 얻음에 짙고 연함이 있었다. 그 중 경박하고 속이는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교활하게 속이는 일도 있었다.

한 제자가 약간 관행(觀行)을 닦고 스스로 말하였다.
“아나함과(阿那含果:不還果)를 터득했다.”
각현이 아직 가까이하여 조사하고 묻기도 전에, 마침내 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졌다. 대단한 원망과 비방을 받아서,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 듯하였다.
이리하여 각현의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름을 감추고 잠적해 버렸으며, 어떤 이는 야밤에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반나절 사이에 대중들이 거의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각현은 평안을 유지하여 마음에 거리끼지 않았다.

당시 기존 승려인 승략(僧䂮)과 도항(道恒) 등은 각현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자기가 터득한 법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전에 다섯 척의 배가 온다고 예언한 것은 허황하여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문도가 속이고 홀려서 서로 같지 않다고 일을 일으킨 것은 이미 계율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이치상 함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응당 속히 떠나서 여기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각현은 말하였다.
“나 자신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서, 떠나고 머무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다만 회포(懷抱)를 다 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어서, 그것을 개탄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명과 함께 떠났다. 그의 정신과 뜻이 조용하여, 처음과 다른 낯빛이 전혀 없었다.
진실을 아는 대중들은 모두 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전송하였다.

요홍도 각현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탄하며 도항(道恒)에게 말하였다.
“불타발타라 각현 사문은 도(道)와 한마음이 되어, 이곳으로 와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문 입을 벌려 아직 말을 토해내지 못하였다. 참으로 깊이 개탄스럽다. 어찌 한마디 말을 허물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고는 요홍이 칙명을 내려 각현의 뒤를 급히 뒤따르게 했다. 그러나 각현은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진실로 은혜로운 임금의 뜻은 압니다만, 칙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승려들을 이끌고 밤에도 길을 걸어, 남쪽 여산(廬山)으로 향했다.

사문 석혜원(釋慧遠)은 오랫동안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하였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니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았다. 혜원은 각현이 배척당한 것은 그 허물이 문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다섯 척의 배를 예언한 것 같은 것은 단지 그 주장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어서, 계율에 대해서는 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자 담옹(曇邕)을 파견하여, 후진(後秦) 임금인 요홍과 관중(關中)의 대중 승려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배척한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혜원은 각현에게 여러 편의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각현은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거처할 때 안락함을 구하지 않았다. 여산에 일 년 가량 머무르고 다시 서쪽 강릉(江陵)으로 갔다. 마침 외국 선박이 들어왔다. 얼마 있다가 찾아가서 물어 보았다. 과연 천축국에서 온 다섯 척의 배로서, 각현이 미리 내다본 바 그대로였다.
온 나라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다투어 와서, 예를 올리고 받들어 보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각현은 모두 받지 않았다. 발우를 들고 탁발하면서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태위(太尉)로 있던 시절에 장사(長史) 벼슬을 하였다.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의(劉毅)를 토벌할 때, 관청의 부서를 따라 주둔했다.
각현은 제자 혜관과 함께 원표에게 나아가 걸식하였다. 원표는 평소 불교를 신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박하게 대접하였다. 미처 배부르기 전에 물러날 것을 고하자, 원표가 말하였다.
“아직 만족하지 않은 듯하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시주께서 보시하는 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든 음식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원표가 즉시 측근에게 호령하여 음식을 더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과연 다했으므로 원표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은 어떤 사람인가?”
혜관은 말하였다.
“덕행과 기량이 고매하여,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표는 각현의 남다름에 깊이 매우 감탄하여 태위(太尉) 유유(劉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태위가 청하여 만나보고는 매우 높이고 공경하여, 필요한 물자를 공양하여 빠짐없이 올렸다. 얼마 후 태위는 서울로 돌아갔다.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각현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진실하여 중국의 풍속과 달랐다. 그리고 뜻과 운치가 맑고 원대하여 평소 고요한 분위기를 띄었다.
서울의 법사 승필(僧弼)은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투장사(鬪場寺, 즉 도량사)의 선사(禪師)는 크나큰 마음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바로 천축국의 왕필(王弼)이나 하안(河晏)과 같은 풍류인(風流人)입니다.”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闐國)에서 『화엄경(華嚴經)』의 앞부분 3만 6천 게송(偈頌)을 구하였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顗)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褚叔度)가 각현을 초청하여 번역하는 우두머리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쥐고, 사문 법업(法業)ㆍ혜엄(慧嚴) 등 1백여 인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한문(漢文)과 범문(梵文)을 회통하여 미묘하게 경전의 뜻을 살렸다. 그러므로 도량사에는 아직까지도 화엄당(華嚴堂)이 남아 있다. 또 사문 법현(法顯)은 서역에서 구한 『승기율(僧祇律)』 범본(梵本)을 다시 각현에게 부탁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내용은 「법현전(法顯傳)」에 실려 있다.

각현이 선후로 번역한 경전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6권, 『니원경(泥洹經)』 및 『수행방편론(修行方便論)』 등 모두 15부 117권이다. 어느 것이나 그윽한 의미를 궁구하여, 미묘하게 문장의 뜻을 극진히 하였다.
각현은 원가(元嘉) 6년(429)에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7) 담무참(曇無讖)

담무참은 담마참(曇摩讖)이나 담무참(曇無懺)이라 하기도 한다. 대개 범음(梵音)을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본시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모직 담요를 짜는 품을 팔아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사문 달마야사는 중국어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승려와 속인들이 숭앙하여 재물로 공양하는 것이 풍부하였다. 담무참의 어머니는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 때문에 담무참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열 살에 같이 공부하는 몇 사람과 함께 주문을 읽었다. 총명함과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하루에 경전을 만여 글자나 암송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우고, 5명(明)의 여러 논들을 두루 보았다. 그의 강설(講說)은 변론이 정밀하여, 응답하여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백두 선사(白頭禪師)가 담무참을 만나 논의를 한 일이 있다. 익힌 공부가 서로 달라 논쟁한 지 백여 일이나 되었다. 아무리 담무참이 공박하고 힐난하여 날카롭게 들고 일어나도, 백두선사는 끝내 수긍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의 정밀한 논리에 굴복하였다. 백두 선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경전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곧 나무껍질에 쓰인 『열반경(涅槃經)』을 주었다. 담무참은 즉시 이 경전을 읽고는 놀라서,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토록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오랫동안 헤매었다.”
이에 대중들을 모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침내 대승에 전념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소승의 경전 2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담무참의 사촌 형은 코끼리를 잘 조련하였다. 그는 왕이 타던, 귀가 흰 큰 코끼리를 타다가 실수로 코끼리를 죽여 버렸다. 왕은 진노하여 사촌형을 주벌하고 명령을 내렸다.
“감히 유해를 돌보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가서 보는 자가 없었으나, 담무참은 곡을 하고 그를 장사지냈다. 왕이 진노하여 담무참을 주벌하려고 하자 담무참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고, 나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어느 쪽이나 대의(大義)를 어기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으나, 담무참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다.
왕은 그의 의지와 기개를 진귀하게 여겨, 마침내 그를 머물게 하고 공양하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에 밝아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서역에서는 그를 대주사(大呪師)라고 불렀다.
뒤에 왕을 수행하여 산에 들어갔다. 왕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은밀히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런 후에 찬탄하여 말하였다.
“대왕의 은택에 감응하기 때문에 마른 돌에서 샘물이 솟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덕을 찬탄하였다. 때에 알맞게 내리는 비의 혜택으로 매우 조화로워져서, 백성들은 노래를 불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을 기뻐했으며,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얼마 후 왕의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 그를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졌다.
담무참은 오랫동안 머문 것이 싫증을 부른다고 생각하여 곧 하직하고 계빈국(罽賓國)으로 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앞부분 열 권과 『보살계경(菩薩戒經)』,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휴대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소승만 배우고, 『열반경』을 신봉하지 않았다. 이에 동쪽 구자국으로 갔다.

얼마 후 다시 나아가 고장(姑臧)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쉬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경을 베개삼아 잤다. 누군가 이 경을 끌어당겨 땅 위에 두었다. 담무참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 이것을 도둑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경은 여래의 해탈(解脫)을 담은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
부끄러워 깨우치고 경본을 특별히 높은 곳에 두었다.
그날 밤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다. 몇 번이나 경본을 들어 올리려 하나 끝내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경을 받들면서 조금도 무거워 하지 않았다. 도둑은 이것을 보고, 담무참을 성인이라 여기고 모두 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 당시 하서(河西) 국왕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양(凉) 지방을 참람히 점거하고 스스로 왕이라 참칭하였다. 담무참의 명성을 들었다. 불러서 상면하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저거몽손은 평소 불법을 받들어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청하여 경본을 번역하고자 하였다. 담무참은 아직 중국어를 잘 알지 못했다. 또 그를 도와 줄 전역자(傳譯者)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이치를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즉시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담무참은 중국어를 삼 년 동안 배우고서야 비로소 『열반경』 첫 부분 열 권을 번역하여 필사(筆寫)하였다.

당시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은 하서(河西) 지방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장(經藏)을 펴내자 깊이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다. 범문(梵文)을 옮겨 바꾼 것을 혜숭공이 받아 적었다. 승려와 속인 수백 명이 의문 나는 것을 종횡으로 거침없이 힐난하였다. 그러나 담무참은 그때그때 응하여 막힌 것을 풀어내며 청아한 변론을 물 흐르듯 하였다. 겸하여 문장솜씨도 풍부하여 문장이 화려하고 치밀하였다.
혜승과 도랑 등이 거듭 널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차례로 『방등대집경(方等大集經)』ㆍ『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ㆍ『비화경(悲華經)』ㆍ『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ㆍ『우바새계(優婆塞戒)』ㆍ『금광명경(金光明經)』ㆍ『해룡왕경(海龍王經)』ㆍ『보살계본(菩薩戒本)』 등 60여만 글자를 번역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 경본의 품수(品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으로 돌아가서 구하여 찾았다. 그때 그의 모친상을 당했으므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우전국(于闐國)에 가서 경본의 가운데 부분을 구하고, 다시 고장에 돌아와서 번역하였다.
뒤에 또 우전국에 사신을 보내어 뒷부분을 찾았다. 이리하여 계속해서 번역하여 33권이 되었다. 위현시(僞玄始) 3년(414)에 처음 번역을 시작하여, 현시 10년(421) 10월 23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 질(帙)을 끝마쳤다. 바로 송(宋)나라 무제(武帝) 영초(永初) 2년(421)이다.

담무참은 이르기를 “이 『열반경』의 범본(梵本)은 본래 3만 5천 게송(偈頌)이다. 이쪽 지방에서 백만 글자 가량을 덜어내어, 지금 번역한 것은 단지 1만 여 게송(偈頌)뿐이다”라고 하였다.
담무참은 일찍이 저거몽손에게 고하였다.
“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면, 반드시 많은 재앙과 돌림병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거몽손은 믿지 않고 몸소 자신이 귀신을 보고 증험하기를 원하였다. 담무참이 즉시 저거몽손에게 주술을 걸었다. 저거몽손은 귀신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였다.
담무참이 말하였다.
“마땅히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재계(齋戒)하고, 신주(神呪)를 외워 돌림병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에 주문을 외운 지 3일 만에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들이 이미 떠났습니다.”
그때 변경에서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수백 마리의 돌림병 귀신들이 달려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나라 안이 평안을 얻은 것은 담무참의 힘이다. 저거몽손은 더욱 공경스럽게 섬겼다.

저거몽손의 위승현(僞承玄) 2년(429)에 이르러, 저거몽손은 황하를 건너 포한(抱罕)에서 진(秦)나라 임금 걸복모말(乞伏暮末)을 정벌하려 세자인 흥국(興國)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리어 걸복모말의 군대에게 패배당하여 흥국은 사로잡혔다.
뒤에 걸복모말은 수비에 실패하였다. 걸복모말도 흥국과 함께 혁련정정(赫蓮定定)에게 사로잡혔다.
후에 혁련정정도 토곡혼(吐谷渾)에게 격파당하여, 흥국은 마침내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저거몽손은 크게 성내었다.
“부처를 섬겨도 영험이 없다.”
사문 50여 명을 내쫓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환속시켰다.
예전에 저거몽손이 자기 어머니를 위하여 장륙(丈六)의 석상을 조성하였다. 석상이 눈물을 흘린 데다 담무참도 간하는 말로 바로잡아주니, 이에 저거몽손이 마음을 고치고 뉘우쳤다.

그때 북위(北魏)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太武帝, 재위 424~452)가 담무참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맞아들이려 했다. 탁발도는 또 저거몽손에게 고하여 알렸다.
“만약 담무참을 보내지 않으면 즉시 공격하겠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섬긴 지 이미 세월이 오래된지라, 차마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였다.

탁발도는 뒤에 또 위태상(僞太常) 고평공(高平公) 이순(李順)을 파견해서, 책명(策命)으로 저거몽손에게 관작을 수여하였다. 사지절시중도독(使持節侍中都督) 양주서역제군사(涼州西域諸軍事) 태부표기대장군(太傅驃騎大將軍) 양주목(涼州牧) 양왕(涼王)으로 삼고 구석(九錫)의 예를 하사하였다.
또한 저거몽손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내 들으니, 담무참의 박학다식은 구마라집과 같은 정도이고, 비밀스런 주문과 신비한 영험은 불도징과 짝할 만하다고 한다. 짐이 도를 연구하고자 하니 빠른 역말에 태워 그를 보내도록 하라.”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신락문(新樂門)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말하였다.
“서번(西蕃)의 늙은 신하인 이 저거몽손은 조정을 받들어 섬겨, 감히 그 뜻을 거스르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천자께서는 아첨하는 말을 믿고 받아들여, 독촉하고 핍박만 하고 계십니다.
전에는 표문을 내려 담무참이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자를 보내 그를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담무참은 바로 저의 스승님이므로 응당 그분과 죽음을 함께 해야만 합니다. 진실로 저의 남은 여생이야 아깝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 번 죽기 마련이지요. 다만 언제인지를 어찌 깨닫겠습니까?”
이순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남보다 먼저 정성을 나타내시어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 입시(入侍)토록 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왕의 충성스러운 공적을 공경하기 때문에 특별한 예우를 드러내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이 오랑캐 도인 한 사람 때문에 산악(山岳) 같은 공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루아침의 성냄을 참지 못하여 이제까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킨다면,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후하게 대우하는 뜻이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대왕을 위하여 취하지 마시기를 빕니다. 주상(主上)께서 마음을 비우심이 지극함은 홍문(弘文)이 아는 바입니다.”

홍문은 저거몽손이 파견하여 위(魏)나라에 보낸 사신이다.
저거몽손이 말하였다.
“태상의 구변이 아름다움은 소진(蘇秦)과 같습니다. 아마도 속마음은 그 말씀과 들어맞지 않는 것 같군요.”
저거몽손은 이미 담무참을 아껴서 보내지 않았으므로, 위나라의 강력함에 더욱 시달렸다.

저거몽손의 의화(義和) 3년(433) 3월에, 담무참은 다시 서역에 가서 『열반경』의 뒷부분을 구하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저거몽손은 그가 떠나기를 원하는 것에 분노하여 비밀리에 담무참을 살해할 것을 꾀하였다. 거짓으로 물자와 양식을 보내고 후하게 보물과 재화를 선사하였다.
출발하는 날에 임하여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작별하였다.
“내 업의 갚음이 장차 이르려 한다. 뭇 성인들께서도 이것을 구제할 수는 없다. 본래 마음에 서원을 새긴 것이라서 도의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저거몽손은 과연 그의 출발에 미쳐 자객을 보내 길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그때 나이는 49세이다. 이 해는 송나라 원가(元嘉) 10년(433)이다. 멀거나 가깝거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좌우에는 항상 대낮에도 귀신이 나타나 칼로 찌르는 것이 보였다. 4월에 저거몽손은 병으로 죽었다.

과거에 담무참이 고장(姑臧)에 있을 때, 장액(張掖: 감숙성 장액현)의 사문 도진(道進)이 담무참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으려 하였다. 담무참이 말했다.
“우선 허물을 참회하라.”
도진은 7일 낮 7일 밤 동안 정성을 다하고, 8일째 되는 날 담무참에게 나아가 계를 구하였다. 담무참은 갑자기 크게 성을 냈다. 도진은 다시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의 업장이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죽을힘을 다하여 좌선하고 참회하였다.

도진은 곧 선정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보살들과 함께 나타나 자기에게 계법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날 밤 같은 장소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도진이 본 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 도진이 담무참에게 나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하였다. 아직 수십 걸음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담무참이 놀라 일어나 외쳤다.
“훌륭하고도 훌륭하도다. 이미 계를 감득(感得)하였구나. 내 응당 다시 너를 위하여 증명(證明)을 할 것이다.”
그러고는 불상 앞에서 차례로 계율의 차별상을 설하였다.

