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1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이라고도 한다. 관정부(灌頂部)에서 따로 추려내었다.
대당 신룡 원년(705년) 5월 23일에 천축 사문 반라밀제(般剌蜜帝)가 광주(廣州) 제지도량(制止道場)에서 역출하였는데, 보살계제자(菩薩戒弟子) 전정간대부동중서문하평장사(前正諫大夫同中書門下平章事) 청하방융(淸河房融)이 필수(筆授)하고, 오장국(烏長國) 사문 미가석가(彌伽釋迦)가 역어(譯語)했다.

반랄밀제(般剌蜜帝) 한역
현성주 번역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실라벌성(室羅筏城)의 기원정사(祇桓精舍)에서 1,250명의 뛰어난 비구(比丘)들과 함께 계셨다. 이 비구들은 모두 번뇌가 없는 대아라한(大阿羅漢)이자 불자(佛子)로서, 불법(佛法)을 지키고 살면서 온갖 세계[諸有]의 속박을 벗어나, 태어나는 국토마다 위의(威儀)를 성취할 수 있으니, 부처님을 따라 법륜(法輪)을 굴리면서 유촉(遺囑)을 감당할 만하였다. 또 이 비구들은 계행[毘尼]이 매우 청정[嚴淨]하여 널리 삼계(三界)의 모범이 되고, 한량없는 응신(應身)으로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미래의 중생도 건져내어 온갖 번뇌의 얽힘에서 벗어나게 할 이들이다.
이 가운데 지혜가 뛰어난 사리불(舍利弗)과 마하목건련(摩訶目犍連)과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와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와 수보리(須菩提)와 우바니사타(優波尼沙陀) 등은 이들의 상수(上首)들이다.

또 한량없는 벽지불(辟支佛)과 무학(無學)과 초심자(初心者)들도 다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왔다.
마침 비구들이 여름의 안거수행(安居修行)을 마치고 그간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여 참회하는 날[自恣]이므로, 시방의 보살들도 마음속의 의심을 물어서 결단하기 위하여 자혜롭고 엄한 부처님을 공손히 받들어 심오한 뜻[密義]을 듣고자 하였다.
즉시 여래께서 자리를 펴시고 편히 앉으셔서, 모든 법회 대중을 위하여 심오한 법을 설하시니, 법석(法席)의 청정대중[淸衆]은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을 얻었으며, 가릉빈가(迦陵頻伽)처럼 맑고 고운 음성이 시방세계에 널리 퍼지자,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보살들이 이 도량으로 모여들었는데, 이들의 상수(上首)는 문수사리(文殊師利)이다.

이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은 부왕(父王)의 제삿날에 공양을 차리고, 부처님을 궁궐내정[宮掖]으로 초청해서 몸소 영접하는 한편, 겸하여 맛이 뛰어난 음식[珍羞]을 더 많이 마련하여 여러 훌륭한 보살들도 친히 맞아들였다.
동시(同時)에 성안의 장자(長者)와 거사(居士)들도 스님들의 공양을 준비해 놓고 부처님께서 참석해 주시기를 원했다. 부처님께서는 문수(文殊)에게 보살과 아라한들을 나눠 거느리고 가서 시주(施主; 齋主)의 청에 응하도록 분부하셨다.
오직 아난(阿難)만은 미리 별도의 청을 받고 멀리 가서 미처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차례에 참여할 겨를이 없었으며, 이미 동행하는 상좌(上座)와 아사리(阿闍黎)도 없이 혼자 돌아오는 길인데, 그날따라 공양하려는 이도 없었다.

아난(阿難)은 지나온 성으로 가서 차례로 공양을 얻기 위해 발우[應器]를 들고 가면서 마음속에 “처음으로 스님들께 공양해 본 적이 없는 단월[最後檀越]을 찾아서 공양주[齋主]를 삼으리라” 생각하고, 깨끗한 귀족 찰제리(刹帝利)나 더러운 전타라(旃陀羅)를 묻지 않고 모범으로 평등한 사랑을 행하려고 하였다. 이렇게 미천한 신분을 가리지 않으려는 것은, 일체중생에게 한량없는 공덕을 원만하게 성취시키려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다.
또 아난은 여래께서 수보리(須菩提)와 대가섭(大迦葉)에게 ‘아라한(阿羅漢)이 되고서도 마음이 평등하지 못하다’고 책망한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활짝 열어 가리지 않는 행으로 모든 의심과 비방을 벗어나신 여래를 우러러 존경하며, 저 성 둘레의 못을 거쳐 성문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공양법[齋法]에 걸맞게 매우 엄숙한 위의(威儀)를 갖췄다.

이때 아난은 걸식(乞食)하다가 환술(幻術)을 잘 부리는 마등가녀(摩登伽女)를 만났다. 마등가는 사비가라(娑毗迦羅)의 선범천주(先梵天呪)로 아난을 음실(婬室)로 끌어들여 음탕한 몸으로 만지고 비비면서 아난의 계체(戒體)를 망치려고 하였다.
여래께서는 아난이 음욕의 마술[術]에 잡힌 줄 아시고 공양을 마치자마자 바로 기원정사(祇垣精舍)로 돌아오시니, 바사닉왕과 대신과 장자와 거사들도 다 부처님을 따라와서, 법문의 요의[法要]를 듣고자 하였다.
바로 이때 세존께서는 정수리로 온갖 보배의 두려움 없는 광명을 놓으셨다.그 광명에서는 천 잎의 보배 연꽃이 나왔으며, 연꽃 위에 가부좌(跏趺坐)하신 화신 부처님께서 신비한 주문을 외우셨다.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보살에게 그 주문을 가지고 가서 아난을 구해 오도록 분부하셨다. 문수보살은 그 주문으로 나쁜 주문을 소멸시키고, 아난과 마등가(摩登伽)를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왔다.

아난(阿難)이 부처님을 뵙고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슬피 울면서, 시작 없는 옛적부터 한결같이 불법을 많이 들어 알기만 하고 도의 힘이 완전하지 못함을 한탄하며, 시방 여래께서 보리(菩提)를 성취하신 묘한 사마타(奢摩他)와 삼마(三摩)와 선나(禪那)의 최초방편(最初方便)을 간절히 청하였다.
그러자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보살들과 시방에서 온 여러 훌륭한 아라한(阿羅漢)들과 벽지불(辟支佛)들도 모두 기쁘게 듣기를 원하며, 말없이 물러앉아 거룩한 가르침[聖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나는 사촌간이지만 정리로는 형제나 다름이 없다. 당초에 발심(發心)했을 때 나의 법 가운데 어떤 훌륭한 모습을 보았기에, 세상의 깊고 소중한 은혜와 애정을 버렸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의 더없이 미묘하고 훌륭한 32상(相)의 형체에서 유리(琉璃)처럼 사무치는 영롱한 빛을 보고, 저는 언제나 ‘이 모양은 애욕의 기운으로 생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추하고 탁하여, 비린내와 누린내가 서로 어울리고 고름과 피가 어지럽게 섞였으니, 이렇게 황금덩어리처럼 훌륭하고 맑고 묘하고 밝은 빛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감동하여 간절히 우러러 존경하면서 부처님을 따라 머리를 깎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잘 들었다. 아난아,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아득한 옛적부터 생사를 계속하는 것은 다 상주신심(常住眞心)의 성품이 맑고 밝은 본체를 알지 못하고, 온갖 허망한 생각을 제 마음으로 잘못 아는 탓이며, 이 생각이 진실하지 못한 까닭에 생사에서 윤회하느니라. 네가 이제 더없이 높은 보리[無上菩提]의 진실하게 열린 밝은 성품을 연마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내가 묻는 말에 곧은 마음으로 대답하여라. 시방 여래께서도 동일한 길을 따라 생사를 벗어나셨는데, 모두 곧은 마음으로 행하셨느니라. 마음과 말씀이 곧으신 까닭에 이와 같이 지위(地位)의 시작에서 최종에 이를 때까지그 중간에 조금도 구부러진 모양이 없으셨느니라.
“아난아. 내가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네가 답하기를 여래의 32상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내었다고 하였으니, 무엇으로 보았으며 무엇으로 좋아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좋아한 것은 저의 마음과 눈입니다. 눈으로 여래의 거룩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좋아했기 때문에 저는 발심하여 생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진실로 좋아한 동기가 마음과 눈에 있다고 말했으니, 만일 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번뇌[塵勞]를 항복시킬 수 없느니라. 마치 적의 침략을 당한 국왕이 군대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려면 적군의 소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너를 생사에 흘러 다니게 한 것은 마음과 눈의 잘못이니, 마음과 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마음과 눈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일체세간의 열 가지 중생[十種異生]은 누구나 똑같이 그 분별하는 마음[識心]은 몸 안에 있고, 눈은 얼굴에 있습니다. 비록 푸른 연꽃과 같은 부처님의 눈을 보아도 부처님의 얼굴에 있으시며, 이제 제 눈[浮根四塵]을 보아도 제 얼굴에 있을 뿐이니, 이렇게 아는 마음[識心]은 몸속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현재 여래의 강당(講堂)에 앉아 있으니, 기타림(祇陀林)을 보라. 지금 기타림은 어디에 있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큰 중각(重閣)의 청정한 강당은 급고원(給孤園)에 있으며, 기타림(祇陀林)은 강당 밖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지금 강당 안에서 먼저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강당 안에서 먼저 여래를 보고, 그 다음에 대중을 보고, 이와 같이 밖을 보아야만 비로소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기타림과 급고원을 본다고 했으니, 어떻게 보았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이 큰 강당의 문과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저는 강당 안에 있으면서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부처님께서 대중(大衆) 가운데 황금색의 팔을 펴시고 아난의 정수리를 만지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삼마제(三摩提)가 있으니 대불정수릉엄왕(大佛頂首楞嚴王)이라고 이름한다. 온갖 행이 원만하게 갖춰져 있어서, 시방 여래께서 한 문으로 뛰어나신 묘하게 장엄된 길이니라.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아난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엎드려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몸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문과 창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에 멀리 기타림(祇陀林)과 급고원(給孤園)을 본다고 했으니, 어떤 중생이든지 이 강당 안에 있으면서 먼저 여래를 보지 못하고 강당 밖을 보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세존이시여. 강당 안에 있으면서 여래를 보지 못하고 밖의 숲과 냇물을 볼 리가 없습니다.”

“아난아. 너도 마찬가지다. 네 마음은 일체를 밝게 알고 있으니, 만일 너의 현재 밝게 아는 마음이 네 몸 안에 있다면, 먼저 당연히 몸속을 밝게 알아야 한다. 어떤 중생이 먼저 몸속을 보고 나서 바깥 물건을 보겠느냐. 비록 심장, 간장, 비장, 위장은 볼 수 없더라도, 손톱이 나고 털이 자라고 근육이 움직이고 맥이 뛰는 정도는 참으로 당연히 밝게 알아야 하는데, 어째서 모르느냐. 분명 몸속도 모르는데 어떻게 밖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닫고 아는 마음이 몸 안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렇게 부처님의 법문[法音]을 듣고 보니 제 마음이 몸 밖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방안에 등불을 켰을 때 그 불빛은 반드시 먼저 방안을 비추고 나서 그 방문으로부터 뒤에 뜰과 마당까지 비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이 몸속을 못보고 홀로 몸 밖만을 보는 것은, 방밖에 있는 등불이 방 속을 비추지 못하는 경우와 같겠습니다. 이 뜻은 확실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부처님의 분명한 뜻[了義]과 일치하여 잘못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비구들은 좀 전에 나를 따라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법식대로 공양을 얻고[循乞] 기타림(祇陀林)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미 공양을 끝냈으나, 공양하고 있는 저 비구들을 보아라. 한 사람의 공양으로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를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비구들은 비록 아라한(阿羅漢)일지라도, 몸과 목숨이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한 사람의 공양으로 모든 사람이 다 배부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너의 깨닫고 알고 보는 마음이 참으로 몸밖에 있다면, 몸과 마음은 서로 따로 떨어져서 저절로 상관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마음이 아는 것을 몸은 깨달을 수 없어야 하며, 몸이 아는 것을 마음은 알 수 없어야 한다. 너는 이제 내 도라면(兜羅綿)손을 보아라. 네 눈이 보면서 마음도 함께 분별하느냐.”

아난이 답했다.
“예, 분별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네 눈과 마음이 서로 안다면, 어째서 네 마음이 밖에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밖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몸속을 보지 못하므로 몸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몸밖에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자금 생각해 보니 그 마음이 있는 한 곳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한 곳이란 어디를 말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분명하게 아는 마음이 몸속을 알지 못하면서도 밖은 잘 보고 있으니, 제 생각으로는 눈 속[根裏]에 가만히 숨어 있겠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유리조각으로 두 눈을 가렸을 경우, 비록 눈은 물체에 가렸으나 아무런 장애 없이 저 눈이 보는 대로 마음이 따라 곧 분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몸속을 못 보는 것은 눈에 있기 때문이며, 밖을 분명하게 보면서 걸림이 없는 것은 눈 속에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눈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유리로 가린 것과 같다면, 유리로 눈을 가린 사람이 산과 강을 볼 때 유리를 보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유리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당연히 유리를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과 같다면, 산과 강을 볼 때 어째서 눈을 못 보는 것이냐. 만일 눈을 본다면 눈은 곧 경계와 똑같아서 ‘눈이 보는 대로 마음이 따라 분별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으며, 만일 눈을 볼 수 없다면, 어째서 이 분별하고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처럼 눈 속에 숨어 있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깨달아 아는 마음이 눈에 유리를 댄 것처럼 눈 속에 가만히 숨어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 저는 이제 또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생의 몸을 보면 5장(藏)ㆍ6부(腑)는 속에 들어있고 구멍은 밖에 있으니, 부장(腑藏)에 있으면 어둡고 구멍에 있으면 밝습니다. 지금 제가 부처님을 상대하여 눈뜨고 밝음을 보는 것으로 몸 밖을 본다 하고, 눈감고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고 한다면, 이 뜻은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눈을 감고 어둠을 볼 때 이 어두운 경계가 눈과 상대하였느냐, 눈과 상대하지 않았느냐. 만일 눈과 상대했다면 어둠은 눈앞에 있으니, 어떻게 몸속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눈앞의 어둠으로 몸속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해와 달과 등불도 없는 암실(暗室)에 있을 때는, 그 방안의 어둠은 온통 너의 내장[焦腑]이겠구나. 만일 어둠이 눈과 상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보는 것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바깥 보는 것을 떠나서 안의 상대가 성립된다 하여, 눈감고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고 한다면, 눈뜨고 밝은 것을 볼 때는 어째서 얼굴을 못 보느냐.

만일 얼굴을 못 본다면 안을 상대하여 본다는 말이 성립되지 않으리라. 얼굴 보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 분별하여 아는 마음은 눈과 함께 허공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속을 본다는 말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허공에 있다면 그 자체로 네 몸이 아니며, 이 여래가 지금 네 얼굴을 보는 것도 마땅히 네 몸이라고 해야 하겠구나. 그렇다면 허공에 있는 네 눈은 이미 안다 해도 당연히 몸은 깨닫지 못해야 한다. 네가 끝까지 고집하여 몸과 눈이 둘 다 안다고 한다면, 당연히 두 아는 작용이 있어야 하고,너 한 사람이 마땅히 두 부처를 이뤄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어둠을 보는 것으로 몸속을 본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말했다.
“저도 항상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법이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이 말씀을 생각하였으며, 이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제 심성(心性)이니,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을 뿐, 안과 밖과 중간의 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지금 법이 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긴다고 하여,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고 한다면, 이 마음이 자체가 없으면 합할 곳이 없을 것이며, 만일 자체가 없어도 합할 수 있다고 한다면, 19계(界)가 7진(塵)을 따라 합한다는 말이니, 전혀 뜻이 되지 않는다. 만일 자체가 있다면, 너는 손으로 네 몸을 찔러 보아라. 네 아는 마음이 안에서 나오느냐. 밖에서 들어오느냐. 안에서 나온다면 몸속을 보아야 하고, 밖에서 들어온다면 마땅히 얼굴을 보아야 한다.”

아난이 말했다.
“보는 것은 눈이고 마음으로 아는 것은 눈이 아닌데 마음이 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눈만으로도 볼 수 있다면, 네가 방안에 있을 때, 문만으로 볼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이미 죽은 사람들도 아직 눈을 가지고 있으니, 마땅히 다 물건을 보아야 하리라. 만일 물건을 본다면 어찌 죽었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또 너의 깨달아 아는 마음이 만일 분명 자체가 있다면, 그 체는 하나이냐, 여럿이냐. 지금 네 몸에 두루 한 체냐, 두루 하지 않는 체냐. 만일 체가 하나라면, 너는 손으로 한 팔[一支]을 찔렀을 때, 4지(支)가 다 느껴야 하고, 만일 다 느낀다면 마땅히 찌른 자리가 따로 없으리라. 만일 찌른 자리가 따로 있다면, 체가 하나란 뜻은 저절로 성립될 수 없다. 만일 체가 여럿이라면 여러 사람이 될 텐데, 어느 체를 너라고 하겠느냐.
만일 네 몸에 두루 한 체라면, 앞서 한 팔을 찔렀을 때처럼, 몸 전체가 다 느껴야 할 것이며,만일 네 몸에 두루 하지 않는 체라면, 너는 머리를 만지면서 발도 만져 보아라. 머리가 만지는 줄 안다면 발은 당연히 만지는 줄을 몰라야 하지만, 너는 지금 그렇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합하는 곳을 따라서 마음이 따라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들었습니다만, 부처님께서는 문수 등 모든 법왕자(法王子)와 더불어 실상(實相)을 담론하시면서 ‘마음은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따라 생각해보니, 마음이 안에 있다면 몸속을 못 보고, 밖에 있다면 서로 알지 못하며, 몸속을 알지 못하므로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해도 옳지 않습니다. 이제 몸과 마음이 서로 알면서도 몸속을 못 보니, 마음은 당연히 중간에 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마음이 중간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중간이란 애매하지 않아서, 반드시 일정한 곳이 없지 않으리라. 지금 너는 중간을 찾아보아라. 중간이 어디에 있느냐. 딴 곳에 있느냐, 네 몸에 있느냐. 만일 몸에 있다면, 몸 주변이면 중간이 아니며, 몸속이면 내장을 보아야 한다. 만일 딴 곳에 있다면, 표시할 수 있느냐, 표시할 수 없느냐. 표시할 수 없으면 중간이 없는 것이며, 표시한다 해도 일정하지 않으리라.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 푯말을 세워 중간을 표시할 때, 동쪽에서 보면 서쪽이고, 남쪽에서 보면 북쪽이니, 표시 자체가 이미 혼란하여 마음이 뒤섞여 어지럽기 때문이다.”

아난이 말했다.
“제가 말한 중간은 이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눈과 색(色)이 인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눈에는 분별작용이 있고, 색 경계[色塵]는 아는 작용이 없는데서, 식(識)이 그 중간에서 생기므로, 이 중간을 마음이 있는 곳이라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마음이 만일 눈과 색 경계의 중간에 있다면, 이 마음 자체는 눈과 색의 둘[二; 根塵]을 겸했느냐, 둘을 겸하지 않았느냐.
만일 둘을 겸했다면, 색[物; 塵]과 눈[體; 根]이 어지럽게 섞일 뿐 아니라, 색[物; 塵]은 눈[體; 根]의 분별작용[知]이 아니니 색의 무지(無知)와 눈의 분별이 딴 편으로 갈라설 텐데, 어찌 중간이 되겠느냐.
둘을 겸하지 않았다면, 눈의 분별[知]도 색의 무지[不知]도 아니어서, 자체의 성품이 없는데, 중간이란 어떤 모양이냐.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마음이 중간에 있다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어. 제가 예전에 들으니, 부처님께서 목건련(目揵連)과 수보리(須菩提)와 부루나(富樓那)와 사리불(舍利弗) 등 네 제자와 함께 법륜(法輪)을 굴리시면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도 있지 않아서, 어디에도 있는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체 무착(無着)이 마음이라는 뜻이니, 제가 이 무착을 마음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깨닫고 알고 분별하는 마음이 어디에도 있지 않다면, 세상과 허공의 물과 육지에서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온갖 물상을 일체(一切)라고 하는데, 네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가 있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일체가 없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일체가 없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거북이의 털과 토끼의 뿔처럼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겠느냐. 또 일체가 있는 데서 집착하지 않는다면, 집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으리라. 모양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모양이 있는 것이며, 모양이 있으면 마음이 있으니, 어찌 집착이 없다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일체에 집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아는 마음이라는 네 말은 옳지 않느니라.”

그러자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을 걷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부처님의 가장 어린 아우로서 부처님의 자애로운 혜택을 입고 비록 지금 출가했다고 하나, 오히려 귀염만을 믿고 많이 듣고 알기만 하다가, 여태껏 무루법[無漏]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사비가라주(娑毗迦羅呪)를 꺾지 못하고, 마등가(摩登伽)의 홀림을 당하여 음실(婬室)에 빠졌으니, 이것은 진실한 경지[眞際]로 가는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부디 세존께서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열어 보이시고, 모든 천제(闡提)들도 추악한 성격[彌戾車]을 헐어버리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몸[五體]을 땅에 던져 대중과 함께 정성을 기우려 공손히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얼굴에서 여러 가지 광명을 놓으셨다.그 빛이 백 천의 햇살처럼 휘황찬란하게 비치자, 드넓은 부처님의 세계[普佛世界]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면서 시방(十方)의 티끌처럼 많은 세계가 일시에 열려 나타났다. 부처님께서 위신력(威神力)으로 이 모든 세계를 합하여 한 세계를 이루시니, 그 세계의 보살들은 본 국토에 머문 그대로 합장하여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중생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가지가지로 뒤바뀌어, 업의 종자가 자연히 악차(惡叉)나무의 열매 덩어리와 같으니, 수행자들은 더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無上菩提]을 성취하지 못하고, 따로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이 되거나, 온갖 외도(外道)와 모든 하늘과 마왕(魔王)과 그 권속(眷屬)이 되는 것은, 다 두 가지 근본을 알지 못하고 어지럽게 뒤섞여 수습(修習)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행은 마치 모래를 삶아서 좋은 음식을 만들려는 것처럼 아무리 오랜 겁을 지낼지라도 성취할 수 없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근본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첫째는 끝없는 옛적부터 나고 죽는 근본으로서, 네가 지금 모든 중생과 함께 반연하는 마음[攀緣心]을 제 성품으로 아는 일이며, 둘째는 시작 없는 보리열반의 원래 청정한 본체[菩提涅槃元淸淨體]로서, 네가 지금 식정(識精)의 원래 밝음으로 모든 인연을 내고 그 인연으로 잃어버린 것이니라.
모든 중생은 이 원래 밝은 본체(本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비록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어긋나게 여러 갈래[諸趣]로 들어가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사마타(奢摩他)의 길을 알고 생사(生死)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이제 또 네게 묻겠노라.”

즉시 여래께서 곧 황금색 팔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보고 있느냐.”

아난이 말했다.
“예 보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여래께서 팔을 들고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드시고 제 마음과 눈에 비추시는 모습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무엇으로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이 대중(大衆)과 함께 똑같이 눈으로 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나에게 답하기를 ‘여래가 팔을 들고 손가락을 구부려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만들어서 너의 마음과 눈에 비춰 주는 것을 본다’고 했는데, 네 눈은 본다고 하겠으나, 무엇을 마음이라 하여 내 주먹의 비치는 모양을 아는 것이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방금 마음이 있는 곳을 물으시자, 저는 마음으로 추궁하여 찾아보았으니, 이 추궁하는 자체를 저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咄), 아난아, 그것은 네 마음이 아니니라.”

이 말을 듣자 아난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피하여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것이 제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앞 경계의 허망한 모양을 인연하는 생각이며, 너의 참 성품을 미혹시킨 번뇌이니라. 너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금생(今生)에 이르도록 도적을 아들로 잘못 알고 너의 본래 영원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생사의 윤회를 받고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부처님의 귀여운 아우로서, 마음 깊이 부처님을 좋아하여 출가하였으나, 제 마음이 어찌 홀로 여래만 공양하겠습니까. 나아가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과 선지식(善知識)을 받들어 섬기거나,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행하기 어려운 불법의 일[法事]을 행할지라도, 다 이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며, 또 가령 법을 비방하여 영원히 선근(善根)에서 물러날지라도, 역시 이 마음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을 마음이 아니라고 밝히신다면, 저는 바로 마음이 없어서 흙과 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깨달아 아는 마음을 떠나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데, 여래께서는 어째서 제 마음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저 혼자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대중도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이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대중에게 열어 보이시고 그 마음을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게 하시려고, 사자좌(師子座)에서 아난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항상 ‘모든 법이 생겨나는 것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경계이며, 일체 인과(因果)와 세계 미진(微塵)은 마음으로 자체를 이룬다’고 설해 왔노라.아난아, 만일 모든 세계의 온갖 존재에서 조그마한 풀 잎새나 가느다란 실 가닥까지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모두 자체의 성품이 있고, 허공일지라도 이름과 모습이 있는데, 더욱이 청정하고 미묘하고 맑고 밝은 마음은 일체 마음의 본성(本性)인데 어찌 자체가 없겠느냐.

만일 네가 분별하고 깨닫고 살피고 분명하게 아는 성품을 굳게 집착하여 틀림없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 마음은 마땅히 모양[色]을 보고 냄새[香]를 맡고 맛[味]을 알고 닿음[觸]을 느끼는 온갖 경계의 일들을 떠나서, 따로 완전한 제 성품이 있어야 하느니라. 네가 지금 내 설법을 받들어 듣고 있을지라도 소리를 따라 분별하고 있으며, 가령 일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사라져서 안으로 고요한 경계를 지킬지라도, 오히려 법의 경계[法塵]를 분별하는 그림자일 뿐이다. 나는 네게 굳이 마음이 아님을 고집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그저 마음으로 자세히 헤아려 보아라. 만일 앞 경계를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다면, 바로 진실한 너의 마음이라고 하겠으나, 분별하는 성품이 경계를 떠나서 자체가 없다면, 이것은 곧 앞 경계를 분별하는 그림자이니라. 경계는 영원히 머무는 진리[常住]가 아니니, 만일 변하여 사라질 때 그 마음도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과 같다면, 너의 법신(法身)도 끊어져 없어지는 것[斷滅]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면 그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을 닦아서 증득하겠느냐.”
그러자 아난과 대중은 무엇을 잃어버린 듯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닦고 배우는 행자들이 현재 비록 아홉 단계의 선정[九次第定]을 성취할지라도, 번뇌를 다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생사(生死)의 허망한 생각을 집착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잘못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이제 비록 많이 들어 아는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성인의 과위[聖果]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니라.”