그 당시 사문 도랑(道朗)은 관서(關西) 지방에서 명예를 떨쳤다. 도진이 계를 감득한 그 날 밤에 도랑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에 도랑은 자신의 계랍(戒臘: 수계 연령)을 낮다고 여겨 도진의 법제자가 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도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 계법이 전수되어 마침내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담무참이 남긴 법도(法度)이다.
별기(別記)에 말하였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반드시 이파륵보살(伊波勒菩薩)이 이 땅에 전래(傳來)할 것이다.”
이 경을 뒤에 과연 담무참이 전하여 번역하니, 아마도 담무참은 어쩌면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안양후(安陽侯)
저거몽손의 사촌 아우로 저거안양후(沮渠安陽侯)가 있다.
사람됨이 의지가 강하고 소탈하며 책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담무참이 하서(河西)지방에 들어와 불법을 널리 폈다. 그러자 안양후는 불경에 뜻을 기울이고 5계[五禁]를 받들어 지녔다. 많은 경전들을 읽자마자 곧 소리 높여 암송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서 생각하였다.
‘배움에 힘써서 많이 들어 아는 것이야말로, 불보살께서 성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어렸을 때 불법을 구하러 고비 사막을 건너 우전국으로 갔다. 구마제대사(瞿摩帝大寺)에서 천축국의 법사 불타사나(佛馱斯那, Buddhasena)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다.
불타사나는 본디 대승을 배웠으며, 천재로서의 빼어남을 드러내었다. 하루에 5천만 글자를 암송하고 선법(禪法)을 밝게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사람 속의 사자[人中師子]’라고 불렀다. 안양후는 그에게 『선비요치병경(禪秘要治病經)』을 배웠다. 또한 그 경의 범본을 소리 내어 외우는 데 뛰어났다.
이윽고 동쪽으로 고창(高昌)에 돌아와서 『관세음경(觀世音經)』과 『관미륵경(觀彌勒經)』을 각각 한 권씩 얻었다. 또한 하서 지방으로 돌아와 즉시 『선요(禪要)』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위위(僞魏)가 서량(西涼)을 병탄(倂呑)하자 남쪽 송(宋)나라로 도망하였다. 뜻을 감추고 몸을 낮추어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항상 탑사(塔寺)에 노닐며 거사의 몸으로 세상을 마쳤다.
과거에 안양후가 『관미륵보살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生兜率天經)』과 『관세음경(觀世音經)』을 번역하였다. 단양 윤(丹陽尹) 맹의(孟顗)가 이것을 보고 훌륭하게 여겨 후한 상을 베풀었다.
뒤에 죽원사(竹園寺)의 비구니 혜준(慧濬)은 다시 그에게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안양후는 이미 오랫동안 익혀서 뛰어나므로 글을 써 나감에 막힘이 없었다. 17일 만에 번역하여 다섯 권을 만들었다. 얼마 후,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서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을 번역했다.
안양후의 거처는 처자식과의 번잡함을 끊었으며, 영예와 이득에 욕심이 없었다. 조용히 불법의 동료들과 소요하며, 불법을 선양하고 유통시켰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뒤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도보(道普)
담무참이 번역한 여러 경전들은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건업(建業)에 전해졌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 법사는 다시 『열반경』의 뒷부분을 찾기를 원하였다.
이에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아뢰어 물자를 공급받았다. 사문 도보를 보내 서리(書吏) 열 명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경을 구하였다. 도보는 장광군(長廣郡)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어 다리를 다치고, 병으로 입적하였다. 도보는 임종에 임하여 탄식하였다.
“『열반경』 뒷부분은 송나라 땅과는 인연이 없구나.”
도보는 원래 고창 사람이다. 그런데 서역을 경유하여 여러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부처님의 존영(尊影)에 공양하고,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 사탑(四塔)ㆍ보리수ㆍ부처님의 발자취ㆍ부처님의 형상(形象) 등을 우러러 뵙지 못한 것이 없었다. 범서(梵書)를 잘 알았다. 여러 나라의 언어에 두루 뛰어나, 특이한 지경을 여행하며 돌아다녔다.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법성(法盛)
당시 고창에는 또 사문 법성(法盛)이 있었다. 역시 외국에 다녀왔다. 모두 네 권의 전기가 있다.

∙축법유(竺法維)ㆍ석승표(釋僧表)
또 축법유와 석승표가 있다. 모두 부처의 나라에 다녀왔다고 한다.

주석
1 책 이름 뒤에 나오는 부(部)는 책 그 자체를 가리킨다. 가령 여기에서의 “『십송률(十誦律)』 부(部)에 정통하여”란 『십송률(十誦律)』이란 책에 정통하다는 뜻이다.

『고승전』 2권(ABC, K1074 v32, p.775a01-p.785b01)

고승전(高僧傳) 제3권

1. 역경 ③

1) 석법현(釋法顯)
석법현의 성(姓)은 공(龔)씨로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의 세 형이 모두 7ㆍ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세 살 되던 해에 바로 승적(僧籍)에 올려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몇 년 동안 집에 머무르다가 병이 위독해져 곧 죽을 듯했다. 사찰로 돌려보내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후에 사찰의 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에 비겼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했다.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티끌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불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극한 성품이야 보통사람을 훨씬 넘어섰지만, 장례를 마치고는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언젠가 같이 공부하는 이들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베었다. 그때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적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이다. 지금 또 남의 것을 빼앗으면, 내세에는 배고픔과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빈도(貧道)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자 즉시 돌아서니, 도적들은 곡식을 버리고 갔다. 수백 명의 대중 승려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지조와 행실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기거의 동작과 범절도 바르고 엄숙하였다. 항상 불경과 율장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동진(東晋) 융안(隆安) 3년(399) 같이 공부하는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를 보고 동쪽과 서쪽을 짐작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자주 뜨거운 바람이 불고 악귀가 나타났다. 이것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법현은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원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악룡이 혹독한 바람을 토하여 비바람에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로우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곳이 7백여 군데나 되었다. 그곳을 건넜다. 또 조교(弔橋)를 딛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였다. 이 모두가 한(漢)나라의 장건(張騫)1)이나 감보(甘父)도 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쳐왔다.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시 혼자 힘으로 외로이 나아갔다.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모두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차츰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말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따라온 두 승려는 위태로움으로 무서워하면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만 홀로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상상의 나래를 펴,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했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왔다.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문 외우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 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올 적에는 길이 다하여 으슥하게 막혀 있었다. 다만 하나의 좁은 길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미처 1리 남짓 가지 못했을 때,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이다. 용모와 복장은 누추하고 소박하나, 신령스런 기운이 우뚝하고 높았다.
법현은 비록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고상하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뒤에 또 한 젊은 승려를 만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그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젊은 승려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대제자(大弟子)인 두타(頭陀) 가섭(迦葉)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다시 급히 뒤쫓아 그 장소에 갔다. 그렇지만 가로지른 돌이 굴 입구를 막아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앞으로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매양 대중 승려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그때마다 모두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이 사는 집을 지었다. 아울러 좋은 먹이를 베풀었다.
매번 하안거(夏安居)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한 마리 작은 뱀으로 변하였다. 양쪽 귀가 모두 흰 빛이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구리 쟁반에 낙(酪)을 가득 담아서, 용을 중앙에 두고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예를 행하면, 곧 용으로 변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국(中天竺國)에 이르렀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波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다.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ㆍ『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과 연경(綖經)2)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
법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워서, 비로소 직접 글씨를 베껴 쓸 수 있었다. 이에 불경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곳곳에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머리 돌려 바라보아도 자신의 그림자만 비치는, 오직 자기 혼자뿐이어서 늘상 슬픔과 탄식을 품었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 한 상인이 중국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흰 비단 부채를 공양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률(彌沙塞律)』ㆍ『장아함경(長阿含經)』ㆍ『잡아함경(雜阿含經)』ㆍ『잡장(雜藏)』을 얻었다.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

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온 배 안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沙門)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狼狽)를 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시주가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하오.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끼리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먹을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없어졌다. 오직 바람에 실려 바다를 떠내려갈 뿐이었다. 뜻밖에 어떤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명아주 풀[藜藿菜]을 발견하고는 짐짓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을 알았다. 다만 아직 어느 곳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의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嶷)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었다. 뜻밖에 사문이 멀리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법현이 더 머물러 겨울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하는 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서울로 갔다.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게 나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ㆍ『방등니원경』ㆍ『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을 번역해 내었다. 거의 백여 만 글자나 된다.
그러고 나서 법현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세상에 내어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어떤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성명(姓名)은 전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으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한 부를 베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집까지 미쳤다. 재물이 죄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오직 『대반니원경』만은 엄연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울에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 나머지 경장과 율장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86세이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2) 석담무갈(釋曇無竭)
석담무갈은 중국말로는 법용(法勇)이라 한다.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곧 고행(苦行)을 닦았다.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여 은사가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법현(法顯) 등이 몸소 부처의 나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슬퍼서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는 서원[忘身之誓]을 세웠다.
마침내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의 무리 25명을 불러모았다. 번개(幡蓋)와 공양(供養) 도구를 갖추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다.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고비 사막으로 진입하여, 내처 들어가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구자국(龜玆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들을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장기(障氣:毒氣)는 천 겹이고, 층층이 쌓인 빙설은 만 리요,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굵은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다.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 표지로 삼았다. 뒷사람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아,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설산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대설산(大雪山)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쥐었다.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다. 계속해서 서로 바꿔가며 기어 올라갔다. 하루를 지내고야 가까스로 넘어왔다.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해 보니, 동료 열두 명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에 예배하였다. 1년 남짓 계빈국에 머무르는 동안 범서와 범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한 부를 구했다.
다시 사자의 입[師子口]이라 해석하는 신두나제하(辛頭那提河)에 이르렀다.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월지국(月氏國)에 들어가 부처님의 육계(肉髻)와 불정골(佛頂骨)에 예배하였다. 저절로 물이 끓어오르는 목방(木舫)을 친견하였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로 갔다. 그곳에서 머무르는 승려 3백여 명은 모두 3승(乘)의 교학을 배웠다. 담무갈은 이 절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국의 선사 불타다라(佛馱多羅)는 중국말로 각구(覺救)라 한다. 그 지방에서는 모두 말하였다.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셨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초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闍梨)로 삼았다.
이 석류사에서 머물며 석 달 동안 하안거를 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향했다. 길은 텅 비고 광활하였다. 다만 벌꿀만을 가지고 식량을 삼았다. 동행자 열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이 같이 다녔다. 담무갈은 비록 자주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는 『관세음경(觀世音經)』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차차 사위국(舍衛國)에 이를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山象]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가르침에 귀의하였다.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튀어 나와, 코끼리떼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다. 또 들소 한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다. 담무갈은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윽고 커다란 솔개가 날아오니, 들소들이 놀라 흩어져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위험에 처하여 구제 받은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그가 번역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은 오늘날 서울에 전한다. 후에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3) 불타집(佛馱什)
불타집은 중국말로 각수(覺壽)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의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밀하게 뛰어났다.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빼어났다.
송(宋)나라의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주(楊州)에 이르렀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梵本)을 얻었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여러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러한 학문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34권으로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 일컬었다. 불타집은 범문(梵文)을 잡고, 우전국(于闐國) 사문 지승(智勝)이 번역하였다. 용광사의 도생(道生)과 동안사(東安寺)의 혜엄(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송(宋)나라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琊王) 연(練)이 시주가 되었다. 다음해 4월에 비로소 마쳤다. 대부(大部)에서 계(戒)의 핵심과 갈마문(羯磨文) 등을 추려내어 베낀 것이 모두 세상에 유행한다. 뒤에 불타집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4) 부타발마(浮陀跋摩)
부타발마는 중국말로 각개(覺鎧)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品行)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삼장(三藏)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잘했다. 항상 이 부(部)를 수지하고 독송하여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송나라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량(西凉)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널리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범본(梵本) 『비바사(毘婆沙)』 3만여 게송(偈頌)을 얻어 가지고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을 발돋움하고 기다렸다. 부타발마가 이 논을 공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이 재위에 있던 승화(承和) 5년(437) 정축년 4월 8일, 곧 송나라 원가(元嘉) 14년(437)에 양주성(凉州城) 안에 있는 한예궁(閑預宮)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였다. 도태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이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義學僧] 3백여 명과 더불어, 문장의 뜻을 바로잡기를 거듭 두 차례나 하여 비로소 마쳤다. 모두 1백 권이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가 서쪽으로 와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凉)나라가 멸망하는 난리통에 경서와 온갖 도구들이 불타버려서 40권이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60권만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5) 석지엄(釋智嚴)
석지엄은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다. 부지런함과 정성스러움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납의(納衣)만을 입고 좌선하며, 오래도록 나물밥으로 살았다. 늘 자기 나라가 텅 비어 황량하다고 생각하였다. 널리 이름난 스승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많이 구하고자 뜻을 세웠다.
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다. 계빈국(罽賓國)에 도달하여 마천타라정사(摩天陀羅精舍)로 들어갔다. 계빈국에서 불타선(佛馱先) 비구에게 선법(禪法)을 묻고 배웠다. 점차로 깊이를 더하여 3년이 지나자, 그 공은 10년 세월을 넘어섰다.
불타선은 그가 선정(禪定)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세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구나.”
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중국 사람들을 공경히 대접하였다.

그 당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비구 역시 그 나라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하여, 그에게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지극히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겼다.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헤어져서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며, 힘써 정진하여 배움을 닦았다.

동진(東晋)의 의희 13년(417)에 유송(劉宋)의 무제(武帝)가 장안을 공략하여 승리하였다.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를 호종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다. 함께 거주하는 세 사람의 승려가 각기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다가가 한참 동안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손가락을 튀기자 세 사람이 눈을 떴다. 그렇지만 잠시 후 도로 눈을 감아버려,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회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여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묻자, 모두들 말하였다.
“이 세 분 승려는 숨어살면서 뜻을 추구하는 고상하고 깨끗한 법사들입니다.”

왕회는 즉각 송 무제(武帝)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올라오기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두 사람이 지엄을 추천하여, 지엄이 무제를 따라갔다.
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김이 매우 성대하였다. 지엄이 도읍에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물렀다. 지엄은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함을 사랑하여, 시끄러운 티끌세상을 피하고 싶어하였다. 왕회는 그를 위하여 동쪽 성문 밖 끝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니, 곧 지원사(枳園寺)이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가져 온 범본(梵本)의 여러 경전들을 미처 번역하지 못했다. 원가 4년(427)에 사문 석보운(釋寶雲)과 함께 『보요경(普曜經)』ㆍ『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ㆍ『사천왕경(四天王經)』 등을 번역했다.
지엄은 절에 있으면서 별다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상 탁발하여 생활하니, 도력의 교화가 이승과 저승까지 끼쳐서 모두 다 감복하였다. 어떤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서주(西州)의 태사(太社)에서 귀신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엄공(嚴公)이 오면 피하여 숨어야 한다’고 하더라.”
이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정확히 못하였다. 갑자기 지엄이 이르렀다. 그의 성명을 묻자, 과연 지엄이라고 하였다. 묵묵히 그를 알아보고는 남몰래 특별히 예우하였다.

의동(儀同) 난릉(蘭陵) 소사화(蕭思話)의 부인 유씨(劉氏)가 병이 들었다. 늘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 지엄을 맞이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지엄이 처음 사랑채에 도착하자마자, 곧 유씨는 떼 귀신들[群鬼]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지엄이 나아가 유씨 부인을 위하여 경을 설하니, 병이 곧 나았다. 이 때문에 5계(戒)를 받고, 온 가문이 불법을 소중히 받들었다.
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던 지엄은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었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행각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였다.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에 5계를 받았지만, 계율을 범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였다.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재차 바다를 건넜다. 또 한번 천축국에 가서 지혜가 밝게 통달한 분들에게 여쭈었다.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갖추어 물었다.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곧 지엄을 위해 선정에 들어, 도솔궁에 가서 미륵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대답하였다.
“계를 받았노라.”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때가 78세이다.

그 나라의 법도는 평범한 승려와 득도한 승려의 화장 장소를 각기 달리 했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했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않았다.
처음에 시신을 평범한 승려의 묘지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신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변경하여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가벼워졌다.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짐짓 서역에서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모두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을 가지고 지엄이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向)3)과 4과(果)4) 중간에서 얼마나 깊고 얕은지를 모를 뿐이다.

6) 석보운(釋寶雲)
석보운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양주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배움의 행실이 있었다. 뜻이 운치 있고 굳세며 깨끗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고 곧으며 순수하고 깨끗함으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였다. 도를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희생해서라도 몸소 부처의 신령스런 자취를 보고, 널리 중요한 불경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두었다.

마침내 동진(東晋) 융안(隆安, 397~401) 초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다. 법현(法顯)ㆍ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따랐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闐國)과 천축국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두루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다. 석가모니께서 남긴 자취를 우러러 예배한 것이 많았다.

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서를 배워, 천축국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갖추어 알았다. 뒷날 장안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 선사를 따라 선(禪)을 일삼아 도(道)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불타발타라 선사가 뜻밖에 후진의 승려들에게 축출 당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그 허물을 같이 하여, 석보운도 달아나 흩어졌다. 그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라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였다. 불타발타라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 도량사에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승려들은 보운의 뜻과 힘이 굳고 단단해서, 죽음의 지경[絶域]인 아주 먼 외국까지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물으면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운은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을 번역해 냈다. 후기에 나온 여러 경전들은 대부분 보운이 바로잡아 정리한 것이다. 중국어와 범어에 모두 뛰어나, 음과 뜻이 알맞고 올곧아서, 보운이 정리한 것은 대중들이 모두 믿고 따랐다.
과거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선역(宣譯)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였다. 그런 강북과 상대적으로, 강남에서의 범어 번역은 보운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진(東晋)과 송나라의 시기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다.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보운의 성품은 그윽한데 머물기를 좋아하여, 한적(閑寂)함을 늘 유지하였다. 마침내 육합산(六合山)5)의 절로 가서 『불본행찬경(佛本行贊經)』을 번역해 내었다.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았다. 습속이 좀도둑질을 좋아하였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이끌어 가르쳤다. 그러자 대부분 허물을 고쳐서,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죽음에 임하여,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맡아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물렀다. 다시 육합산으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산사에서 돌아가셨다. 이때 나이는 74세이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가 있다.