아난이 이 말을 듣고 또 다시 슬피 울면서 온몸[五體]을 땅에 던져 길게 끓어 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하였으나,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믿고 항상 홀로 ‘내가 수고롭게 닦지 않아도 여래께서 저에게 삼매(三昧)를 내려주시리라’고 생각하며, 본래 몸과 마음이 서로 대신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고 저의 본심(本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은 도(道)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거지 아들[窮子]이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난 것과 같습니다. 오늘에야 비로소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듣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음은, 마치 아무리 입으로 음식을 말해도 끝내 배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지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에 얽매인 까닭은, 고요하고 영원한 심성[寂常心性]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헐벗고 궁핍한 저를 가엾게 여기시고 밝고 묘한 마음을 밝히셔서 도의 눈[道眼]을 열어주옵소서.”

즉시 여래께서는 가슴의 만자(卍字)에서 보배로운 광명을 놓으셨다. 백천 색으로 어우러진 그 찬란한 광명은 일시에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두루 퍼져서, 시방의 온갖 보배로운 국토[寶刹]에 계신 모든 여래의 정수리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아난과 모든 대중을 비췄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위대한 법의 깃대를 세우리라. 따라서 시방의 일체중생도 미묘하고 심오한 성품의 맑고 밝은 마음을 얻게 하여 청정한 안목을 밝히도록 하리라.”
아난아, 너는 좀 전에 나에게 ‘광명이 빛나는 주먹을 본다’고 답했는데, 이 주먹의 광명이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어떻게 주먹이 되었으며, 또 너는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은 부처님의 온 몸이 보배 산처럼 붉어서 청정한 빛을 내시기 때문에 광명이 있으시며, 저는 그 모습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또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시고 사람들에 보여주셨기 때문에 주먹 모양이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는 오늘 실례를 들어 네게 알려주리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비유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아난아, 비유하면 나의 주먹과 같다. 만일 내 손이 없다면 내 주먹을 만들 수 없으며, 네 눈이 없다면 너는 볼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은 이치로 네 눈을 내 주먹에 비교한다면 그 뜻이 같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제 눈이 없다면 저는 볼 수 없으므로, 제 눈을 여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실제[事]와 뜻이 서로 같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서로 같다고 했으나 이 뜻은 그렇지 않다. 그 까닭은 만일 손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주먹을 만들 수 없으나,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말하리라. 네가 시험 삼아 길거리로 가서 맹인(盲人)들에게 ‘당신은 무엇을 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 맹인들은 너에게 ‘나는 지금 눈앞에 캄캄함만 볼 뿐, 그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리라. 이 뜻으로 보면 앞 경계가 스스로 어두울 뿐, 보는 작용이야 무엇이 모자라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맹인들의 눈앞이 캄캄함을 어째서 본다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눈의 기능이 없는 맹인들이 보는 캄캄함과 눈의 기능이 있는 사람이 암실(暗室)에서 보는 캄캄함을 비교하면, 두 캄캄함은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암실에 있는 사람을 저 맹인들과 비교하면 두 캄캄함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눈 먼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 보다가 홀연히 눈빛을 얻고 다시 앞 경계에서 갖가지 물체를 보았을 때 이를 눈이 본다고 한다면, 저 암실에 있는 사람이 눈앞의 캄캄함만 보다가 홀연히 등빛을 얻고 앞 경계에서 갖가지 물체를 본다면, 당연히 등이 본다고 해야 하리라. 만일 등이 본다면 보는 능력은 등에 있으니, 자연히 등이라고 이름할 수 없으며, 또 등이 보는 것이니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등은 빛을 드러낼 수 있으나, 이렇게 보는 작용은 이 눈이요 등이 아니며, 눈은 색을 드러낼 수 있으나, 이렇게 보는 성품은 이 마음이요 눈이 아니니라.”

아난이 또 이 말을 듣자 대중과 함께 비록 입으로는 이미 할 말이 없어졌으나 마음으로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여래께서 자비하신 음성으로 설해주시기를 바라면서, 합장하여 마음을 비우고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그물 모양처럼 무늬 져서 도라면(兜羅綿)처럼 부드럽고 광명이 빛나는 손을 들어 다섯 손가락을 펴시면서, 아난과 대중에게 명하셨다.
“내가 처음 도를 이루고녹원(鹿園)에서 아야다(阿若多) 등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四部大衆)에게 말하기를 ‘일체중생이 보리(菩提)와 아라한(阿羅漢)을 이루지 못함은 다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잘못 때문이니라’고 했을 때, 너희들은 당시에 무엇을 근거로 깨달았기에 거룩한 과위[聖果]를 이뤘느냐.”

이때 교진나(憍陳那)가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지금 장로(長老)로서 대중 가운데 홀로 ‘잘 아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객진(客塵)의 두 글자를 깨닫고 과위[果]를 성취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 말하면 나그네가 여정(旅亭)에 머물러서 자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자고 먹는 일이 끝나면, 편안히 머무를 여가도 없이 짐을 싸서 길을 떠나지만, 주인은 멀리 떠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머물지 않는 것은 나그네이고,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머물지 않는 것을 객(客)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 날씨가 맑게 갠 아침에 밝은 태양이 하늘에 떠올랐을 때, 그 빛이 빈틈으로 들어와서 빈틈의 티끌을 밝게 비추면, 티끌의 모양은 흔들리지만,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사유해 보면, 맑고 고요한 자체는 허공[空]이고, 흔들리는 것은 티끌이니, 흔들리는 것을 진(塵)의 뜻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즉시 여래께서는 곧 대중을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고 폈다가 또 구부리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느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여래께서 대중을 향하여 온갖 보배무늬의 손을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대중 가운데 손을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본다고 하였으니, 내 손이 펴고 구부렸느냐, 아니면 네 보는 작용이 펴고 구부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존께서 보배의 손을 대중 가운데 펴고 구부리시니, 저는 여래의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리는 모양을 보았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린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고요하였느냐.”

아난이 말했다.
“부처님의 손이 움직였을 뿐[不住],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고요한 일도 없었는데, 어찌 움직인다[無住]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래께서는 여기에 손바닥으로 한줄기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아난의 오른쪽에 보내시니, 아난은 머리를 돌려 오른쪽을 보았고. 또 한줄기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아난의 왼쪽에 보내시니, 아난은 머리를 돌려 왼쪽을 보았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네 머리가 어째서 좌우로 흔들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여래께서 미묘한 보배의 광명을 날려서 저의 왼쪽과 오른쪽에 보내시니, 저는 그 광명을 보느라고 저절로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여래의 광명을 보느라고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고 하니, 네 머리가 흔들렸느냐, 아니면 네 보는 성품이 흔들렸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제 머리가 저절로 흔들렸을 뿐, 저의 보는 성품은 애초에 멈춘 일도 없었는데 어찌 흔들린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부처님께서 널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이 흔들림을 티끌이라 하고, 머물지 않음을 나그네라고 한다면, 너희들은 아난을 보라. 머리가 저절로 흔들렸을 뿐, 보는 성품은 흔들리지 않았느니라.
또 너희들은 나를 보라. 손이 스스로 펴고 구부렸을 뿐, 보는 성품은 펴거나 구부리지 않았느니라.
그럼에도 어째서 너희들은 지금 움직임을 몸으로 삼고 흔들림을 경계로 삼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마다 생하고 멸하는 가운데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일을 행하는 것이냐. 이렇게 심성(心性)이 진실을 잃고 물체를 자신으로 알아서 그 속을 윤회하며 스스로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이때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몸과 마음이 태연해진 가운데 생각해 보았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인연 경계를 따라 분별하는 그림자를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야 여래를 만나서 깨닫고 보니, 마치 젖 잃은 아기가 다시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 듯 기뻤다. 아난은 대중과 함께 합장하여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몸과 마음에서 진실과 망상의 허와 실과 현재의 생멸(生滅)과 불생멸(不生滅)의 이치를 드러내시고, 두 가지의 바른 뜻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를 원했다.

이때 바사닉왕(波斯匿王)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전에 가전연(迦旃延)과 비라지자(毗羅胝子)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斷滅]을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을 만났으나 지금도 오히려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이 의심을 해결하여 불생멸의 이치를 확실하게 증명하겠습니까. 지금 이 대중 가운데 번뇌가 있는 이들도 모두 다 듣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네 몸이 현존하니 이제 또 네게 물어보리라. 대왕의 그 육신은 금강처럼 견고하여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하는가.”

왕이 말했다.
“저는 지금 이 몸이 끝내 변하여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전에 몸이 멸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멸할 줄 아는가.”

왕이 말했다.
“저의 이 무상(無常)하게 변하여 무너지는 몸이 비록 이전에 멸한 적은 없으나, 생각마다 옮기고 달라져서 계속 새롭게 변하여 멈추지 않고, 불에 타는 땔감이 재가 되듯이 점점 스러져 사라지며 쉬지 않고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보니, 이 몸은 앞으로 결코 멸하여 사라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왕이여, 그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이미 쇠약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얼굴 모습은 동자 때와 얼마나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어렸을 때는 피부와 살갗이 부드럽고 윤택하였으며, 더 자랐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여 힘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너진 나이로 거의 쇠약한 상늙은이[衰耄]가 다 되었으니, 형색은 말라서 초췌하고 정신은 멍하여 혼미하며, 머리는 하얗고 얼굴은 쭈그러져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텐데, 어떻게 혈기 충만한 젊은 시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몸과 얼굴은 한꺼번에 쇠약하지 않았으리라.”

왕이 말했다.
“세존이시여, 변하여 달라진 모양이 가만히 옮겼으니, 저는 참으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寒暑]의 옮겨 흐름과 함께 점점 이렇게 늙어버렸습니다. 그 까닭은 제 나이 스무 살 때는 비록 젊은 나이라고 하나, 얼굴 모습은 이미 이전 열 살 때보다 늙었으며, 서른 살 때는 스무 살보다 늙었으며, 지금의 예순두 해를 보낸 나이로 쉰 살 때를 돌아보면, 쉰 살 때가 훨씬 건장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가만히 옮겨온 일을 대강 보고, 비록 이렇게 폭삭 늙었다고 하였으나, 그 동안 흘러 바뀌어 온 기간을 그저 10년씩 잡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세히 생각해 본다면 그 변함이 어찌 10년 20년뿐이겠습니까, 실은 해마다 변했습니다. 어찌 오직 해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달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어찌 단지 달마다 변할 뿐이겠습니까, 실은 날과 함께 변해왔습니다. 좀 더 세밀하게 곰곰이 살펴보면, 찰나마다 생각마다 변하여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몸이 마침내 변하여 없어질 줄 압니다.”

부처님께서 대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는 ‘변화하고 옮기고 바뀜이 멈추지 않음을 보고 그 몸이 끝내 멸할 줄 안다’고 했는데, 그대는 멸할 때에도 몸 가운데 멸하지 않는 이치가 있는 줄을 아는가.”

바사닉왕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참으로 그 이치를 모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불생멸의 성품을 보여주리라. 대왕이여, 그대는 몇 살 때 처음으로 항하의 강물을 보았는가.”

왕이 말했다.
“제 나이 세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기바천(耆婆天) 사당(祠堂)을 참배[謁]할 때, 이 강물을 건너면서 바로 항하의 강물인 줄 알았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말하기를 ‘스무 살 때는 열 살 때보다 늙었고, 내지 예순 살은 쉰 살보다 늙었으며, 또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찰나마다 생각마다 옮기고 변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대가 처음 세 살 때 본 이 강물을 열세 살이 되어 본 그 강물에 비하면 어떻게 다른가.”

왕이 말했다.
“세 살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금년 예순 두 살이 되어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지금 스스로 하얀 머리와 쭈그러진 얼굴을 서럽게 여기고 있으며, 그 대의 얼굴도 분명 동자 때보다 훨씬 쭈그러졌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강물을 보는 정기와 예전의 동자 때 강물을 보는 정기에도 따로 동자와 늙은이가 있겠는가.”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왕이여, 그대의 얼굴은 비록 쭈그러졌을지라도, 이 보는 정기의 성품은 일찍이 쭈그러진 적이 없었느니라. 쭈그러지는 것은 변할지라도 쭈그러지지 않는 것은 변하지 않느니라. 변하는 것은 변하여 없어질지라도 저 변하지 않는 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데. 어째서 그대는 그 속에 생사를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저 말가리(末伽梨)들의 ‘이 몸이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을 끌어들이는가.”

왕은 이 말씀을 듣고 이 몸이 죽은 뒤에 이 생을 버리고 다음 생에 태어난다는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 대중들과 함께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을 얻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하고 합장한 채 길게 끓어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고 듣는 마음이 결코 생멸(生滅)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저희들에게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거꾸로 일을 행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번뇌를 씻어주옵소서.”

그러자 여래께서 황금색 팔을 내리시고 손으로 아래쪽을 가리켜 보이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 모다라(母陀羅: 印, 封, 結印, 手印) 손을 보아라. 이 손의 모양을 ‘바로’라고 하겠느냐, ‘거꾸로’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모양을 ‘거꾸로’라고 하겠으나, 저는 ‘바로’인지 ‘거꾸로’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세상 사람들이 이 모양을 ‘거꾸로’라고 한다면, 어떤 모양을 ‘바로’라고 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여래께서 팔을 세우셔서 도라면(兜羅綿)손을 위로 올리시고 허공을 가리키신다면 ‘바로’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곧 팔을 세우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이러한 뒤바뀜[顚倒]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 사람들은 한 번 더 잘못 보고 있느니라. 분명히 알라. 너의 그 몸을 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과 비교하여 밝힌다면, 여래의 몸을 바르게 두루 다 아는 지혜의 몸이라 하고, 너희들의 몸을 성품이 뒤바뀐 몸이라고 한다. 네 몸을 따라서 자세히 살펴보아라. 네 몸을 여래의 몸에 비하여 뒤바뀌었다는 말은 어디를 두고 뒤바뀌었다고 하느냐.”

그러자 아난은 대중과 함께 몸과 마음의 뒤바뀐 곳이 어딘지 몰라서 치켜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멍하게 부처님을 바라보았다.
부처님께서 자비한 마음을 내어 아난과 대중을 가엾게 여기시고 조수(潮水)처럼 때에 맞는 음성으로 두루 법회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나는 항상 ‘물질[色]과 마음[心]과 모든 인연과 마음에 딸린 모든 생각[心所使]과 온갖 인연 경계의 법[所緣法]은 유심(唯心)에서 나타난 모양’이라고 설해왔느니라.

네 몸과 마음은 다 이렇게 묘하고 밝고 진실하고 정밀하고 심오한 마음 가운데 나타난 현상인데, 어째서 너희들은 본래 묘하고 원만하고 밝은 마음의 보배처럼 밝고 묘한 성품을 잃어버리고, 깨달음을 미혹(迷惑)으로 잘못 아는 것이냐.
미혹한 어둠이 허공으로 변하고, 허공의 미혹한 어둠 가운데서 어둠이 맺혀 색(色)이 되고, 색이 망상과 섞이니, 망상으로 나타난 모양을 몸으로 여겼으며, 인연을 모아 안으로 흔들리고 경계를 좇아 밖으로 달리는 어둡고 흔들리고 시끄러운 모양을 심성(心性)으로 삼았느니라.

이렇게 한번 미혹하여 마음으로 여겨서는 헷갈려 몸[色身] 속에 있다고 결정하고, 안으로 색신(色身)과 밖으로 산과 강과 허공과 대지가 온통 다 묘하고 밝은 참 마음 가운데 물체임을 알지 못하니, 비유하면 맑고 깨끗한 백 천의 큰 바다를 버리고, 오직 한 물거품의 체[一浮漚體]만을 인정하여, 바닷물 전체[全潮]로 지목하고, 넓은 바다[瀛渤]를 끝까지 다 물거품으로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너희들은 내가 아래로 내린 손과 다름없이 미혹한 가운데 한 번 더 미혹한 사람들이니, 이 여래는 너희들을 가련한 자라고 하느니라.”

아난은 부처님께서 가련하게 여겨 구해주신 깊은 가르침을 받들고 눈물을 흘리면서 차수(叉手)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비록 부처님의 이와 같은 묘음(妙音)을 받들어서 묘하고 밝은 마음이 원래 원만하여 영원히 변치 않는 마음자리[心地]임을 깨달았으나, 제가 지금 부처님의 설법소리를 깨달을지라도, 현재 인연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진실로 우러러 볼지라도 단지 이 마음을 얻을 뿐이니, 아직은 감히 본원(本元)의 심지(心地)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원만한 법음[圓音]을 베푸시어, 이 의혹의 뿌리를 뽑으셔서 더없이 높고 바른 도[無上道]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오히려 인연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이 법도 인연일 뿐, 법의 본성을 얻은 것이 아니니라. 어떤 사람이 손으로 달을 가리켜 다른 사람에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손가락을 따라 달을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 만일 손가락을 보고 달 자체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어찌 달만 잃었겠느냐. 손가락도 잃었느니라. 왜냐하면 가리킨 손가락을 밝은 달로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만 잃었다고 하겠느냐. 밝음과 어둠도 모른다고 하리라. 왜냐하면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로 여겨서, 밝고 어두운 두 성질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만일 내 설법소리를 분별하는 작용으로 네 마음을 삼으려면, 그 마음은 마땅히 소리의 분별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있어야 한다. 비유하면 여정(旅亭)에 기숙(寄宿)한 나그네는 잠시 머물다가 이내 떠나서 끝내 상주(常住)하지 않으나, 여정을 맡은 사람은 전혀 갈 곳이 없으니 여정의 주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진실한 네 마음이라고 한다면, 갈 데가 없어야 하는데, 어째서 소리를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냐. 어찌 소리를 분별하는 마음만 그렇겠느냐, 나의 용모를 분별하는 마음도 온갖 색상(色相; 三十二相八十種好)을 떠나서는 분별하는 성품이 없느니라. 이렇게 나아가 분별이 전혀 없는 곳에 이르면, 색(色)도 아니고 공(空)도 아니므로, 구사리(拘舍離)들은 이 이치를 모르고 명제(冥諦)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법의 인연을 떠나서 분별하는 성품이 없다면, 너의 마음[心性]은 각각 인연을 따라 돌아갈 자리가 있으니, 어찌 주인이 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만일 제 심성(心性)이 돌아갈 곳이 있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묘하고 밝은 본래의 마음은 어째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입니까. 저를 가엾게 여기시어 그 이치를 설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또 네가 나를 볼 때 그 보는 정기[見精]는 밝은 근원이다. 이 보는 정기가 비록 미묘하고 정밀하고 밝은 마음은 아닐지라도, 눈을 눌러 생긴 곁 달과 같으며, 강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아니다. 너는 자세히 들어라. 이제 너에게 돌려보낼 자리가 없는 까닭을 보여주리라.
아난아, 이 큰 강당이 동쪽으로 활짝 열려 있을 때 하늘에 해가 뜨면 밝은 빛을 보고, 그믐의 한밤중에 구름이 잔뜩 끼면 캄캄한 어둠을 보며, 문과 창틈에서는 통함을 보고, 담과 지붕에서는 막힘을 보며, 분별하는 곳에서는 여러 인연을 보고, 텅 빈 곳에서는 두루 공(空)한 성질을 보며, 안개에 묻혀 내리는 흙비의 모양에서는 어둠에 쌓인 티끌을 보며, 날씨가 맑게 개어 먼지와 안개가 걷히고 나면 다시 맑은 기운을 보리라.

아난아, 너는 이 변화하는 모양들을 다 보고 있으니, 나는 이제 그 모양들을 본래 원인한 자리로 각각 돌려보내리라.
본래 원인한 자리는 어느 곳이겠느냐.
아난아, 이 여러 변화하는 모양 가운데, 밝음은 해로 돌려보내리라. 그 까닭은 해가 없으면 밝지 않기 때문이다. 밝은 원인은 해에 속했으니, 해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어둠은 그믐의 한 밤중에 돌려보내고, 통함은 문과 창틈으로 돌려보내며, 막힘은 담과 지붕으로 돌려보내고, 여러 인연은 분별로 돌려보내며, 텅 빈곳은 허공으로 돌려보내고, 안개 쌓인 흙비는 티끌로 돌려보내며, 맑은 기운은 개인 날씨로 돌려보내리라.이 세상의 모든 변화는 이 여덟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너는 이 여덟 가지를 두루 다 본다. 그 두루 다 보는 정기의 밝은 성품은 어디로 돌려보내겠느냐.
만일 밝음으로 돌려보낸다면 밝지 않을 때는 어둠을 보지 못해야 하리라. 비록 밝고 어두운 것들은 가지가지 차별이 있으나, 보는 정기는 차별이 없느니라.
돌려보낼 수 있는 것들은 자연히 네가 아니지만, 네가 돌려보내지 못하는 것은 네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네 마음은 본래 묘하고 밝고 깨끗하나, 너 스스로 미혹하여 본성을 잃고 윤회하면서 언제나 생사 가운데잠겨 흘러 다니니 여래는 불쌍하다고 하느니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비록 이 보는 성품은 돌려보낼 곳이 없다는 것을 알지라도, 어떻게 해야 이 보는 성품이 저의 참 성품이란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에게 물어 보리라. 너는 아직 번뇌 없는 청정한 경지[無漏淸淨]를 얻지 못했으나, 나의 신통력[神力]으로 초선천(初禪天)을 걸림 없이 보았다. 아나률(阿那律)은 염부제(閻浮提)를 손안의 암마라(菴摩羅) 열매처럼 보고, 보살들은 백 천의 세계를 보며, 시방 여래는 티끌처럼 많은 청정국토를 남김없이 다 볼 수 있으나, 중생은 아무리 환하게 볼지라도 한 치[分寸]에 지나지 않는다.
아난아, 내가 너와 함께 사천왕(四天王)이 머무는 궁전을 보았을 때, 중간에서 물과 육지와 허공에 다니는 온갖 것을 두루 다 보았다. 거기에 비록 어둡고 밝은 가지가지 형상이 있었으나, 어느 것 하나 앞 경계의 구분으로서 걸리고 막히지 않는 것이 없었으니, 너는 여기에서 자타(自他)를 분별해 보아라. 내가 이제 너에게 보는 작용 가운데 무엇이 나 자체인지 무엇이 다른 물상인지를 가려내리라.

아난아, 네가 보는 능력을 다하여 일월궁(日月宮)으로부터 살펴보아라. 이것은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또 칠금산(七金山)까지 자세히 살펴보아라. 비록 가지가지 빛깔은 다르나, 역시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이렇게 점차 다시 뜬구름과 나는 새들과 부는 바람과 날리는 티끌과 숲과 나무와 산과 내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짐승들을 보아라. 모두 다 물체일 뿐 네가 아니니라.
아난아, 이 멀고 가까운 온갖 물체의 성질은 비록 다를지라도, 너의 보는 정기는 한결같이[同] 청정하게 보느니라. 온갖 종류의 물체에는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보는 성품은 차별이 없으니, 이 보는 정기의 묘한 밝음이 진실한 너의 보는 성품이니라.
만일 이 보는 작용이 물체라면, 너는 나의 보는 작용도 보아야 한다.
만일 같이 보는 것으로 나의 보는 작용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너는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못 보는 것이냐.

만일 내가 보지 않는 곳을 본다고 한다면, 자연히 저 보지 않는 모양이 아니니라.만일 내가 보지 않는 자리를 못 본다면 자연히 물체가 아니니, 어찌 너 자신이 아니겠느냐.
또 네가 이제 물체를 볼 때 너는 이미 물체를 보았으니, 물체도 너를 보아야 하리라. 그러면 보는 자체의 성질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너와 나와 온갖 세상은 제자리의 질서[安立]를 이루지 못하리라.
아난아, 만일 네가 나를 볼 때 바로 너의 보는 작용이요, 나의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보는 성품이 두루 원만한 자체는 너 자신이 아니고 누구라고 하겠느냐. 어째서 너의 진실한 성품이 너의 성품으로서 진실하지 않다고 의심하여, 나를 상대로 진실을 찾으려는 것이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성품이 틀림없이 저 자신이고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 제가 여래와 함께 사천왕의 승장보전(勝藏寶殿)을 보느라고 일월궁(日月宮)에 있었을 때는 이 보는 성품은 두루 사바세계에 원만하다가, 정사(精舍)로 돌아왔을 때는 단지 가람(伽藍)만 보였으며, 마음 닦는 당실[淸心戶堂]에 있을 때는 처마와 행랑만 보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는 성품은 이와 같이 그 자체가 본래 한 세계에 두루 원만하다가 지금 방안에서는 오직 한 방에만 가득 차는 것입니까. 이 보는 성품이 큰 것을 움츠려 작아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 끊어지는 것입니까. 저는 지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오니 부디 넓은 자비를 내리시어 설하여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세간의 크다거나 작다거나 안이라거나 밖이라고 하는 모든 일의 작용[事業]은 각기 앞 경계에 달려 있을 뿐이니, 보는 성품이 펴진다거나 움츠린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비유하면 모난 그릇에서 모난 허공을 보는 일과 같다. 내가 또 너에게 묻겠노라. 이 모난 그릇에서 보는 모난 허공은 정해진 모남이겠느냐, 정해진 모남이 아니겠느냐. 만일 정해진 모남이라면 달리 둥근 그릇에 담을지라도 그 허공은 반드시 둥글지 않아야 하리라. 만일 정해진 모남이 아니라면 모난 그릇 속에 있을지라도 당연히 모난 허공이 없어야 한다. 네가 말한 ‘이 뜻이 있는 곳을 모른다’는 뜻의 내용[義性]이 이러하니, 무엇이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둥글고 모남이 없는 데로 들어가게 하려면, 단지 모난 그릇만 치우면 그만이다. 허공 자체는 모남이 없으니, 더 이상 허공에 있는 모난 모양을 치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네가 질문한 대로 방에 들어갔을 때 보는 성품이 움츠러져 작아졌다면, 고개를 들어 해를 쳐다볼 때는 보는 성품을 늘려서 해에 맞춰야 하겠느냐. 만일 담장이나 지붕에 끼어서 보는 작용이 끊어졌다면, 벽에 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는 어째서 이은 흔적이 없느냐. 네가 말한 뜻은 그렇지 않느니라.
온갖 중생들이 시작 없는 옛적부터 자기를 물체로 미혹하여 본래의 마음을 잃고 물체를 따라 구르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이니라. 만일 물체를 굴릴 수 있다면, 여래와 같이 몸과 마음이 뚜렷이 밝아서,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한 털 속에 두루 시방국토를 머금어 들일 수 있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 보는 정기가 틀림없이 나의 미묘한 성품이라면, 이 미묘한 성품은 지금 바로 제 앞에 있습니다. 이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분명 나의 진실한 성품이라면,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이 몸과 마음은 분별하는 실체가 있으나, 저 보는 정기는 따로 제 몸을 구분하여 가려내지 못합니다.
만일 참으로 앞에 있는 보는 정기가 제 마음이라면, 저로 하여금 지금 보게 하였으니, 보는 성품이 실제로 나이고, 이 몸은 제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래께서 좀 전에 ‘물체도 나를 볼 수 있으리라’고 힐난하신 말씀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부디 큰 사랑으로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지금 네가 말한 보는 정기가 네 앞에 있다고 한 뜻은 진실하지 않다. 참으로 네 앞에 있어서 네가 실제로 보고 있다면, 이 보는 정기는 이미 장소가 있을 것이니, 그 장소를 가리켜 보일 수 있으리라. 나는 지금 너와 함께 기타림(祇陀林)에 앉아서 수풀과 냇물과 법당과 위에 있는 해와 달과 앞에 마주한 항하를 두루 다 보고 있으니, 너는 이제 내 사자좌(師子座) 앞에서 손을 들어 이 가지가지 모양에서 가리켜 보아라. 그늘진 것은 숲이고 밝은 것은 해며, 막힌 것은 벽이고 통한 것은 허공이다. 이렇게 풀과 나무와 티끌과 먼지에 이르기까지 비록 크고 작음은 다를지라도, 모양이 될 만한 것은 가리키지 못할 것이 없느니라.만일 그 보는 정기가 분명 네 앞에 있다면 너는 손으로 확실하게 가리켜 보아라. 어느 것이 이 보는 정기냐.

아난아, 마땅히 알라. 만일 허공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허공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허공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물상을 보는 정기라고 한다면 물상은 이미 보는 정기가 되었는데, 어느 것을 물상이라고 하겠느냐. 너는 세밀하게 만상(萬象)을 헤치고 벗겨서, 밝고 깨끗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보는 작용의 근원을 쪼개고 골라내어, 저 온갖 물상들을 보듯 분명하여 의혹이 없도록 나에게 가리켜 보여라.”

아난이 말했다.
“제가 지금 이 겹 층의 전각 강당에서 멀리 항하의 강까지 위로 해와 달을 보면서, 손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과 눈가는 대로 볼 수 있는 것을 다 가리켜도 모두 이 물체일 뿐, 보는 정기는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저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처음 배우는 성문이어서 그렇다고 하나, 심지어 보살들의 큰 지혜로도 온갖 물상에서 정견(精見)을 쪼개어 내놓을 수 없습니다.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 말대로 정견(精見)이 없고 일체 물상을 떠나서 따로 제 성품이 있다면, 네가 가리킬 물상 안에는 보는 정기가 없으리라. 한 번 더 네게 부탁한다. 너는 지금 여래와 함께 앉아있는 기타림(祇陀林)에서, 다시 수풀과 동산으로부터 해와 달까지 살펴보아라. 가지가지 다른 모양에서 네가 가리켜 낼 보는 정기가 없다면, 너는 또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무엇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밝혀보아라.”

아난이 말했다.
“저는 실재로 이 기타림을 두루 보고 있으나,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무를 보겠으며, 만일 나무가 보는 정기라면 어찌 나무라고 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허공을 보겠으며, 만일 허공이 보는 정기라면 어찌 허공이라고 하겠습니까.
제가 또 사유(思惟)해 보니, 이 온갖 물상 가운데서 세밀하게 밝힌다면, 보는 정기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그러자 대중 가운데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듣자 아득하여, 이 뜻의 나중과 처음을 몰라 일시에 놀라면서, 어느 뜻을 지켜야 할지를 몰라 당황했다.
여래께서 그 넋이 변하여 놀란 줄을 아시고 가련하게 여겨 아난과 대중들을 달래면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이여, 무상법왕(無上法王)의 말은 진실한 말이며, 진리그대로 설하는 말이며, 속이지 않는 말이며, 거짓이 없는 말이니, 말가리(末伽黎) 등이 죽지 않는다고 교란하는 네 가지 희론[四種不死矯亂論議]이 아니니라. 너희들은 자세히 사유하여 법을 원하는 간절한 마음[哀慕]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여라.”

이때 대중 가운데 있던 문수사리 법왕자(法王子)가 사부대중(四部大衆)을 가련하게 여겨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공손하게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대중이 여래께서 밝히신 정교한 보는 작용이 색과 공인지[是], 아닌지[非是]에 대한 두 가지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앞에 인연하는 색(色)과 공 등의 모양이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라면 반드시 가리켜 보일 수 있어야 하며, 만일 정교한 보는 작용이 아니라면 볼 수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중은 지금 이 뜻이 돌아간 자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놀라고 있을 뿐, 옛날부터 바른 근성[善根]이 모자란 탓이 아닙니다.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베푸셔서, 이 온갖 물상(物象)과 보는 정기는 원래 무엇이 길래, 그 중간에 그렇다고도[是]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도[非是] 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밝혀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문수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시방 여래와 뛰어난 보살들이 스스로 머문 삼마지(三摩地) 가운데는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와 생각하는 모양들은 허공 꽃과 같이 본래 아무것도 없느니라. 이 보는 정기와 보는 정기의 인연 경계는 원래 보리의 묘하고 맑고 밝은 본체인데, 어찌 이 가운데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있겠느냐.
문수여, 너에게 묻겠노라. 너 그대로 문수인데다시 문수가 있다고 하여 이것은 문수다 문수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느냐.”

문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가 실제 문수인데, 이것은 문수다라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것이 문수다라고 한다면, 바로 두 문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저는 변함없는 문수이니, 이 가운데 참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두 모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는 작용의 미묘한 밝음과 허공과 온갖 경계도 이와 같이 본래 묘하고 밝고 더없이 높은 보리의 맑고 원만한 참 마음이니라. 이 참 마음이 허망하게 물체[色]와 허공과 보고 듣는 작용으로 변했으니, 마치 곁 달[第二月]을 보면서 어느 것은 달이고, 또 어느 것은 달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문수여, 단지 참 달 하나뿐이니, 달이다 달이 아니다라고 할 까닭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제 보는 정기와 경계[塵]를 살펴서 가지가지로 밝히는 작용은 허망한 생각이니, 그 가운데서 그렇다 그렇지 않다는 경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지만, 이것은 진실하고 정밀하고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이기 때문에 가리켜 밝힐 수 있다 가리켜 밝힐 수 없다는 경계에서 너를 벗어나게 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의 인연[覺緣]은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고요한 가운데 영원히 머물러서, 그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을 예전의 범지(梵志) 사비가라(娑毗迦羅)가 말하는 ‘명제(冥諦)’나, 또는 재에 몸을 던지는 외도 및 온갖 외도들이 말하는 ‘참 나[眞我]가 시방에 두루 원만하다’는 뜻과 어떻게 다릅니까.

세존께서는 이전에 능가산(楞伽山)에서 대혜(大慧)보살 등에게 이 뜻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저 외도들은 항상 자연(自然)이라고 설하나, 내가 말한 인연은 저 경계가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제 살펴보니, 깨달음의 성품은 자연으로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멀리 일체 허망한 뒤바뀜을 벗어났으므로,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니 저들이 주장하는 자연과 어떻게 가려내야만 온갖 사견(邪見)에 들지 않고 진실한 마음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성품을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방편으로 설명하여 진실하게 너에게 알려줬는데, 너는 오히려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자연과 헷갈리는 것이냐.
아난아,만일 틀림없이 자연이라면 ‘저절로[自]’가 반드시 분명하여 자연의 체[自然體]가 있어야 한다.
너는 또 이것을 살펴보아라. 이 묘하고 밝게 보는 작용에서 무엇으로 자체(自體)를 삼겠느냐. 이 보는 작용을 밝음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어둠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빈곳[空]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막힘으로 자체를 삼겠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또 만일 빈곳으로 자체를 삼는다면 당연히 막힘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온갖 어둠 등의 모양을 자체로 삼는다면, 밝을 때는 보는 성품이 끊겨 없을 텐데 어떻게 밝음을 보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묘하게 보는 성품이 분명 자연이 아니라면, 저는 이제 인연으로 생긴다고 밝히려 하나, 제 마음은 오히려 아직 분명하지 못해서 여래께 묻습니다. 이 뜻은 어떻게 해야 인연의 성품[因緣性]에 부합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인연이라고 했으니 네게 묻겠노라. 너는 지금 보는 작용으로 인(因)하여 보는 성품이 눈앞에 뚜렷하니, 이 보는 성품은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밝음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만일 어둠으로 인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빈곳과 막힘으로 인한 경우도 밝음과 어둠의 예와 같다.
아난아, 이 보는 성품은 또 밝음을 연(緣)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어둠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느냐.

아난아, 만일 빈곳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막힘을 보지 못해야 하며, 만일 막힘을 연해서 보는 작용이 있다면 당연히 빈곳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와 같이 밝음과 어둠을 연하는 경우도 빈곳과 막힘의 예와 같다.
그러니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정밀한 깨달음의 묘한 밝음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며, 자연도 아니고 자연이 아닌 것도 아니며, 인연과 자연이 아닌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 아니라는 것이 아닌 것도 없으며[無非不非], 인연과 자연이란 것도 없고, 인연과 자연이란 것이 아니란 것도 없는 가운데[無是非是], 일체의 모양을 떠나서 일체의 법과 일치하느니라. 너는 어째서 이 가운데 마음을 두고 세상에서 희론(戱論)하는 온갖 명상(名相)으로 분별하려는 것이냐. 이렇게 분별하는 것은 마치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고 하듯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인데,허공이 어떻게 너의 손에 잡히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깨달음의 성품이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어째서 비구들에게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보는 성품에 네 가지 연(緣)을 갖췄으니, 이른바 빈곳을 인연하고 밝음을 인연하고 마음을 인연하고 눈을 인연한다는 것이니라’고 하셨으며, 이 뜻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나는 세간의 인연상(因緣相)을 설했을 뿐,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을 설한 것이 아니다.
아난아, 또 네게 묻겠노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나는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라 하고, 어떤 경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느냐.”

아난이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햇빛과 달빛과 등빛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모양이 보이면 보는 것이라고 하며, 햇빛과 달빛과 등빛이 없으면 볼 수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아, 만일 밝음이 없을 때를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당연히 어둠도 볼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분명 어둠을 본다면 이것은 단지 밝음이 없을 뿐이지, 어째서 보는 것이 없다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어둠 속에 있을 때 밝음을 못 본다는 이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금 밝은 데 있으면서 어두운 모양을 볼 수 없는 것도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렇다면 밝고 어두운 두 모양을 함께 다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리라.
비록 밝음과 어둠이 서로 번갈아 빼앗아 바뀔지라도, 너의 보는 성품은 밝음과 어둠을 잠시도 떠난 적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분명히 알라. 밝음과 어둠을 둘 다 보는 것인데 어째서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너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밝은 것이 아니요, 어둠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어두운 것이 아니며, 빈곳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빈곳이 아니요, 막힘을 볼 때도 보는 성품은 막힌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네가 물은 네 가지 뜻이다. 너는 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는 정기를 볼 때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 진견(眞見)은 오히려 보는 정기를 떠나 있어서, 보는 정기로도 미칠 수 없는데, 어떻게 인연이니 자연이니 화합상(和合相)이라고 하겠느냐.
너희 성문들은 소견이 좁고 낮아 아는 것이 없어서 청정한 실상(實相)을 모르고 있느니라. 내가 이제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리니,곰곰이 잘 생각하여 묘한 보리의 길[妙菩提路]에 피곤하거나 게으르지 않도록 하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인연과 자연과 모든 화합상과 화합하지 않는 이치를 말씀해주셨으나, 여기에 마음이 채 열리기도 전에, 이제 다시 ‘보는 정기를 보는 진견(眞見)은 보는 정기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지금은 더욱 미혹하여 답답할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넓으신 사랑으로 큰 지혜의 눈을 베푸셔서 저희들에게 깨달음의 마음을 밝혀 맑히는 법을 깨우쳐 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난은 슬피 울며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거룩한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였다.

이때 세존께서는 아난과 대중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장차 대다라니(大陀羅尼)와 모든 삼마제(三摩提)와 묘한 수행의 길[妙修行路]을 설하시기 위하여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기억력이 좋을지라도 단지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 채웠을 뿐, 사마타(奢摩他)의 미세하고 심오한 관조의 지혜[微密觀照]는 아직 마음속 깊이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너를 위해서 분별하여 열어 보이고, 또 장래의 번뇌에 얽힌 중생들도 깨달음의 과위[菩提果]를 얻게 하리라.
아난아, 일체 중생이 세상에서 윤회하는 것은 두 가지 뒤바뀌어 분별하는 허망한 보는 작용을 따라 바로 그곳에서 발생하여 바로 그 업으로 바퀴 돌 듯 구르기 때문이니라.
두 가지 보는 작용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이요. 둘째는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이다.

개별 업(別業)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눈에 붉은 삼 병[赤眚]이 있는 사람은 밤에 등불에서 남달리 5색이 둥글게 겹친 등 무리를 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밤 등불에 밝게 나타난 등 무리[圓光]를 등불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보는 작용의 색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난아, 만일 이것이 등불의 색이라면 삼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등 무리를 보지 못하는데, 어째서 오직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이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만일 보는 작용의 빛이라면 보는 작용은 이미 빛이 되었는데, 저 삼 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등 무리는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또 아난아, 만일이 등 무리가 등불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옆자리의 병풍이나 휘장이나 책상이나 돗자리를 볼 때에도, 당연히 등 무리가 나와야 하며, 보는 작용을 떠나서 따로 있다면, 분명 눈이 보는 것이 아닌데, 어째서 삼 병에 걸린 사람만은 눈으로 등 무리를 보는 것이냐.

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빛은 실제로 등에 있으며, 보는 작용의 병이 등 무리가 되었느니라.
등 무리와 보는 작용이 다 삼 병일지라도, 삼 병을 보는 자체는 병이 아니니, 끝내 등 무리를 놓고 등 탓이다 보는 작용 탓이다라고 말하거나, 그 가운데서 등 탓이 아니요 보는 작용 탓이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마치 곁 달[第二月]은 달 자체도 아니고 달그림자도 아닌 것과 같다. 왜냐하면 곁 달은 눈을 눌러 생겼기 때문이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이 눈을 눌러 생긴 곁 달의 근원을 두고 ‘달 모양이다 달 모양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보는 작용과 보는 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벗어났다’고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 등 무리도 역시 그러하여 삼 눈병으로 생겼는데, 이제 무엇을 이름하여 등 탓이다 보는 탓이다라고 하겠으며, 어찌 더욱이 ‘등 탓이 아니다 보는 탓이 아니다’라고 분별하려고 하겠느냐.

공동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이 남섬부주(南贍部洲)에는 큰 바다를 제외한 중간의 육지에만 3천 섬[洲]이 있는데, 한 복판의 대륙[大洲]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 한데 묶어 세어 보면 2천 3백 개의 큰 나라가 있느니라. 그 나머지 작은 섬[小州]은 여러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데, 그 사이에는 3백 나라 2백 나라가 있기도 하고, 또 한 나라 두 나라로부터 서른 나라 마흔 나라 쉰 나라까지 있기도 하다.

아난아, 만일 이 중 어느 한 작은 섬에 단 두 나라만 있는 데서, 오직 한 나라 사람들만이 공동으로 나쁜 인연에 물들었다면[感], 그 작은 섬의 해당 국토 중생은 온갖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된다. 혹은 두 해를 보기도 하고 두 달을 보기도 하며, 내지 햇무리[暈], 월식과 일식[適], 해의 귀걸이[珮玦], 살별[彗星], 사방으로 뿔 돋친 별[孛星], 빗겨 나는 별똥 별[飛星], 아래로 흐르는 별똥 별[流星], 해를 등진 무지개[負耳], 암수의 쌍무지개[虹蜺] 등 가지가지 나쁜 모양을 보느니라. 이 모양은 단지 이 국토 중생들만 볼 뿐이며, 저 국토 중생들은 본래 본 바도 없고 듣지도 못한다.

아난아,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 일을 앞뒤로 맞춰서 밝혀보리라. 아난아, 저 중생이 개별 업의 허망한 보는 작용[別業妄見]으로 본 등빛에 나타난 등 무리가 비록 경계와 유사하게 나타났을지라도,결국 저 보는 사람의 눈병으로 이뤄졌으니, 삼 병은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나타난 모양일 뿐, 빛 자체에서 만들어진 모양이 아니다.
그러나 삼 병을 보는 자체는 결국 보는 자체의 허물이 없느니라.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과 국토와 중생들을 보는 작용에 견주어 보면, 모두 다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병으로 이뤄진 모양이니라.

보는 작용[見]과 보는 작용의 인연[見緣]이 앞에 나타난 경계인 듯하나, 원래 나의 깨달음의 밝음으로 허망하게 인연 대상을 보는 삼 병이니, 깨닫고 보는 것이 곧 삼 병이지만, 본각(本覺)의 밝은 마음으로 인연을 깨치는 것은 삼 병이 아니니라.
그러니 깨달아야 할 삼 병을 깨달으면, 이 깨달음은 삼 병 가운데 있지 않느니라. 이것이 참으로 보는 정기를 보는 진실한 봄[見見]이니, 어찌 깨닫고 듣고 알고 보는 허망한 마음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지금 나를 보고 너 자신을 보고 모든 세간의 온갖 중생을 볼지라도, 다 보는 작용의 삼 병이요, 삼 병을 보는 진실한 자체가 아니다. 저 보는 작용의 정밀하고 진실한 성품은 삼 병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작용’이라고 하지 않는다.

아난아, 저 중생들이 본 공동 몫의 허망한 보는 작용[同分妄見]을, 저 허망하게 본 개별 업의 한 사람에 견주어 보면, 눈에 삼 병 걸린 사람은 저 한 나라와 같다. 또 저 한 사람이 본 등 무리는 삼 병으로 허망하게 생겼으며, 이 공동의 몫으로 본[衆同分] 불길한 모양[不祥]은 공동으로 보는 업[同見業]의 전염병처럼 나쁜 기운[瘴惡]에서 일어났으니, 모두 시작 없는 옛적부터 보는 작용의 허망에서 생겼느니라.

염부제(閻浮提)의 3천주(洲) 가운데 네 큰 바다를 겸한 사바세계(娑婆世界)와 아울러 시방(十方)의 모든 번뇌가 있는 국토와 중생들을 견주어 보면, 다같이 깨달음이 밝고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허망한 병의 인연으로, 화합하여 허망하게 나고, 화합하여 허망하게 죽는 것이니라.
만일 모든 화합하는 인연과 화합하지 않은 것을 멀리 벗어날 수 있다면, 온갖 나고 죽는 원인을 멸하여 없애고, 원만한 보리의 생멸을 떠난 성품이요, 청정한 본래 마음인 본래 깨달음이 영원히 머물게 되리라.

아난아, 네가 비록 앞서 본각의 묘하고 밝은 성품이 인연도 아니고 자연성도 아님을 깨달았다고 하나, 오히려 이러한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치를 밝히지 못하였느니라.아난아, 내가 이제 또 앞 경계를 들어 너에게 물어보리라. 너는 지금도 오히려 일체 세상의 망상으로 화합한 온갖 인연의 성질을 가지고 스스로 보리를 증득하는 마음도 화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의혹하고 있느니라.
지금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어울렸느냐, 어둠과 어울렸느냐. 통함과 어울렸느냐, 막힘과 어울렸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렸다면 또 너는 밝은 것을 보아라. 밝은 것이 바로 눈앞에 닿아 있으니 어느 곳에 보는 정기와 섞였느냐. 보는 정기[見]와 밝은 모양[相]은 가려낼 수 있을 테니, 섞인 것은 어떤 형상이냐.
만일 밝은 것이 보는 정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밝은 모양을 보겠느냐. 만일 밝음이 곧 보는 정기라면 어찌 보는 정기 자체를 보겠느냐.
만일 분명 보는 정기가 원만하다면 어느 곳에 밝음과 어울리겠으며, 만일 밝음이 원만하다면 당연히 보는 정기와 어울리지 못하리라.
보는 정기는 분명 밝음과 다르므로, 섞이면 저 성품이 밝다는 명분[名字]을 잃게 되며, 섞여서 밝은 성품을 잃었으니, 밝음과 어울린다는 말은 옳지 않다.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린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또 너의 묘하고 깨끗한 보는 정기는 밝음과 합하였느냐, 어둠과 합하였느냐. 통함과 합하였느냐, 막힘과 합하였느냐.
만일 보는 정기가 밝음과 합하였다면, 어두울 때는 밝은 모양은 이미 사라져서, 이 보는 정기는 온갖 어둠과 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을 볼 때 어둠과 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한 경우에도 마땅히 밝음을 보지 못해야 한다. 이미 밝음을 보지 못했다면, 어떻게 밝음과 합했다 하며, 밝음이 어둠이 아닌 줄을 알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한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사유(思惟)해보니 이 미묘한 깨달음의 근원은 모든 인연 경계와 마음으로 생각하는 작용[心念慮]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이제 또 깨달음의 근원은 화합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내가 다시 네게 묻겠노라. 이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어둠과 어울리지 않았느냐.통함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막힘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어울리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 사이에 반드시 경계선[邊畔]이 있어야 한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어디까지가 밝음의 경계이고 어디까지가 보는 정기의 경계이냐. 또 보는 정기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며 밝음의 경계는 어디서 시작하느냐.
아난아, 만일 밝은 경계 안에 보는 정기가 없다면, 서로 닿지 않아서 그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경계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어울린 경우도 밝음과 어울리는 예와 마찬가지다.

또 묘한 보는 정기가 화합하지 않았다면, 밝음과 합하지 않았느냐. 어둠과 합하지 않았느냐. 통함과 합하지 않았느냐. 막힘과 합하지 않았느냐.
만일 밝음과 합하지 않았다면, 보는 정기와 밝음이 그 성질과 모양이 서로 어긋나서 마치 귀와 밝음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아도 밝은 모양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할 텐데, 어떻게 합하고 합하지 않는 이치를 가려서 밝히겠느냐.
어둠과 통함과 막힘과 합한 경우도 밝음과 합하는 예와 마찬가지다.

아난아, 너는 오히려 아직도 일체 실속 없이 뜬 경계에서 환술(幻術)처럼 변화하는 온갖 모양이, 바로 그 곳에서 생겨났다가 그 곳을 따라 사라져버림을 밝히지 못하여, 허망한 환영(幻影)을 모양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진실그대로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니라.
이와 같이 내지 5음(陰)과 6입(入)과 12처(處)에서 18계(界)에 이르기까지,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난다 하고, 인연이 흩어지면 허망하게 멸한다고 하지만, 단지 이 생기고 멸하고 가고 옴이 본래 여래장(如來藏)으로서, 영원히 머물러 묘하게 밝고 움직이지 않고 두루 원만하고 미묘한 진여(眞如)의 성품임을 잘 알지 못할 뿐이다.
이 성품의 진실하고 영원불변한 가운데서는 아무리 가고 옴과 미혹하고 깨달음과 나고 죽음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 없느니라.