7) 구나발마(求那跋摩)
구나발마는 중국말로 공덕개(功德鎧)라고 한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罽賓國)을 다스렸다. 조부인 가리발타(呵梨跋陀)는 중국말로 사자현(師子賢)이라 한다.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유배를 당하였다. 아버지인 승가아난(僧伽阿難)은 중국말로 중희(衆喜)라 한다. 산림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구나발마의 나이 14세가 되자, 예리한 식견으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깊이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덕을 숭상하며 착함에 힘썼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의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목숨을 요절시키는 일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설령 죄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하겠다.”
구나발마가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저를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소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너의 몸에 있는 고통을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도 오히려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삼도(三塗)7)의 길에서입니까?”
어머니가 이에 잘못을 뉘우쳐 깨달아,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큰 나라에 군림하여 어루만지고 남면(南面)8)하여 제왕의 존귀함으로써 일컬어질 것이다. 만약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인의 과보[聖果]를 얻을 것이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9부를 밝게 꿰뚫고 4아함[含]에 두루 밝았다. 그리고 백여만 글자에 이르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다들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세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다.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재주가 밝고 덕이 높다.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그리하여 신하들 수백 명이 두세 차례 간곡하게 청하였다. 그러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였다.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고,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미 초과(初果)를 터득했다.”
몸가짐과 차림새로도 남들을 감화시켜, 그를 본 자들은 마음을 내어 불법에 의지하였다.
후에 사바국(闍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었다. 한 도사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飛舶]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구나발마가 와서 이르렀다. 왕의 어머니가 성스러운 예식으로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였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해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까 두렵다.”
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시달려,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차차 감화에 젖어듦이 오래되자, 정신을 전념하여 점점 독실해졌다.

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을 하려 합니다. 만약 상대해서 전투를 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위태로워져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존귀하신 스승님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그 사나움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뿐입니다.”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문득 적들이 물러나 흩어졌다. 왕이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의 공경스러운 믿음이 더욱 충만해졌다. 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법문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군신들이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왕께서 만약 나라를 버리신다면, 자식 같은 우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를 의지하여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 같은 자비로움으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감히 죽기로 청하노니, 그 진실한 마음을 펴도록 하옵소서.”

왕이 차마 굳이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어 군신들에게 나아가서 세 가지 바람을 청하였다.
“만약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 바람은 무릇 왕국의 경계 안에서는 똑같이 스승님[和尙]을 받드는 것이다. 두 번째 바람은 다스리는 경내 안에서는 모두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바람은 소유한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다.”
군신들은 기뻐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공경하며 받아들였다. 이에 온 나라가 모두 따라서 계를 받았다. 왕이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몸소 건축에 쓸 재료를 끌고 가다가, 왕이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술로 치료해 주었다.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인도하고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퍼져나갔다.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시에 서울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이 있었다. 멀리에서 훌륭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하였다. 원가(元嘉)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곧바로 교주(交州)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이하여 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이 또 사문 법장(法長)ㆍ도충(道沖)ㆍ도준(道雋)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보살펴 주기를 청하였다. 아울러 구나발마와 사바왕인 파다가(婆多加)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국경에 왕림하여 불도의 가르침을 퍼뜨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마땅히 넓히고자 함에 있어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미 상인 축난제(竺難提)의 배를 타고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드디어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언장[遺文]에서 말하였다.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시산(虎市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파랐다. 구나발마가 그것이 기사(耆闍)9)와 방불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이라고 바꾸었다.
영취산 절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 소리[磬音]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양 건치[椎]소리가 이를 때마다 구나발마가 이미 이르렀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지만 젖지 않았다. 혹은 진흙을 밟고 왔지만 습기가 차지 않았다. 당시에 많은 도인과 속인이 숙연하게 더욱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다. 구나발마가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10)과 정광(定光)11)ㆍ유동포발(儒童布髮)12)의 형상을 그렸다. 형상을 그려 놓은 뒤로 매일 저녁에 빛을 발하였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한 뒤에야 그치었다.
시흥(始興)의 태수인 채무지(蔡茂之)가 깊이 더욱더 존경하여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장차 죽음에 이르자, 구나발마가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을 하여 편안하게 위로하였다. 후에 채무지의 집사람이 꿈속에서,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와 함께 법을 강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가 이곳에 거주한 이후로는 밤낮으로 오갔다. 그러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나더라도,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를 두드리며 희롱하고 지나갔다. 이에 산길을 가는 나그네와 물길을 가는 객들이 오가는 데 막힘이 없었다. 구나발마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자들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았다. 사미는 한 마리 흰 사자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끝까지 가득히 푸른 연꽃이 널리 퍼지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미가 놀라고 두려워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았으나, 휑하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견줄 것 없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후에 문제(文帝)가 거듭 혜관(慧觀) 등에게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서울로 갔다. 원가(元嘉) 8년(431) 정월에 건업(建鄴)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제자는 항상 재계하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남을 죽이는데 내몰려서 뜻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시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겠습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대저 도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합니다.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을 떨치지 못합니다. 만약 자신을 이겨서 몸으로 애쓰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 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 마디 좋은 말을 하면 선비와 여인네[士女]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한 가지 훌륭한 정치를 펴면 신과 사람[人神]마저 함께 화합합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 형벌을 쓰고, 힘을 지치게 하지 않는 사역을 시키십시오. 그리 하시면 바람과 비로 하여금 때에 맞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절기에 고루 알맞아서, 온갖 곡식이 무성하게 번성하고, 뽕과 삼[桑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지런히 하신다면[持齋] 가지런함 역시 크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 역시 많다 할 것입니다. 어찌 반나절의 음식을 덜어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한 뒤에야, 바야흐로 널리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이에 책상[机]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대저 속인은 고원한 원리에 미혹되고, 사문은 가까운 가르침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이상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를 허탄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가르침에 막힌다는 것은 문장[篇章]에 구애되어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깨우침을 열어 밝게 다다랐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니 천인의 경지를 더불어 말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도록 하여 공양을 융숭하고 후하게 해 주었다. 공경ㆍ제후왕과 뛰어난 선비들이 높여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을 여는 날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다.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정신은 자연스럽고 웅변은 빼어났다.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말이 오가는 사이에 깨닫게 하였다.

후에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을 내었다. 처음에 28품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을 내어서 30품을 이루었다. 하지만 미처 옮겨 베끼기 전에 「서품(序品)」과 「계품(戒品)」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히려 두 가지의 판본이 있다. 혹은 『보살계지경(菩薩戒地經)』이라고도 한다.
과거 원가(元嘉) 3년(426)에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팽성(彭城)에서 외국의 이엽바라(伊葉波羅)에게 『잡심(雜心)』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렇지만 품(品)을 선택함에 미쳐서는, 장애로 말미암아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때에 이르러 구나발마에게 다시 청하여 후품(後品)을 번역하여 13권을 이루었다. 앞서 내었던 『사분갈마(四分羯磨)』ㆍ『우바새오계략론(優婆塞五戒略論)』ㆍ『우바새이십이계(優婆塞二十二戒)』 등과 아울러 모두 26권이다. 모두 글의 뜻이 자세하고 신실하여 범어와 한어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였다.
“6년 전 여덟 명의 사자국(師子國) 여승이 서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2중(衆)13)을 수계하는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계품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계법(戒法)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있어서 나온 것이다. 설사 그러한 지난날의 사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계를 얻는 데에 문제가 없음은 대애도(大愛道)비구니14)의 인연과 같다.”

여러 승니들이 또 연월이 차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굳이 다시 받으려 하니, 구나발마가 일러 말하였다.
“좋다. 진실로 더욱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크게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돕는 것이다. 다만 서역국 승니의 승랍(僧臘)이 차지 못하고, 또한 열 사람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의 말을 배우게 해야 한다.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승니를 청하여 오게 해서 열 명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 해 여름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하였다. 당시에 신자들이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다.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성스러운 예로 숭배하였다.
하안거를 마치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각(閣)으로 돌아갔다.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갑작스레 이미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을 유언장으로 지어서,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였다.
“이미 제2과(果)를 증득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국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입적한 뒤 곧바로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붙들어 앉혔다. 얼굴 모습이 입정(入定)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달려 온 도인과 속인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향기가 강렬하게 감돌아 풍겨 나오는 것을 맡았다. 뱀이나 용처럼 생긴 한 필쯤 되는 길이의 물체 하나가,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를 수 없었다.”

곧 남림(南林)의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법에 의해서 사비(闍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였다. 향과 섶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를 뿌려 시신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왕성하게 타올라 하늘까지 빛났다. 이때에 하늘은 맑고 환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15)을 세웠다. 거듭해서 계를 받고자 하던 여러 비구니들은 바라던 일이 끊어지자,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었다.

과거 구나발마가 서울에 이르자, 문제가 그를 좇아 보살계를 받고자 했다. 때마침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여, 미처 그 일을 물어 명을 받들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구나발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본래의 생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심하여 한스러움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여러 승려에게 명하여 그의 유언장을 번역하였다.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보(三寶)와 청정한 계를 지니신
여러 상좌(上座)께 절 올리나이다.
탁한 세상엔 아첨과 간사함 많아
헛되고 거짓되어 참된 마음 없고
어리석고 미혹되어 참됨을 알지 못하여
시기심으로 덕 있는 사람 질투한다네.

이 때문에 여러 성현께선
지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시었네.
나 구나발마는
목숨이 다할 때 되어
그 동안 얻은 착한 공덕을
이제 그대로 말해 보리다.

아첨과 간사한 마음으로
명리 구하기 바라지 않고
대중의 게으름 타이르고 권하여
불법을 더욱 자라나게 했네.
크나큰 법력 이와 같아
모두 들어보오, 어진이여.

옛날 광야에서 나는
처음 죽은 시체를 보았소.
살찐 살벌레 잔뜩 들끓고
악취에다 피고름 흘러 내렸지.

마음 매어 그곳에 정신 모으니
이 몸의 본성도 이와 같아서
항상 이 몸의 모습을 보았네.
나방이 불을 두려워 아니함과 같음을

이같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사시관(死尸觀)을 닦아 익혀서
밖으로 들으려는 생각[聞思] 던져 버리고
나무 수풀 사이에 의지해 머물렀다오.

이 밤 오로지 정진하여
바르게 관할 것을 늘 잊지 않아서
경계가 늘 앞에 있음이
맑은 거울을 대함과 같으니
저와 같이 나 역시 그러하였네.

이로써 마음 고요하고 편안하여
지극히 맑은 몸이 정토라면
큰 환희심이 자라나면
청량한 마음은 극락일세.

집착 없는 마음이요
골쇄상(骨鎖相)을 이룬다면
백골이 눈앞이라
썩고 무너져서 뼈마디도 흩어지고
백골마저 가루 되지만
티 없는 지혜는 밝게 타올랐네.

사법상(思法相)16)을 굴복시켜
때때로 이 같은 경지 터득하여
몸이 편안하고 매우 유연하여
이 같은 방편의 수행이

훌륭하게 나아지고 더욱 더 늘어나니
미세한 티끌 찰나찰나 소멸하여
색이 무너진 정념(正念)의 법(法)이여,
이것이 바로 마침내 도달할 곳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탐욕 일으키는가.

알아라, 여러 감각에서 생기는 것이
고기가 미끼를 탐하는 것과 같음을.
그 감각이 헤아릴 수 없이 무너지고
찰나찰나 닳아 없어짐 관한다면
알리라, 저 감각이 의지하는 곳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에서 일어남을.

업과 업의 과보란
인연에 의지하여 찰나찰나 사라짐을
마음이 아는 가지가지
이것을 별상법(別相法)이라 이름하니

별상법은 사(思)와 혜(慧)와 염(念)을
차례로 만족하게 닦는 것이네.
여러 가지 법상 관하면
그 마음 더욱 밝아져서

내가 그 지혜[爾焰]17)속에서
4념처(念處)18)를 분명하게 보니
이로써 율행(律行)이 다해
마음을 거둬 잡아 인연 가운데 머물렀어라.

괴로움은 달구어진 칼 같으니
이는 갈애(渴愛)19)로 구르는 것이네.
갈애 다하여 열반에 들어
두루 저 삼계를 굽어보니

죽음의 불꽃 활활 타올라
형체 쇠약하여 바짝 수척하지만
장난을 멈추고 방편을 좋아하면20)
몸 다시 점점 충만해지고

수승하고 묘한 뭇 상(相) 생하니
정위(頂位)와 인위(忍位)도 이와 같아라.
이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진실로 바른 방편으로

점점 경계 약해져
적멸의 낙이 늘어나고
세제일법(世第一法) 얻으면
순일무구한 한 생각 진제를 반연하고

차례로 법인(法忍)이 생하여
무루도(無漏道)라 하나니
망상과 모든 경계와
이름마저 다 멀리 여의어

경계의 진제의(眞諦義)는
번뇌를 없애 버리고 청량함 얻음이어라.
삼매의 과보 성취하면
번뇌 떠난 청량한 연(緣)이어서

솟거나 가라앉지도 않아
맑고 지혜롭기 밝은 달이요
고요히 안주하니
순일무구한 적멸의 상이라

이는 내가 말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부처님께서만 아시는 경지일러라.
나바아비담(那波阿毘曇)에
다섯 인연과(因緣果)를 설했으니

참된 뜻이란 알아 닦고 행함이요
이름이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여러 논마다 각기 이단(異端)이 있지만
수행에는 두 가지 이치 없으니

치우치게 집착하면 시비가 있되
통달한 자야 어그러지거나 다툼 없도다.
수행의 여러 묘한 상을
내 지금 설하지 않음은

사람들이 망상을 일으켜
세간을 미혹시킬까 두렵기 때문이네.
경지 따라 중생에 이익 되는 법을
내 이미 약간 설했으니

눈 밝은 지혜인은
이 연기를 잘 알 것이오.
마라바국(摩羅婆國) 경내에서
비로소 초성과(初聖果)를 터득했고

정사와 산사에서
수도한 자취는 멀리 여읨을 닦았으며
뒤에 사자국(師子國)의
겁파리(劫波利)라는 마을에서

더욱 닦아 나아가 제2과를 증득하니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이로부터 어려움 많아
이욕도(離欲道)를 닦는 장애되어서

내 멀리 여읨 닦음을 보는 이나
이곳이 한적함을 알은 이나
모두 희유한 마음 내어
이양(利養)하러 다투어 모여들었네.

내 이를 불타는 독같이 여겨
꺼려 여의는 큰마음 내었어라.
난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사바국(闍婆國)과 임읍(林邑)을 지나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에 여러 나라 안에서
힘닿는 대로 불법 일으켰나니

물어야 할 바를 묻지 마시고
진실관을 살펴 닦으소.
지금 이 몸 멸하여 없어짐은
고요히 등불 꺼지는 것과 같다오.

8) 승가발마(僧伽跋摩)
승가발마는 중국말로 중개(衆鎧)라 하며 천축국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떠났으며, 맑고 준수하게 계율을 잘 지키는 덕이 있었다. 삼장을 잘 해석했다.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했다.
송 원가(元嘉) 10년(433)에 고비사막을 지나 서울에 이르렀다. 재간이 넓고 인품이 맑아서, 도인과 속인들이 그를 공경하고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사로서 받들어 섬겨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平陸)의 수령인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다.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이 순수하고 치밀하다고 여겼다. 그에게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을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탑을 3층으로 올렸다. 오늘날의 봉성(奉誠)탑이 바로 그것이다. 승가발마는 도를 행하고 경을 암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모여들어 불도의 교화가 널리 퍼졌다.

과거 구나발마(求那跋摩)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밝아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거듭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이때에 이부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는데, 삼장이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서울로 왔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자취를 이어받도록 하였다.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는 서울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말하였다.
“이상한 것을 바로잡아야 하니, 뜻을 집행하는 것이 같지 않다.”
혜원은 직접 승가발마와 논의를 겨루어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지를 표방하고 법다움을 환하게 드러냈다. 이치로서 증명함이 분명하고 진실하여, 이미 덕에 귀의(歸依)하는 바가 있었다.
혜의는 마침내 완고함과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앙하여 복종하였다. 제자 혜기(慧基) 등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공경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모범적인 계율[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 올리는 공양을 널리 설치하였다. 그러자 사부 대중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서울이 기울어질 정도였다.
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오묘하게 『잡심론』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앞서 구나발마 삼장이 비록 번역했다고는 하나, 아직 책으로 엮지 못했다.
즉시 그 해 9월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승가발마를 청해 번역하게 했다. 보운(寶雲)이 말을 풀고, 혜관(慧觀)이 붓으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고증하고 교감하기를 한 번씩 두루 하여 끝마쳤다.
이어서 『마득륵가경(摩得勒伽經)』ㆍ『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ㆍ『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및 『청성승속문(請聖僧俗文)』 등을 펴냈다.

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불경 번역하는 일을 끝내고 난 뒤에 작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중들이 모두들 만류했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 없었다.
원가(元嘉) 19년(442)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9) 담마밀다(曇摩蜜多)
담마밀다는 중국말로 법수(法秀)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일곱 살이 되자 정신이 깨끗하고 올곧았다. 불법의 일을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계빈국에서는 많은 성인과 통달한 이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 많은 경을 널리 꿰뚫었다. 특히 선법(禪法)에서 깊이가 있었다. 그가 터득한 경지는 지극히 정미하고 몹시 심오하였다.
사람됨이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으며, 총명하여 사리를 잘 해득하였다. 의식과 규범을 세밀하게 바로잡았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연미(連眉) 선사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교화를 펼칠 뜻을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玆: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렀다.
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왕의 꿈에 신이 말하였다.
“큰 복덕이 있는 분이 내일 입국할 것이다. 그대는 반드시 공양해야만 한다.”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外司]에게 칙령을 내렸다. 만일 이채로운 분이 국경에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담마밀다를 맞이하였다. 궁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마침내 그를 따라 계(戒)를 받고, 네 가지 공양물로 시주하는 예를 다했다.

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으므로, 재물로 봉양 받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자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했다.
“복덕 있는 분이 왕을 버리고 떠난다.”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고비사막을 지나 돈황에 이르렀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벚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정원 백 이랑을 조성하였다. 방각(房閣)과 못[池沼]은 매우 엄숙하고 깨끗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凉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 배우려는 문도(門徒)들도 많이 찾아들어 선업(禪業)이 몹시 성하였다.