아난아, 어째서 5음(陰)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게 개인 밝은 허공을 볼 때, 오직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하나의 맑게 개인 빈곳만을 보다가,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고 멍하게 바로 뜬눈이 피로해지면, 허공에서 따로 어물거리는 헛꽃을 보기도 하고,또 일체 어지럽게 날 뛰는 헛된 모양을 보기도 하는 것과 같이, 색음(色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온갖 어물거리는 헛꽃은 허공에서 온 것도 아니고 눈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허공에서 왔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한다. 만일 드나듦이 있다면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만일 빈 것이 아니면, 스스로 그 꽃 모양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마치 아난의 몸에 아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일 눈에서 나왔다면 이미 눈에서 나왔으니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한다. 또 이 꽃의 성질이 눈에서 나올 수 있다면 당연히 보는 작용이 있어야 하며, 만일 보는 작용이 있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에서 꽃이 되었으니, 돌아와서는 반드시 눈을 보아야 한다. 만일 보는 작용이 없다면 나가서는 이미 허공을 가렸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가려야 하리라. 또 꽃을 볼 때도 눈에는 당연히 가린 것이 없는데, 어째서 맑은 허공을 보아야만 맑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음(色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과 발이 편안하고 온 뼈마디가 고루 화평하여 살아 있다는 것도 잊고 마음에 어기고 따르는 일도 없는 가운데, 그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허공에서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빈다면, 두 손 사이에 난데없이 껄끄럽거나 매끄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한 여러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수음(受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 모든 허망한 촉감은 허공에서 오지도 않고 손바닥에서 나오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은 촉감을 잘 아는데 어째서 몸에는 촉감이 없느냐. 허공이 닿을 곳을 가려서 닿게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손바닥에서 나왔다면 당연히 두 손바닥이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며,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쳤을 때 손바닥이 알았다면, 떼었을 때는 촉감이 들어갈 것이니, 손목과 팔목의 골수(骨髓)들도 마땅히 들어갈 때의 종적(蹤迹)을 느껴야 한다. 또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나오는 것을 알고 들어가는 것을 안다면, 저절로 한 물체가 몸 속을 오고 가는 것이니, 어째서 마주 합하기를 기다려서 알아야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수음(受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신 매실을 말하면 입에서 침이 나오고 높은 벼랑을 밟는다고 생각하면 발바닥이 껄끄럽고 시쿰한 느낌이 생기는 것과 같이, 상음(想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아난아, 시다는 말에서 생긴 침은 매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입으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침이 매실에서 나온다면 당연히 매실 자체가 말해야 하는데 어찌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리겠느냐.
만일 입으로 들어간다면 당연히 입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어찌 꼭 귀를 기다려 듣겠느냐. 만일 귀로만 듣는다면 이 침은 어째서 귀속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냐.
높은 벼랑을 밟아 오른다는 생각도 매실 비유와 같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상음(想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며,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세찬 흐름이 물결을 서로 이어 흐르면서 앞뒤를 서로 뛰어넘지 않는 것과 같이, 행음(行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흐름의 성질은 허공을 근거로 생기지도 않고, 물을 근거로 있지도 않으며, 물의 성질도 아니고, 허공과 물을 떠나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허공을 근거로 생긴다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은 끝없는 흐름을 이루어 세계는 자연히 온통 물 속에 빠져 잠기리라.
만일 물을 근거로 있다면 이 세차게 흐르는 성질은 당연히 물이 아니니, 물의 소유한 모양[所有相]이 있으면 마땅히 지금 눈앞에 뚜렷이 보여야 한다. 만일 그 흐름이 물의 성질이라면 맑고 고요할 때는 분명 물 자체가 아니어야 한다.
만일 허공과 물을 떠나서 흐름이 따로 있다면 허공은 바깥이 있지 않으며, 물을 떠나서[水外]는 흐름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행음(行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빈가병(頻伽甁)을 취하여 두 구멍을 막아서 그 속에 공기[空]를 가득 채우고 천리의 먼 길을 행하여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식음(識陰)도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이러한 허공은 저 곳에서 오지도 않고 이 곳에서 들어가지도 않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만일 저 곳에서 왔다면 그 병 속에 이미 허공을 담아서 가지고 갔으니, 그 병이 있었던 자리의 허공은 마땅히 조금 적어져야 한다.만일 이 곳에서 들어간다면 뚜껑을 열고 병을 기울일 때는 당연히 허공이 나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식음(識陰)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6입(入)을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곧 저 사람이 눈동자를 멍하게 뜨고 피로한 것은, 눈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밝음과 어둠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塵象]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보는 성질은 밝음과 어둠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보는 작용은 밝음과 어둠에서 오지도 않고, 눈[根]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밝은 데서 온다면 어두울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어둠을 볼 수 없어야 하고, 어두운 데서 온다면 밝을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밝음을 볼 수 없어야 하며, 눈에서 나온다면 밝고 어둠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보는 정기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앞에서 경계의 모양을 보았으니, 돌아와서는 당연히 눈을 보아야 한다.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보는 것이니, 네 눈의 보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의 보는 기능[眼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손가락으로 급히 귀를 꽉 막는다면, 귀의 감관[耳根]이 피로하여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은, 이 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듣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듣는 성질은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데서 오지도 않고, 귀[根]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듣는 성품이 조용한 데서 왔다면 움직일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소리의 움직임을 듣지 못해야 하고,만일 움직이는데서 왔다면 조용할 때는 곧장 따라 사라져서 조용함을 깨닫지 못해야 하며, 만일 귀에서 생긴다면 움직임과 조용함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듣는 자체는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은 듣는 작용으로 성품을 이뤘으니 허공이 아니며, 또 허공이 제 스스로 들으니 너의 듣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의 듣는 기능[耳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급히 코로 숨을 들이켜서 들이켠 숨을 조금 길게 끌어 피로해지면, 콧속에 서늘한 느낌이 생긴다. 이 느낌으로 인하여 통함과 막힘의 허와 실[虛實]과, 이와 같이 온갖 향기와 추한 기운들을 분별하는 것은, 이 코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통함과 막힘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냄새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냄새 맡는 성품이라고 하며, 이 냄새 맡는 성질은 저 통함과 막힘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냄새 맡는 작용은 통함과 막힘에서 오지도 않고, 코에서 나오지도 않으며,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통한 데서 온다면 막힐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막힘을 알겠으며, 만일 막힘 때문에 있다면 통할 때는 냄새 맡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향기와 추한 냄새 등의 느낌을 밝히겠느냐. 만일 코에서 생긴다면 분명 통함과 막힘과 상관없으니, 이러한 냄새 맡는 기능은 본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온다면 이 냄새 맡는 작용은 돌아와서 네 코를 냄새 맡아야 하며, 또 허공 자체가 스스로 냄새를 맡는 것이니 네 코의 맡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의 맡는 기능[鼻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혀로 입술을 조금 오래 핥았을 경우, 병 있는 사람은 쓴맛을 느끼고 병 없는 사람은 조금 단맛을 느낀다. 단맛과 쓴맛으로 혀의 감각이 나타나고 혀를 움직이지 않을 때는 항상 담담한 맛이 있는 것은, 이 혀와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이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맛보는 성질이라고 하며, 이 맛보는 성질은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달고 쓴맛과 담담한 맛은 달고 쓴맛에서 오지도 않고 담담한 맛 때문에 있지도 않으며, 또 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달고 쓴맛에서 온다면 담담할 때는 맛보는 작용이 사라지니 어떻게 담담한 맛을 알겠으며, 만일 담담한 맛에서 왔다면 달고 쓴맛을 느낄 때는 담담한 맛이 없어지니 어떻게 달고 쓴 두 맛을 알겠느냐. 만일 혀에서 생긴다면 분명 달고 담담하고 쓴 경계와 상관없으니 이 맛을 아는 기능[知味根]은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 맛보는 것이지, 네 입이 맛보는 것이 아니다. 또 허공 자체가 맛보는 일이니 네 혀의 맛보는 기능[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의 맛보는 기능[舌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한쪽의 차가운 손으로 다른 쪽의 더운 손과 맞댈 경우, 차가운 기운이 더운 기운보다 많으면 더운 기운은 차가운 기운을 따라 차가워지고, 더운 기운이 많으면 차가운 기운은 더운 기운을 따라 더워진다. 이와 같이 이 맞대어 깨닫는 촉감이 뗄 때에는 떼는 줄을 아는 작용으로 나타나니, 끼어드는 기운[勢]이 이렇게 성립하는 것은, 피로한 촉감이 그 원인이며, 이 몸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떼고 합하는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촉감을 일으키고 그 가운데 있으면서, 경계의 모양을 빨아들이는 작용을 촉감의 성질[知覺性]이라고 하며, 이 촉감 자체[知覺體]는 서로 떼고 합함의 어기고 따르는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촉감[覺]은 떼고 합함에서 오지도 않고, 어기고 따름에 있지도 않으며, 몸의 감관[根]에서 나오지도 않고, 또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합할 때 온다면 뗄 때는 합함이 이미 사라지니 어떻게 떼는 작용을 알겠느냐. 어기고 따르는 두 모양도 마찬가지다. 만일 몸에서 나온다면 분명 떼고 합하고 어기고 따르는 네 가지 모양이 없으니, 네 몸의 감촉 기능은 원래 제 성품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나온다면 허공 스스로가 촉감이니 네 몸의 감촉 기능[身入]과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몸의 감촉 기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어떤 사람이 피곤하고 나른하여 잠이 들었다가 푹 자고 나서 깨었을 때, 경계를 보면 기억하고 기억을 잃으면 잊어버림이 바로 뒤바뀐 생주이멸(生住異滅)이니라. 이를 빨아들여 익히고 의식 가운데로 돌아가서 서로 뛰어넘지 않음을 의식의 인식 기능[意知根]이라고 하며, 이것은 의식과 피로를 겸하여 보리의 마음도 함께 멍하여 피로를 일으킨 모양이니라.
생기고 사라짐의 두 가지 허망한 경계로 인하여 아는 작용을 모으고 그 속에 있으면서 안의 경계[內塵; 곧 法塵]를 빨아들여 보고 들음이 흐름을 거슬러서 기억하거나 흐름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잊는 작용을 지각하는 성질[知覺性]이라고 하며, 이 지각하는 성질은 자고 깨는 생멸의 두 경계를 떠나면 끝내 자체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아난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지각의 기능[覺知之根]은 자고 깸에서 오지도 않고, 생기고 사라지는 데에 있지도 않으며, 의식의 감관에서 나오지도 않고, 허공에서 생기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만일 잠깬 데서 온다면 잠잘 때는 곧 따라 사라져버리니 무엇으로 잠을 자며, 분명 생길 때 있다면 멸할 때는 같이 없는데 무엇이 멸하겠느냐. 만일 멸하는 데 있다면 생길 때는 곧 멸함이 없는데 무엇이 생기는 것을 알겠느냐. 만일 의식의 감관에서 나온다면 자고 깨는 두 모양은 몸의 열리고 닫힘을 따르는 것이니, 이 열리고 닫히는 두 체를 떠나면 이 지각작용은 허공 꽃과 같이 끝내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 제 스스로 아는 일이니, 너의 의식작용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의식 기능[意入]은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2처소[處]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또 이 기타원(祇陀園)의 나무와 숲과 샘과 못들을 보아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색이 눈의 보는 작용을 내겠느냐. 눈이 색의 모양을 내겠느냐.

아난아, 만일 또 눈[眼根]이 색의 모양을 낸다면 공(空)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눈이 낸 색의 모양은 마땅히 소멸할 것이며, 소멸하면 드러낼 모양은 아무것도 없다. 색의 모양이 이미 없다면 무엇이 공의 본질을 밝히겠느냐. 눈이 공의 모양을 내는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다.만일 또 색의 경계[色塵]가 눈의 보는 작용을 낸다면 공(空)을 볼 때는 색이 아니니, 보는 작용은 곧 소멸할 것이며, 소멸해버리면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 공과 색을 밝히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보는 작용과 색과 공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색과 보는 작용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이 기타원(祇陀園)에서 공양이 마련되면 북을 치고, 식단으로 대중을 불러 모을 때는 종을 치니, 너는 그 때마다 앞뒤로 서로 이어지는 북소리와 종소리를 듣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들 소리가 귀가로 오겠느냐. 귀가 소리 나는 곳으로 가겠느냐.
아난아, 만일 소리가 귀가로 온다면, 내가 실라벌성(室羅筏城)에서 걸식(乞食)할 때는 기타림(祇陀林)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이 소리가 분명 아난의 귀가로 와버린다면, 목련과 가섭은 함께 듣지 못해야 할 텐데, 어찌 더욱이 1,250 사문(沙門)이 한꺼번에 종소리를 듣고 다같이 공양할 곳으로 오는 것이냐.

만일 네 귀가 저 소리 나는 곳으로 간다면, 내가 기타림(祇陀林)에 돌아와 머물 때는 실라벌성(室羅筏城)에는 내가 없는 것과 같이, 네가 북소리를 듣고 그 귀가 이미 북 치는 곳으로 가버린다면, 종소리가 겹쳐 나도 마땅히 함께 들을 수 없어야 하는데, 어찌 더욱이 그 가운데 코끼리와 말과 소와 양들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듣는 것이냐. 만일 오고 감이 없다면 듣는 작용도 없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듣는 작용과 소리는 모두 처소가 없으니 듣는 작용과 소리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향로의 전단향기를 맡아보아라. 이 향기는 비록 1수(銖)만 태울지라도 실라벌성의 40리 안에서는 동시에 향내를 맡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향기는 전단나무에서 나오겠느냐. 네 코에서 나오겠느냐. 허공에서 나오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향기가 네 코에서 나온다면, 코에서 생긴다는 말이니 당연히 코에서 나와야 하며,코는 전단이 아닌데 어떻게 콧속에 전단 기운이 있겠느냐. 네가 향내를 맡는다는 말은 당연히 코로 들어온다는 뜻이니, 콧속에서 나오는 향기를 맡는다고 말하면 이치에 맞지 않느니라.

만일 허공에서 난다면, 허공의 성질은 한결같으니 향기도 항상 있어야 하는데, 무엇 때문에 향로에 마른 향나무를 태워야 하겠느냐.
만일 전단나무에서 난다면, 이 향의 본질은 타면서 연기가 나기 마련이니, 코가 향내를 맡을 적에 연기와 함께 맡아야 한다면, 그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서 채 멀리 퍼지기도 전에 40리 이내의 사람들은 어째서 이미 향내를 맡는 것이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향기와 코와 맡는 작용은 다 함께 처소가 없으니, 맡는 작용과 향기의 두 처소는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두 때에 대중과 함께 발우를 가지고 걸식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간혹 소락(酥酪)을 가장 잘 정제(精製)된 제호(醍醐)를 만나면 훌륭한 맛이라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맛은 허공에서 생기느냐. 혀에서 나느냐. 음식에서 나느냐.

아난아, 만일 이 맛이 네 혀에서 난다면 네 입 속에는 혀가 하나뿐이니, 그 혀가 일단 우유 맛이 되었다면, 검은 꿀[黑石蜜]을 먹어도 맛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만일 맛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맛을 안다고 할 수 없으며, 만일 달라진다면 혀는 여럿이 아닌데 어떻게 한 혀로 여러 맛을 다 알겠느냐.
만일 음식에서 난다면, 음식은 아는 작용이 없으니 어떻게 제 스스로 알겠으며, 또 음식이 제 스스로 안다면 남의 음식과 같으니, 너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맛을 안다고 하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너는 허공을 씹어 보아라. 어떤 맛이 나느냐. 그 씹은 허공이 분명 짠맛이라면 이미 네 혀를 짜게 하였으니 네 얼굴도 짜야 한다 .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언제나 짠맛 속에 사는 바닷고기와 같이 조금도 싱거운 맛을 알지 못하리라. 만일 싱거운 맛을 모른다면 짠맛도 깨닫지 못해야 한다. 또 아무 맛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맛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맛과 혀와 맛보는 작용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맛보는 작용과 맛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새벽마다 언제나 손으로 머리를 만지리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만져서 아는 것은 어느 쪽이 촉감을 아는 주체[能觸]이냐. 그 촉감을 아는 주체는 손에 있겠느냐. 머리에 있겠느냐.
만일 손에 있다면, 머리는 알지 못할텐데 어떻게 촉감이 성립되겠느냐. 만일 머리에 있다면 손에는 촉감이 없을 텐데, 어찌 촉감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각각 따로 있다면 너 아난에게 마땅히 두 몸이 있어야 하리라.

만일 머리와 손에서 똑같이 한 촉감이 생긴다면, 손과 머리는 당연히 같은 일체(一體)가 되어야 한다. 만일 같은 일체라면 촉감은 성립되지 않으리라. 만일 다른 이체(二體)라면 촉감은 어느 쪽에 있겠느냐. 대는 쪽[能]에 있으면 닿는 쪽[所]에 있지 않을 것이며, 닿는 쪽에 있으면 대는 쪽에 있지 않으리라. 당연히 허공이 너에게 촉감을 주었다고도 못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촉감을 아는 작용과 몸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몸과 촉감은 둘 다 허망하여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너는 언제나 의식(意識) 가운데 인연하는 선과 악과 무기(無記)의 세 성질로 법칙을 만들어내고 있으니, 이 법은 마음과 일치한 상태에서 생기겠느냐.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方所]가 있겠느냐.

아난아, 만일 마음과 일치 하다면, 법칙은 경계[塵]가 아니므로 마음의 인연대상이 아니니, 어떻게 처소가 성립되겠느냐.
만일 마음을 벗어나서 따로 장소가 있다면 법의 자성(自性)은 아는 작용이냐, 아는 작용이 아니냐. 아는 작용이라면 마음이라 하겠으나, 너와는 다르면서 경계도 아니니, 다른 사람의 마음과 같으리라. 너와 일치하면서 마음과도 일치 하다면, 어떻게 네 마음이 다시 너에게 둘이 되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아니라면 이 법의 경계[塵]는 이미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떼고 합함과 차고 따뜻함과 허공의 모양도 아닌데,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이제 색과 허공에서 전혀 표시할 수 없고, 인간이 또 허공밖에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마음이 인연할 대상도 아니니, 법의 처소는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법칙과 마음은 모두 처소가 없으니, 뜻과 법은 둘 다 허망하여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아난아, 어째서 18계(界)를 본래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네가 밝힌 대로 눈[眼]과 색(色)이 연(緣)이 되어 눈의 인식[眼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識]이 눈 때문에 생긴다 하여 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색(色) 때문에 생긴다 하여 색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눈 때문에 생긴다면, 눈 자체에는 이미 색(色)과 공(空)이 없어서 분별할 수 없는데, 너의 인식이 있다 한들 무엇을 상대로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보는 작용은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흰 것이 아니니 표시할 길이 없는데,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이 인식이 색(色) 때문에 생긴다면, 공하여 색(色)이 없을 때에는 너의 인식도 마땅히 없어질 텐데, 허공의 성질을 어떻게 알겠느냐.

만일 색이 변할 때 네가 색의 모양[色相]이 변천하는 상태를 안다면, 너의 인식 자체는 변천한 일이 없는 것이니,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또 색의 변천을 따라 인식이 변천한다면, 경계의 모양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며, 또 인식이 색을 따라 변천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한결같으리라. 그러면 이미 색에서 생겼으니, 마땅히 허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하게 되리라.
만일 두 가지를 겸하여 눈과 색이 함께 눈의 인식[眼識]을 낸다면, 눈과 색이 합해져 있을 때는 인식이 자리할 중간이 없을 것[離]이며, 눈과 색이 떨어져 있을 때는 눈과 색의 양쪽으로 갈라서 합해야 한다. 그러면 자체의 성품이 어지럽게 뒤섞일 텐데, 어떻게 경계를 이루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눈과 색이 연이 되어 눈의 인식경계[眼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눈과 색과 색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또 네가 밝힌 대로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耳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하여 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소리 때문에 생긴다하여 소리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귀 때문에 생긴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한 두 모양이 이미 앞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귀[根]에는 아는 작용이 성립되지 않는다. 분명 알 대상이 없으면 아는 작용도 오히려 성립될 수 없는데, 인식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귀의 듣는 작용을 취해서 인식이라 한다면,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이 없기 때문에 듣는 작용도 성립될 수 없는데, 어떻게 색(色)과 향(香)과 미(味)와 촉(觸)의 4진(塵)으로 섞여 짜인 귀의 형체를 인식의 경계라고 하겠으며,귀의 인식영역은 또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소리에서 생긴다면, 인식이 소리 때문에 있으니, 듣는 작용과 관계가 없으며, 듣는 작용이 없으면 소리의 모양도 있는 자리가 없으리라. 인식이 소리에서 난다 하여 소리를 듣는 작용에 따라 소리 모양이 있다고 인정하면, 듣는 작용은 마땅히 인식 자체를 들어야 하리라. 인식 자체를 듣지 못한다면 소리의 경계가 아니며, 인식 자체를 듣는다면 소리와 똑같아서, 인식 자체가 이미 듣는 대상이 되었으니, 무엇이 인식 자체를 듣는 줄 알겠느냐. 만일 아는 작용이 없다면 결국 초목과 같으니, 당연히 소리와 듣는 작용이 섞여서 중간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리라. 경계의 중간자리가 없으면 안팎의 모양은 무엇으로 성립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귀와 소리가 연이 되어 귀의 인식경계[耳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귀와 소리와 소리 경계의 셋은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코와 냄새[香]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鼻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코 때문에 생긴다 하여 코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냄새[香] 때문에 생긴다 하여 냄새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인식이 코 때문에 생긴다면 너는 마음속에 무엇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쌍 손톱 모양의 살덩어리를 코라고 생각하느냐. 냄새를 맡아서 동요하는 성질을 코라고 생각하느냐.
만일 살덩어리를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살덩어리[肉質]는 몸이고, 몸의 아는 작용은 촉감이니, 몸이라면 코가 아니며, 촉감이라면 경계[塵]이니라. 그러면 코는 오히려 이름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냄새 맡는 작용을 가지고 코라고 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무엇이 맡는다고 생각하느냐. 살덩어리가 맡는다고 한다면 살덩어리의 맡는 작용은 원래 촉감이지 코가 아니며, 허공이 맡는다고 한다면 허공이 제 스스로 맡는 것이니, 살덩어리는 마땅히 느끼지 못해야 하며, 허공이 맡는다면[如是] 마땅히 허공이 바로 네가 되고 네 몸은 알지 못해야 하며, 지금의 아난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냄새 자체[香]가 맡는다고 하면 맡는 작용은 저절로 냄새 자체에 속하는데 너와 무슨 상관이냐.

만일 향냄새와 추한 냄새가 분명 네 코에서 난다면, 저 향내와 구린내의 두 가지 흐르는 기운은 이란(伊蘭; 臭木)나무와 전단(栴檀; 香木)나무에서 생기지 않으리라.이 두 나무[二物]가 없는데서 너는 스스로 코를 맡아보아라. 향내가 나느냐. 구린내가 나느냐. 구린내라면 향내가 아니며, 향내라면 분명 구린내가 아니다. 만일 향내와 구린내를 둘 다 맡는다면, 너 한 사람에게 마땅히 두 코가 있어야 하고, 또 나에게 도를 물을 때도 두 아난이 있어야 하니, 어느 쪽을 네 몸이라고 하겠느냐.

만일 코가 하나라면 향내와 구린내의 둘은 구분되지 않아서, 구린내가 이미 향내가 되고 향내가 또 구린내가 되어, 두 성질이 있지 않을 텐데 경계를 무엇으로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냄새[香]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은 냄새 때문에 있으니, 마치 눈에 보는 작용이 있으나 제 눈을 볼 수 없듯이 냄새 때문에 인식이 있으므로 마땅히 냄새를 맡지 못해야 하리라. 인식이 냄새를 안다면 냄새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이 아니니라.

냄새가 맡는 작용을 근거로 있지 않다면, 냄새의 경계는 성립되지 않으며, 인식이 냄새를 알지 못한다면 인식의 경계[因界]는 냄새에서 건립되지 않는다. 이미 중간이 없고 안의 감관과 밖의 경계가 성립되지 않으니, 저 온갖 맡는 성질은 마침내 허망하리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코와 냄새가 연이 되어 코의 인식경계[鼻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코와 냄새와 냄새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혀와 맛이 인연이 되어 혀의 인식[舌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혀 때문에 생긴다 하여 혀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맛 때문에 생긴다하여 맛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혀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감자(甘蔗)와 오매(烏梅)와 황련(黃連)과 석염(石鹽)과 세신(細辛)과 생강[薑]과 계피[桂]들은 모두 맛이 없으리라. 너는 스스로 혀를 맛보아라. 단맛이냐, 쓴맛이냐. 만일 혀의 성질[性]이 쓰다면 무엇이 와서 혀를 맛보겠느냐. 혀는 스스로 맛보지 못하는데 무엇이 지각하겠느냐. 혀의 성질이 쓰지 않다면 맛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를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맛 때문에 생긴다면, 인식[識] 자체가 맛이 되리라. 그러면 혀의 감관[舌根]이 스스로 맛보지 못함과 한가지니, 어찌 인식[識]이 맛인지 맛 아닌지를 알겠느냐.

또 일체 맛은 한 물건에서만 생기지 않으니, 맛이 이미 많이 생김으로 인식도 당연히 여러 체(體)라야 하리라. 인식의 체가 만일 하나이며 체가 분명 맛에서 생긴다면,짠맛과 담담한 맛과 단맛과 신맛과 화합한 맛과 본래 가진 맛[俱生]과 변하여 달라진 맛[諸變異]들은 똑같이 한 맛이 되어 분별이 없으리라. 이미 분별이 없다면 인식이라고 이름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또 혀와 맛의 인식경계[舌味識界]라고 하겠느냐. 그렇다고 허공이 너의 심식(心識)을 내지는 않았으리라. 혀와 맛의 화합으로 난다면 곧 이 가운데는 원래 제 성품이 없을 텐데 어떻게 경계가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혀와 맛이 연이 되어 혀의 인식경계[舌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혀와 맛과 혀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身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은 몸 때문에 생긴다 하여 몸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닿음 때문에 생긴다하여 닿음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몸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합하고 떼는[合離] 둘을 깨달아 아는 인연[二覺觀緣]이 없으니 몸이 무엇을 알겠느냐.
만일 인식이 닿음 때문에 생긴다면, 분명 네 몸이 없는데, 몸이 아닌 다른 무엇이 있어서 대고 뗌을 알겠느냐.

아난아, 물체는 닿아도 알지 못하고, 몸이 아는 작용은 닿음에 있으니, 몸을 알리는 작용이 곧 닿음이며, 닿음을 아는 작용이 곧 몸이다. 따라서 인식이 닿음이면 몸이 아니며, 인식이 몸이면 닿음이 아니니, 몸과 닿음의 두 모양은 원래 처소가 없느니라. 또 닿음이 몸과 합하면 곧 몸 자체의 성품이며, 닿음이 몸을 떠나면 바로 허공과 같은 모양이니, 이렇게 안과 밖이 성립되지 않으면, 중간의 인식이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또 중간의 인식이 성립되지 않으면 안과 밖의 성질이 공하여 없으니, 너의 인식이 생긴들 무엇으로 경계를 세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몸과 닿음이 연이 되어 몸의 인식경계[身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몸과 닿음과 몸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아, 또 네가 밝힌 대로 뜻[意; 意根]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意識]이 생긴다면, 이 인식[識]은 뜻 때문에 생긴다 하여 뜻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법 때문에 생긴다 하여 법의 경계라고 하겠느냐.

아난아, 만일 인식이 뜻[意; 意根] 때문에 생긴다면, 네 뜻[意; 意根] 가운데 반드시 생각할 법[所思]이 있어야 너의 뜻을 밝히겠는데, 만일 앞에 법이 없다면 뜻이 생길 곳이 없으며, 인연을 떠나서는 형체가 없으니, 인식[識]이 무엇을 가지고 작용하겠느냐.
또 너의 식심(識心)이 온갖 사량[諸思量; 意根]과 요별을 겸한 성품[兼了別性]과 더불어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뜻[意]과 같다면 그대로 뜻[意]이니, 무엇이 생기겠으며, 뜻과 다르다면 같지 않으니, 마땅히 인식할 곳이 없어야 하리라. 만일 인식할 곳이 없다면 어떻게 뜻에서 생긴다고 하겠으며, 만일 인식할 곳이 있다면 무엇이 인식을 낸 뜻이겠느냐. 같고 다름의 두 성질이 성립되지 않으면, 경계를 어떻게 세우겠느냐.

만일 인식이 법 때문에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법은 다섯 경계[五塵]를 벗어나지 않으니, 너는 색법(色法)과 성법(聲法)과 향법(香法)과 미법(味法)과 촉법(觸法)을 보아라. 모양이 분명하여 제각기 다섯 감관을 상대할 뿐, 뜻이 거두는 법이 아니다. 너의 인식이 결코 법을 의지하여 생긴다면, 너는 이제 자세히 살펴보아라. 법 경계[法; 法塵]의 법은 어떤 모양이냐. 만일 색과 공[色空; 色法]과 움직이고 고요함[動靜; 聲法]과 통하고 막힘[通塞; 香法]과 합하고 뗌[合離; 觸法]과 생기고 사라짐[生滅; 味法]을 떠난다면 이 온갖 모양을 벗어나서는 끝내 얻을 것이 없느니라. 생긴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생기고, 멸한다면 색과 공의 온갖 법이 멸할 뿐이다. 이미 원인 할 곳이 없는데 원인이 생겨 인식이 있다면, 어떤 형상이 되겠으며, 형상이 없다면 경계가 어떻게 생기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뜻과 법이 연이 되어 뜻의 인식경계[意識界]가 생긴다고 하나, 세 곳은 전혀 있는 데가 없으니 뜻과 법과 뜻 경계의 셋은 다 본래 인연도 아니고 자연도 아니고, 여래장의 묘한 진여의 성품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항상 화합하는 인연을 말씀하실 때마다 ‘일체 세상의 가지가지 변화는 다 4대(大)의 화합으로 나타난다[發明]’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과 자연을 모두 물리치십니까. 저는 지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오니, 부디 가련하게 여기시고 중생들에게 희론법을 떠난 중도의 완전한 뜻[中道了義]을 열어 보여주옵소서.”

이때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먼저 성문과 연각의 모든 소승 법을 싫어하여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열심히 구하려고 발심했기 때문에, 나는 방금 너를 위해서 가장 뛰어난 법[第一義諦]을 열어 보여줬는데도, 어째서 또 세상의 희론인 망상의 인연에 스스로 얽매는 것이냐. 네가 비록 들은 지식이 많을지라도, 마치 약을 말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진실한 약이 있으나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여래는 참으로 가련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나는 마땅히 너에게 분별하여 열어 보일 뿐 아니라, 미래에 대승(大乘)을 닦는 사람들에게도 실상(實相)을 통달케 하리라.”
그러자 아난은 말없이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자 하였다.

“아난아, 네가 말한 대로 4대(大; 要素)의 화합으로 세상의 가지가지 변화가 나타난다면[發明], 아난아, 만일 저 요소[大]의 성질 자체가 화합이 아니라면, 모든 요소[諸大]와 섞여 어울릴 수 없음은 마치 허공이 모든 물체와 어울리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며, 만일 화합하는 성질이라면 한가지로 변화하여 시작과 끝을 서로 이루면서 생멸이 상속하여, 났다가 죽고 죽었다가 나며 나고 나며 죽고 죽기를 마치 불덩어리가 쉴 새 없이 돌 듯 반복하리라.

아난아, 또 마치 물이 얼음이 되었다가 얼음이 다시 물이 되듯 반복하느니라.
너는 흙의 성질을 보아라. 긁어서는 대지(大地)가 되고, 가늘어서는 미진(微塵)이 되었다가 인허진(鄰虛塵; 허공에 가까운 티끌)이 되느니라. 인허진은 저 극미한 물질의 가장자리[極微色邊際相]를 일곱 몫으로 쪼갠 것이며, 다시 인허진(鄰虛塵)을 쪼갠 것이 바로 완전한 허공의 성질이니라.
아난아, 만일 이 인허(鄰虛)를 쪼개어 허공이 된다면, 마땅히 허공이 색상(色相)을 출생시킨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너는 지금 ‘화합한 까닭에 세상의 온갖 변화하는 모양이 출생하는가’를 물었으니, 너는 또 이 점을 생각해보아라. 한 인허진은 얼마의 허공을 들여 화합해야만 생기겠느냐. 당연히 인허진이 합쳐서 인허진이 되지는 않으리라.

또 인허진을 쪼개어 허공이 되려면 얼마의 색상(色相)을 들여 합해야만 허공이 되겠느냐. 만일 색과 합할 때라면 색과 합했으니 허공이 아니며, 만일 허공과 합할 때라면 허공과 합했으니 물질이 아니다. 색은 오히려 쪼갤 수 있겠으나, 허공을 어떻게 합하겠느냐.너는 원래 여래장(如來藏) 안에 성품이 색인 진실한 공[性色眞空]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색[性空眞色]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知量]에 응하는 줄을 모르고 있느니라.
업을 좇아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불의 성질은 자체[我]가 없으니 여러 인연에 의지하느라. 너는 성안의 식전(食前)의 집들을 보아라.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필 때, 손에 불 거울[陽燧; 火鏡]을 들고 햇빛에서 불을 피우고 있느니라. 아난아, 이를 화합이라고 한다면, 너와 나와 1,250비구가 지금 화합하여 한 대중이 된 것과 같다. 대중으로는 비록 하나이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각자의 몸이 따로 있으며, 다들 태어난 씨족의 이름이 있으니, 사리불(舍利弗)은 바라문(婆羅門)족이고, 우루빈라(優樓頻羅)는 가섭파(迦葉波)족이며, 그리고 아난은 구담(瞿曇)족이다.

아난아, 만일 이 불의 성질이 화합 때문에 생긴다면, 저 사람이 손에 거울을 잡고 해에서 불을 피울 때, 이 불은 거울에서 나오겠느냐. 쑥에서 나오겠느냐. 해에서 오겠느냐.
아난아 만일 해에서 온다면, 해가 스스로 네 손안의 쑥을 태웠으니, 해가 온 곳의 수풀들은 마땅히 불에 타야 한다.
만일 거울에서 나온다면, 스스로 거울에서 나와 쑥을 태웠는데, 어째서 거울은 녹지 않았느냐. 거울을 잡은 네 손도 오히려 뜨거운 기운이 없는데, 어찌 거울이 녹겠느냐.

만일 쑥에서 생긴다면, 무엇 때문에 해와 거울과 빛을 빌려 서로 접촉해야만 불이 생기겠느냐.
너는 또 자세히 살펴보아라. 거울은 손에 잡혀 있고, 해는 하늘에서 오며, 쑥은 본래 땅에서 나는데, 불은 어느 곳으로부터 와서 여기를 지나가겠느냐. 해와 거울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불빛이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오히려 여래장 안에 성품이 불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불이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줄을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세상 사람이 한 곳에서 거울을 들고 불을 피우면 한 곳에 불이 생기고, 법계에서 두루 거울을 들고 불을 피우면 세상 가득 불이 일어나서 세상을 가득 채울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다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물의 성질은 일정하지 않아서 흐르고 그침이 한결같지 않느니라. 저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선인(仙人) 가비라(迦毗羅)와 선인 작가라(斫迦羅)와 발두마(鉢頭摩)와 하살다(訶薩多)와 같은 여러 뛰어난 환술사[幻師]들이 달의 정기[太陰精]를 받아서 환술약[幻藥]을 만들 때, 그들은 보름날 밤중[白月晝]에 구슬 소반[方諸]을 손에 들고 달 속의 물을 받는다. 이 물은 구슬 소반에서 나오겠느냐. 허공 가운데 저절로 있겠느냐. 달에서 나오겠느냐.

만일 달에서 나온다면, 오히려 먼 곳인데도 구슬 소반에서 물이 나올 수 있게 하였으니, 거쳐 온 숲과 나무들은 다 당연히 물을 토해서 흘려보내야 한다. 흐른다면 무엇 때문에 구슬 소반에서 물이 나오기를 기다리겠으며, 흐르지 않는다면 물이 달에서 흐르지 않음이 분명하다.
만일 구슬 소반에서 나온다면, 이 구슬 소반에서는 마땅히 항상 물이 나와야 할 텐데, 무엇 때문에 한밤중의 보름달을 기다려 물을 받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허공의 본질은 끝이 없으니, 물도 마땅히 끝없이 흘러야 한다. 그러면 인간에서 하늘까지 모두 함께 물 속에 잠길 텐데, 어찌 물과 육지와 허공을 따로 행할 수 있겠느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달은 하늘에서 떠오르고, 구슬 소반은 손에 잡혀 있고, 구슬 안의 물을 받는 소반[盤]은 그 사람이 펴놓은 것인데, 물은 어디로부터 와서 여기까지 흘러들었느냐. 달과 구슬은 서로 멀리 떨어져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물의 정기가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오히려 여래장 안에 성품이 물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물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한 곳에서 구슬을 잡으면 한 곳에서 물이 나오고, 법계에서 두루 구슬을 잡으면, 법계에 가득 물이 생길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다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바람의 성질은 자체가 없으니, 흔들리고 고요함이 한결같지 않다. 네가 항상 법의[衣]를 바로 고쳐 입고 대중의 모임에 들어갈 때마다 승가리 자락[僧伽梨角]이 흔들리면 그 흔들림이 옆 사람에게 닿아서 그 사람의 얼굴에 가벼운 바람이 스친다. 이 바람은 가사자락에서 나오겠느냐, 허공에서 일어나겠느냐. 그 사람의 얼굴에서 생기겠느냐.

이 바람이 만일 가사자락에서 나온다면, 너는 바로 바람을 입었으니, 그 옷은 펄럭이고 날리어 분명 너의 몸에서 떠나리라. 나는 지금 설법하면서 모임 가운데 법의를 드리웠으니, 너는 내 옷을 보아라. 바람이 어디에 있느냐. 당연히 내 옷 속에 바람을 감춰둔 자리가 있다고 하지는 않으리라.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네 옷이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째서 나부낌이 없느냐. 허공은 항상 머무는 성질이니, 바람도 마땅히 항상 생겨야 한다. 만일 바람이 없을 때면 허공도 당연히 없어져야 하는데, 없어진 바람은 볼 수 있겠으나, 없어진 허공은 어떤 모양이겠느냐. 만일 생멸이 있다면 허공이라 할 수 없고, 허공이라고 한다면 어찌 바람이 나오겠느냐.
만일 바람이 저절로 스친 상대의 얼굴에서 생겼다면, 상대의 얼굴에서 나왔으니, 마땅히 너를 스쳐야 한다. 너 자신이 옷을 고쳐 입었는데 어째서 거꾸로 상대를 스쳐간 것이냐.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옷을 고쳐 입은 것은 너이고, 얼굴은 저 사람에게 있으며, 허공은 고요하여 흔들려 흐르는 것과 상관이 없는데, 바람은 어디로부터 불어와서 여기를 흔드는 것이냐.
바람과 허공은 성질이 달라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바람의 성질이 온 곳 없이 저절로 있다고도 하지 못한다.
너는 전혀 여래장 안에 성품이 바람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바람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너 한 사람이 옷을 가볍게 펄럭이면 가벼운 바람이 일고 법계에서 두루 펄럭이면국토 가득 생겨서 세간에 두루 가득할 텐데,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성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허공의 성질은 형상이 없으므로 물체로 인하여 드러나느니라. 실라벌성 안에 강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찰제리[刹利]와 바라문(婆羅門)과 비사(毗舍)와 수타(首陀)와 전타라(旃陀羅)들이 살 집[安居]을 새로 세우려고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할 때, 흙이 한 자쯤 나오면 그 자리에 한 자의 허공이 생기고, 이렇게 흙이 한 길 나오면 중간에 다시 한 길의 허공이 생기는데, 허공의 얕고 깊음은 나오는 흙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느니라. 이 허공은 흙 때문에 나오겠느냐, 파냄 때문에 나오겠느냐, 원인 없이 저절로 생기겠느냐.

아난아, 만일 이 허공이 원인 없이 저절로 생긴다면, 흙을 파기 전에는 어찌하여 막혀서 오직 대지(大地)만 볼 뿐, 멀리 환하게 통하지 않았느냐.
만일 흙 때문에 나온다면, 흙이 나올 때는 마땅히 들어가는 허공을 보아야 하며, 만일 흙이 먼저 나오는데 들어가는 허공이 없다면, 어찌 허공이 흙 때문에 나온다고 하겠느냐. 만일 나오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마땅히 허공과 흙은 원래 다른 원인이 없어야 한다. 다르지 않다면 같은 것인데, 흙이 나올 때 어째서 허공이 나오지 않느냐.
만일 파냄 때문에 나온다면, 파는 자체로 허공만 나오고 당연히 흙은 나오지 않아야 하며, 파냄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면, 팔 때마다 저절로 흙만 나와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을 보는 것이냐.

너는 다시 조심하고 주의해서 자세히 관찰하여라. 파는 기구는 사람의 손에서 방향을 따라 운전(運轉)하고 흙은 땅을 따라 옮기는데, 이러한 허공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겠느냐. 파냄과 허공의 허(虛)와 실(實)은 서로 작용하지 않아서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허공이 온 곳 없이 저절로 나온다고도 하지 못한다.
만일 허공의 성질이 두루 원만하여 본래 동요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현재 눈앞의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함께 다섯 요소[五大]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너는 마음이 혼미하여 네 요소[四大]가 원래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바로 허공을 보아라. 나오겠느냐 들어가겠느냐,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않겠느냐.
너는 전혀 여래장 안에 성품이 깨달음인 진실한 공과 성품이 공인 진실한 깨달음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아난아, 한 우물이 공하면 허공이 한 우물만큼 생기듯 시방의 허공도 이와 같은데, 시방에 원만한 허공이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이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눈의 보는 작용[見覺; 眼根을 시작으로 六根을 다 칭함]에는 아는 작용이 없으니, 색(色)과 공(空)을 따라서 아는 작용이 생기느니라. 네가 지금 기타림(祇陀林)에 있어도 아침이면 밝고 저녁이면 어두워지며, 가령 밤중일지라도 보름이면 밝고 그믐이면 캄캄하다. 이러한 밝고 어두운 경계를 따라 보는 작용이 가려내고 있으니, 이 보는 작용은 밝고 어두운 모양과 넓은 허공과 더불어 동일체(一體)이겠느냐. 동일체가 아니겠느냐. 혹은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느냐. 혹은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겠느냐.

만일 이 보는 작용이 밝음과 어둠과 넓은 허공과 더불어 원래 일체(一體)라면, 밝음과 어둠의 두 체는 서로 없어져서, 어두울 때는 밝음이 없고 밝을 때는 어둠이 없으리라. 만일 어둠과 일체라면 밝을 때는 보는 작용이 없을 것이며, 밝음과 일체라면 어두울 때는 보는 작용이 멸하리라, 이렇게 멸한다면 어떻게 밝음을 보고 어둠을 보겠느냐. 만일 어둠과 밝음은 다르나 보는 작용에 생멸이 없다면, 일체가 어떻게 성립되겠느냐.

만일 이 보는 정기가 어둠과 밝음과 더불어 일체가 아니라면, 너는 밝음과 어둠과 허공을 떠나서 보는 작용의 근원(根元)을 가려내 보아라. 어떤 형상이 되겠느냐.밝음을 떠나고 어둠을 떠나고 허공을 떠나면, 이 보는 작용의 근원은 거북의 털이나 토끼의 뿔처럼 없을 것이며, 밝음과 어둠과 허공의 세 일과 모두 다르다니, 무엇으로 보는 작용을 세우겠느냐.
밝음과 어둠은 서로 등진 것인데, 어떻게 혹 동일하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밝음과 어둠과 허공의 셋을 떠나서는 보는 정기는 원래 없는데, 어떻게 다르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허공을 가려 나누고 보는 작용을 가려 나누려면 본래 경계선[邊畔]이 없는데, 어찌 동일하지 않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어둠을 보고 밝음을 보아도 성품은 변하여 옮기지 않는데, 어찌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하겠느냐.

너는 더욱 자세히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펴서 깊이 관찰하여라. 밝음은 태양을 좇고 어둠은 그믐밤을 따르고, 통함은 허공에 속하고 막힘은 대지로 돌아가는데, 보는 정기는 무엇을 근거로 나오겠느냐. 보는 작용은 감각이며 허공은 완고하여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보는 정기가 온 곳 없이 저절로 나온다고도 하지 못한다.
만일 보고 듣고 아는 작용의 성품이 두루 원만하여 본래 흔들리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끝이 없고 움직이지 않는 허공과 흔들리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함께 여섯 요소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네 성품이 망상에 깊이 잠겨서 너의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작용이 본래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을 보아라. 생기겠느냐, 멸하겠느냐.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겠느냐, 같지도 다르지도 않겠느냐.
너는 잠시도 여래장 안에 성품이 보는 작용인 깨달음의 밝음과 깨달음의 정기인 밝은 보는 작용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 가운데, 중생의 마음을 따라 각자의 아는 능력에 응하는 이치를 모르고 있느니라.

한 보는 근원[一見根]의 보는 작용이 법계에 두루 원만함과 같이, 듣는 작용[聽]과 맡는 작용[齅]과 맛보는 작용[嘗觸]과 닿는 작용[覺觸]과 인식작용[覺知]의 묘한 덕도 환하여 법계에 주변하고 시방 허공에 원만하니, 어찌 따로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아난아, 인식 자체[識性]는 근원이 없으니, 여섯 가지 감관[根]과 대상[塵]을 따라서 허망하게 나오느니라.너는 지금 이 법회의 성중(聖衆)을 두루 눈으로 빙 둘러 보아라. 그 눈이 두루 보는 작용은 단지 거울 속의 모습이 따로 분별하지 않는 것과 같을 뿐이다.
너는 그 가운데를 인식해서 차례로 표하여 ‘이 사람은 문수요, 이 사람은 부루나요, 이 사람은 목건련이요, 이 사람은 수보리요, 이 사람은 사리불이다’라고 가리켜 보아라. 이 인식이 밝게 아는 작용은 보는 작용에서 생기겠느냐. 모양에서 생기겠느냐. 허공에서 생기겠느냐. 까닭 없이 불쑥 나오겠느냐.

만일 네 인식 자체가 보는 작용 가운데서 생긴다면, 밝음과 어둠과 물체와 허공과 관계가 없으니, 이 네 가지가 분명히 없다면 원래 너의 보는 성품도 없으리라. 보는 성품도 오히려 없는데 어디에서 인식이 일어나겠느냐.
만일 네 인식 자체[識性]가 모양에서 생긴다면, 보는 작용에서 생기지 않았으니, 이미 밝음을 볼 수 없고 어둠도 볼 수 없느니라. 밝음과 어둠을 볼 수 없다면 곧 물체와 허공도 없으니 저 모양들도 오히려 없을 텐데, 인식은 어디에서 일어나겠느냐.
만일 허공에서 생긴다면, 모양도 아니고 보는 작용도 아니니, 보는 작용이 아니면 분간하지 못해서 스스로 밝음과 어둠과 물체와 허공을 알지 못할 것이며, 모양이 아니면 인연이 사라져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설자리가 없으리라. 이 모양도 아니고 보는 작용도 아닌 곳[二非]에 처한다면, 공이라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며, 있어도 물체와 같지 않으니, 너의 인식이 일어난들 무엇을 분별하고자 하겠느냐.

만일 까닭 없이 불쑥 나온다면, 어째서 대낮[日中]에는 밝은 달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너는 더욱 곰곰이 생각하여 세밀하게 살펴보아라. 보는 작용은 너의 눈동자에 맡기고 모양은 앞 경계에 미루고, 모양이 될 만한 것은 있는 것이 되고, 모양이 아닌 것은 없는 것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의 인연은 무엇을 근거로 나오는 것이냐.
인식은 움직이지만 보는 작용은 고요하여, 어울리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으며,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도 이와 같으니, 인식의 연이 나온 곳 없이 나온다고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이 인식하는 마음이 본래 온 곳이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분별[了別]하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작용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그 성품이 온 곳이 없으니, 저 허공과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겸하여 함께 일곱 요소라고 하며, 성품이 진실하고 원만하고 융통한 여래장으로서 생멸이 없는 자리이니라.

아난아, 너는 마음이거칠고 들떠서 보고 듣고 밝히고 아는 작용이 여래장(如來藏)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느니라. 너는 마땅히 이 여섯 곳의 인식하는 마음을 살펴보아라. 같겠느냐, 다르겠느냐. 공하겠느냐, 있겠느냐.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겠느냐, 공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겠느냐.
너는 원래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인식인 밝게 아는 작용과 깨달음의 밝음인 진실한 인식을 모르고 있느니라. 묘한 깨달음이 고요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해서 시방 허공을 머금고 토하는데, 어찌 따로 생기는 장소가 있겠느냐.
업(業)을 좇아서 출현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무지하여 인연과 자연의 본질로 잘못 알고 있느니라. 이것은 모두 이 인식하는 마음으로 분별하여 헤아리는 작용이니, 단지 말만 있을 뿐, 전혀 진실한 뜻이 없느니라.”

이때 아난과 모든 대중은 여래의 미묘한 가르침을 받고 몸과 마음이 텅 비어 걸림 없는 경지에 들었다. 모든 대중은 각각 스스로 마음이 시방에 두루 원만해져서 시방 허공을 보니, 마치 손바닥 안에 든 잎사귀를 보는 듯하였다. 일체 세상의 온갖 물상들이 모두 다 보리의 묘하게 밝은 원래의 마음과 일치하니, 마음이 정기가 두루 원만하여 시방을 두루 다 싸안았다. 이 경지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되돌아보니, 저 시방 허공 가운데 작은 티끌이 있는 듯 없는 듯 나부끼는 것과 같았으며, 맑고 넓은 바다에 흐르는 한 물거품이 온 곳 없이 일고 꺼지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스스로 분명하게 알고 본래 묘한 마음이 영원히 머물러 멸하지 않는 법을 얻게 되자,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합장하여 처음으로 얻은 법의 고마움을 여래 앞에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묘하고 고요한 총지로 부동하신 세존이시여
수능엄왕은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법입니다
억겁 동안 뒤바뀐 생각을 말끔히 씻어내시어
아승기겁 밟지 않고 법신을 얻게 하셨습니다.

저도 이제 거룩한 과위를 얻고 성불한 뒤에
다시 돌아와 한량없는 중생을 건지렵니다
이 깊은 마음으로 많은 부처님들을 받들어서
그 무거운 부처님의 은혜를 갚으려 하옵니다.

엎드려 세존께 청하오니 증명하여 주옵소서
굳은 서원으로 오탁악세에 먼저 들어가서
만일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못한다면
열반에 들지 않고 끝까지 교화하렵니다.

큰 용맹이시여 큰 힘이시여 큰 자비시여
더욱 깊이 살피시어 미세번뇌 끊게 하여
보다 일찍 깨달음의 정상에 오르게 하고
시방법계의 도량에서 교화토록 하옵소서
끝없이 넓은 허공 다하여 없어진 다 해도
금강처럼 견고한 마음 흔들리지 않으리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릉엄경』

이때 대중 속에 있던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옷을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덕(威德)이 뛰어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훌륭하게 설해 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저를 설법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추천하셨으나, 이제 여래의 미묘한 설법을 들으니, 마치 귀머거리가 백보(百步) 밖에서 모기소리를 듣는 듯하여 본래 볼 수도 없는데 어찌 더욱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비록 저에게 밝게 설하시어 미혹을 없애주셨으나, 지금도 아직 이 뜻이 완연하여 의혹이 없는 자리[究竟無疑惑地]를 자세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부류는 비록 깨달았다고 하나, 익혀 쌓인 번뇌[習漏]를 아직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이 법회 가운데 번뇌가 없는 경계에 오른 저희들도 비록 온갖 번뇌를 다 없앴다고 하나, 이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들으니, 오히려 의심과 후회만 더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상의 일체 6근과 6진과 5음(陰)과 12처(處)와 18계(界) 등이 다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의 온갖 유위상(有爲相)이 생겨서 차례로 옮기고 흐르며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입니까.
또 여래께서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고요히 상주(常住)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흙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겠으며, 또 물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불의 성질은 생기지 않을 텐데, 또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질이 허공에 함께 두루 원만하여 서로 빼앗아 쫓아내지 않는 이치를 밝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흙은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고 허공은 비어 통하는 성질인데 어떻게 두 성질이 함께 법계에 두루 가득 찰 수 있습니까.저는 이 뜻이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내리시어 저의 구름처럼 덮인 미혹을 거둬주옵소서.”
이 말을 마치자 대중과 함께 5체(體)를 땅에 던져서 존경을 다하여 더 없는 여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부루나(富樓那)와 법회 대중 가운데 번뇌를 다하고 배움을 초월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가 오늘 널리 이 회상의 대중을 위하여 승의제(勝義諦) 가운데 진승의(眞勝義)의 본질을 밝혀서, 이제 너희들 모임 중에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이공(二空)을 얻지 못한 이들과 보살승[上乘]으로 돌아선 아라한들이 모두 다 일승의 적멸한 도량[一乘寂滅場地]인 진실한 아란야(阿蘭若)의 바른 수행 처를 얻게 하리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부루나 등은 존경을 다하여 말없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富樓那)여,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 너는 항상 이 여래로부터 ‘성품의 깨달음은 묘하고 밝으며, 본래의 깨달음은 밝고 묘하다’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언제나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뜻을 들어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깨달음이다 밝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성품 자체의 밝은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깨달음이 밝지 않으니 밝혀야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밝지 않음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힐 대상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밝힐 대상[所明]이 없다면 밝힐 깨달음이 없다고 했는데, 밝힐 대상[所]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며,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음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또 깨달음의 고요하고 밝은 성품도 아니니라.
성품 자체의 깨달음은 본래 분명히 밝은 자리다. 그럼에도 너는 여기서 허망하게 밝혀야할 깨달음을 생각한 것이다. 깨달음은 밝힐 대상이 아님에도 밝힘으로 인하여 밝힐 대상[所]을 세우고, 밝힐 대상[所]이 이미 허망하게 세워지니, 너의 허망한 능력[妄能]이 생겨서, 같음도 다름도 없는 가운데 불길처럼 성하게 다른 것이 이뤄졌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 하여, 다른 것을 근거로 같은 것을 세워서, 같음과 다름을 환하게 밝히고, 이를 근거로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을 세웠느니라. 이와 같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서로 대립하여 수고로움이 생기고, 수고로움이 오래되어 티끌[塵]을 발하여 자체 모양이 혼탁해지니,이로 인하여 진로번뇌(塵勞煩惱)를 이끌어냈느니라.
일어나서는 세계가 되고, 고요해서는 허공이 되니, 허공은 같은 것이고, 세계는 다른 것이며, 저 같음과 다름이 없는 것이 실제의 인연으로 변화하는 법[眞有爲法]이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음과 허공의 캄캄한 어둠이 번갈아 바뀌며 흔들리기 때문에 풍륜(風輪) 있어서 세계를 붙드느니라.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기고 밝힘을 굳혀서 막힘을 이루니, 저 금보(金寶)는 밝힌 깨달음이 굳혀진 것이므로, 금륜(金輪)이 있어서 국토를 보전하느니라.
깨달음을 굳혀서 보배가 되고 밝힘이 흔들려 바람이 생기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火光]이 있어서 변화하는 성질이 되느니라.
보배의 밝음이 물기를 내고 불빛이 위에서 쪼여 삶으니 수륜(水輪) 있어서 시방경계를 둘러싸느니라.
불의 오름과 물의 내림이 번갈아 발하여 굳히니, 젖은 편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편은 육지와 섬이 되느니라. 이치가 그러기 때문에 저 큰 바다에서는 항상 불빛이 일어나고, 저 육지와 섬에서는 항상 강이 흐르느니라.
물의 세력이 불보다 약하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산 돌을 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이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흙의 세력이 물보다 약하면 빼어나서 풀과 나무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숲이 불에 타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함이 얽히고 발생해서 서로 번갈아 종자가 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끊임없이 상속(相續)하느니라.