항상 강남의 천자 땅에 불법을 전하려고 뜻을 두었다. 송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촉(蜀:四川省)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렀다.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각(禪閣)을 조성하여 세웠다.
지극히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면서 청하였다. 10여 일이 지나 마침내 한 매를 감응하였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를 내면서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승려와 속인 제자들이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들마다 그 마음을 백 곱절 더하였다.
얼마 후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나중에는 기원사(祇洹寺)에서 휴식을 취했다. 담마밀다의 불도에 대한 명성은 본래부터 드러나서 교화가 여러 나라에 미쳤다. 서울에 이르자, 처음부터 온 도읍이 다 기울어질 만큼 예우하고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송의 문애(文哀)황후로부터 황태자, 공주에 이르기까지 후궁에서 재(齋)를 설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초액(椒掖)21)에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건강을 여쭈는 심부름꾼들이 열흘을 멀다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곧 기원사(祇洹寺)에서는 『선경(禪經)』ㆍ『선법요(禪法要)』ㆍ『보현관(普賢觀)』ㆍ『허공장관(虛空藏觀)』 등을 번역하여 펴냈다. 항상 선도(禪道)를 가르쳐서, 때로는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오기까지 하였다. 멀거나 가까운 곳의 사부 대중들이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회계(會稽:浙江省) 태수 평창(平昌) 사람 맹의(孟顗)는 깊이 불법을 믿어,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우(浙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니고, 무현(鄮縣)에 있는 산에다가 탑과 절을 건립하였다.
동쪽 나라의 옛 습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는 집집마다 바른 곳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동안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가 10년(433)에 담마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종산(鐘山)의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담마밀다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과 시내를 사랑하였다. 종산(鐘山)이 자리한 산다움의 아름다움은 숭산(嵩山)이나 화산(華山)과 겨룰 만하다 생각하였다. 정림하사의 전체적 틀 잡음이 시냇가의 옆으로 낮게 자리한 것을 항상 한탄했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땅을 살펴보고,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 원가 12년(435)에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선비들과 서민들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봉헌한 것이 가득 쌓여, 선방(禪房)과 전우(殿宇)를 빽빽하게 여러 층으로 세웠다. 이에 사문(沙門)의 무리들이 만 리 먼 곳으로부터 몰려들었다. 엄숙하고 온화하게 불경을 암송하면서, 교화를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림(定林)의 달(達) 선사는 달마밀다의 수제자[神足弟子]로, 당신의 가르침을 넓혀서 명성이 도인과 속인들을 진동시켰다. 그 때문에 청정하게 교화가 오래 지속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뛰어난 업적은 높이 받들어져서 바뀌지 않았으니, 이는 담마밀다가 남긴 강렬한 가르침[遺烈]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서역에서 남쪽 나라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닌 곳마다, 선을 닦는 모임[檀會]을 다시 일으켜서 가르침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과거에 담마밀다가 계빈국을 떠날 때에 가비라(迦毘羅)의 신왕(神王)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 구자국에 이르렀을 때, 도중에 돌아가려 하여 이에 신왕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담마밀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대의 신이한 힘은 변통 자재하여 여러 곳들을 돌아다닐 터이니, 앞으로 그대를 따라 남방으로 함께 가지 않겠나 싶소.”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림자를 거두어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따라와 서울에 이르렀다. 곧 상사(上寺)에서 가비라 신왕의 초상화를 벽에 그렸다. 지금까지도 소리하는 그림자의 효험[聲影之驗]이 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다.
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의 나이가 87세이다. 도인과 속인들의 사부 대중이 곡을 하면서 뒤를 따랐다. 이어서 종산(鐘山) 송희사(宋熙寺) 앞에 묻었다.

10) 석지맹(釋智猛)
석지맹은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신풍(新豊)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분명하며, 행실을 닦기를 맑고 깨끗이 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경을 암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매양 외국 도인이 천축국 나라에 석가의 남긴 자취 및 대승 경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탄식하여 느낌이 일어나, 마음을 멀리 밖으로 돌려서 생각하였다.
‘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
드디어 위진(僞秦) 홍시(弘始) 6년(404) 갑진년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명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짜기 넘기를 서른여섯 번을 하고, 마침내 양주성(凉州城)에 이르렀다.

양관(陽關)을 떠나 서쪽 고비사막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곳을 넘어갔다. 이전에 전해 들었던 것보다 그 어려움이 배나 지나쳤다.
마침내 선선국(鄯鄯國)ㆍ구자국(龜慈國)ㆍ우전국(于闐國)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보았다.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파미르 고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과 함께 천 7백 리를 나아가서 파륜국(波倫國)에 이르렀다. 같이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스스로 힘써 나아가, 남은 네 명과 함께, 설산(雪山)을 넘어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오백 나한이 항상 아뇩달지(阿耨達池)를 왕래하였다. 큰 덕을 갖춘 나한이 있었다.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석지맹이 도인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를 위하여 사천자(四天子)의 일을 말해 주었다. 이것이 자세하게 「석지맹전(釋智猛傳)」에 나와 있다.

석지맹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22)를 보았다. 또한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보았다. 광채 나는 빛깔이 자줏빛을 띈 검푸른 색이었다. 네 곳 가장자리가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발우를 이마로 모시며 발원하였다.
“발우가 만약 감응한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윽고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견딜 수 없었다. 상[案]에 내려놓았을 때,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천 3백 리를 가서 가유라위국(迦有羅衛國)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 및 육계골(肉髻骨)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그림자 자취[影迹]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빽빽한 숲과 마구니를 항복시킨 보리수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하루 동안 공양하였다. 아울러 보배 일산[寶蓋]과 대의(大衣)23)로, 부처님께서 악마를 항복시킨 상(像)을 덮었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러운 변이(變異)를 샅샅이 살폈다. 하늘 사다리[天梯]나 용의 못[龍池]을 본 일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후에 화씨국(華氏國)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큰 지혜가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나열가(羅閱家)라고 불렸다. 그는 모든 족속에게 법을 전파하였다.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아, 순은으로 만든 3장(丈) 높이의 탑을 세웠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중국에는 대승(大乘)의 학문이 있는가, 없는가?”
석지맹이 대답하였다.
“모든 것이 대승의 학문입니다.”
나열(羅閱)이 놀라 찬탄하였다.
“드문 일이로다. 드문 일이로다[希有]. 아마 보살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닐런지?”
석지맹은 그에게서 범본(梵本) 『대니원(大泥洹)』 1부를 얻었다. 또 『승기율(僧祇律)』 1부, 여러 경의 범본을 얻었다.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되돌아왔다.

갑자년에 천축국을 출발하여 동행한 세 명의 도반은 길에서 죽었다.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돌아왔다. 양주에서 니원본(泥洹本)을 펴내어 20권을 얻었다.
원가(元嘉) 14년(437) 촉(蜀) 땅에 들어갔다. 16년(439) 7월에는 전기를 지어 돌아다닌 곳을 기록했다. 원가(元嘉, 424~452) 말년에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사문에 대하여 두루 찾아보았다. 행로를 기록하여 열거한 것이때로는 간혹 서로 같지 않다. 부처님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어긋난다. 아마도 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단지 한 길만이 아니며, 정골과 발우가 신령스럽게 옮겨 다녀 때로 다른 곳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에 서술한 견문을 증거로 삼기에는 어렵다.

11) 강량야사(畺良耶舍)
강량야사는 중국말로 시칭(時稱)이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다. 아비담(阿毘曇)을 잘 외우고, 율장의 책[律部]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대부분 해박하였다. 삼장에도 아울러 밝지만 선문(禪門)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 선정의 관문에 들 때마다, 간혹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항시 삼매정수(三昧正受)로써 교화를 여러 나라에 전하였다.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멀리 고비사막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서울에 다다르니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매우 특이하다고 더욱 찬탄하였다.

처음에 종산(鐘山)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사문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약왕약상관(藥王藥上觀)』과 『무량수관(無量壽觀)』을 번역하였다. 승함이 곧 붓을 들어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번뇌의 장애를 건너는 비밀한 술법[轉障之秘術]이자, 정토를 이루는 크나큰 바탕[淨土之洪因]이었다. 그러므로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평창(平昌) 사람 맹의는 소문을 들었다. 삼가 공경해서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제공하였다. 맹의가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면서,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진정으로 간청하였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가 쉬었다.
원가(元嘉) 19년(442년)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유람하며 곳곳에서 도를 펴니, 선을 배우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가 60세이다.

∙승가달다(僧伽達多)ㆍ승가라다(僧伽羅多)
이때에 또 천축국의 사문 승가달다와 승가라다는 모두 선학(禪學)에 매우 밝았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머물렀다.
승가달다가 일찍이 산중에 있으며 좌선(坐禪)을 하였다. 해가 마침 저물어서 식사를 거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새가 무리를 지어 과일을 물고 날아가다가 내려 주었다. 승가달다가 생각하였다.
‘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지금 날아가는 새가 내려준 음식이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는가.’
그러고는 받아서 먹었다.
원가 18년(441년) 여름에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의 청을 받아들여, 광릉(廣陵)에서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건업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라다는 중국말로 중제(衆濟)라 한다. 송나라 경평(景平, 423~424) 말에 송의 서울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다. 본래의 그윽함과 한가함을 닦으며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원가 10년(433)에 종부(鍾阜)의 양지쪽에 살 곳을 정하였다.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정사를 건립하였다. 곧 송희사(宋熙寺)가 이것이다.

1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구나발타라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 어려서 5명(明)의 여러 논을 익혔다. 천문(天文)ㆍ서산(書算)ㆍ의방(醫方)ㆍ주술(呪術)에도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었다. 깜짝 놀라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봉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沙門)을 끊어 막았다. 이에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에서 스승과 벗을 구하였다.
곧바로 비녀를 뽑아버린 뒤 머리를 깎고, 정신을 전념하여 배움에 뜻을 두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무렵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뛰어났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화순하며,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었다. 스승을 섬김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사양하고, 대승에 나아가 배웠다. 대승의 스승이 시험 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자,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다. 스승이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너는 대승과 소중한 인연이 있다.”
이윽고 독송과 강의에서 겨룰 자가 없었으니, 더 나아가 보살계법을 받았다.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띄워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만약 오로지 외도(外道)만을 지키신다면, 비록 제가 돌아간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 됨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삼보를 믿어 귀의하신다면, 길이 서로 뵙겠지요.”
그의 부모는 그의 편지가 온 것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의 여러 나라에 이르니, 모두들 필요한 물건을 전해 보내왔다. 일찍이 동방에 인연이 있음으로 해서, 이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마저 떨어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해 시방불(十方佛)을 염송하고 관세음을 칭한다면, 어디를 가든 감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경(呪經)을 외우고, 간절하게 예참하였다. 조금 있다가 신풍(信風)24)이 갑자기 이르렀다. 짙은 검은 색의 구름이 끼어 비를 내려, 온 배 안의 사람이 구제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자사(刺史)인 차랑(車郞)이 표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송나라 태조는 사신을 보내 영접하였다. 이윽고 서울에 이르자, 명승(名僧)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칙령을 내려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그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통역을 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길거리에서 반갑게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傾蓋如故]25)같이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있다가 태조가 청하여 맞이하고, 더욱 깊이 숭배하여 존경하였다. 낭야(瑯琊) 안연지(顔延之)는 뛰어난 재주와 큰 학식을 지닌 석학인데도, 의관을 갖추고 문하에 들어갔다.

이에 이르러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갓과 일산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대장군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인 남초왕(南譙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 뒤에 뭇 승려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기원사에서 불교 교리[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을 모아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여 냈다.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번역하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鬘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 말이 오가며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

후에 초왕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ㆍ『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ㆍ『무량수경(無量壽經)』 1권ㆍ『니원경(泥洹經)』ㆍ『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ㆍ『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ㆍ『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ㆍ『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

초왕(譙王)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

원가(元嘉, 424~455) 말기에 이르러 초왕이 자주 괴이한 꿈을 꾸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서울에 장차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적질을 도모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가 간절하게 간언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호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왕은 세상 물정과 소신 때문에 그를 핍박하여 함께 내려갔다.

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큰 배가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강기슭까지 너무 멀어서 온전히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을 부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이 겨우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의 흐름이 매우 깊고 빨랐다.
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었다.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어지러워하는 사이에 10여 보나 나갔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강기슭으로 올라왔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었다. 어린아이에게 보상코자 둘러보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바야흐로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당시에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세조가 군중에 칙명을 내렸다. 구나발타라를 찾으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의 사자 편에 부쳐 궁궐로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찾아내어, 배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
세조가 곧바로 접견하여 곡진하게 돌아보며 여쭈었다.
“만나기를 고대한 날이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났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 잿가루로 날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접견을 하시니, 거듭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칙명으로 물었다.
“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하여 몰아댔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예기치 못한 전생의 인연으로 인해, 이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세조가 말하였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 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였다.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였다.

이에 앞서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다. 매번 초왕(譙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대가 패하기에 이르러서 서찰을 검사해 보니,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희롱 삼아 물었다.
“승상(丞相)을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공양을 받은 것이 10년입니다. 어찌 덕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좇아 간절히 비나이다.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세조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롭다고 여겨 허락하였다.
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됨에 이르러 칙령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讌會)를 열어,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다.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때 미쳐 머리를 말끔하게 깎지 못한 터라서 흰머리가 희끗하였다. 세조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자인데, 단지 늙음이 이미 이르렀군. 짐이 시험 삼아 늙음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들의 의도를 꿰뚫어 볼 것이오.”
그리하여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소. 그러나 다만 오직 한 가지 남아있는 일이 있다오.”
곧바로 소리에 응하여 답하였다.
“제가 멀리 황제의 서울에 와서 30년이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을 머금기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어서,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세조가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자신의 자리 가까이에 앉도록 하여 온 조정의 눈길이 쏠렸다.

후에 말릉(秣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皇樓) 서쪽에 절을 세웠다.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향을 살라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너희들은 묵은 인연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웠으니,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약 머물고자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어라. 만약 머물 수 없다면, 각기 편안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명이 같은 날 저녁에 꿈을 꾸었다. 천여 명의 귀신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절 안의 대중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현재 도후저(陶後渚)에 있는 백탑사(白塔寺)가 바로 그곳이다.

대명(大明) 6년(462) 천하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효험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였다.
“반드시 감응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우러러 삼보와 폐하의 하늘같은 위엄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입니다. 만약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었다. 다시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다. 조용히 경을 외우며, 마음속으로 비밀스런 주술을 더 하였다.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서북쪽에서 마치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떠 있었다.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지더니, 비가 연이어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였다.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뒤이어 내려 주었다.

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종신토록 거친 음식만을 먹었다.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끝내고 나면 번번이 날아다니는 새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태시(泰始) 4년(468) 정월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지 못함을 느끼고는, 문득 태종과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성스런 모습이 나타났다. 우중(禺中: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태종은 헤어지는 아픔이 몹시 더하여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어, 영예로움과 애도함을 함께 갖추었다.

∙아나마저(阿那摩低:寶意)
당시에 또 사문 보의(寶意)라는 자가 있었다. 범어(梵語)로는 아나마저라고 한다. 본래의 성은 강(康)씨로 강거(康居) 사람이다.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송(宋)나라 효건(孝建) 연중(454~456)에 서울에 와서 와관선방(瓦官禪房)에 머물렀다.
항시 절 안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였다. 또한 불경과 율장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삼장(三藏)이라고 불렀다. 평소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아, 곧바로 길흉(吉凶)을 알았다. 신령스런 주술을 잘하였다. 손바닥에 향을 칠하여 사람의 지나간 과거의 일도 알아보았다.
송나라 세조가 높이 두 자쯤 되는 동으로 만든 타호(唾壺) 하나를 내려주었다. 항상 탁상 앞에 놓아두었다. 홀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도둑질하였다. 보의가 돗자리 하나를 속이 빈 채로 둘둘 말고는, 위를 향해 여러 차례 주문을 외웠다. 3일 저녁이 지나자 타호가 돗자리 안에 되돌아와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이에 사방 원근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제나라의 문혜왕(文惠王)ㆍ문선왕(文宣王)과 양나라 태조(太祖)가 모두 그를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 말년에 머무른 곳에서 돌아가셨다.

13) 구나비지(求那毘地)
구나비지는 중국말로 안진(安進)이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도를 좇아 천축국의 대승법사(大乘法師)인 승가사(僧伽斯)를 스승으로 섬겼다.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부지런히 경을 암송하고 대소승(大小乘)을 연구하여, 꿰뚫은 것이 거의 20만 글자나 되었다. 외전(外典)을 겸하여 공부하여 음양(陰陽)을 자세히 터득하였다. 시간을 점치고 일을 시험하여, 조짐을 증명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제(齊)나라 건원(建元, 479~482) 초에 서울에 와서 비야리사(毘耶離寺)에 머물렀다. 지팡이를 짚고 따르는 무리들의 위엄서린 자태가 엄숙하고 단정하여, 왕공(王公)과 귀족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공양을 청하였다.

과거 승가사는 천축국에서 수다라장(修多羅藏) 가운데 긴요하고 절실한 비유들을 뽑아 한 부(部)로 편찬하였다. 무릇 온갖 일의 배움에서 새롭게 가르쳤다. 구나비지는 그것들에 모두 뛰어난데다, 겸하여 뜻과 취지에도 밝았다.
영명(永明) 10년(492) 가을에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모두 10권이다. 『백유경(百喩經)』이라고 이른다. 뒤에 다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과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 각 1권을 내었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이후부터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 거의 끊어졌다. 이것이 세상에 유통되자, 세상에서 모두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구나비지는 사람됨이 매우 도량이 넓고 도타웠기 때문에, 만 리나 되는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남해(南海)의 상인들은 모두 그를 종사로써 섬겼다. 바치는 물건은 모두 받아들여 불법을 영위하는 데 사용하였다. 건업(建業)의 회수(淮水) 옆에 정관사(正觀寺)를 지어 이곳에 거주하였다. 2층 누각과 층문(層門)으로 전당(殿堂)을 정돈하여 꾸몄다.
중흥(中興) 2년(502) 겨울, 머무르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바라(僧伽婆羅)
양(梁)나라 초기에 승가바라라는 자가 있었다. 역시 외국에서 온 불학을 공부한 승려[學僧]이다. 거동과 모양이 신중하고 깨끗하며, 상대하여 담론을 잘 하였다. 서울에 이르러 역시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렀다. 지금의 왕이 매우 예를 갖추어 대우하였다.
정관사와 수광전(壽光殿)ㆍ점운관(占雲館)에 칙명을 내려, 『대육왕경(大育王經)』ㆍ『해탈도론(解脫道論)』 등을 번역하였다. 석보창(釋寶唱)과 원담윤(袁曇允) 등이 붓을 들고 받아 적었다.