또 부루나야, 밝힘을 굳힌 허망함[明妄]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힘이 허물이다. 대상의 허망[所妄]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진실한 밝은 이치가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작용은 소리를 떠나지 못하고 보는 작용은 물체를 벗어나지 못하여, 모양[色]과 냄새[香]와 촉감[觸] 등 여섯 허망한 경계를 이루느니라. 이로 인하여 보고 느끼고 맡고 아는 작용이 따로 열리어 같은 업끼리 서로 얽히기도 하고, 합하여 생기기도 하고, 떠나서 변화를 이루기도 하느니라.
보는 작용이 밝아서 색(色)이 환하게 나타나면, 밝은 경계를 환히 보면서 생각을 형성하여, 소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하면서, 애정을 흘려보내 종자를 이루고 생각을 거둬들여 태(胎)에 드느니라.
이렇게 서로 어울려 생길 때에 같은 업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어서 갈라람(羯囉藍)과 알포담(遏蒱曇)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나고 알로 나고 습기로 나고 변화로 나는 중생[胎卵濕化]은 그 적응할 곳을 따르는데, 알로 나는 중생은 오직 생각[想]만으로 태어나고,태로 나는 중생은 욕정(欲情)으로 존재하며, 습기로 나는 중생은 합해서 감응하고, 변화로 나는 중생은 떠나서 상응(相應)하느니라.
이렇게 번갈아 서로 변하고 바뀌면서, 업으로 받은 과보를 따라 날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생각과 애정이 함께 얽혀서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의 부모와 자손들이 서로 태어남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애정의 탐욕[欲貪]이 근본이니라.
애정을 탐내어 함께 몸을 불리면서 탐욕을 그치지 못하면, 온갖 세상의 알로 나고 변화하여 나고 습기로 나고 태로 나는 중생들이 힘의 강하고 약함을 따라서 번갈아 서로 잡아먹게 된다. 이런 일들은 살생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니, 이렇게 온갖 중생들[十生之類]이 죽고 또 죽고 나고 또 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서로 잡아먹으며 나쁜 업을 짓고 함께 태어나기를 미래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투도(偸盜)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너는 나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나는 너에게 진 빚을 갚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모습을 좋아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번뇌에 얽히는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살생(殺生)과 투도(偸盜)와 음욕(婬欲)의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과(業果)가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 뒤바뀐 상속(相續)은, 다 깨달음의 밝음[覺明; 性覺妙明, 本覺妙明]으로 명료하게 아는 성품[明了知性; 妄明]이 그 아는 작용으로 인하여 모양을 일으키니, 허망한 보는 작용으로 생긴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이 차례로 옮기고 흐르면서, 이 허망을 따라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이니라.”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이 묘각(妙覺)의 본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이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가운데, 까닭 없이[無狀]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이제 묘하고 공하여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산과 강과 대지와 인연변화[有爲]의 익혀 쌓인 번뇌[習漏]는 언제 또 생기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여 어떤 미혹한 사람[迷人]이 어느 한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헷갈렸다면,이 헷갈림은 헷갈림 때문에 있겠느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왔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렇게 미혹한 사람은 헷갈림 때문도 아니고,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헷갈림은 본래 근본이 없는데, 어찌 헷갈림 때문에 있겠으며, 깨달음에는 헷갈림이 생기지 않는데, 어찌 깨달음에서 나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바로 헷갈려 있을 때, 문득 깨달은 사람이 가리켜줘서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비록 헷갈렸다고 하나 이 마을에서 다시 헷갈리겠느냐.”

부루나가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시방 여래(十方如來)도 이와 마찬가지다. 미혹은 근본이 없고 성품이 철저히 공하여 옛날부터 본래 미혹한 일이 없느니라. 잠시 본래의 깨달음을 미혹한 듯하나 미혹을 깨달아서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에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또 사람이 눈병에 걸렸으면 허공에서 헛꽃을 보겠으나 눈병이 나으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과 같으니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 꽃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꽃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생각해보아라. 어리석겠느냐. 슬기롭겠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원래 꽃이 없는 허공에서 허망하게 생기고 사라짐을 보고, 꽃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고 본 자체가 이미 뒤바뀐 일인데, 여기에 다시 꽃이 나오도록 억지를 쓴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다. 어찌 이런 미친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거나 슬기롭다라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어째서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묘한 깨달음이 밝고 공한 자리에서 산과 강과 대지가 언제 다시 나오느냐고 물었느냐.
또 마치 금광(金鑛) 안에서 돌과 섞여 있는 정밀한 금이 한 번 순금이 되고 나면 다시 돌과 섞이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가’를 물었고, ‘물과 불의 성질이 어째서 서로 밀어내어 없애지 않는가’를 의심하였으며, 또 ‘허공과 모든 대지가 함께 법계에 가득 차려면 마땅히 서로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부루나여, 비유하면 허공의 체는 여러 모양이 아니면서 저 온갖 모양의 활동을 막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을 말하리라. 저 넓은 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흔들면 움직이고, 맑게 개면 깨끗하고, 기가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빛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다른 방면의 온갖 인연작용의 모양[諸有爲相]은 저들 자체에서 생기겠느냐. 아니면 허공 자체에 있겠느냐.

만일 저들 자체의 원인으로 생긴다면, 부루나여, 해가 비칠 때는 이미 이 해가 밝은 것이니, 시방세계가 한가지로 햇빛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 가운데 둥근 해를 보는 것이냐. 만일 허공 자체가 밝은 것이라면, 당연히 허공 제 스스로 비춰야 하는데, 어째서 한 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때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허공과 해와 다르지도 않느니라.
모양으로 관찰해도 원래 허망하여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그 서로 밀어내 빼앗지 않는 뜻을 따지겠느냐.
성품으로 관찰해도 원래 진실하여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다.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처음부터 물도 불도 아닌데, 어찌 또 서로 용납하지 않는 뜻을 묻겠느냐. 진실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네가 공으로 밝히면 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각각 그대로 나타나며, 만일 함께 밝히면 그대로 함께 나타나느니라.함께 나타남이란 무엇이겠느냐.

부루나여, 마치 어느 한 강물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경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 그림자를 보다가,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면, 강물의 해 그림자도 두 사람을 따라서 하나는 동쪽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이 처음부터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마땅히 ‘이 해는 하나인데 어째서 각기 따로 가는가. 각기 따로 간 해가 이미 둘인데 어째서 하나씩 나타나는가’라고 따지지 못하리라. 완연히 허망만 더할 뿐 증명할 근거가 없느니라.

부루나여, 너는 색(色)과 공(空)으로 여래장(如來藏)에서 서로 기울기도 하고 서로 빼앗기도 하니,여래장도 따라서 색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 가득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 바람은 흔들리고 허공은 고요하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우니, 중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깨달음을 등져서 경계[塵]와 합하기 때문에 티끌 번뇌[塵勞]를 일으키니, 세상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나는 묘한 밝음의 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 법으로 여래장과 합했으니, 여래장의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으로 원만하게 법계를 비출 뿐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의 경계가 한량없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한량없는 경계가 하나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작은데서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데서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법계에 두루 원만하기도 하고, 몸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싸안기도 하며, 한 털끝에서 부처님의 세계[寶王刹]를 나타내기도 하고,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기도 하느니라. 이렇게 티끌번뇌를 멸하여 깨달음과 합했기 때문에, 진여(眞如)의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일으키느니라.

여래장의 본래 미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고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아니며, 색도 아니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도 아니며,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도 아니고 이와 같이 내지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도 아니니라.
또 밝음[明]도 무명(無明)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내지 늙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니라.
또 고제(苦諦)도 아니고 집제(集諦)도 아니고 멸제(滅諦)도 아니고 도제(道諦)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얻음[得]도 아니니라.
또 보시[檀那]도 아니고 지계[尸羅]도 아니며, 인욕[毗梨耶]도 아니고 정진[羼提]도 아니며, 선정[禪那]도 아니고 지혜[般剌若]도 아니며, 바라밀다(波羅蜜多)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내지 달달아갈(怛闥阿竭; 如來)도 아니며, 아라하(阿羅訶; 應供)와 삼야삼보(三耶三菩; 正徧知)도 아니고, 대열반(大涅槃)도 아니며, 상덕[常]도 아니고 낙덕[樂]도 아니며, 아덕[我]도 아니고 정덕[淨]도 아니니라.
이렇게 세간도 출세간도 모두 아니므로, 여래장의 원래 밝고 묘한 마음은 그대로 마음이고 그대로 공이며, 그대로 흙이고 그대로 물이며, 그대로 바람이고 그대로 불이며, 그대로 눈이고 그대로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며, 그대로 색이고 그대로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이며, 그대로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이니라.
또 그대로 밝음[明]과 무명(無明)이고밝음과 무명이 다함이며,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늙음이고 그대로 죽음이며, 그대로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니라.
또 그대로 고제이고 그대로 집제이며, 그대로 멸제이고 그대로 도제이며, 그대로 지혜이고 그대로 얻음이니라.

또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계이며, 그대로 인욕이고 그대로 정진이며, 그대로 선정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바라밀다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달달아갈(怛闥訶竭)이며, 그대로 아라하(阿羅訶)와 삼야삼보(三耶三菩)이고 그대로 대열반이며, 그대로 상덕이고 그대로 낙덕이며, 그대로 아덕이고 그대로 정덕이니라.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일치함[卽]도 떠나고 일치하지 않음[非]도 떠나서 일치하면서도[是卽] 일치하지 않으니[非卽], 세간의 삼계[三有]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그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더없이 높은 보리를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겠느냐.

비유하면 거문고[琴]와 공후(箜篌)와 비파(琵琶)에 묘한 소리가 있을지라도, 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너와 중생도 마찬가지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은 저마다 원만하지만, 나는 잠시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실상해인(實相海印)이 광명을 발하고, 너희들은 잠깐 마음을 들기만 해도 먼저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그것은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도를 열심히 구하지 않고 소승만을 좋아하여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기 때문이다.”

부루나가 말했다.
“저도 여래와 더불어 보배로운 깨달음이 뚜렷이 밝아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둘이 없이 원만하지만, 저는 옛적부터 시작 없는 망상을 만나 오래도록 생사에서 윤회하다가, 이제 거룩한 법[聖乘; 阿羅漢果]을 얻었으나, 아직도 구경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온갖 망상을 다 원만하게 멸하시어, 홀로 미묘하고 영원한 진리에 드셨으니, 감히 여래께 묻겠습니다.
일체중생은 어떤 원인으로 망상이 있어서, 스스로 미묘한 밝음을 덮고 생사에 빠져 헤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을 없앴다고 하나 아직 남은 의혹을 다 없애지 못했으니, 나는 현재의 세상일들을 들어 네게 물으리라. 네가 어찌 듣지 못한 일이겠느냐.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홀연히 어느 새벽에거울로 얼굴을 비추고 거울 속의 머리에서 잘생긴 얼굴[眉目]을 좋아하다가, 자기 머리에서 얼굴과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고 성을 내어 꾸짖으며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너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느냐.”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은 그저 마음이 미쳤을 뿐, 더 이상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한 깨달음은 밝고 원만하여 본래 원만하게 밝고 미묘할 뿐인데, 여기에 이미 허망이라고 칭한들,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만일 원인 할 곳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온갖 망상이 연달아 서로 원인을 이루고 미혹으로 미혹을 쌓으면서 티끌처럼 많은 겁[塵劫]을 지냈으니, 이 여래가 밝힐지라도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느니라.
이렇게 미혹의 원인은 미혹 자체의 원인으로 있을 뿐이니, 미혹에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은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하려고 하겠느냐.
보리(菩提)를 깨달은 사람은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비록 꿈속의 일이 정교하게 밝을지라도, 무슨 인연이 있기에 꿈속의 물건을 취하고자 하겠느냐. 더욱이 또 원인이 없어서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겠느냐. 저 성안의 연야달다인들 무슨 인연이 있기에 스스로 머리를 겁내어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만 쉬어버리면 머리를 밖에서 얻지 않으리라.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은들 어찌 머리를 잃어버렸겠느냐.

부루나여, 허망한 성질이 이와 같은데 무엇을 근거로 있겠느냐. 네가 단지 세간(世間)과 업과(業果)와 중생(衆生)의 세 가지 상속(相續)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너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리라. 쉬고 나면 곧 보리의 훌륭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수고롭게 갈고 다듬고[肯綮] 닦아 증득하는 방법을 빌리겠느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안에 여의주(如意珠)가 매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헐벗은 채 걸식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비록 실제로는 가난할지라도 구슬을 잃은 적이 없으니,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구슬을 가리켜줘서 마음속의 소원을 성취하여 큰 부자가 된다면, 비로소 신비한 구슬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바로 이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방금 세존께서 ‘살생과 투도와 음욕 업의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고, 쉬고 나면 곧 보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인연의 이치가 명백히 밝혀졌는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을 가차 없이 버리시는 것입니까. 저는 인연으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이 어찌 홀로 나이 어린 저희들 유학성문(有學聲聞)들 뿐이겠습니까. 이 법회의 대목건련(大目犍連)과 사리불(舍利弗)과 수보리(須菩提)들도 노범지(老梵志)를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법(因緣法)을 듣고 발심하여 깨달아서 번뇌가 없는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기를 ‘보리는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사성(王舍城)의 구사리(拘舍梨)들이 설한 자연(自然)이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이겠습니까.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의 답답한 심정을 시원하게 열어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안의 연야달다가 미친 증세의 인연을 없애버린다면, 미치지 않는 성품은 자연히 나올 것이며, 인연이다 자연이다라는 이치도 여기서 끝나게 되리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저절로[自] 그런 것[然]이어서, 그런 것이 저절로 아님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머리를 겁내고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자연의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째서 자연의 머리는 인연 때문에 잃지 않았느냐. 본래의 머리를 잃지 않고 미친 두려움만 허망하게 나왔다면, 잠시도 변하여 바뀐 일이 없는데, 어찌 인연을 빌리겠느냐.
미친 증세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부터 미치고 두려운 증세가 있어야 할 텐데, 미치기 전에는 미친 증세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느냐.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본래의 머리를 깨닫고 미쳐서 달아난 까닭을 안다면, 인연이나 자연이라는 주장은 다 쓸모없는 논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곧 보리의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만일 보리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생멸일 뿐이다.
생멸이 모두 사라져서 공덕작용이 없는 도에만일 자연이 있다고 하면, 이 경우에도 자연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밝히는 격이니, 이것 역시 생멸이니라.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세상에서 온갖 모양을 뒤섞어 일체(一體)를 만들어서 화합성질이라고 이름하거나, 화합하지 않는 것을 본연의 성질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으리라.
본연이다 본연이 아니다 화합이다 화합이 아니다라고 하는 화합과 본연을 모두 떠나고, 떠났다[離] 떠나지 않았다[合]를 모두 벗어나야만[俱非] 이 구절을 비로소 쓸모없는 논리를 떠난 법이라고 하리라.

너는 아직도 보리열반(菩提涅槃)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겁을 지내 부지런히 힘써 닦은 정도로 증득할 단계가 아니다. 비록 또 시방 여래께서 설하신 12부경(部經)의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이 기억할지라도, 단지 쓸모없는 논리[戱論]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을 담론할 때 명료하게 결정함으로써 사람들이 너를 들은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렇게 겁을 쌓아 듣는 지식을 많이 닦아 익히고도, 마등가(摩登伽)의 난(難)을 면할 능력이 없다가, 너는 어째서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 마등가의 불꽃같은 음욕을 단번에 끄고 아나함과[阿那含]를 성취하여, 나의 법 가운데 정진의 숲(精進林)을 이루고 애욕의 강물을 말려서 너를 해탈케 한 것이냐.

그러므로 아난아, 네기 비록 겁을 지내며 여래의 묘하게 장엄한 비밀 법[祕密妙嚴]을 기억할지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아서 세상의 미움과 사랑의 두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못하리라.
마등가는 지난 세상에 음녀(婬女)였으나, 신비한 주문의 힘으로 그 애욕을 소멸하여, 지금은 법회 가운데 성비구니(性比丘尼)란 이름으로, 라후라(羅睺羅)의 어머니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함께 과거 세상의 원인을 깨달았느니라. 여기에 이들은 지내온 세상을 애정의 탐욕 때문에 괴롭게 살아왔음을 알고, 일념으로 번뇌 없는 선행[無漏善]을 닦았기 때문에, 얽힘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수기를 받기도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경계에 멈춰 있는 것이냐.

아난은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니, 의혹이 사라지고 마음에 실상(實相)을 깨달아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얻고감격하여 다시 슬피 울며, 부처님의 발까지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길게 끓어 앉아서 두 손 모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더없이 대비(大悲)하시고 청정하신 부처님[寶王]께서는 저의 마음을 잘 깨우쳐주셨으며, 이러한 가지가지 인연과 방편으로 어둠에 잠긴 이들을 타이르고 이끄시어 고해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비록 이러한 설법을 듣고 여래장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여래의 시방 국토에 청정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妙覺王刹]를 품어 기르는 줄을 알았으나, 여래께서는 저에게 또 ‘많이 들어 안 지식은 공덕이 없으니, 실제로 닦는 것보다 못하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저는 지금 마치 집 없는 떠돌이[旅泊之人]가 홀연히 천자로부터 화려한 집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큰집을 얻었을지라도 들어가는 문을 몰라 찾고자 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대비(大悲)를 버리지 마시고, 이 법회의 어둡고 무지한 저희들이 소승을 버리고, 여래께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향하여 본래 발심하신 길을 얻게 하시고, 또 배우는 단계의 행자들이 옛날부터 반연(攀緣)해온 경계를 무엇으로 다스리고 굴복시켜야만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 몸[五體]을 땅에 던져 법회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이 법회 가운데 연각과 성문으로서 보리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미래에 보리의 마음을 낼 말법(末法) 중생들에게도 더없이 높은 법의 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서 여래의 묘한 삼마제(三摩提)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먼저 깨달음을 일으키는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을 밝혀야 한다.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첫째 뜻은 너희들이 만일 성문을 버리고 보살 법[菩薩乘]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수행자리에서 일으킨 마음[因地發心]이 결과자리의 깨달음[果地覺]과 같은지 다른지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이니라.아난아, 만일 수행자리(因地]에서 생멸심(生滅心)을 가지고 첫 수행의 원인[本修因]을 정하여 생멸을 떠난 불법[佛乘]을 구한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뜻에서 너는 온갖 물질로 이뤄진 세상을 밝게 비춰보아라. 조작이 가능한 법은 모두 변하여 사라지느니라.

아난아, 너는 세상의 조작이 가능한 법을 보아라, 무엇인들 무너지지 않겠느냐. 그러나 끝내 허공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조작이 가능한 법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져 없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몸 안에 굳은 형태는 흙의 요소이고 젖는 성질은 물의 요소이며, 따듯한 감촉은 불의 요소이고, 흔들리는 성질은 바람의 요소이니, 이 네 가지 요소가 얽혀 짜임에 따라, 너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작용으로 변한 상태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를 다섯 겹쳐 쌓임의 혼탁이라고 하느니라.

혼탁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맑은 물은 본래 청결하고, 저 먼지와 흙과 회 가루의 종류는 본질이 막히고 걸림으로, 두 체는 본질 그대로[法爾] 서로 따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흙을 집어서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막히는 성질을 잃고 물은 청결을 잃어서, 모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를 혼탁이라고 하며, 너의 혼탁의 다섯 겹쳐 쌓임도 마찬가지니라.

아난아, 너는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한 허공을 보아라. 허공과 보는 작용은 구분되지 않으리라. 허공은 있으나 실체[體]가 없고 보는 작용은 있으나 감각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妄]을 이뤘으니, 이것을 첫 번째 겹쳐 쌓임의 겁혼탁(劫濁)이라고 한다.
너의 몸은 현재 네 가지 요소를 뭉쳐서 형체[體]가 되었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막아서 걸려 막히게 하며,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을 돌려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두 번째 겹쳐 쌓임의 견탁(見濁)이라고 한다.

또 네가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식별하고 외우고 익힐 때, 성품은 알고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모양은 여섯 경계[六塵]를 나타내고 있으나, 경계를 떠나면 모양이 없고, 지각[覺]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세 번째 겹쳐 쌓임의 번뇌탁(煩惱濁)이라고 한다.
또 너는 아침저녁으로 생기고 멸함이 멈추지 않아서, 알고 보는 작용은언제나 세상에 머물고자 하고, 업은 운행하여 항상 국토를 옮기려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네 번째 겹쳐 쌓임의 중생탁(衆生濁)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들의 보고 듣는 작용은 원래 다른 성질이 없으나, 여러 경계[衆塵; 六塵]가 따로 떨어져 까닭 없이 다른 것이 생기니, 성품 가운데서는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서는 서로 등져서,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은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다섯 번째 겹쳐 쌓임의 명탁(命濁)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네가 이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깊이 계합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먼저 생사의 근본을 가려내고, 생멸을 떠난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을 의지해서 성취해야 한다. 고요한 자리로 그 허망한 생멸[滅生]을 돌려서 누르고, 원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밝은 깨달음의 생멸이 없는 성품을 얻어 수행자리의 마음[因地心]으로 정한 뒤에, 결과자리의 수증(修證)법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마치 혼탁한 물을 흔들리지 않는 그릇에 담아서 깨끗이 맑히는 것과 같다.
오래도록 가만히 두어 움직이지 않고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아 맑은 물이 뚜렷이 나타난 상태를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처음 누른 경계라고 하며, 탁한 찌꺼기마저 제거하여 순수하게 맑은 물만 남은 상태를 영원히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끊은 경계라고 한다.
이렇게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여, 일체의 변화가 나타나서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모두 다 열반의 청정한 묘한 덕과 계합하느니라.

둘째 뜻은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내어 보살법[菩薩乘]에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을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서 ‘이것이 시작 없는 겁에 업을 일으켜서[發業; 發業無明] 태어남을 북돋고 있으니[潤生; 潤生無明] 무엇이 짓고 무엇이 받는가’라고 관찰하는 일이다.
아난아, 네가 보리를 닦으면서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허망한 감관과 경계[根塵]가 어느 곳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뒤바뀐 곳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번뇌의 근본을 항복시켜서 여래의 자리를 취하겠느냐.

아난아, 너는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살펴보아라. 맺힌 곳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푸는 방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너에게 무너뜨림을 당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맺히거나 푸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바로 네 앞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여섯이 도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자기 집안의 보배를 겁탈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시작 없는 겁 동안 중생세계에 얽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니라.

아난아, 어째서 중생세계(世界)라고 하겠느냐. 세(世)는 옮겨 흐른다는 뜻이며, 계(界)는 방위라는 말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동쪽과 서쪽과 남쪽과 북쪽과 동남쪽과 서남쪽과 동북쪽과 서북쪽과 위아래는 계(界)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세(世)이다. 방위는 열이고 흐름은 셋이니, 일체중생이 허망을 짜서 서로 이뤄내고 몸 안에서 바뀌고 옮기면서 세와 계를 서로 밟는 것이니라.
이 계(界)의 성질이 비록 열 곳이라 하나, 일정한 방위(方位)가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는 단지 동서남북만 지목할 뿐이다. 위와 아래는 자리가 없고, 사이[中]는 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四方)의 수는 분명하여 세(世)와 서로 밟아서, 세 때가 사방으로 사방이 세 때로 완연히 구르니 열 둘이니라. 이렇게 흘러 변함을 세 차례 포개면, 하나가 열이 되고 백이 천으로 불어난다. 처음과 끝을 다 포함하면 여섯 감관 안에는 각각 공덕이 천 이백이 있느니라.