【論】불경을 번역한 공이 드높아서 참으로 무어라 찬양할 말이 없다. 옛날에 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로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과 말전지(末田地) 등이 팔만 법장(八萬法藏)26)을 함께 갖추어 가지고 주지[具足住持]하셨다. 도를 넓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일과 쓰임[功用]이 더욱더 넓었다. 그러니 성스러운 지혜가 해처럼 빛나서, 남은 빛이 아직도 숨겨지지 않는다.
이후로 가전연자(迦旃延子)와 달마다라(達磨多羅)와 달마시리제(達磨尸利帝) 등이 함께 이론(異論)을 널리 찾아서 각각 그 언설(言說)을 지었다. 모두 4아함[含]27)을 근본으로 이어받고, 삼장(三藏)을 종주(宗主)로 삼은 것이다.

용수(龍樹)와 마명(馬鳴)과 바수반두(婆藪盤豆)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대승 경전을 법칙 삼아 그 핵심이 되는 요점을 잘 추슬렀다. 그 근원은 반야(般若)28)에서 나오고, 흐름은 쌍림(雙林)29)을 꿰뚫는다. 비록 낮은 곳이나 높은 곳이나 두루 화합하여 적셨다고 하지만, 또한 그 본성까지 함께 터득했다. 그래서 삼보로 하여금 책에 실려 전하게 하고, 법륜(法輪)으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5백 년 동안에 오히려 정법(正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일컫는다.
무릇 신성한 교화가 접하는 곳마다,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여기로 모여든다. 한결같은 소리와 한결같은 빛으로 문득 다른 나라를 진동시키고, 한결같은 대(臺)와 한결같은 일산으로 인도를 뒤덮은 것이다.

중국과 가유(迦維)30)는 왕래하는 길이 파미르고원과 강으로 끊어져서 수만 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聖人)의 신비한 힘을 이용한다면, 반걸음이나 한 걸음의 사이와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보고 듣는 것이 제한되고 막혀 있음은 어찌 시절의 운수[時運]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인연과 운수가 장차 감응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잠기어 젖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도(浮圖)31)의 왕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큰 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조서를 내려 초왕(楚王) 영(英)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미묘한 말을 외우고, 부도(浮圖)의 인자한 제사를 숭상한다.”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난 것을 해몽하기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서역에 보냈다. 그리하여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도를 품고 와서 교화를 하였다.

그들은 책을 옆에 끼고 외로이 길을 떠났다. 어렵고 괴로운 중에도 반드시 도달할 것을 기약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기어올라서는 깊은 연못에 다다랐다. 나르는 듯한 동아줄을 잡고서는 험한 나루를 건넜다. 자신의 몸을 헌신짝처럼 여겨 돌보지 않았으므로, 어려움을 만나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불법을 전하고 불경을 펼쳐, 처음으로 동쪽 나라 중국을 교화하여 후학들이 배우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힘 덕분이다.

안청(安淸)과 지참(支讖)과 강승회(康僧會)와 축법호(竺法護) 등에 이르러서는, 모두 다른 왕조에 한 시기씩, 앞사람의 발꿈치를 뒤이어서 크게 도왔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은 말이 매우 다르다. 스스로 훈고에 정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뒤이은 지겸(支謙)과 섭승원(聶承遠)과 축불념(竺佛念)과 석보운(釋寶雲)과 축숙란(竺叔蘭)과 무라차(無羅叉) 등도, 모두 범어(梵語)와 중국말을 매우 잘해서 번역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세 번씩 반복하여 말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우리 중국의 음률을 사용하고 윤색하여 완성하였다.
논(論)에서 일컫는다.
“외국의 세속 말을 따라서 바른 뜻을 보이려 했고, 바른 뜻 속에서도 더욱 뜻이 바른 말을 썼다.”
논의 일컬음은 대개 이런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그 후에 구마라집이 석학(碩學)으로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신묘한 식견으로서 그윽하고 심원한 이치를 알았다. 그리하여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고 외국 여러 나라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다시금 지겸과 축불념 또는 축숙란 등이 번역한 문장이 예스럽고 투박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다시 거듭 범본(梵本)을 대조하여 번역하였다. 그래서 금본(今本)과 고본(古本)의 두 경전이 말은 다르나 뜻에서는 같다.
이때에 도생(道生)과 도융(道融)과 도영(道影)과 승예(僧叡)와 혜엄(慧嚴)과 혜관(慧觀)과 도항(道恒)과 승조(僧肇) 등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 전에 뜻을 깨닫고 글이 구슬처럼 매끄러웠다. 붓을 잡아 뜻을 이어 글을 다듬는 임무는 바로 이 사람들이 맡았다. 그래서 장안(長安)의 번역이 왕성하여 으뜸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
이때 요흥(姚興)32)이 천자의 칭호를 쓰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삼보를 사랑하고 숭상하여 불법을 성곽과 참호로 둘러치듯 보호하였다. 그래서 도를 사모하여 찾아와 위의를 갖춘 이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연기가 끼듯 모여들었다. 삼장(三藏) 법문과 인연이 있는 것은 반드시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운이 동쪽 중국으로 옮겨온 이래 여기에서 가장 융성하였다.

불현(佛賢) 비구가 강남에서 번역한 『화엄경(華嚴經)』의 큰 책과 담무참(曇無讖)이 하서(河西)에서 번역한 『열반경』의 오묘한 가르침과 여러 승려들이 번역한 4아함경(阿含經)ㆍ5부(部)33)ㆍ건도(犍度)34)ㆍ『바사(婆沙)』35) 등은 모두 내용이 법의 근본에 부합되고 이치가 3인(印)36)에 맞는다.
그러나 동수(童壽: 구마라집)는 첩을 둔 허물이 있고, 불현(佛賢: 불타발타라)은 물리쳐 내쫓긴 자취가 남아 있다. 실록을 고찰해 보아도 상세히 구명하기가 쉽지 않다. 혹시 시절의 운수[時運]가 경박하여 도를 잃고 사람들은 흩어졌기 때문에, 보고 느끼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만약 본래의 자취에 가깝게 더듬는다면, 아마도 또한 구슬에 생긴 하나의 흠집 정도일 것이다.

또 안세고(安世高)ㆍ담무참(曇無讖)ㆍ법조(法朝)37)ㆍ법조(法祚)38) 등은 생각이 조리에 맞고 박학하여 어진 은택을 안개처럼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하니, 갚아야 할 전생의 업보나 피할 수 없는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러므로 나한(羅漢)은 비록 모든 번뇌가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골이 터지는 액운을 만났다. 비간(比干)39)은 충간(忠諫)하면서 정성을 다했으나 오히려 칼을 받는 화를 당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도중에 축법도(竺法度)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오직 소승(小乘)을 고집한다고 말하여 삼장과는 어그러졌다. 밥을 먹을 때도 구리로 된 발우를 사용하니 본래 계율이 허락한 바가 아니다. 땅에 엎드려 서로 향해서 절하니, 이 또한 참법(懺法)40)에 없는 것이다.

또 축법도가 태어난 곳은 남강(南康)40)이어서 천축국에 노닌 것은 아니다. 만년에 담마야사(曇摩耶舍)를 만났으나, 그 또한 소승(小乘)을 전공한 스승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대중(大衆)들과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통달한 군자들은 일찍이 돌아서서 가버리지 않았다. 다만 여승의 무리들만 쉽게 따라서 비로소 그 교화를 받았다.
무릇 여인들에 대한 이치의 가르침은 흡족 시키기가 어려워서 일의 자취가 쉽게 뒤집어진다. 인과(因果)를 들으면 소홀히 금방 등져 버리고, 변화하는 술수[變術]를 보면 앞을 다투어 따라간다. ‘따라서 타락한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의 연못은 넓어서 숫자가 8억(億)에 이르지만, 번역하여 얻은 것은 천여 권에 그친다. 모두들 가로막는 사막을 넘어서고, 절벽의 끊긴 길을 넘어 왔다. 혹은 안개를 바라보며 험난한 곳을 건너고, 혹은 말뚝을 붙잡고 몸을 밀어 나오는 고생들을 겪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모여 헤아려 찾아보니, 모두 열 중에 여덟 내지 아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법현(法賢)ㆍ지맹(智猛)ㆍ지엄(智嚴)ㆍ법용(法勇) 등이 출발할 때는 많은 사람을 모아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다만 오직 돌아보는 자신의 그림자만 유일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라 하겠다.

하나의 경전이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은, 경전에 다시 수명을 부여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런 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의 배우는 무리[學徒]들은 오직 한 가지 경전만을 연구하여 익히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넓게 읽으면 많이 미혹된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배움을 타락시키는 말이다. 옳은 방법을 총괄한 가르침은 아니다. 어째서인가?
무릇 이치의 참맛을 찾고 법문(法門)을 바르게 판단하고자 한다면, 어찌 억측으로 판단하여 여러 경전을 널리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옮겨 베낀 수고로움이 수포로 돌아가고, 경전이 영원히 상자 속에 감추어진다. 단 이슬과 같은 바른 설법을 끝내 펼쳐서 찾아보지 않아, 더할 나위 없는 보배 구슬을 숨겨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오.
만약 선정(禪定)과 계율을 통괄하여 캐내고,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을 융합하여 배울 수 있다면, 비록 다시 기수(祇樹)의 그늘이 없어지더라도 그윽하고 미묘한[玄妙] 바람은 오히려 불 것이다. 그리고 사라수(娑羅樹)의 잎이 변하더라도 불성(佛性)은 오히려 빛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멀리는 석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까이는 불경을 번역한 이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것이 되리라. 아마도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身命]을 얻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손가?

찬(贊)하노라.
빈바(頻婆)42)가 노래를 멈추나
거듭된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5승(乘)43)이 마침내 굴러서
팔만법문(八萬法門) 두루 가득 차네.

뭇 별들 북두성 둘러싼 고요한 밤
한(漢)나라 황제 꿈에 신령이 통하는구나.
섭마등ㆍ축법란ㆍ지참ㆍ구마라집이
도를 위해 목숨 바쳐 모여드네.

자애로운 구름이 그늘을 옮기고
지혜로운 물이 나루를 전하니
저 말세로 하여금
바야흐로 큰 인연을 심는도다.

주석
1 전한(前漢)의 하내(河內) 사람. 자(字)는 자문(子文). 무제(武帝) 때 대월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匈奴)한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 10년 13년 만에 대월지국으로부터 돌아왔다. 이로부터 한나라가 서성(西城) 제국(諸國)에 알려져 교통(交通)이 크게 열리니 원삭(元朔) 6년에 그 공으로 박망후(博望侯)로 봉후(封侯)되었다.
2 선경(線經). 즉 경을 말하는 것으로서 경전의 이름이 아니다.
3 소승들이 닦는 네 가지 계위(階位). 증과(證果)를 향하여 수행하되, 아직 과(果)에 이르지 못한 동안. 수다원향ㆍ사다함향ㆍ아나함향ㆍ아라한향.
4 소승 증과(證果)의 네 계위. 과(果)는 무루지(無漏智)가 생기는 지위. 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ㆍ아라한과.
5 강소성(江蘇省) 육합현(六合縣) 서남쪽 강포현(江浦縣) 경계에 있는 산.
6 범어 ksatriya의 음역으로 인도의 사성 가운데 바라문 다음가는 왕 및 무사 계급을 말한다.
7 화도(火塗)인 지옥도(地獄道), 도도(刀塗)인 아귀도(餓鬼道), 혈도(血塗)인 축생도(畜生道)를 말한다.
8 임금이 조정(朝廷)에서 신하에 대하여 남쪽으로 향해 앉는 자리. 전(轉)하여 임금의 지위를 이른다.
9 Grdhrakuta의 음역으로 마갈타국(摩竭陀國)에 있는 산 이름이며, 영취라고 번역한다.
10 라후라. 석존의 아들. 사미의 시초.
11 정광불(錠光佛) 또는 연등불(燃燈佛)이라 번역. 과거 구원(久遠)한 옛적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미래에 반드시 성불하리라는 수기(授記)를 주었다고 한다.
12 유동은 범어 마납박가(摩納縛迦)의 번역. 정행(淨行)을 닦는 젊은 보살. 그 보살이 과거 인행시에 부처님께서 진흙을 밟지 않으시도록 자기의 머리카락을 풀어 엎드려서 부처님께서 그 머리카락을 밟고 지나시게 했다고 한다.
13 비구. 비구니의 이부 대중.
14 석존의 이모. 부처님의 교단에서 맨 처음으로 비구니가 되었다.
15 승려를 화장하여 타고 남은 ‘하얀 재’를 모셨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재를 모셨다고 하여 회탑(灰塔)이라고도 한다. 후대의 부도(浮圖)와 같다.
16 사물을 생각하는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심상.
17 Jneya. 이염(爾炎)이라고도 쓴다. 소지(所知)ㆍ경계(境界)ㆍ지모(智母). 지경(智境)이라 번역. 5명(明) 등의 법이 지혜를 발생케 하는 경계가 되는 것.
18 소승의 수행자가 3현위(賢位)에서 5정심관(停心觀) 다음에 닦는 관. 신념처(身念處)ㆍ수념처(受念處)ㆍ심념처(心念處)ㆍ법념처(法念處).
19 목마를 때 물을 사랑하듯 범부가 5욕(欲)을 탐하는 것.
20 『법화경』「방편품」 참조.
21 황후(皇后)의 어전(御殿).
22 부처님께서 쓰시던 타구(唾具). 법현이 친견했던 것과 같다.
23 삼의의 하나. 승가리라 음역.
24 동북풍(東北風) 혹은 계절풍을 말한다.
25 길을 가다가 만나 서로 잠깐 이야기하는 정도의 교분(交分)이지만, 서로 마음이 맞아 옛날부터 사귄 사이같이 친하다는 말.
26 팔만법문(八萬法門)ㆍ팔만사천법장(八萬四千法藏)ㆍ팔만사천법문(八萬四千法門)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일대 교법을 통틀어 일컫는 말. 중생에게 팔만 사천의 번뇌가 있으므로 이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하여 팔만 사천의 법을 말하였다 한다.
27 4아함경(阿含經). 곧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ㆍ『중아함경(中阿含經)』ㆍ『장아함경(長阿含經)』ㆍ『잡아함경(雜阿含經)』을 말한다. 『아함경』은 아함부에 속하는 소승경의 총칭이다.
28 모든 사물의 본래의 양상을 이해하고 불법의 진실한 모습을 파악하는 지성의 작용. 또는 최고의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
29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 석존(釋尊)이 입멸(入滅)하신 곳.
30 가유라열(迦維羅閱)ㆍ가비라위(迦毘羅衛)와 같은 말. 석존(釋尊)의 탄생지.
31 부도(浮屠)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석종(石鐘) 또는 돌탑을 말하고, 중국에서는 스님들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32 남북조(南北朝) 시대 후진(後秦)의 왕. 유학과 불교를 선양하였다.
33 첫째, 오부대론(五部大論): 법상종(法相宗)에서 쓰는 5종의 논(論). 곧 『유가론』ㆍ『분별유가론』ㆍ『대장엄론』ㆍ『변중변론』ㆍ『금강반야론』. 둘째, 오부대승경(五部大乘經)』: 첫째는 대장경 중에 있는 대승 경전을 5종으로 분류한 것. 『개원석교록』의 분류는 반야부ㆍ보적부ㆍ대집부ㆍ화엄부ㆍ열반부, 『열장지진』의 분류는 화엄부ㆍ방등부ㆍ반야부ㆍ법화부ㆍ열반부. 둘째는 천태종에서 『화엄경』ㆍ『대집경』ㆍ『대품반야경』ㆍ『법화경』ㆍ『열반경』을 말한다.
34 같은 종류의 법을 모아서 한몫씩 묶어 놓은 것. 경론(經論) 중의 부문을 가리키는 명칭. 편장(篇章)에 해당.
35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줄여서 『바사론(婆沙論)』. 5백 대아라한 편저. 659년 현장이 번역. 불멸(佛滅) 후 400년 초에 가니색가왕이 5백 나한을 모아 불경을 결집할 때 『발지론』을 해석하게 한 책이다.
36 3법인(法印). 불교의 근본 교의(敎義)를 셋으로 표시한 것.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ㆍ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ㆍ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 인(印)은 인신(印信)ㆍ표장(標章)이란 뜻으로 일정불변하는 진리라는 표지.
37 『고승전』 제1권에 보이는 백원(帛遠)의 자(字)이다.
38 법조(法祖)의 아우인 백법조(帛法祚)이다.
39 은(殷)나라의 충신. 주왕(紂王)의 음란함을 간하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기자(箕子)ㆍ미자(微子)와 더불어 은나라의 3인(仁)이라고 일컬어진다.
40 경전을 읽어 죄장(罪障)을 참회하는 법회. 『법화경』으로 하는 것을 법화 참법, 『아미타경』으로 하는 것을 미타 참법이라고 한다.
40 중국의 지명(地名)으로 같은 이름이 여러 곳 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미상(未詳).
42 빈바사라(頻婆娑羅). 중인도 마갈타국 임금. 석존(釋尊)이 성도(成道)한 뒤에 귀의하여 가란타에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다.
43 일반 사람으로서 깨달음의 지위, 특히 해탈의 지경에 도달케 하는 부처님의 교법을 승(乘)이라 하는데 이를 다섯 종류로 나눈 것을 5승이라고 한다.

『고승전』 3권(ABC, K1074 v32, p.785c01-p.797c01)

고승전(高僧傳) 제4권<

2. 의해(義解) ①

1) 주사행(朱士行)
주사행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바르고 곧아서 어떤 기쁨이나 어떤 막음으로도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멀리까지 생각을 품고 깨달아, 티끌세상을 벗어나 출가한 후로는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 힘썼다.