아난아, 너는 또 이 가운데 자세히 헤아려 공덕이 많고 적음[優劣]을 정해 보아라.
눈이 보는 것은 뒤가 어둡고 앞이 밝은데, 앞쪽은 전체가 밝으나 뒤편은 전체가 어둡다. 왼쪽과 오른쪽의 옆으로 보는 것이 세 몫 중에 두 몫이다. 다 합해서 논한다면 짓는 공덕이 완전하지 못하여, 세 몫의 공덕에서 한 몫의 공덕이 없으니, 마땅히 눈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귀는 두루 다 들어서 시방 어디에나 빠짐이 없다. 소리가 움직일 때는 멀고 가까움이 있는 듯하나, 조용할 때는 한계가 없으니, 마땅히 귀의 감관은 천 이백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통해서 작용하는데, 내쉬고 들이쉬는 작용만 있고, 중간의 어울림은 빠져 공덕이 없느니라. 코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코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혀로는 모든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다 설하여 밝힐 수 있음으로, 말은 한계[方分]가 있을지라도, 끝없는 이치를 다해내니, 마땅히 혀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몸은 닿음[觸]을 느껴서 거슬리거나 따르는 경계[違順]를 아는데, 합할 때는 느낄 수 있으나 떼었을 때는 알지 못하니, 떼었을 때는 하나이고 합했을 때는 한 쌍이다. 몸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몸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는 묵묵히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일체세간과 출세간 법을 받아들여서, 성인과 범부를 다 포용하여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땅히 뜻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난아, 네가 지금 생사애욕의 흐름[生死欲流]을 거슬러 흐르는 근원을 끝까지 다 돌이켜서, 생멸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로 수용(受用)하는 감관에서, 어느 감관과 합해야 하는지 어느 감관을 떠나야 하는지, 어느 감관이 깊은지 어는 감관이 얕은지, 어느 감관이 원통(圓通)한지, 어느 감관이 원통하지 않은지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여기에서 원통한 감관을 깨닫고 저 시작 없는 옛날부터 망상으로 짜인 업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통한 감관을 따를 수 있다면, 원통하지 못한 감관으로 닦은 날과 겁[日劫]보다 그 공덕이 배가되리라.
내가 지금 여섯 감관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밝은 본래공덕의 수량을 이와 같이 자세히 밝혔으니, 너는 잘 생각하여 들어가기에 알맞은 감관을 가려보아라. 나는 마땅히 밝혀서 너를 더욱 잘 닦아 나갈 수 있게 하리라.
시방 여래께서는 열여덟의 경계[十八界]를 낱낱이 수행하여 다 더없이 높은 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셨는데, 그 중간에 전혀 우열(優劣)이 없었느니라. 단지 너는 근기가 낮아서 그 가운데 자재한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선양하여 너에게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니, 한 문으로 들어가서 헛되지 않으면, 저 여섯 감각기관은 일시에 청정하리라.”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흐름을 거슬러 깊이 한 문에 들어가야만, 여섯 감관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으니, 3계(界)의 중생세간이 견도(見道)의 자리에서 끊어야할 번뇌[惑]는 멸했으나, 오히려 아직 여섯 감관 가운데[根中] 쌓아온 시작 없는 겁의 허망한 습기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저 습기도 반드시 수도(修道)의 자리에서 끊어야 하는데,더욱이 어찌 이 가운데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여러 미세한 종류의 수량[分齊頭數]이겠느냐.

이제 너는 또 현재의 여섯 감관이 하나인지 여섯인지를 살펴보아라. 만일 하나라고 한다면, 귀는 어째서 못 보고, 눈은 어째서 듣지 못하며, 머리는 어째서 밟지 못하고, 발은 어째서 말하지 못하느냐.
“만일 여섯 감관으로 결정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법회에서 너에게 미묘한 법문을 선양하고 있는데, 너의 여섯 감관 가운데 어느 감관이 와서 받아들이는 것이냐.”

아난이 말했다.
“저는 귀로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제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을 열어 뜻을 묻고 몸을 일으켜 공손히 받드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면 마침내 여섯이라야 하고, 여섯이 아니라면 마침내 하나라야 하니, 결국 너의 감관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감관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 없는 겁부터 뒤바뀌어 잠기고 무딘 까닭에 원만하게 고요한 자리에서 하나다 여섯이다라는 뜻이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須陀洹)이 되어, 여섯 대상[六; 六塵]을 소멸하였으나, 아직은 하나를 없애지 못했으니, 마치 넓은 허공에 여러 가지 그릇을 섞어놓고, 그릇 모양의 다름을 따라 다른 허공이라고 하다가,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서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저 한없는 허공이 어떻게 너를 위해서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더욱이 어찌 또 하나라 하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너의 분별하여 아는 여섯 가지 수용감관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밝음과 어둠 등 두 가지가 서로 형성되어 나타남[相形]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보는 정기가 색(色)을 반영하여 색과 맺어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 勝義根]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눈의 체[眼體]라고 한다. 여기에 포도 알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 浮塵根 또는 扶塵根]이 제멋대로 흘러서 색을 좇아 달리느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침[相擊]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듣는 정기가 소리[聲]를 반영해서 소리를 말아들여[卷]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귀의 체[耳體]라고 한다. 여기에 둥글게 말린 새 잎사귀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이 제멋대로 흘러서 소리를 좇아 달리느니라.

통함과 막힘 등 두 가지가 서로 열려 드러남[相發]에 따라,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맡는 정기가 냄새[香]를 반영해서 냄새를 받아들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코의 체[鼻體]라고 한다. 여기에 드리운 쌍 손톱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냄새를 좇아 달리느니라.
담담한 맛[恬]과 여러 가지 맛[變] 등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림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맛보는 정기가 맛을 반영해서 맛과 짜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혀의 체[舌體]라고 한다. 여기에 활 모양의 초승달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맛을 좇아 달리느니라.

뗌과 닿음 등 두 가지가 서로 비빔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촉각[覺]을 일으키고, 촉각의 정기[覺精]가 촉감을 반영하여 촉감을 뭉쳐서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몸의 체[身體]라고 한다. 여기에 허리가 잘록한 북의 이마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촉감을 좇아 달리느니라.
생겨남과 멸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상속(相續)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인식작용을 일으키고, 인식의 정기가 법을 반영하여 법을 끌어당겨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뜻의 생각[意思]이라고 한다. 여기에 깊고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법을 좇아 달리느니라.

아난아, 이러한 여섯 감관이 저 깨달음이 본래 밝은데서 밝은 것으로 밝히려는 깨달음을 두었기 때문에, 저 정밀한 밝음을 잃고 허망한데 엉겨 붙어 빛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그러기 때문에 너는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보는 자체가 없고, 움직임을 떠나고 조용함을 떠나면 원래 듣는 성질이 없으며, 통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면 냄새 맡는 성질이 생기지 않고, 여러 가지 맛이 아니고 담담한 맛이 아니면 맛보는 성질이 나오지 않으며, 떼지도 않고 대지도 않으면 촉감이 본래 없으니, 멸함이 없고 생김이 없으면 분별작용이 어디에 의지하겠느냐.
너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과 닿음과 뗌과 담담한 맛과 여러 다른 맛과 생겨남과 사라짐과 어둠과 밝음 등 이러한 열두 가지 인연변화의 모양[有爲相]에 매어 구르지 않고, 어느 한 감관을 뽑아 엉겨 붙은 자리를 벗겨서 안으로 굴복시키고, 굴복시켜 원래의 진리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라. 이렇게 비치는 성품이 환하게 밝아져야만, 나머지 다섯 엉겨 붙은 자리도 뽑힌 한 감관을 따라[應拔] 원만하게 벗겨지느니라. 이것은 앞 경계를 따라 일으킨 지견(知見)이 아니므로, 밝음은 감관을 따르지 않고,감관에 맡겨 밝음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여섯 감관이 서로 서로 융통하여 작용하게 되느니라.

아난아, 네가 알다시피 이 법회 가운데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이 없어도 보고, 발난타용(跋難陀龍)은 귀가 없어도 들으며, 긍가신녀(殑伽神女)는 코가 아닌 것으로 냄새를 맡고, 교범발제(驕梵鉢提)는 혀와 다른 것으로 맛을 알며, 또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이 없어도 촉감이 있는데, 여래가 광명 가운데 비춰서 잠깐 나타나게 하였을 뿐, 이미 바람의 성질이니, 그 몸은 원래 없느니라.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으로 고요한 경지를 얻은 성문들 가운데 이 법회의 마하가섭(摩訶迦葉)과 같은 경우는, 뜻 감관[意根]을 멸한 지 오래 되었으나, 마음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도 뚜렷이 밝혀서 분별하느니라.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관을 뚜렷이 뽑아버린다면, 안으로 밝게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뜬 경계[浮塵]와 물질 세간의 온갖 변화의 모양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생각을 따라 더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화하리라.
아난아, 세상 사람이 보는 작용을 눈에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서 어두운 모양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도 서로 캄캄하지만[相類], 저 사람이 손으로 몸 둘레를 더듬으면,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머리와 발을 단번에 가려내서 밝을 때와 한가지로 깨달아 아느니라. 인연경계를 보는 것이 밝음 때문이라 하여 어두울 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밝지 않아도 스스로 밝게 아는 작용이 생긴다면, 온갖 어두운 모양이 그 아는 작용을 영원히 어둡게 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감관과 경계가 이미 소멸해버린다면, 어찌 깨달음의 밝음이 원만한 미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리의 깨닫는 마음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과자리의 명목(名目)과 상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果位) 가운데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진여(眞如)와 불성(佛性)과 암마라식(菴摩羅識)과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일곱 가지 이름은, 명칭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청정하고 원만하여 자체의 성품이 견고하니, 금강왕(金剛王)과 같이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보고 듣는 작용이 어둠과 밝음과 움직임과 고요함과 통함과 막힘을 떠나서는 끝내 자체가 없다고 하신다면, ‘생각하는 마음이 앞 경계를 떠나서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어찌하여 끝내 단절되어 사라질 경계[畢竟斷滅]를 가지고 수행자리의 원인[修因]을 삼아서 여래의 일곱 가지 영원불변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밝음과 어둠을 떠나서는 보는 작용이 끝내 공하다면, 마치 앞 경계가 없을 때는 생각 자체의 성품도 멸한다는 이치와 같으니, 앞뒤로 반복하여 자세히 추궁할지라도 본래 제 마음 자체도 제 마음의 소재도 없을 텐데, 무엇으로 원인을 세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여래께서 먼저 설하신 ‘고요하고 정밀하고 원만하고 영원하다’는 것도 진실한 말과 어긋나서 결국 쓸모없는 논리가 되어버릴 텐데, 어찌 여래를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한갓 뒤바뀐 원인만 알 뿐, 눈앞의 뒤바뀐 실제를 참답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오히려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못할까 염려되어 나는 이제 세속의 일들을 예로 들어[試將塵俗] 너의 의심을 없애 주리라.”

즉시 여래께서는 라후라(羅睺羅)에게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게 하시고 아난에 물으셨다.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가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종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도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그때 라후라는 또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었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이제 들리느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들린다 하고 어떤 상태를 들리지 않는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들린다 하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도록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조금 지나서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에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다.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경우에 소리가 난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하며,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어째서 스스로 말을 교란(矯亂)하느냐.”

대중과 아난은 함께 부처님께 물었다.
“저희들이 지금 어째서 교란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들린다 하고, 또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예, 들립니다. 소리가 납니다’라는 대답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이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없으면 너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만일 참으로 영 듣지 못한다면, 듣는 성품이 이미 사라져서 마른 나무와 같을 텐데, 종을 다시 쳤을 때 소리가 나는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나는 줄 알고 없어진 줄 아는 작용은 소리의 경계가 스스로 없기도 하고 나기도 할 뿐인데, 저 듣는 성품이 어떻게 네게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겠느냐. 또 참으로 듣는 작용이 아주 없다면, 무엇이 없어지는 줄을 알겠느냐.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듣는 가운데 스스로 생기고 사라질지언정, 네가 소리의 생겨남과 소리의 사라짐을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뒤바뀌었으니 소리를 헷갈려 듣는 작용으로 여기고 영원[常]을 단멸[斷]로 혼미한들 어찌 괴이한 일이겠느냐 만은, 끝내 마땅히 온갖 움직이고 조용함의 닫히고 막힘과 열리고 통함을 떠나서는 듣는 작용은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잠이 무거운 사람이 평상[床枕]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 집안 사람이 그가 자는 사이에 비단의 다듬이질을 하면서 방아를 찌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 절구질과 다듬이질 소리를 다른 물건의 소리로 여기고 북 소리든지 종소리로 들으면서, 꿈꾸는 동안에 스스로 ‘웬 종이 나무와 돌 소리를 내는 것일까’하고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절구소리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꿈속에서 이 방아 찧는 소리를 북 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난아, 이 사람이 꿈속에서 어찌고요하고 흔들리고 열리고 닫히고 통하고 막히는 경계를 기억하겠느냐. 그 형체는 비록 잠들었을지라도,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느니라.
비록 네 형체가 스러지고 그 목숨[命光]이 옮겨서 사라진들, 이 성품이 어떻게 네게서 소멸되겠느냐.
모든 중생이 시작 없는 때부터 온갖 물체[色]와 소리를 따라 생각을 좇아서 흘러 다니는 것은, 일찍이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함을 깨닫지 못하여 영원한 진리를 따르지 않고 생기고 멸하는 작용을 좇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태어날 때마다 번뇌에 물들어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만일 생멸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지킨다면, 영원한 광명이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대상[塵]과 감관[根]과 인식하는 마음[識心]은 즉시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모양은 티끌 번뇌이고, 인식하는 정은 때 번뇌이니라. 티끌 번뇌와 때 번뇌[二]를 함께 멀리 벗어나면 너의 법눈[法眼]은 바로 맑고 밝아질 텐데, 어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비록 둘째 뜻의 문을 말씀해 주셨으나, 이제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생각해 보니, 만일 매듭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끝내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와 이 법회의 유학성문(有學聲聞)들도 이와 마찬가지며, 시작 없는 옛날부터 무명과 더불어 함께 생하고 함께 멸해왔으니, 비록 이렇게 많이 듣고 아는 선근(善根)으로 출가했다고 하나, 마치 하루거리 학질병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부디 큰사랑으로 생사에 빠져 허덕이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의 몸과 마음이 어째서 번뇌에 얽혔는지, 무엇으로 풀어야 하는지를 가리켜주시고, 미래의 괴로운 중생들도 윤회를 벗어나서 삼계[三有]에 떨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대중과 함께 온몸[五體]을 땅에 엎드려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면서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의 더없이 높은 가르침을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아난과 법회의 유학성문들을 가엾게 여기시는 한편, 미래의 중생들을 위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원인으로서 장래의 안목을 삼으시려고, 염부단(閻浮檀)의 자금색(紫金色) 광명이 빛나는 손으로 아난의 이마를 만지셨다.
이때 시방의 드넓은 부처님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면서, 그 세계에 계시는 티끌처럼 많은 여래께서 각각 이마에서 보배광명을 놓으시자, 그 광명이 동시에 저 세계에서 기타림(祇陀林)으로 와서 여래의 이마를 비추시니, 법회의 대중은 이전에 본적이 없는 광경을 보았다.
여기서 아난과 대중은 다 함께 티끌처럼 많은 시방 여래께서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난에게 일러주시는 말씀을 들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다. 아난이여,네가 구생무명(俱生無明)이 어떻게 너를 생사에 윤회하도록 뿌리 맺혔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오직 너의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네가 또 더없이 높은 보리가 어떻게 너에게 빨리 안락한 해탈의 고요하고 미묘하고 영원한 경지를 깨닫게 하는지를 알고자 할지라도, 역시 너의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아난이 이러한 법문을 들었으나 마음은 오히려 분명하지 않아서,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아뢰었다.
“‘나를 생사에 윤회케 하거나 안락하고 미묘하고 영원한 경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다 같이 여섯 감관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감관[根]과 대상[塵]은 근원이 같고, 얽힘과 해탈은 둘이 아니며, 식(識)의 성품은 허망하여 허공 꽃과 같으니라.
아난아, 경계[塵]로 인하여 아는 작용을 일으키고, 감관을 따라 모양이 있으며, 모양과 보는 작용은 제 성품이 없으니 여러 줄기로 기댄 갈대[交蘆]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지금 지견(知見)으로 지견을 세우면, 바로 무명의 근본이며, 지견에서 지견을 떠나면, 이것이 곧 번뇌 없는 열반의 진실하고 청정한 경지이니라. 그러니 이 가운데 어찌 다른 것을 용납하겠느냐.”

이때 세존께서는 거듭 이 뜻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게(偈)를 설하셨다.

참 성품은 유위법이 모두 다 공했으나
인연 따라 생기기에 환상처럼 변화한다.
무위법은 생멸인연 일체 다 떠났으니
실속 없이 허망함은 허공 꽃과 다름없다.

허망으로 말하면서 온갖 진실 밝혀봐도
허망이나 진실이나 모두 다 허망하다.
참이나 참 아님을 아예 떠난 자리이니
보거나 보이는 곳이 어디에 있겠느냐.

속속들이 텅텅 비어 실제성품 없음으로
이를 비겨 줄기 기댄 빈 갈대와 같다한다.
맺힌 곳과 푸는 일은 그 자리가 똑같으니
성인이나 범부거나 두 갈래길 따로 없다.

줄기 기댄 갈대 속을 깊이깊이 살펴보라.
공한 법과 존재 법을 둘 다 함께 떠났으니
미혹하여 모른다면 그게 바로 무명이요
밝혀내어 깨달으면 그게 바로 해탈이다.

맺힌 원인 하나 하나 차례대로 풀고 나면
여섯 자리 다 풀리어 하나까지 없어지니
여섯 감관 두루 살펴 원통감관 골라내면
성인반열 들어서서 바른 깨침 이루리라.

미세하기 그지없어 알기 힘든 아타나식
쌓인 습기 흘러내려 폭포수를 이뤘으니
진실인지 참 아닌지 미혹할까 염려하여
지금까지 조심하여 설명하지 않았노라.

자기 본래 마음에서 그 마음을 취한다면
환상 아닌 바른 법이 환상 법을 이루지만
취함 없이 그냥 두면 비환 법도 없어지고
환상 아닌 바른 법도 생겨나지 않을 텐데

실체 없는 환상 법이 어느 곳에 서겠느냐.
이를 일러 청정하고 미묘한 연꽃이며
견고한 금강의 보배로운 깨달음이며
환술처럼 자유로운 삼마제라 이름하니

손 퉁기는 잠깐 사이 무학자리 넘으리라
무엇과도 비교 못할 아비달마 바른 법은
티끌처럼 한량없는 시방세계 여래께서
한 길 따라 수행하여 열반하신 문이니라.

이때 아난과 대중은 여래께서 더 없는 자비로운 가르침을 들으니, 기야(祇夜)와 가타(伽陀)가 잘 어울려 정교하게 빛나는 묘한 이치가 맑게 사무처서, 모두들 마음과 눈이 환하게 열리어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문을 감탄하였다.
아난은 머리를 조아려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금 부처님께서 차별 없는 대비(無遮大悲)로 설하신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한 진실구절[眞實句]을 들었으나, 제 마음은 아직도 여섯이 풀려서 하나까지 없어지려면 그 매듭을 어떤 순서로 풀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큰사랑을 내리시어 이 법회의 대중과 미래중생을 불쌍하게 여기시고, 다시 한번 법문[法音]을 베푸셔서 깊게 잠긴 번뇌를 씻어주옵소서.”

그러자 여래께서는 사자좌(師子座)에서 열반승(涅槃僧; 內服)을 바르시고 승가리(僧伽梨)를 거둬 여미시며 손으로 7보(寶)책상을 끌어당기시더니, 겁바라천(劫波羅天)이 바친 꽃수건[華巾]을 잡으시고, 대중 앞에 매듭 하나를 맺고 아난에게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이냐.”

아난과 대중은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것은 매듭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래께서 꽃수건[疊華巾]에 또 한 매듭을 맺으시고 거듭 아난에게 물으셨다.
“이것이 무엇이냐.”

아난과 대중은 또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것도 매듭이라고 합니다.”
여래께서는 이렇게 꽃 수건에 차례로 맺어 모두 여섯 매듭을 맺으시면서 매듭을 하나하나 맺을 때마다 맺힌 매듭을 손에 들고 아난에게 ‘이것은 무엇이냐’고 물으셨으며, 아난과 대중도 그 때마다 부처님께 차례로 ‘그것은 매듭이라 합니다’라고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수건을 맺었을 때 너는 매듭이라고 하였다. 이 꽃 수건은 본래 하나뿐인데,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어째서 너희들은 또 매듭이라고 하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보배 꽃 실로 짠 수건[寶疊華]은 비록 본래는 하나이나, 제 생각으로는 여래께서 한 번 맺으시면 한 매듭이라고 하며, 백 번 맺는다면 백 매듭이라고 할 것입니다.그러나 이 수건에는 단지 여섯 매듭뿐이어서, 결국 일곱 매듭은 되지 못했으나, 다섯 매듭은 이미 넘었는데, 여래께서는 어째서 단지 처음 하나[初時]만을 인정하시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매듭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알다시피 이 보배 꽃 수건은 원래 하나 뿐인데, 내가 여섯 번 맺었기 때문에 여섯 매듭이라고 하였다. 너는 자세히 살펴보아라. 수건 자체는 같지만 맺었기 때문에 달라졌느니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처음 맺은 매듭을 첫 번째라 하고, 이렇게 여섯 번째 매듭까지 생겼는데, 내가 이제 여섯 번째의 매듭을 첫 번째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할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섯 번째 매듭을 그대로 두고는 이 여섯 번째의 이름은 절대로 첫 번째가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여러 생을 지내면서 변명한들, 어떻게 이 여섯 번째 매듭의 이름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섯 매듭이 똑같지는 않으나 근본 원인을 돌아보면, 한 수건에서 만들어졌으나 끝내 어지럽게 뒤섞을 수 없듯이, 너의 여섯 감관도 이와 같이 끝까지[畢竟] 같은 데서 끝까지[畢竟] 다른 것이 생겼느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 여섯 매듭이 하나로 되어있지 않음을 싫어하여 반드시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되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이 매듭을 그대로 둔다면 시비가 무성하게 일어나서 그 안에 저절로 ‘이 매듭은 저 매듭이 아니다’‘저 매듭은 이 매듭이 아니다’라고 하겠으나, 여래께서 지금 당장 모두 다 풀어버리시고 매듭이 생기지 않게 하신다면, 이 매듭 저 매듭이 다 없어져서, 오히려 하나라고 이름할 것도 없는데, 어찌 여섯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섯이 풀려서 하나까지 없어지는 뜻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네가 시작 없는 옛날부터 심성(心性)이 어지럽게 날뛰기 때문에, 알고 보는 작용이 허망하게 발생하여 쉴 새 없이 허망함이 일어나서, 보는 작용이 피로하여 티끌번뇌[塵]를 일으켰느니라. 마치 피로한 눈에 어지러운 헛꽃[狂華]이 나타나듯, 고요하여 정밀하게 밝은데서 까닭 없이 일체 세간의 산과 강과 넓은 땅과 생사와 열반이 어지럽게 일어났으니, 모두 다 미친 피로에서 나온 뒤바뀐 헛꽃 모양이니라.”

아난이 말했다.
“이 피로[勞]가 매듭과 같다면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여래께서 손에 매듭 맺힌 수건을 들고왼쪽으로 당기시면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이렇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러면 풀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곧 다시 손을 돌려 오른쪽으로 당기시면서 또 아난에게 물으셨다.
“이렇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말했다.
“그래도 풀리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손으로 왼쪽과 오른쪽을 각각 당겨 보았으나, 결국 풀 수 없었다. 네가 방법[方便]을 내 보아라. 어떻게 하면 풀리겠느냐.”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맺힌 복판에 맞춰 푼다면 풀리겠습니다.”

부처님께 아난에 일러주셨다.
“그렇다. 그래야 한다. 매듭을 없애려면 맺힌 복판에 맞춰야 하느니라.
내가 ‘불법(佛法)이 인연을 따라 생긴다’고 설한 것은, 세간의 화합한 거친 모양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다. 여래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밝혀서, 그 본래 원인[本因]이 연(緣)할 곳을 따라 나오는 이치를 알고, 이와 같이 내지 항하(恒河)의 모래처럼 많은 세계 안에 내리는 빗방울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 숫자를 다 알며, 지금 눈앞의 가지가지에서도 어째서 소나무는 곧고 가시나무는 굽고 따오기는 희고 까마귀는 검은지 그 원래의 까닭을 다 분명하게 아느니라.
아난아, 네 마음대로 여섯 감관에서 선택하여라. 감관의 맺힌 자리를 풀어버린다면, 경계의 모양[塵相]은 저절로 없어지리라. 온갖 허망함이 소멸하여 없어져버리면 진리 아닌 그 무엇이 너를 기다리겠느냐.
아난아, 나는 이제 너에게 묻겠노라.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이 겁바라천(劫波羅天) 수건의 여섯 매듭을 동시에 풀어서 맺힘을 한꺼번에 없앨 수 있겠느냐.”

아난이 답했다.
“동시에 없앨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매듭들은 본래 차례로 맺혀 생겼으므로, 지금도 마땅히 차례로 풀어야 합니다. 여섯 매듭의 본체는 같으나, 매듭의 맺힘이 동시가 아닌데, 매듭을 풀 때인들 어찌 동시에 없애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섯 감관을 푸는 일도 마찬가지니라. 이 감관이 처음 풀리면 먼저 아공(我空; 人空과 같음)을 얻고, 공의 본질[空性]이 뚜렷이 밝아지면 법에서 해탈하며, 법에서 해탈하고 나서 아공과 법공이 함께 공한 경계[俱空]마저 생기지 않아야 이를 ‘보살이 삼마지(三摩地)에서 얻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하느니라.”

아난과 대중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지혜의 깨달음이 뚜렷이 통하여 의혹이 없어지자, 일시에 합장하여 머리를 조아려 두 발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저희들은 지금 몸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서 시원하게 걸림이 없는 경계를 얻었으며, 또 하나와 여섯이 없는 이치를 알았으나, 아직도 오히려 원만하게 통달한 근본 감관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낙엽처럼 구르면서 오랜 겁 동안 헐벗고 외롭게 다니다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부처님과 천륜(天倫)을 맺었으니, 마치 젖 잃은 아기가 홀연히 자애로운 어머니를 만난 듯 기쁩니다. 만일 이렇게 부처님을 만난 기회에 도를 이루고 얻은 바 비밀한 말씀으로 본래의 깨달음[本悟; 本覺]을 돌이켜 똑같이 된다면, 듣지 못할지라도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에게 비밀로 장엄한 법[秘嚴]을 베푸시고 여래의 최후 가르침이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물러나서 비밀 법에 대한 심기[密機]를 가다듬고 부처님의 그윽한 가르침[冥授]을 기다렸다.