예전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축불삭(竺佛朔)이 『도행경(道行經)』을 번역했다. 이는 곧 소품(小品)의 옛 판본으로서 문구가 간략하여 내용의 뜻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사행은 일찍이 낙양에서 『도행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문장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투박하여, 대체로 미진함을 깨닫고는 매양 탄식하였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였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구하여야 하겠다.”

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57)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였다. 서쪽 고비 사막을 지나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렀다. 과연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얻었다. 제자인 불여단(不如檀)을불여단은 중국어로 법요(法饒)라는 의미이다. 보내 범본의 불경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자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곳 왕에게 아뢰었다.
“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불법을 미혹하여 어지럽힙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불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처럼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임금님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경전을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마침내 경을 태우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이 곧 이를 허락하였다. 사행이 궁전 앞에 장작을 쌓아 불태우며, 불 곁에 나아가 서원하였다.
“만약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할 것이라면, 불경은 곧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가호가 없다면, 이는 운명일 터이니 어찌 하겠는가?”
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은 이내 꺼졌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가죽을 덧댄 책표지[皮牒]도 본래 것과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마침내 경전을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로 보낼 수 있었다.

∙축숙란(竺叔蘭)
이때 하남 땅에 축숙란이란 거사가 있었다. 본래는 천축국 사람이다. 아버지 대에 피난을 와서 하남 땅에 거주하였다. 숙란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훗날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겪고 나서, 두루 업과 과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 오로지 정성을 다해 힘써서 깊이 불법을 숭상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를 널리 연구하여, 범어와 중국어에 빼어났다.

∙무라차(無羅叉)
또한 무라차란 승려가 있었다. 서역의 도사로서 옛 서적을 참구하고 배운 것이 많았다. 이들이 곧 손에 범본을 잡으면, 축숙란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부른다. 가죽을 덧댄 책 표지[皮牒]로 된, 옛 원본은 지금 예장(豫章)에 남아 있다.
태안(太安) 2년(303)에 이르러 지효룡(支孝龍)이 축숙란을 찾아갔다. 한꺼번에 다섯 부를 베껴 쓰고 교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아직 품목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열네 필의 비단에 쓰인 옛 원본은 오늘날의 필사권 20권 분량이다.

사행은 마침내 나이 80세에 우전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서방의 법에 의하여 그를 다비하였다.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졌지만 시신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곧 주문을 외웠다.
“만약 진실로 득도하셨다면, 법으로 보아 마땅히 시신이 썩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응하여 시신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이에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제자인 법익(法益)이 그 나라에서 돌아와 친히 이 일을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사행은 우전국에서 형체를 흩뿌렸다”고 이른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2) 지효룡(支孝龍)
지효룡은 회양(淮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풍모 있는 자태가 있어 무겁게 여겨졌다. 이에 다시 더하여 고상한 풍채가 탁월하고, 높은 이론이 시대에 적합하였다. 항상 소품(小品)을 펴놓고 음미하면서, 이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진류(陳留)의 완첨(阮瞻), 영천(穎川)의 유개(庾凱)와 나란히 지음(知音)1)의 교류를 맺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달(達)이라 불렀다. 당시에 혹자가 그를 조롱했다.
“우리 진나라에서 용 같은 천자가 일어나시어[龍興]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셨네[天下爲家]. 가사와 오랑캐 옷을 벗어버려야 하거늘, 사문은 어찌하여 머리카락과 피부를 온전히 하여 비단을 걸치지 않는 것인가?”
효룡이 말하였다.
“하나(도)를 잡는 것으로써[抱一]2) 소요(逍遙)하고, 오직 적멸로써 정성을 이루고자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모습을 허물고 옷을 바꾸어 형상이 변했다고 하여, 저들은 나를 욕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저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귀함에 무심(無心)하면 할수록 더욱더 귀하고, 풍족함에 무심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족한 법입니다.”
그의 때맞춘 임기응변은 모두 이와 같았다.

당시 축숙란이 처음으로 『방광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효용은 이미 평소 무상(無相)을 즐기던 터였다. 이에 이를 얻자마자 곧 10여 일 동안 펴서 읽어보고는, 문득 나아가 강의를 열었다. 그 후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손작(孫綽)이 찬(贊)하였다.

작고 모난 것은 견주어 보기 쉬우나
크나큰 그릇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라.
굳세고 굳센 님이여,
높고 넓은 곳으로 매진하기에

중생들이 다투어 삼가 귀의하고
사람들은 사모하여 본받아 우러르네.
찰랑이는 샘물 가득 구름을 담고
난초는 풍성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구나.

3) 강승연(康僧淵)
강승연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장안에서 태어났다. 모습은 비록 인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중국말을 하였다. 얼굴과 행동이 자상하고 바르며, 뜻과 행동이 넓고 깊었다. 『방광(放光)』ㆍ『도행(道行)』 등 두 반야경을 외웠다. 곧 대품과 소품의 두 경전이다.

∙강법창(康法暢)ㆍ지민도(支敏度)
진(晋)나라 성제(成帝) 때에 강법창ㆍ지민도 등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넜다. 법창도 역시 재주와 생각이 넘쳐 나서 서로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인물론(人物論)』과 『시의론(始義論)』 등을 지었다. 법창은 늘 주미(麈尾:拂子, 털이개)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다. 이름난 손님을 만날 때마다 청담(淸談)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이에 유원규(庾元規)가 법창에게 말하였다.
“이 털이개를 왜 항상 쥐고 다니는가?”
법창이 말하였다.
“(당신 같이) 청렴한 사람은 갖지 않고, (나 같이) 탐욕스런 사람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된다.”

지민도도 역시 총명하며 명석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역경록(譯經錄)』을 지었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한다.
승연은 비록 덕이 법창과 민도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과 달리 청렴하고 검약하게 자처하여 항상 구걸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처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걸식(乞食)을 하다가 진군(陳郡)의 은호(殷浩)를 만났다. 은호가 처음으로 불경의 심원한 이치에 대해 물었다. 즉각 세속 책의 성정(性情) 같은 내용으로 답하면서,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은호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다시 보았다.
또 낭야(瑯琊)의 왕무홍(王茂弘)이 코가 높고 눈이 깊다 하여 그를 희롱하였다. 승연은 말하였다.
“코가 얼굴의 산이라면, 눈은 얼굴의 못[淵]이랍니다. 산이 높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고, 못이 깊지 않으면 맑지가 않다.”
당시 사람들이 명답이라 여겼다.

그 후 예장산(豫章山)에 절을 세웠다. 읍과의 거리가 수십 리이다. 강물을 두르고 높은 재를 옆에 끼며,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이름난 승려와 뛰어난 달인들이 메아리가 답하듯 달려와 무리를 이루었다.
항상 『심범천경(心梵天經)』을 수지하여, 공의 논리에 그윽하고 원대하였다. 유달리 강설을 잘 하기에, 배움을 숭상하는 문도들이 오가며 가득 찼다. 그 후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4) 축법아(竺法雅)
법아는 하간(河間: 황하 부근) 사람이다. 올곧고 올바르며 법도와 기량이 있었다. 어려서는 외도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불교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그러자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을 받들었다.
당시 그에게 의지한 제자들 모두 세간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곧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일을 헤아렸다. 이것을 외도의 서적과 짝 맞춰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사례로 삼았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말한다.

∙비부(毘浮)ㆍ담상(曇相)
아울러 비부ㆍ담상 등도 역시 격의를 말하여 문도들을 가르쳤다. 법아는 풍채가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요점의 해설[樞機]에 뛰어나,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가며 강설하였다. 도안(道安)ㆍ법태(法汰) 등과 더불어 늘 불경을 펼쳐 해석하되, 의문 나는 것을 모아서 함께 경의 요점을 연구하였다.
그 후 고읍(高邑)에 절을 세웠다. 대중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가르쳐 이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담습(曇習)
법아의 제자 담습이 스승을 이어받아, 강론하는 말솜씨가 훌륭하였다. 위조(僞趙)의 태자 석선(石宣)의 존경을 받았다.

5) 강법랑(康法朗)
강법랑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절도 있게 잘 지켰다. 한 번은 경을 읽다가 쌍수(雙樹)ㆍ녹원(鹿苑:鹿野苑)의 부분을 보고는 울적하여 탄식했다.
“내가 과거의 성인이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하여 성인께서 계셨던 곳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맹세코 가이(迦夷: 카필라)로 가서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였다. 곧 같이 공부한 네 사람과 함께 장액(張掖)을 떠나, 서쪽으로 고비 사막을 지났다. 걸어서 사흘이 지나자,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홀연히 한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초목이 사람을 덮어 가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두 칸의 방이 있었다. 방 가운데 각기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한 사람은 이질(痢疾)을 앓았다. 두 사람의 방이 나란히 있으나 서로 돌보지 않았다. 사방에 똥오줌뿐이어서 온 방안이 냄새나고 더러웠다. 법랑이 그의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가는 길이 같아서 불법으로써 친척이 됩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서야 어찌 버려두고 가겠습니까?”

법랑은 이에 6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씻고 세탁하며 공양하였다. 7일째가 되자 이 방안 전체가 향화(香華)로 꾸며졌다. 이를 보고는 이윽고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방은 우리 스승님[和上]의 방입니다. 그 분은 이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법랑이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정성이 들어맞아 모두가 곧 도에 들어갈 것이오. 멀리 여러 나라로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소. 그러한 일은 무익하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수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오. 다만 법랑 그대는 공업(功業)이 작고 정순하지 못하여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나, 중국[眞丹國]으로 돌아가서는 대법사가 될 것이오.”
이에 네 사람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았다. 오직 법랑만은 다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경론을 찾아 연구하였다. 그 후 중산(中山)으로 돌아왔다. 제자 수백 명이 불법의 강설을 이어나갔다. 후에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손작(孫綽)이 찬을 지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것과 흠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법랑은 환히 빛났으나
그 빛남을 숨겼다.

끝을 공경히 하되 시작은 신중하며
미세함을 추구하되 빛남을 찾아냈다.
무엇으로써 증명을 삼는가.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 것을 아노라.

∙영소(令韶)
법랑의 제자 영소는 아버지가 안문(雁門) 사람이다. 성은 여(呂)씨다. 어렸을 때에는 사냥을 즐겼으나, 훗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법랑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과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선 수행에 뛰어나서, 입정(入定)할 때마다 혹은 며칠씩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유천산(柳泉山)으로 거처를 옮겨 동굴을 뚫고 좌선하였다. 법랑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나무로 법랑의 상을 조각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섬겼다.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여소(呂韶)가 중산에서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 것은, 곧 이 사람을 말한 것이다.

6) 축법승(竺法乘)
축법승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슬기로움으로 훌쩍 뛰어났다. 멀리 비추어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축법호(竺法護)에게 의지하여 사미가 되었다. 맑고 진실한 뜻과 기개가 있어, 법호가 매우 아름답게 여겼다.
법호의 도가 관중(關中) 지방을 덮자, 재산까지 성대하게 불어났다. 당시 장안의 으뜸가는 집안 출신으로 불법을 받들고자 하는 누군가가, 법호의 도덕을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법호를 찾아가 거짓으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돈 20만 냥을 요구하였다. 법승이 당시 열세 살의 나이로 스승의 옆에서 모시다가, 법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곧 말하였다.
“스승님[和尙]께서는 마음에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법승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얼굴색을 보아하니 실지로 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도덕이 어떠한지를 관찰하려고 온 것입니다.”
법호가 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그 손님은 종중 사람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법호를 찾아와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한 것을 사과하였다. 이에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졌다.

후에 법승은 서쪽 돈황(燉煌)에 이르러, 절을 세워 배우는 이들을 맞아들였다. 몸을 잊고 도를 위하여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무릇 이리ㆍ승냥이 같이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바꾸어,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큰 교화가 서쪽 땅에 행해지게 된 것은 법승의 힘이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은 『도현론(道賢論)』에서 법승을 왕준충(王濬沖)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승과 안풍(安豊)은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예지력으로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러니 비록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논두렁 밭두렁 같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덕이 높은 선비 계옹(季顒)이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

∙축법행(竺法行)ㆍ축법존(竺法存)
법승과 같이 공부한 축법행과 축법존이 있다. 그들도 나란히 산중에 깃들어 지조를 지킨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7) 축법잠(竺法潛)
법잠의 자(字)는 법심(法深)이다. 왕(王)씨로 낭야(瑯琊) 사람이다. 진(晋)나라 승상 무찬군공(武昌郡公) 왕돈(王敦)의 아우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중주(中州) 유원진(劉元眞)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유원진은 일찍부터 재주와 지혜로서 명성이 있기 때문에 손작이 찬탄했다.

삼가하여 마음을 비우고
어슴푸레 한가롭게 머무름을
그 누가 체득했나.
우리 유원진일세,

이야기는 아로새길 만하고
비춤은 어리석은 이를 깨우칠 만하며
가슴 속은 탁 트여
매양 밝아라.

법잠은 유원진에게 배운 뒤로 경박함과 화려함을 자르고 깎아냈다. 근본을 숭상하고 배움에 힘쓰더니, 미묘한 말로 교화를 일으켜 명성이 서쪽 조정을 적셨다. 그는 풍모와 자태, 용모가 당당하였다.

스물네 살에 이르자 『법화경』과 『대품』을 강의하였다. 이미 깊은 이해를 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강설마저도 훌륭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풍모를 살피고 도를 음미하는 사람이 항상 5백 명을 채웠다.
진(晋) 영가(永嘉) 연간(307~313)의 초기에 난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넜다. 중종(中宗) 원제(元帝)ㆍ숙조(肅祖) 명제(明帝)ㆍ승상 왕무홍(王茂弘)ㆍ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등이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여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건무(建武) 태녕(太寧, 317~325) 연간 중에 법잠은 항상 궁전 안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세상 밖의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덕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중종ㆍ숙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무홍ㆍ유원규도 죽자, 마침내 자취를 섬산(剡山)에 숨겨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도를 묻는 사람들이 이미 다시 산문에 모여들었다.
법잠은 30여 년 동안 강석을 유유자적하였다. 때로는 대승의 법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노자』와 『장자』를 풀기도 하였다. 투신한 제자 모두가 내전ㆍ외전에 두루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애제(哀帝, 562~563)가 불법을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모시기를 청하였다. 법잠은 부름의 뜻이 중하다 하여 잠시 궁궐로 나아갔다. 어전에서 『대품경』을 개강하니, 주상과 조정의 선비들 모두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간문제(簡文帝:司馬煜)가 재상으로 있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사실상 그를 군주[至德:至尊을 뜻함]로 여겼다. 법잠은 승려와 속인의 영수로서 선대의 조정에서는 벗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읍 받는 예와 절 받는 예를 늘상 겸하였다. 간문제가 왕이 되자 경건히 하는 예가 더욱 도타워졌다.
법잠은 어느 날 간문제의 처소에서 패국공(沛國公) 유담(劉惔)을 만났다. 유담이 조롱하였다.
“도사가 무엇 때문에 붉은 문이 있는 궁전에서 노니는가?”
법잠이 답하였다.
“당신은 붉은 문이라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오막살이일 뿐입니다.”
사공(司空) 하차도(何次道)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다. 순수하고 소박하여 경전을 독실하게 믿었다. 매양 공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더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예를 따랐다. 그러더니 자주 초청하여 여러 번 법사를 일으켰다.

법잠은 비록 그들을 따라 다시 동서로 움직였지만,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에 아뢰고 섬주(剡州)의 앙산(仰山)으로 돌아와, 그가 먼저 가졌던 뜻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숲과 언덕을 소요하다가 남은 여생을 마쳤다. 이때 지둔(支遁)이 심부름꾼을 보내, 앙산 옆에 있는 옥주(沃州)의 작은 산을 사서 고요히 머물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법잠이 대답하였다.
“오려고만 한다면 곧 주겠습니다. 어찌 소유(巢由:上古時代의 仙人)가 산을 사서 은둔한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지둔은 뒤에 어떤 고구려(高句麗)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좌(上座) 축법심은 중주(中州) 유원진의 제자입니다. 체득한 덕이 곧고 우뚝하여 도인과 속인을 모두 다스립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불법의 기강을 유지하여, 나라 전체에서 모두 우러르는 도를 넓히신 뛰어난 분입니다.
근자에 도업이 더욱 깨끗해져서 티끌세상의 더러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산 속 물가에 꾸며 덕을 닦으면서 한가로이 지내자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섬현(剡縣)의 앙산에 계십니다. 같이 노니는 이들과 함께 도의를 논설하십니다. 조용히 사는 삶이 하도 깨끗하여,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영탄합니다.”

진의 영강(寧康) 2년(374)에 앙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9세이다.
열종(烈宗) 효무제(孝武帝)가 조서를 내렸다.
“법심 법사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멀리 비우며, 거울 같은 풍모로서 맑고 곧았다. 재상의 영화를 버리고 물들인 옷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인간 세상 밖의 산에 살면서 독실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가 펼친 도에 힘입어 창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돈 10만 냥을 부조한다. 급히 말을 달려 보내도록 하라.”
또 손작은 법잠을 유백륜(劉伯倫)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잠은 도의 소양이 깊고 무거우며 원대한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령(劉伶, 유백륜)은 방탕하게 뜻을 멋대로 하여 우주를 작다고 여겼다. 비록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일에서는 유령이 미치지 못하지만, 넓고 큰 바탕의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축법우(竺法友)
당시 앙산에는 또한 축법우가 있었다. 의지가 굳세고 행동이 바르며 뭇 경전에 널리 뛰어났다. 어느 날 법잠에게서 아비담(阿毘曇)을 받았다. 하룻밤 만에 곧 이를 외웠다. 이에 법잠이 말하였다.
“한번 눈을 거친 것을 외우다니, 옛날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일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너를 5백 나한의 하나로 삼으리라.”
스물네 살 때 곧 강설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섬현성 남쪽에 대사(臺寺)를 세웠다.

∙축법온(竺法蘊)
축법온은 깨달음과 슬기로운 이해력으로 그윽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더욱 빼어났다.

∙강법식(康法識)
강법식도 역시 의학(義學)의 공부가 있었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로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강흔(康昕)을 만났다. 강흔은 스스로 서예에서는 법식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법식과 강흔은 각기 왕우군(王右軍:王羲之)의 초서를 썼다. 옆 사람이 훔쳐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또 많은 경을 베껴 썼는데,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축법제(竺法濟)
축법제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재주가 있어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을 지었다. 무릇 이러한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법잠의 제자들이다. 손작은 이들을 위하여 나란히 찬을 지었으나, 다시 갖추어 적지는 않겠다.

8) 지둔(支遁)
지둔의 자는 도림(道林)이다. 관(關)씨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신통한 이치가 있고 총명함이 몹시 빼어났다. 처음 서울에 이르자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말하였다.
“미묘한 경지에 이른 공부는 재상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진군(陳郡)의 은융(殷融)이 일찍이 위개(衛玠)와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위개의 정신의 빼어남은 후진으로서 아무도 그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둔을 만나자 다시 위개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집안 대대로 부처를 섬겼으며, 어려서부터 비상한 이치를 깨달았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여 도행품(道行品)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혜인경(慧印經)』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우뚝하니 홀로 빼어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강의하는 곳에 이를 때마다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문장 구절을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글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거칠다고 평가받았다. 사안(謝安)이 이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것은 곧 구방인(九方堙)이 말의 관상을 보는 일과 같다. 병들어 피로한 말은 버리되, 그 중에서 뛰어나고 빠른 말을 취하는 것이다.”
왕흡(王洽)ㆍ유회(劉恢)ㆍ은호(殷浩)ㆍ허순(許詢)ㆍ극초(郄超)ㆍ손작(孫綽)ㆍ환언표(桓彦表)ㆍ왕경인(王敬仁)ㆍ하차도(何次道)ㆍ왕문도(王文度)ㆍ사장하(謝長遐)ㆍ원언백(袁彦伯) 등은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허물없는 사귐을 나눈다고 알려졌다.

지둔이 백마사(白馬寺)에 있을 때이다. 유계지(劉系之) 등과 『장자』의 「소요편(逍遙篇)」을 담론하였다. 어느 날 유계지가 말하였다.
“각기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하고 생각한다.”
지둔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桀)과 도척(盜跖)은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성품이었습니다. 만약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라면, 저들 또한 소요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물러나서 「소요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때에 오랫동안 공부한 유생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오(吳:江蘇省)로 돌아와 지산사(支山寺)를 세웠다. 만년에 섬현(剡縣)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吳興)의 태수(太守)가 되어 지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 때를 헤아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거늘 섬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신다니 몹시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인생이란 잠시 깃드는 것일 뿐인지라, 근자엔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일조차 거의 다한 듯합니다. 종일토록 근심스럽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실망하여 탄식할 따름입니다.
오직 기다림은 그대가 오시어 툭 터놓고 이야기하여 시름을 푸는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흐르는 것 같군요. 이곳은 대부분 산마을인지라, 한가하고 고요하며 병을 치료할 만한 곳입니다. 일이야 어디라고 섬현과 다르겠습니까만은 의약품에서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런저런 인연을 생각해서, 쌓이고 쌓인 저의 그리는 정을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왕희지는 당시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평소 지둔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한 차례 지나가는 기운이니, 무어 말할게 있겠는가?”
그 후 지둔이 섬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군(于郡)을 경유하였다. 이때 왕희지는 짐짓 지둔을 찾아가 그의 감화력을 살펴보았다. 지둔에게 이르자 왕희지는 말하였다.
“「소요편」에 대해 들려줄 수 있겠는가?”
지둔은 곧 수천 어구의 글을 지어 새로운 이치를 펴서 드러내었다. 글 짓는 솜씨가 놀랍고 절묘하였다. 왕희지는 마침내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풀었다. 지둔에게 정신이 팔려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이어 영가사(靈嘉寺)에 주석하기를 청하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였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자취를 섬산으로 돌려 옥주(沃州)의 작은 잿마루에 절을 세워 도를 행하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 승려가 늘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때로 혹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둔은 이에 좌우명을 지어 이들에게 힘쓰도록 하였다.

부지런할지어다, 부지런할지어다.
지극한 도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쉬고 머뭇거리어
신기함을 약하게 하여 잃게 하는가.

아득한 삼계에
오래도록 길이 시달려서
번뇌의 고달픔은 밖에서 모여들건만
어두운 마음은 안으로만 치달린다.

죽을 각오로 내달려 목마르게 흠모하면
아무리 아득해도 피로조차 잊는다.
인간의 한 세상은
떨어지는 이슬방울과 같다.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니
누가 베푼다는 말인가.
덕을 품은 달인은
편안함이 반드시 위태로운 것임을 안다.

고요하게 맑은 거동으로
번뇌를 참선의 연못에서 씻어내라.
삼가하여 밝은 금계를 지켜서
우아하게 계율을 즐겨야 한다.

신묘한 도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며
함이 없는 경지에 뜻을 높이도록 하라.
세 가지 가림을 가라앉혀 맑게 하고
여섯 가지 허물을 무르녹여 단련하라.

다섯 요소를 이룬 우리네 몸은 공한 것으로
우리네 사지도 텅 빈 것이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여 손가락을 비유한 것은 아니니
끊되 떠나지 말아라.

미묘한 깨달음을 이미 베풀었으니
더욱 더 그 앎을 그윽하게 하라.
변화에 따라 그대로 맡겨
남과 더불어 옮겨가라.

앞으로는
생각하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이를 도탑게 한 이가 깨달음의 어버이니
갓난아기처럼 되도록 뜻을 두어라.

당시의 여론은 지둔의 재능이 세상을 경영하는 백성을 구제할 만한데도, 자신을 깨끗이 하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남을 구제하는 일을 겸하는 겸인(兼人)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지둔이 이에 『석몽론(釋矇論)』을 지었다.

만년에는 석성산(石城山)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서광사(棲光寺)를 세웠다. 산문(山門)에서 좌선[宴坐]하여 마음을 선의 뜻에서 노닐고, 나무열매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뜻은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는 경지에서 물결쳤다.
이어 안반(安般:數息)과 4선(禪)에 관한 여러 경전과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ㆍ『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ㆍ『도행지귀(道行旨歸)』ㆍ『학도계(學道誡)』 등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마명(馬鳴)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자, 용수(龍樹)의 그림자를 밟아 오른 것이다. 이치가 법의 근본과 호응하여 실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許詢)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무릇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소상하게 지둔의 종지를 터득했다.”
그러나 돌아가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세 번 하노라면, 도리어 문득 어지러웠다.

진(晋)의 애제(哀帝)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므로 서울로 나갔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조정과 재야에서도 기뻐 감복하였다.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濛)은 일찍부터 정밀한 논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의 재주 넘친 글을 가려내어 수백 어구의 글을 만들고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지둔이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지둔을 찾아갔다. 지둔이 그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제가 당신과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마몽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곧 감탄하였다.
“참으로 승려의 왕이다. 어찌 내가 겨룰 수 있겠는가?”

극초(郄超)가 사안(謝安)에게 물었다.
“지둔의 말솜씨를 혜중산(嵇中散)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혜중산은 노력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뿐이지.”
극초가 다시 물었다.
“은호(殷浩)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변에서는 아마도 은호가 지둔을 누르겠지. 그렇지만 솟구쳐 뛰어넘어 곧 바로 연원에 이르려는 점에서는, 은호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그 후 극초는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둔 법사는 신령한 이치에 뛰어나고 그윽한 경지에 빼어나서 홀로 깨달은 분일세. 참으로 수백 년 이래의 불법을 이어 밝혀,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한 불법의 제왕이라네.”

지둔이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3년을 넘어서려 하자, 이에 동산(東山)으로 돌아갔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하직 인사를 아뢰었다.
“지둔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감히 재능 없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스승이 되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진들을 채찍질하지 못하여, 신령한 다스림에 허물만 남겼습니다.
무릇 사문(沙門)의 길[義]에서의 법이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순수함을 조각하면 질박함에 어긋나므로, 욕망을 끊어 종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텅 비어 그윽한 거리에서 노닐며, 안으로는 성인의 법칙을 지켜서 5계(戒)의 곧음을 가슴에 달고, 밖으로는 임금님의 다스림을 돕습니다. 소리 없는 음악으로 조화롭게 하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화음을 이루어서, 자애로운 효도를 도탑게 하여, 꿈틀거리는 중생들에게 상해가 없게 합니다.

어루만지며 구휼하는 애절한 마음을 머금고, 길이 어질지 못한 일을 슬퍼합니다.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順理)를 잡고, 멀리 숙명(宿命)의 재앙을 막습니다.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경지의 절개를 끌어안고, 항(亢:極上)의 땅을 밟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3)
이 때문에 어진 임금은 왕의 자리의 무거움에 나아가서 높은 절개를 공경하고, 뛰어난 법도로 편안히 합니다. 순리의 마음을 더듬어서 형식적인 공경을 생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어받은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옵선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모아주신 데다, 우아하고 고상하여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신령한 규범에서 노닐어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것을 잊습니다. 이른바 새벽의 종과 북소리가 지극하듯이, 명성이 천하를 떨치어 맑은 교화의 바람이 이미 높으므로, 몹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수명을 하늘땅과 같이 하여 널리 지극한 교화를 떨치십시오. 진부한 믿음의 요망하고 거짓됨을 제거하여, 공자를 위해 기도한 드넓은 논의를 찾으십시오. 좁은 길에서 진흙 묻히는 일을 끊어, 평탄한 길에서 크나큰 말고삐를 떨치소서.

그리하시면 태산은 계씨의 산신 제사로 더렵혀지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신령스러움을 이룹니다. 왕자는 둥근 언덕이 아닌 곳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길이 올곧습니다.4) 만약 올곧음과 신령스러움이 각각 하나(도)로써 사람(왕자)과 신(태산)이 서로를 잊는다면, 임금은 임금다워서 아래로 몸소 거동하는 일이 없으려니와, 신은 신다워서 주술로써 신령스러움을 더하지 않습니다. 왕자와 신의 그윽한 덕이 서로를 덮어주어 백성들이 그윽한 돌봄에 힘입고, 넓고 넓은 우주가 상서로운 집을 이룬다면, 크고도 큰 우리나라가 천도를 이루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늘상 함이 없어야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고,5) 크나큰 형상을 잡아야 천하가 저절로 찾아듭니다.6) 나라 법에는 형벌과 살육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만약 살려주되 그것이 베풂 때문이 아니라면, 상 받는 사람은 스스로 얻습니다. 만약 죽이되 그것이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면, 벌받는 사람은 스스로 받을 것입니다. 관청을 넓혀서 귀신의 생각을 꺼려하고, 인사권을 공개하여 그윽한 도량을 지극히 하십시오. 그러신다면, 공자의 이른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흘러가는구나!(天何言哉四時行焉)’가 될 것입니다.

빈도는 동산(東山)의 들에 숨어살며 세상의 영화와 달리하여, 긴 언덕의 푸성귀를 먹고 맑게 흐르는 계곡물로 양치질하며 지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려 하여, 황제의 섬돌 엿보기를 끊었사옵니다. 모르는 사이에 천자의 빛이 곡진하게 비추어, 외람되이 오막살이집까지 미쳐, 자주 밝으신 조서를 받들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어찌 할 수도 없어 몸둘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궁정에 이른 이래 누차 이끌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빈객의 예로써 넉넉하게 대하시고, 미묘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매양 부끄럽게도 재능이 막힌 곳을 뚫지 못하고, 논리는 새로움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그윽한 계획에 대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거나, 보고 들은 것을 성실하게 거짓 없이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모시면서 조심하고 삼갔으나, 흐르는 땀이 자리를 적셨습니다.
그 옛날 상산의 네 늙은이[商山四皓]는 한 고조 유방에게 나아갔고, 단간목(段干木)은 위문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아감에 알맞은 때가 있었으니, 묵묵히 말하지 않더라도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뜻이 어울렸습니다.

이제 덕은 옛 분들과 다르고 동정도 진심에서 어긋나, 궁궐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황제를 선동합니다. 근거 아닌 것으로 지쳐버리니, 어떻게 할 만한 정치[有爲之治]를 하겠습니까?‘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하물며 다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 한가롭게 살면서 멀고 넓게 빠짐없이 익히니, 고개를 빼어들어 동쪽을 돌아보며 그리워함에, 누군들 품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우러러 원하옵건대 이제 폐하께옵서 저를 내쳐 놓아주시는 은택을 내려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새답게 새를 기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입은 은혜가 두터울 것입니다. 삼가 봉하지 않은 글로써 아뢰어, 어리석고 좁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양식을 싸서 꾸려 놓고, 길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애하신 조서(詔書)를 기다립니다.”
조서를 내려 곧 이를 허락하여 노자를 지급하고, 사신을 보내서 일마다 풍성한 후대를 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인사를 모두가 떠나는 길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떠나보냈다.

채자숙(蔡子叔)이 먼저 와서 지둔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사안석(謝安石)은 뒤에 이르렀다. 채자숙이 잠깐 일어난 사이에 사안석이 곧 자리를 옮겨 그곳에 앉았다. 채자숙이 돌아와서는 요와 함께 사안석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나 사안석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현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섬산(剡山)에서 자취를 거두어 숲 우거진 물가에서 목숨을 마쳤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지둔에게 말을 보내 주었다. 지둔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혹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지둔은 말하였다.
“그 뛰어나고 빠름을 사랑하여 잠시 기를 따름이오.”
그 후 어떤 사람이 학을 선물로 보내 왔다. 이때 지둔이 학에게 말하였다.
“너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물이다. 그렇거늘 어찌 사람들의 귀와 눈의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이를 놓아주었다. 지둔이 어릴 때의 일이다. 스승과 함께 사물의 종류를 논하다가, 계란은 날로 먹어도 살생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스승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어 스승이 죽은 뒤, 홀연히 스승의 형상이 나타나서 달걀을 땅에 집어던졌다.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걸어 나왔다가 잠깐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지둔은 곧 깨닫고, 이로 말미암아 몸을 마치도록 푸성귀만 먹었다.

지둔은 전에 여요(餘姚)의 오산(塢山)을 지나다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오중(塢中)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안(謝安)이 예전에 자주 찾아와 만나면 곧 열흘씩 이곳에서 보냈소. 지금 감정에 부딪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마다 그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군요.”
그 후 병이 심해지자 오중으로 돌아갔다. 진(晋)의 태화 원년(366) 윤4월 4일에 머물던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3세이다. 곧 오중(塢中)에 묻었다. 아직 그 무덤이 남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섬주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 자세하지 않다.

그를 위하여 극초(郄超)는 서전(序傳)을 지었고, 원굉(袁宏)은 명찬(銘贊)을 지었으며, 주담보(周曇寶)는 조문을 지었다. 손작의 『도현론(道賢論)』에는 지둔을 바로 상자기(向子期)에 견주어 표현하였다.
“지둔과 상수(向秀)는 장자와 노자를 숭상했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다르나 현담을 즐긴 기풍은 같다고 하겠다.”

또한 『유도론(喩道論)』에서 전한다.
“지둔은 의식이 맑고 바탕이 순하여 남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묘한 도가 깊고 성하여 정신과 더불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이것이 유학에 힘쓴 먼 곳의 무리들이 근본에 돌아가게 된 이유이자, 유유자적한 도가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덕이 높은 선비인 대규(戴逵)가 길을 가다가 지둔의 묘 앞을 지나가다가 탄식하였다.
“덕스런 소리가 아직 멀어지지 않았거늘 아름드리 나무가 이미 무성하구나. 바라건대 신통한 이치가 면면히 이어져서, 기운과 함께 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지법건(支法虔)
지둔과 함께 공부한 법건(法虔)은 이론에 정밀하게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둔보다 먼저 죽었다. 지둔이 탄식하였다.
“예전에 장석(匠石)7)은 자귀질을 영인(郢人)에게서 그만두었고, 아생(牙生:伯牙)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튼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사귄 벗이 이미 사라졌구나. 말을 해도 완상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맺혀 나도 죽을 것이다.”
이에 절오장(切悟章)을 짓다가 죽음에 즈음하여 완성하였다. 붓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마쳤다. 무릇 지둔이 지은 시문은 열 권으로 모아져 세간에 성행된다.

∙축법앙(竺法仰)
당시 동쪽 땅에 또 축법앙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해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왕탄(王坦)이 소중히 여겼다. 죽은 뒤에 오히려 형상을 드러내어 왕탄을 찾아가 행실을 도왔다.

9) 우법란(于法蘭)
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하였다. 곧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외웠다. 밤낮으로 법을 구하고 도를 물음에 있어서 반드시 대중보다 앞섰다.
스무 살에 이르자 풍채가 빼어나게 뛰어났다. 도를 3하(河)8)에 떨쳐서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성품이 산천을 좋아하여 대부분 산 동굴에 머물렀다.
어느 겨울철, 산에 있을 때 얼음과 눈보라가 매우 사나웠다. 이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법란의 방에 들어왔으나, 법란은 얼굴빛에 거부감이 없었다. 호랑이도 매우 순종하더니, 이튿날 눈이 그치자 곧 떠났다.
또한 산중의 신(神)들도 항상 찾아와 법을 받았다. 그의 덕이 정령(精靈)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 후 강남의 산수(山水)로는 섬현(剡縣)이 가장 기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곧 천천히 동구(東甌)를 걸어서 멀리 우승산(嶀嵊山)이 바라보이는 석성산(石城山) 발치에 머물렀다. 지금의 원화사(元華寺)가 그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감화력을 유원규(庾元規)에 비유하였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그를 완사종(阮嗣宗)9)과 비교하여 논했다.
“법란이 남긴 묘한 자취는 매우 고상하여 거의 지인(至人)10)의 무리이다. 완보병(阮步兵)은 홀로 오만하여 무리 짓지 않았으니, 또한 법란과 짝한다 하겠다.”
섬현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상심하여 탄식했다.
“불법이 비록 일어났지만 불경의 도리에 빠진 것이 많구나. 만약 한 번만이라도 원만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
이에 멀리 서역으로 가서 남다른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였다. 교주(交州)에 이르러 병이 들어 상림(象林)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둔(支遁)이 뒤쫓아가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찬(贊)을 지었다.