이때 세존께서 널리 대중 가운데 훌륭한 보살들과 번뇌를 다한 뛰어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 보살과 아라한은 불법[我法] 가운데 나서 무학(無學)을 이뤘으니,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묻겠노라. ‘최초에 발심하여 18계(界)를 깨달았을 때, 무엇으로 원만한 통달 법[圓通]을 삼았으며, 어떤 방편으로 삼마지(三摩地)에 들었느냐.’”

교진나(驕陳那) 등 다섯 비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녹야원(鹿苑)에 있을 때 계원(雞園)으로 가서, 여래께서 성도(成道)하신 최초에 여래를 뵙고 부처님의 음성을 통해서 4제(諦)를 깨달아 밝혔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물으시자, 제가 처음 ‘안다’고 답했더니, 여래께서는 저를 인가(印可)하시고 ‘아야다(阿若多; 안다[解]는 뜻)’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미묘한 소리가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음성으로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음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우파니사타(優波尼沙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부처님의 발까지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역시 여래께서 성도(成道)하신 최초에 여래를 뵙고, 부정한 모양[不淨相]을 관찰하다가 크게 싫어하여 벗어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색(色)의 성질은 부정(不淨)에 속하여 백골이 티끌 되어 허공으로 돌아가서, 공(空)과 색(色)이 둘이 없음을 알고 무학도(無學道)를 이루자,여래께서는 저를 인가하시고 니사타(尼沙陀)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티끌 요소의 색[塵色]이 이미 다 사라져서 묘한 색이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색상(色相)으로부터 아라한(阿羅漢)을 이뤘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색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향업동자(香嚴童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로부터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현상[諸有爲相]을 자세히 관찰하라’는 가르침을 듣고, 부처님 곁을 떠나 맑고 고요한 방에서 사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침수향(沈水香)을 태우는 비구들이 보였으며, 향기가 조용히 콧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제가 그 향기를 관찰해 보니, 나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연기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가도 붙을 곳이 없고 와도 온 곳이 없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뜻이 사라져서 샘이 없는 도를 밝히게 되자, 여래께서는 저를 인가하시어 향엄(香嚴)이란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여기에 티끌 요소의 향기[塵氣]가 문득 사라지고 미묘한 향기가 정밀하고 원만해지니, 거기서 저는 향의 장엄 법으로 아라한(阿羅漢)을 이뤘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향의 장엄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약왕(藥王), 약상(藥上)의 두 법왕자(法王子)가 법회 가운데 5백 범천(梵天)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한량없는 오랜 겁 동안 세상의 양의(良醫)가 되어, 입으로 이 사바세계의 풀과 나무와 금과 돌들 맛보았습니다. 그 이름의 수가 10만 8천 가지이나 이와 같이 맛을 보고, 그 맛이 신지 짠지 담담한지 단지 매운지, 또 여려 어울린 맛[諸和合]인지 그대로 순수한 맛[俱生]인지 변하여 달라진 맛[變異]인지를 알았으며, 또 찬 성질인지 더운 성질인지 독이 있는지 독이 없는지를 두루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여래를 받들어 모신 뒤에는 맛의 성질이 공도 아니고 있지도 않으며, 몸과 마음과 일치하지도 않고 몸과 마음을 떠나지도 않는 이치를 분명히 알고, 맛의 원인을 분별하여 환히 깨닫게 되자, 여래께서는 저희 형제[昆季]를 인가하시어 약왕보살(藥王普薩), 약상보살(藥上菩薩)이란 칭호를 내려주셨습니다. 지금은 이 법회 가운데서 법왕자(法王子)가 되었으며, 맛으로 인한 깨달음이 밝다하여 보살자리에 올랐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제가 증득한 경우로는 맛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발타바라(跋陀波羅)가 동반(同伴) 16보살[開士]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희들은 이전에 위음왕(威音王)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스님들이 목욕할 때 차례를 따라 욕실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물의 원인은 이미 때[塵]를 씻는 것도 아니고, 몸을 씻는 것도 아님을 깨닫고, 중간이 편안하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들었습니다. 과거에 닦은 습성[宿習]을 잊지 않은 가운데, 금생[今時]에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여 이제 무학(無學)을 성취하였으며, 저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발타바라(跋陀波羅)라는 이름을 내려주셨습니다. 그 결과 묘한 촉감[妙觸]이 뚜렷이 밝아져서 부처님의 대를 이을 아들이 되어 불법(佛法)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촉감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마하가섭(摩訶迦葉)과 자금광비구니(紫金光比丘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난 겁에 이 세계에 일원등(日月燈)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 저는 직접 가까이 모시고 법문을 들으면서 수행하였으며,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사리(舍利)를 공양하며 등불로 어둠을 계속 밝히면서 자주 빛 황금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도금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몸에는 언제나 자주 색 황금빛이 가득 찼으며, 이 자금광비구니들도 저의 권속으로서 동시에 발심하였습니다. 저는 세상의 여섯 경계[六塵]는 변하여 허물어지는 법임을 관찰하고, 오직 공적(空寂)한 법으로 멸진정[滅盡]만을 닦아서, 몸과 마음이 손가락 퉁기는 잠깐 사이에 백천 겁을 뛰어 넘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가 공한 법으로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두타행(頭陀行)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시니, 묘한 법이 밝게 열리면서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법의 원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아나율타(阿那律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처음 출가하여 언제나 수면을 즐기니, 여래께서는 저에게‘축생의 종류가 되리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저는 부처님의 꾸지람을 듣고 자책하여 슬피 울면서 칠일동안 잠자리에 들지 못하다가 두 눈의 기능을 잃었습니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에게 즐겁게 보는 작용으로 비춰 밝히는 금강삼매[樂見照明金剛三昧]를 가르쳐주셨으며, 저는 이 삼매로 눈을 따르지 않고도 시방(十方)을 살펴보고, 마치 손바닥의 열매를 보듯이 정교한 실물이 환해지니, 여래께서는 저에게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했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보는 작용을 돌이켜 근원을 따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주리반특가(周利槃特迦)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외우는 재주도 없고 많이 듣고 아는 능력도 없습니다. 최초에 부처님을 만나 법문을 듣고 출가하여 여래의 한 구의 가타[一句伽陀]를 기억하려고 하였으나, 백일이 다 되어도 앞을 알면 뒤를 잊고 뒤를 알면 앞을 잊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저의 어리석음을 딱하게 여기셔서, 저에게 ‘편안히 머물러서 들숨 날숨을 고르게 다스려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숨 호흡을 관찰하여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온갖 행의 찰나(刹那)를 세밀하게 추궁하여 다하고, 마음이 활짝 열려서 크게 걸림이 없어졌습니다. 마침내 번뇌를 다하여 아라한을 성취하고 부처님의 좌석 아래에 머무니, 부처님께서는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했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숨을 돌이켜 공(空)을 따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교범발제(驕梵鉢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말버릇이 나빠서 지난 겁에 사문들을 가볍게 여겨 조롱하다가, 세상에 태어날 때마다 소 새김질병에 걸렸는데, 여래께서 저에게 한 맛의 청정한 심지법문[一味淸淨心地法門]을 가르쳐주시니, 저는 잡념을 없애고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맛을 아는 작용은 몸도 아니고 물체도 아님을 관찰하여, 생각을 따라 자유롭게 세간의 온갖 번뇌를 뛰어넘었습니다. 따라서 안으로 몸과 마음을 해탈하고 밖으로 세계를 버려서, 새가 새장을 나오듯 멀리 삼계[三有]를 벗어나, 때 번뇌를 여의어 티끌 번뇌를 소멸하고 법의 눈이 청정하여 아라한을 성취하니, 여래께서는 친히 무학도(無學道)에 올랐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제가 증득한 바로는 맛보는 작용을 돌이켜 바른 지견으로 돌리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필릉가바차(畢陵伽婆蹉)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제가 처음 발심하여 부처님을 따라 도에 들어갔을 때 여래로부터 ‘세상에는 즐거운 일들이 없다’는 말씀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성(城)안에 들어가 걸식(乞食)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말씀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길에서 독 가시에 찔려 발을 다치니 온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저는 ‘아는 작용[知]이 있어서 이 심한 아픔을 지각[知]하는 것이다. 비록 허망한 깨달음[覺]이 아픔[痛]을 지각[覺]할지라도, 본각[覺]의 청정한 마음에는 아픔 자체[痛]도 아픔을 지각하는 작용[痛覺]도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이 한 몸에 어찌 두 깨달음[雙覺]이 있겠는가’라고 사유하였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거둬 다스린 지 오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홀연히 공하여 삼칠일 만에 온갖 번뇌를 다 비우고 아라한을 성취하자, 여래께서 친히 인가를 내리셔서 무학(無學)의 지위를 밝혀주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순수한 깨달음으로 몸을 버리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수보리(須菩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를 얻고, 몸을 받아 태어난 생(生)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아도 스스로 다 기억합니다. 처음 모태(母胎)에 있을 때부터 곧바로 공적(空寂)한 경계를 알았고, 이와 같이 시방세계까지도 공하여, 중생들에게 공한 성품을 증득케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여래께서 밝히신 성품이 깨달음인 진실한 공[性覺眞空]을 듣고, 공한 성품을 원만하게 밝혀서 아라한을 성취하고, 단번에 여래의 보배로운 밝은 공의 바다[如來寶明空海]에 들어가 부처님의 지견(知見)과 같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래께서는 무학(無學)을 성취했다고 인가하시면서, 성품이 공한 이치로 해탈[解脫性空]한 경우는 제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온갖 모양이 빈자리[非]에 들어가서 빈 자체[非: 能空]와 비운 곳[所非: 所空]을 다하고, 법을 돌이켜 무(無)로 돌아가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사리불(舍利弗)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마음으로 보는 작용[心見; 眼識]이 청정하였으며, 이러한 상태로 몸을 받아 태어남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았으나, 그 때마다 세간과 출세간의 가지가지 변화를 한 번 보면통하여 장애가 없었습니다.
저는 길을 가다가 가섭파(迦葉波) 형제를 만나 그들이 선양하는 인연 법(因緣法)을 듣고 마음이 끝이 없음을 깨달아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습니다. 여기서 보는 작용의 깨달음[見覺; 眼識]이 밝고 원만하여 두려움이 없는 큰 법을 얻고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여 부처님의 장자(長子)가 되었으니, 저는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나 법으로 변화하여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가 증득한 바로는 마음으로 보는 작용이 빛을 일으켜 빛이 가득한 지견(知見)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보현보살(普賢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일찍부터 이미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여래의 법왕자(法王子)가 되었습니다. 시방 여래께서 보살의 근기를 갖춘 제자들에게 보현행(普賢行)을 닦도록 가르치심은 저를 따라 이름을 세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마음으로 듣고 중생의 지견(知見)을 분별합니다. 만일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다른 세계에서 한 중생이라도 마음속에 보현행(普賢行)을 밝히는 자가 있으면, 저는 그때 여섯 어금니의 코끼리를 타고 몸을 백 천으로 나누어 다 그곳으로 갑니다. 비록 그 사람이 업장이 두터워서 저를 못 볼지라도 저는 보이지 않은 가운데[暗中] 그 사람의 이마를 만지며 보호하고 위로하여 원하는 일을 이루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저의 근본 수행[本因]을 말씀드린다면 마음으로 듣는 작용이 밝음을 일으켜서 자재하게 분별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손타라난타(孫陀羅難陀)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처음에 출가하여 부처님을 따라 도에 들어가서 비록 계율을 갖춰 지녔으나, 삼마지(三摩地)에 들면 마음이 항상 흐트러지고 흔들려서 번뇌 없는 법을 얻지 못하자, 세존께서는 저와 구치라(俱絺羅)에게 ‘코끝이 희어질 때까지 코끝을 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자세히 관찰하여 삼칠일(三七日)만에 콧속의 기운을 보았더니, 드나드는 숨결이 연기와 같았습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안으로 밝아지고 세계도 환하게 열려서 유리처럼 두루 비고 맑아지더니,연기의 모양이 점점 사라져서 코의 숨결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여기에 마음이 열리어 번뇌를 다하고 드나드는 숨결들이 모두 광명으로 화해서 시방세계를 비치며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앞으로 반드시 보리를 이루리라’고 수기를 내리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숨결을 오래도록 소멸하여 숨결이 밝음을 일으켜서 밝음이 원만한 가운데 번뇌를 멸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오랜 옛 겁부터 말재주[辯才]가 걸림이 없어서 괴로움과 공한 법[苦空]을 설하는 가운데 깊이 실상(實相)을 통달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여래의 비밀법문(祕密法門)을 대중 가운데서 미묘하게 연설[開示]하여 두려움이 없는 법을 얻었습니다. 여래께서는 저의 뛰어난 말재주를 아시고, 음성 굴리는 법[音聲輪]으로 저를 떨쳐 일으켜주시니, 제가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을 도와 법륜(法輪)을 굴리며 사자후(師子吼)를 떨치고 아라한을 성취하자, 세존께서는 저에게 설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설법의 소리[法音]로 마군(魔軍)의 원망을 항복시키고 온갖 번뇌를 소멸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우바리(優波離)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몸소 부처님을 따라 성을 넘어 출가하여, 직접 여래의 6년 고행을 지켜보았습니다. 또 여래께서 온갖 마군(魔軍)을 항복시키고 모든 외도를 제압하시어 세상 사람들을 탐욕과 온갖 번뇌에서 해탈시키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계율을 받들어 지켰습니다. 이와 같이 삼천의 위의(威儀)와 팔만의 미세한 행과 심성 자체의 업[性業]과 규제를 범한 업[遮業]에 이르기까지 다 청정하여 몸과 마음이 적멸한 경지에 들어서 아라한을 성취하고, 여래의 대중 가운데 기강(紀綱)이 되니, 여래께서는 친히 저의 마음을 인가하시고 대중에게 ‘계율을 지니고 몸을 닦는 일에서는 가장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고 추천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을 단속하여 몸이 자재한 다음, 마음을 단속하여 마음이 막힘없이 환히 열린 뒤에, 몸과 마음이 모두 다 부드럽게 잘 통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대목건련(大目犍連)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거리에서 걸식을 하다가 우루빈라(優樓頻螺), 가야(伽耶), 나제(那提)의 세 가섭파(迦葉波)를 만나서, 그들이 선양하는 여래 인연법의 깊은 뜻을 듣고 단번에 발심하여 크게 통달하자, 여래께서는 제 몸에 저절로 가사(袈裟)가 입혀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또 제가 시방을 다니면서 걸림 없는 경지에 들어 신통(神通)을 밝히자, 여래로부터 ‘더없이 훌륭한 신통’이라는 추천을 받고, 저는 아라한을 성취하였습니다. 어찌 세존뿐이겠습니까. 시방의 여래께서도 저의 신통력을 ‘원만하게 밝고 청정하고 자재하여 두려움이 없는 경지’라고 찬탄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고요한 자리를 돌이켜서 마음의 빛을 탁한 물을 오래 두어 맑히듯 밝히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오추슬마(烏芻瑟摩)가 여래 앞에 나아가 합장하고 부처님의 두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언제나 먼저 옛 일을 생각해 봅니다. 구원 겁 전에 저의 성품은 몹시 음욕을 탐냈습니다. 그때 세상에 나오신 공왕(空王) 부처님께서 ‘음욕이 많은 사람은 맹렬한 불덩어리’라고 설하시면서, 저에게 ‘온갖 뼈[百骸]와 사지(四肢)의 차고 더운 기운들을 두루 관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가르침을 따라 행했더니, 신비한 광명이 안으로 엉겨서 음욕을 탐하는 마음이 변하여 지혜의 불이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모든 부처님께서는 저를 불 머리[火頭]라고 부르셨습니다. 저는 화광삼매(火光三昧)의 힘으로 아라한을 성취하고, 마음에 큰 소원을 세워서 모든 부처님이 성도 하실 때마다 역사(力士)로 변하여 직접 마군(魔軍)의 원망을 항복시켰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과 마음의 따듯한 촉감을 자세히 관찰하여, 걸림 없이 유통(流通)시켜 온갖 번뇌를 다 소멸하고, 보배로운 큰 불꽃을 일으켜서 더없이 높은 깨달음에 오르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지지보살(持地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먼 옛날의 일을 생각해 보니, 보광여래(普光如來)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비구였습니다. 저는 항상 일체 중요한 길과 나루의 입구와 밭과 땅이 좁고 험하여 제대로 되지 않아서 수레와 말들을 방해하고 훼손하는 것을 보고, 그 곳을 골고루 메우기도 하고, 다리를 세우기도 하고, 모래와 흙을 지어 나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노력하기를 한량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실 때까지 계속하였는데, 때로는 어떤 중생이 사람과 수레가 붐비는 곳[闤闠處]에서 짐 나르기를 원하면, 제가 먼저 짊어지고 가서 목적지에 물건을 내려놓고 바로 떠나서 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비사부(毘舍浮)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는 흉년이 들어 굶주림이 심했는데, 저는 짐꾼이 되어 멀고 가까운 곳을 묻지 않고 오직 한 푼만 받았습니다. 간혹 수레를 끄는 소가 구렁에 빠졌을 때에는 저의 신비한 힘으로 바퀴를 밀어 올려 고통을 없애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국왕이 공양을 마련하여 부처님을 청했는데, 저는 부처님께서 잘 지나가실 수 있도록 땅을 평평하게 골라놓고 기다렸습니다. 비사부(毘舍浮) 부처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저의 이마를 만지시면서 ‘마땅히 마음의 땅을 잘 고른다면 세상의 땅은 일체 다 골라지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저는 곧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따라서 몸의 미세한 티끌[微塵]과 세계의 미세한 티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미세한 티끌의 자성[微塵自性]은 서로 부딪치지 않으며, 병기[刀兵]까지도 저촉되는 일이 없음을 알고, 저는 법의 성품에서 무생법인[無生忍]을 깨달아 아라한(阿羅漢)을 성취하였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돌려 보살자리에 들어가서, 여러 여래께서 설하신 묘한 연화의 부처님 지견의 경지(妙蓮華佛知見地)를 듣고 제가 먼저 증명하여 상수(上首)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몸과 세계의 두 미세한 티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본 여래장(如來藏)이나, 허망하게 티끌이 일어났음을 자세히 관찰하여, 티끌을 소멸하고 지혜를 원만하게 갖춰서 더없이 높은 도를 이루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월광동자(月光童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하사겁(恒河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때 수천(水天)이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모든 보살들에게 ‘물의 정기[水精]를 수습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몸 가운데 물의 성품이 빼앗기지 않음을 관찰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처음 콧물과 침으로부터 이와 같이 진액(津液)과 정액(精液)과 피와 대변과 소변에 이르기까지, 몸속을 빙빙 도는 물의 성품이 동일한 이치를 끝까지 추궁하여, 물이 몸속과 세계 밖 부당왕찰(浮幢王刹)의 온갖 향수해(香水海)와 함께 평등하여 차별이 없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처음 이 관(觀)을 성취했을 때는 단지 물만 보는 경계일 뿐, 아직 몸이 없는 경지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비구로서 방안에 편안히 앉아 선정[禪]에 들었습니다. 저의 제자가 창문을 통해서 방안을 보다가, 오직 방안에 가득 찬 맑은 물만 보이고, 그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어리고 무지한 동자는 기와조각 하나를 물 속에 던져 철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힐끔 돌아보고 가버렸습니다. 저는 선정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심장이 몹시 아팠는데, 사리불(舍利弗)이 몰래 해치는 귀신[違害鬼]을 만난 경우와 같았습니다.
저는 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나는 아라한도(阿羅漢道)를 얻고 나서 오래 전부터 병과 인연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 일로 별안간 심장이 아픈 것일까. 장차 도에서 물러나 잃어버릴 징조가 아닌가.”

그때 동자가 급히 저에게 달려오더니 앞서 행한 일을 말했습니다.
저는 동자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네가 다시 물이 보이면 반드시 문을 열고 물 속에 들어가서 기와조각을 제거해야 한다.”
동자는 가르침을 받들어서 제가 선정에 들자, 다시 또 물을 보고 그 속에 뚜렷이 남은 기와조각을 발견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뒤에 제가 선정에서 나오니 체질[身質]이 아프기 전과 같았습니다.
그 뒤로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나서 모시다가, 산해자재통왕여래(山海自在通王如來) 때에 비로소 몸이 없는 경지를 얻으니, 시방세계의 온갖 향수해(香水海)와 함께 성품이 진공(眞空)과 합하여 둘도 없고 차별도 없었으며, 지금은 여래께서 내려주신 동진(童眞)이란 이름으로 보살의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물의 성품이 한 맛으로 흐르고 통하여 무생법인[無生忍]을 얻고 보리를 원만하게 갖추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유리광법왕자(瑠璃光法王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사겁(恒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그때 무량성(無量聲)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셔서, 보살들에게 본래 깨달음의 미묘한 밝음을 열어 보이시면서 ‘이 세계와 중생의 몸은 다 허망한 인연의 바람 힘으로 굴리는 경계임을 관찰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 계(界)의 안전한 건립을 관찰하고, 세[世]의 옮기는 때를 관찰하고, 몸의 움직이고 멈춤을 관찰하고, 마음의 움직이는 생각을 관찰해 보니, 온갖 움직임은 둘도 없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 온갖 움직이는 성질은 와도 온 곳이 없고 가도 간 곳이 없음을 깨달으니, 티끌처럼 많은 시방의 뒤바뀐 중생들은 하나같이 허망하고, 이와 같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까지도, 한 세계 안에 들어 있는 중생들마다 마치 한 그릇에 담겨 어지럽게 우는 수많은 모기들이 지극히 보잘것없는 곳[分寸]에서 어지럽게 날뛰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으니, 마음이 활짝 열려서 동방의 부동 부처님의 나라[不動佛國]를 뵙고, 법왕자(法王子)가 되어 시방의 부처님을 섬기는 가운데, 몸과 마음이 빛을 일으켜서 걸림 없이 환하게 사무쳤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의지함이 없는 바람의 힘을 관찰하여 보리의 마음(菩提心)을 깨닫고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시방세계의 부처님과 합하여 하나의 묘한 마음을 전하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허공장(虛空藏)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여래와 함께 정광(定光)부처님의 처소에서 끝없는 몸[無邊身]을 얻었습니다. 그때 손에 네 개의 큰 보배구슬을 들고, 시방의 티끌처럼 많은 부처님 세계를 비춰 밝히니, 모두 허공으로 변했습니다. 또 제 마음에 크고 둥근 거울이 나타나서 열 가지 미묘한 보배광명을 놓고 시방의 온 허공의 경계를 두루 비추니, 온갖 높이 솟은 세계[諸幢王刹]들이 거울 속에 들어와서 제 몸속으로 스며 들였으나, 몸이 허공과 동일하여 서로 걸리거나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걸림 없는 몸으로 티끌처럼 많은 국토에 거침없이 들어가서 널리 불사(佛事)를 행하며 순조롭게 따르는 큰 능력[大隨順]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크고 신비한 힘은제가 근거 없는 네 가지 요소[四大無依]가 허망한 생각으로 생멸 할 뿐, 허공과 둘이 아니며 불국토와 본래 동일한 이치를 자세히 관찰하여, 동일한 이치를 밝혀서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허공의 끝없는 이치를 관찰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서 묘한 힘을 원만하게 밝히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미륵(彌勒)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미진겁(微塵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일월등명(日月燈明)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 저는 그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였으나, 마음에 세상의 명예를 중히 여겨 귀족[族姓]들과 사귀기를 좋아하였습니다.

이때 그 세존께서는 저에게 ‘유심식정(唯心識定)을 수행하여 삼마지(三摩地)에 들어가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 겁에 걸쳐 이 삼매(三昧)를 닦으면서 항하의 모래처럼 많은 부처님을 모시는 사이에, 세상의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말끔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연등(燃燈)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을 때, 저는 비로소 더없이 미묘하고 원만한 식심삼매[無上妙圓識心三昧]를 성취하여, 온 허공과 여래와 국토의 깨끗함과 더러움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모두 제 마음에서 변화하여 나타난 경계임을 알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오직 심식(心識)뿐이기 때문에, 식의 성품[識性]이 한량없는 여래를 유출시키는 것을 알았으며, 지금은 ‘다음 부처님의 자리를 이으리라’는 수기도 받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하게 통달한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시방(十方)이 유식(唯識)임을 자세히 관찰하여 심식(心識)을 원만하게 밝히고, 원성실성[圓成實]에 들어가서 의타기성[依他]과 변계소집[遍計執]을 멀리 여의어 무생법인[無生忍]을 얻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대세지법왕자(大勢至法王子)가 그의 동반 52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의 발까지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지난 옛 항사겁(恒沙劫)의 일을 생각해 보니, 무량광(無量光)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열 두 여래께서 1겁(劫)마다 이어 나오셨습니다. 그 마지막 초일월광(超日月光)부처님께서 저에게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가르쳐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비유하면 한 사람은오로지 기억하여 생각하는데 한 사람은 아득히 잊고 있다면, 이러한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난 것이 아니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이 서로 기억하여 두 기억하는 생각이 깊어야만 태어날 때마다 형체에 그림자가 따르듯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라. 시방 여래께서 중생을 생각하여 가엽게 여김은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과 같은데, 만일 자식이 달아나 버린다면,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어머니를 생각하는 자식의 마음이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같을 때, 어머니와 자식은 여러 생을 지낼지라도 어기거나 멀어지지 않으리라.

만일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여 염불한다면, 현재 또는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뵙거나, 부처님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며, 방편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마음이 열리느니라. 마치 향을 물들이는 사람이 몸에 향기가 베이는 것과 같으니, 이를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본래 첫 수행자리[本因地]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법인(無生法忍)에 들었으며, 지금은 이 세계에서 염불하는 사람을 거두어 정토(淨土)로 돌아가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원만한 통달 법을 물으시니, 제 경우로는 따로 고를 것 없이 여섯 감관을 모두 거둬들여 청정한 생각을 계속 이어 삼마지(三摩地)를 얻는 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2, 한글대장경으로