법란은 세속을 초월하여
현묘한 종지[玄旨]를 빠짐없이 체득하고
아름답게 산택에 숨어
호랑이ㆍ외뿔소를 두루 길들였다.

별전에 이르기를, “법란도 감응하여 마른 샘에서 물로 양치질하였다. 그 일은 법호(法護)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세하지 않다.

∙축법흥(竺法興)ㆍ지법연(支法淵)ㆍ우법도(于法道)
이 밖에 또 축법흥ㆍ지법연ㆍ우법도 등이 법란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덕이 비슷하였다. 법흥은 견문이 넓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법연은 빛나는 재주로 칭송되며, 법도는 논리의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10) 우법개(于法開)
법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우법란을 섬겨 제자가 되었다. 깊은 생각이 외롭게 일어나 고유한 견해를 말로 드러냈다. 『방광반야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또한 기바(耆婆:醫神)를 이어받아 오묘하게 의술에 뛰어났다.
어느 날 걸식을 하다가 한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의 부인이 자리에 누워 병이 위급하였다. 온갖 치료로도 효험이 없어 온 집안이 당황하고 어지러웠다. 법개가 이르기를 “이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바로 양(羊)을 죽여서 잡신(雜神)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
법개가 주인을 시켜 먼저 양고기를 조금 가지고 국을 끓여서 병자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에 그 기운을 타고서 침을 놓았다. 잠깐 사이에 양의 얇은 꺼풀에 아기가 쌓여서 나왔다.

승평 5년(361)에는 효종(孝宗)황제가 병에 걸렸다. 법개가 맥을 짚었다. 그는 황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는 들어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강헌(康獻) 황후가 명령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법개를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만 문에 이르러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온갖 말로 기피하는구나. 마땅히 정위(廷尉)에게 넘겨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갑자기 황제가 죽어서 죄를 면하였다. 섬현(剡縣)의 석성산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원화사(元華寺)를 수축하였다.
그 후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옮겨 늘 지도림(支道林:支遁)과 색(色)과 공(空)의 의미를 다투었다. 이들의 논쟁에 여강(廬江)의 하묵(何黙)이 법개의 비판을 밝게 펼치고, 고평(高平)의 극초(郄超)가 도림의 해답을 잘 풀었다. 나란히 세간에 전한다.

∙우법위(于法威)
법개의 제자 법위(法威)는 맑고 총명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손작이 그를 찬하였다.

『주역』에서는 한백(翰白)11)을 찬양하고
『시전(詩傳)』에서는 빈조(蘋藻: 문장)를 찬미하네.
희고 날쌘 얼룩말이 마당에 있듯이
큰 비가 멈춘 때의 향기가 나는 듯하구나.

법위(法威:于威)의 밝은 깨우침은
견고하여 멀리서도 검토하니
깨끗한 그 명예를
그리워함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법개가 어느 날 법위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지둔이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道行經)』을 강론하는 산음(山陰)을 지나가게 하였다. 법개가 법위에게 일러두었다.
“도림의 강의는 네가 그곳에 이를 무렵에 어느 품(品)에 이를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말로 수십 번에 걸쳐 공박하고 논란하여라. 이 품에 있는 것은 예전에도 통하기 어려웠던 대목이다.”
법위가 그 고을에 이르자 바로 지둔의 강의를 만났다. 과연 법개의 말과 같았다. 여러 번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지둔이 굴복하였다. 지둔은 이로 인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는 얼마만큼 반복해야 만족하겠는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인가?”
그러므로 동산(東山)의 속담에 전한다.
“위없는 기량의 법심(法深:竺法灒), 독창적 생각의 우법개(于法開), 절륜한 말솜씨의 도림(道林:支遁), 놀라운 기억력의 식스님12).”

애제(哀帝) 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서울로 나가서 『방광반야경』을 강의하였다. 모든 옛 불경 번역[舊學]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그로 인하여 풀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산으로 하직하여 돌아왔다. 황제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정중하게 돈과 비단 및 가마와 겨울ㆍ여름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 사안(謝安)과 왕문도(王文度) 등도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덕이 높고 밝으며 굳세고 대범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의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십니까?”
법개가 대답하였다.
“6육바라밀을 밝혀 네 가지 마구니의 병을 제거하고, 아홉 가지 조짐을 조리하여 풍한(風寒)의 병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60세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재주 있는 말솜씨로 종횡하고, 몇 가지 술법으로 널리 가르침을 편 것은, 법개공에게 달려 있던 일이어라.”

11) 우도수(于道邃)
도수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가 그를 양육하였다. 도수는 효도와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어머니를 받들듯이 하였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법란(法蘭)을 섬기고 제자가 되었다.
학업이 고명하여 내외의 전적을 해박하게 열람하였다. 의방과 약업[方藥]에 훌륭하며 서찰(書札)을 아름답게 썼다. 다른 풍속들을 훤하게 외우고, 더욱이 담론에 솜씨가 있었다. 법호가 항상 칭송하였다.
“도수는 고상하고 간결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여, 옛 어진 분들[고인]의 기풍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야흐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법란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너니, 사경서(謝慶緖)가 크게 미루어 중히 여겼다.
성품이 산과 시내를 좋아하여 동쪽에 있을 때, 대부분의 이름난 산을 노닐어 밟았다. 사람됨이 비방과 칭송에 개의하지 않으며, 세속과 가까이 할 뜻을 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그 후 법란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다가 교지(交趾)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가 31세이다.

극초(郄超)가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지둔이 비명(碑銘)을 지어 찬양하였다.
영명하고 영명한 상인(上人)이시여,
지식은 뛰어나고 이론은 맑아라.
밝은 바탕은 옥같이 아름답고
덕스런 말씀은 난초처럼 향기로워라.

손작은 도수를 완함(阮咸)과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완함은 여러 번 벼슬을 한 허물이 있고, 도수는 맑고 투명하다는 명성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짝이 됩니까?”
손작이 말하였다.
“비록 자취에서는 우묵한 구덩이와 높은 땅으로 비교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고상한 기풍에서는 같다.”
『유도론(喩道論)』에 전한다.
“근간 낙양에 축법행이 있다. 담론자들은 그를 악령(樂令)에 견준다. 강남에 우도수가 있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뛰어난 부류로 상대한다. 모두가 당시에 함께 보고들은 것으로, 동료들이 사사로이 칭찬한 말이 아니다.”

12) 축법숭(竺法崇)
법숭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들어와 계율로써 절도를 지켜 칭찬을 받았다. 게다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뜻을 경전의 기억에 두텁게 두었다. 더욱이 법화 일승의 가르침[法華一敎]에 뛰어났다.
일찍이 상주(湘州)의 녹산(麓山)을 노닐 때에, 산의 정령[山精]이 부인으로 나타났다. 법숭을 찾아와 수계(受戒)를 청하고는,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절로 사용하게 하였다. 법숭이 머물러 조금 지나자, 교화가 상주 땅을 두루 적셨다.
그 후 섬현(剡縣)의 갈현산(葛峴山)으로 돌아왔다. 초가집 암자에서 개울물을 마시며, 선정(禪定)의 지혜로 기쁨을 취하였다. 동구(東甌)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모여들었다.

노국(魯國)의 은둔하는 선비 공순지(孔淳之)와 만나, 해가 다하도록 즐거이 노닐었다. 문득 이틀 밤을 묵으면 다시 돌아갈 것을 잊었다. 마음을 열어 몰록 들어맞으면 스스로 마음에 꼭 맞는 사귐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법숭은 한탄하였다.

생각을 인간 세상 밖으로 멀리한 지
30여 년이건만
일산을 기울여 머리를 맞댈 벗을 만나다니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그 후 공순지와 이별하여 떠돌았다. 법숭이 시를 읊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거늘
산림의 선비는
가더니 돌아오지 않누나.

이 시는 이와 같은 사람(공순지)을 일컬은 것이다.
법숭은 후에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화의소(法華義疏)』 네 권을 지었다고 한다.

∙석도보(釋道寶)
당시 섬현의 동쪽 앙산에 석도보가 있었다. 성은 왕(王)씨이며, 낭야 사람이다. 진(晋)의 재상인 왕도(王導)의 아우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을 믿고 깨달아, 세상을 피해서 영화를 마다하였다. 친구들이 충고하며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탕에서 목욕하고, 곧 나아가 머리카락을 깎으려 하였다. 이때 시를 지어 읊었다.
만 리의 강물이 처음에는 술잔에 넘치는
작은 물에서 시작된 것임을 어찌 알랴?
후에 그는 배움의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다.

13) 축법의(竺法義)
법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열세 살 때 법심(法深)을 만나 문득 물었다.
“어질음과 이로움[仁利]은 군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법심이 말하였다.
“사람으로서 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법심은 그가 어리지만 뛰어나게 총명한 것을 보고 출가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불문에 뜻을 깃들여 법심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법화경』에 뛰어났다.
그 후 법심을 하직하여 서울을 떠나 다시 크게 강석을 열었다. 왕도(王導)와 공부(孔敷) 등도 모두 가르침을 따라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이르러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시영(始寧)의 보산(保山)에서 쉬었다. 수업하는 제자가 항상 백여 명이었다.
함안(咸安) 2년(372)에 이르러 문득 심기(心氣)에 질병을 느끼자, 항상 생각을 관세음보살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씻어주었다. 꿈을 깨니 곧 병이 나았다. 부량(傅亮)은 늘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법의와 교류하시던 곳에서는, 매양 관세음보살의 신령한 이적을 설법하는 것을 들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숙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진(晋)의 영강(寧康) 3년(375) 효무(孝武)황제가 사신을 보내, 오시기를 청하였다. 서울로 나가 강설하였다.
진의 태원(太元) 5년(380) 서울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이에 10만 냥으로 신정강(新亭崗)을 사서 묘지로 삼고, 3층의 탑을 세웠다. 법의의 제자인 담상(曇爽)이 묘소에 절을 세워 신정정사(新亭精舍)라 이름하였다.
그 후 송(宋:南北朝 때의 前宋) 효무제(孝武帝, 454~465)가 남쪽으로 내려와 간흉을 토벌하였다. 황제의 깃발을 이곳에 멈추고서 이 절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효무제가 제왕의 자리를 선양받아 등극하자, 다시 선당(禪堂)에 행차하여 이곳을 개척하였다. 절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로 고쳤다. 그런 까닭에 원가(元嘉, 424~453) 말엽의 동요에 이르기를, “전당(錢塘)에서 천자가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 선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중흥사의 선방에는 아직도 용비전(龍飛殿)이 있다. 지금의 천안사(天安寺)가 그곳이다.

14) 축승도(竺僧度)
승도의 성은 왕(王)씨로 이름은 희(晞)이다. 자는 현종(玄宗)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비록 어릴 때는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타고난 자태가 빼어났다. 열여섯 살이 되자 정신이 시원하고 빼어나서 남다르게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여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당시에 홀로 어머니와 살면서 효성으로 섬기고 예를 다하였다. 같은 고을의 양덕신(楊德愼)의 딸에게 구혼하였다. 양덕신의 딸 역시 양반집의 규수로 이름은 소화(苕華)라 하였다.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고전공부도 잘하였다. 승도와 나이가 같았으므로 구혼한 날에 곧 서로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미처 예식을 치루기 전에 소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또한 죽고, 승도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이에 승도는 마침내 세상의 무상함을 보고, 문득 느끼어 깨달은 바 있어, 곧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이름을 승도라 바꾸고서, 속세 밖으로 자취를 옮겨 땅을 피해 유학하였다.

이에 소화는 부모상을 마치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여인이 좇는 세 가지 길[三從之義]에서 홀로 서는 도리란 없다.’
곧 승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몸의 터럭이나 피부조차 다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거니와, 종실의 제사를 갑자기 지내지 않아도 안 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세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하고, 먼 뜻을 바꾸어 우뚝이 빛나는 자태를 성대하게 하여, 밝은 세상에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멀게는 조상들의 혼령을 편안히 쉬게 하고, 가깝게는 사람과 신들의 소원을 풀어 위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다섯 수의 시를 그에게 보냈다.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크나큰 도리는 스스로 끝없고
하늘땅은 길고도 오래 가며
거대한 바위는 소멸되기 어렵고
겨자씨 또한 헤아리기 어려워요.

사람이 한 세간에 태어남은
회오리바람이 창문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부귀영화가 어찌 무성하지 않으리오만
아침저녁 사이에 시들고 썩어가지요.

냇가에서 시를 읊조리다
해 저물 녘 술병 두드리는 일 생각만 해도
맑은 소리 귀를 간지럽히고
기름진 맛 입에 달라붙지요.

비단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멋진 갓으로 머리를 꾸밀 수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아
텅 빈 것에 탐닉하여 있는 것을 해치시나요.

저의 구구한 정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후세를 구휼케 하려구요.

이에 승도는 답서를 보냈다.
“무릇 임금을 섬겨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도를 넓혀서 만방을 제도하는 일만 같지 못하오. 어버이를 편안히 모셔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은 도를 널리 펴서 삼계를 제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신체발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나 가까이 하는 말일 뿐이라오. 다만 나의 덕이 멀리 미치지 못하여 아직 두루 덮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루는 것처럼, 또한 미약한 것에서부터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오. 이에 가사를 걸치고 석장을 잡고서, 맑은 물을 마시고 반야를 읊는 것이오. 비록 제후의 옷을 입고 여덟 가지 맛있는 반찬을 갖추어 먹으며, 황홀한 악기 소리를 듣고 휘황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며 산다 할지라도, 뜻을 바꾸지는 않겠소.
만약 지난날의 약속에 매달린다면 곧 함께 열반을 기약할 뿐이라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듯이, 그대가 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치 내가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같소.

양씨여, 길이 이별하여 긴긴 전생의 인연을 이제는 끊소! 이 해도 저물어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구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만 하고,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때맞추어 힘써야 하오.
그대는 나이와 덕이 모두 한창 때이니, 마땅히 사모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오. 도사에게 마음을 뺏겨 좋은 시절을 놓쳐서는 안 되오.”

다섯 수의 시를 지어 여자의 시에 회답하였다. 그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기회건 시운이건 멈추어 주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 세월은 지나가며
큰 바위도 다할 때를 만나니
겨자씨도 어찌 많다 하겠소.

참으로 가는 것은 쉬지 않으므로
시냇가에서 탄식하였다오.13)
듣지 못했소, 영계기(榮啓期)가
흰머리가 되어서도 맑은 노래 부른 것을.

무명옷으로 따뜻하거늘
누가 비단 치장을 따지겠소.
금세에는 비록 즐겁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어찌할 것이오.

죄와 복은 참으로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
어찌 남을 구휼한단 말이오.

승도의 품은 뜻이 돌처럼 견고하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화도 느끼고, 역시 깊은 믿음이 일어났다. 이에 승도는 오로지 정성을 불법에 쏟아 많은 경전을 펴서 음미하였다. 『비담지귀(毘曇旨歸)』란 책을 지었으며, 이 또한 세상에 유행한다. 그 후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축혜초(竺慧超)
당시 하내(河內) 지방에 또 축혜초가 있었다. 역시 행실과 지혜를 겸비하여 드러냈다. 덕 높은 선비인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와 좋은 벗으로, 『승만경(勝鬘經)』을 주해하였다.

주석
1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그 악상(樂想)을 일일이 알아 맞혔다는 종자기(鍾子期)와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자기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일컫는 말.
2 하나를 잡는 것으로써 천하의 기준을 삼는다(抱一爲天下式, 『老子』 22장).
3 『주역(周易)』「건괘(乾卦)」, 상구(上九)의 효사(爻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역(逆)으로 이항무회(履亢無悔)라 한 것이다.
4 예로부터 하나(도)를 얻은 것이 있더라.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고, 신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골짜기는 하나를 얻어서 가득하고, 만물은 하나를 얻어서 낳고, 제후나 왕은 하나를 얻어서 올곧게 하니, 이러한 모든 것이 이르는 곳은 하나이다. (『노자』 39장)
5 도는 늘 하는 것이어서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절로 변화하리라. (『노자』 37장)
6 크나큰 형상을 잡으면 천하가 마음껏 오가리니, 천하가 마음껏 오가더라도 해가 안 되어 크게 평안하다. (『노자』 35장)
7 장석운부(匠石運斧)의 고사를 나은 유명한 장인이다. 그는 자귀로 물건을 쪼는 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한다.
8 하동ㆍ하남ㆍ하북의 세 군(郡)이다. 즉 황하 유역을 일컫는다.
9 완적(阮籍), 삼국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의 한 사람. 벼슬이 보병교위(步兵校尉)였기 때문에 완보병(阮步兵)이라고도 함.
10 만약 천지 본연의 바름을 타고 대자연의 순리를 부려 무궁한 지경에서 노닌다면, 그런 이가 대체 어디에 기댈 게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다. “지인(至人)은 자기를 고집함이 없고, 신인(神人)은 공을 드러냄이 없고, 성인(聖人)은 이름을 떨침이 없다.”(『장자』「소요유」)
11 백마한여(白馬翰如). 말이 아주 희고 날쌔다는 것.
12 『고승전』 전체를 살펴보아도 식으로 끝나는 법명을 가진 승려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13 공자(孔子)가 흐르는 물을 보고 ‘수재수재 서자여사(水哉水哉逝者如斯)’라고 탄식한 것을 말함.

『고승전』 4권(ABC, K1074 v32, p.798a01-p.805b01)

고승전1~4, 5~8, 9~12, 13~14, 한글대장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